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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빅-

 

심박측정기처럼 규칙적인 기계음을 뱉는 장치가 저택 바깥의 광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택 외부에 달려있던 방범용 카메라. 도둑 잡기 용으로 치고 넘어가기엔 지나치게 복잡하고 밀도 높은 시스템이다.


망가진 상태로 버려진 게 몇십 년도 전이지.


그래도 눈에 잔뜩 힘을 주면 아직은 봐줄 만하다.

 

 


“침입자는 없는 거 같고... 전기 충격 사슬도 멀쩡히 동작하고 있고...”

 

 

 

천장도 바닥도 하얀 타일로 도배되어 있는 방.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저택 내 지하실에서도 한층 더 내려와야 하는 기밀 설비다.

 

저택 내외에 설치되어 있는 카메라를 전부 볼 수 있으면서 전격, 가스, 주변 지질 감지 장치까지 한 번도 통제할 수 있는 관제탑 비슷한 곳.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기가 찰 만큼 은밀하게 설계된 시설. 마리아 그 인간의 망상 장애가 도움이 되는 몇 안 되는 경우다.

 


 

“... 아, 눈 아파.”

 

 

 

눈을 비볐다. 빠각, 빠각, 유리창을 닦는 듯한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언뜻 들으면 복어 새끼가 이빨을 가는 소리 같기도 하다. 아까 전부터 눈을 비볐을 때마다 한 시도 빠지지 않고 빠각, 빠각 소리가 난다.

 

빠각, 빠각.

 

쁙극.

 

이번에는 소리가 달라졌다.

 

눈가를 비비던 손가락을 떼보니 빨간 핏자국이 묻어 나왔다.

 

 

 

“아이씨... 또 눈 찔렀네.”

 

 

 

컴퓨터 화면에 비춰지는 얼굴을 봤다.

 

팬더처럼 쾡한 눈동자와 주변 다크서클. 요새 며칠 못 잔 게 벌써부터 티가 나는 것 같다.

 

잠시 눈을 붙이려고 등을 의자에 붙였다. 모니터와 마찬가지로 몇십 년 동안 버려져 있던 의자가 끼기긱,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로 젖혔다.

 

비명을 지르는 건 허리도 마찬가지였다. 척추 속 뼈 마디들이 으직거리며 늘어지는 게 느껴질 만큼 주변 근육이 경련을 한다.

 

이 몸의 유통기한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일까.

 

예전에는 하루에 5분씩 10번을 나눠서 자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점차 인간처럼 변하는 것 같아서 소름 돋는다.

 

 

 

“... 슬슬 정리하자. 이젠 못 해도 10분은 자야 하잖아.”

 

 

 

생체병기로 만들어졌던 장화가 하기엔 어색한 말.

 

그래도 이젠 인정하기로 했다. 난 더 이상 예전처럼 강하지 않다.


그때 오리진더스트를 멍청할 만큼 많이 복용했었다. 하기사 그 정도로 쳐먹었는데 지금 안 죽은 걸 고마워해야지.

 

째각-

 

시계 위에 달린 태양광 패널을 짚었다. 


시침은 벌써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 자자.”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겼다.

 

의자를 집어넣고 내 자리에 있던 화면을 끄고, 중앙 거대 모니터를 제외한 나머지 모니터들을 껐다.

 

와이어를 당겨 묶어 놓았던 서버실의 스위치들도 껐다.


어깨가 움츠려진다. 만성적인 우울증이 책을 음독해주는 목소리처럼 조곤조곤 머릿속에 울려 퍼진다.


쓸데없이 넓은 방이라 잡념이 생긴 탓이지.


이곳에 오고 생각이 너무 많아졌다. 무의미한 가정들이란 것을 알지만 그걸 전달하는 뉴런의 뿌리가 너무 깊숙이 박혀버렸다.


거봐.


그러니까 이런 것도 나오잖아.


 

 

[재미있니?]

 

 

 

다 꺼진 불빛.

 

홀로 밝은 복도의 불빛을 배경 삼아 익숙한 환영이 고개를 들었다.

 

어깨까지만 내려오는 길지 않은 단발. 그리 크지 않은 키와 초점을 잃은 눈. 약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는 몸짓.

 

이 저택에 오고 나서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보이는 괴물의 형상.

 

 

 

[그렇게 선생님 노릇을 하면서 과거를 잊어버리면 즐겁나?]

 

 

 

마리아 리오보로스다.

 

습관적으로 목을 긁었다. 손톱에 긁히는 살갗은 더 이상 내 목에는 목줄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마리아.”

 

[흐음.]

 

“내 머릿속에서 나가.”

 

 

 

그림자는 새벽녘 안개처럼 조금 흐려졌다.

 

나는 방 밖으로 걸어갔다. 계단을 오르기 위해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힘줄은 고장난 것처럼 삐걱거렸다.

 

 

 

[날 보내주지 않은 게 누군데.]

 

“......”

 

[네 주변을 봐라. 네가 한 짓들을. 얼마나 우스운 일이야?]

 

 

 

환영의 몸이 굽어졌다. 허리를 굽힌 마리아가 나를 응시하고 있다.


작게 경련한다. 비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그림자는 조금 더 붉게 변했다. 


유동체의 어둠은 나의 말과 억양과 몸짓을 흉내내고 있었다.

 

 


[하하, 그 장화가 욕 한마디 하지 못해서 쩔쩔 매고 있는 꼴이라니. 

네가 너를 그렇게 키웠니? 아니잖니, 얘야. 아니잖아. 안 그래?]

 

“...”

 

[겁이 나니? 무서워? 저 위에 있는 것들을 봐라. 네가 손가락만 움직여도 죽을 것들이야. 

난 너를 그렇게 강하게 만들었다. 네 눈앞에 거슬리는 모든 걸 죽일 수 있을 만큼 강하게.]


"... 좆까는 소리 하지마."


[하지만 뻔뻔하게 키우진 않았어.

그러면 네가 너무 편해지잖니.]


 

 

그림자가 커졌다. 어둠 속에선 동그란 눈동자만 징그럽게 반짝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

 

나는 계속 위로 올라갔다. 계단 하나를 오르기 위해서 다리에 계속 힘을 주었다.

 

 

 

[세상 모든 나쁜 짓을 하고 그 모든 일을 내 탓으로 돌린 주제에 유치원 보모 노릇이라.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셈이지? 아직도 죽은 내 탓을 하며 살고 있나?]

 

“... 탓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 니 년 때문이었잖아.”


[나 때문이라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아니잖아. 예전이었다면 몰라도, 오르카를 보고 왔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지.

거기서 넌, 네가 다른 길을 고를 수도 있었단 걸 보고 왔으니까.]


"... ..."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없지. 어차피 정답은 네가 알고 있잖나.]

 

 

 

터벅-

 

그리고, 탁.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났다. 내가 한 것은 아니었다. 이명이 들리는 것처럼.

 

환영이 손가락을 튕겼다. 소리는 반 박자 늦게 도착했다. 


건너편 방이었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은 모니터가 있던 곳 옆에 있었다. 바람 불 일 없는 지하실에 차가운 문 하나가 저 홀로 끼릭거리며 움직였다.

 

다 낡아서 벽에 동화되어버린, 전에 있던 콘크리트의 노줄마저 세월의 풍파를 맞고 사라진 방이었다.

 

 

 

[잊은 건 아니겠지.]

 

"... ..." 

 

[아이들이 이곳에 오지 못하게 막은 게, 정말 그 아이들을 걱정하기 때문만은 아니잖아.]

 

 


그럼에도 나에겐 사무치게 소름 돋는 오지였다.

 

내가 처음 눈을 뜬 곳.

 

하얀 방 건너편은 작은 캡슐 같은 것들이 많았다. 안에는 초록색 액체들이 사람 키만큼 담겨 있었다.

 

바이오로이드 제조 장치.

 

저택 내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방은, 마리아 리오보로스가 평생을 바쳐 숨겨온 기밀이 있었다.


그 빌어먹을 년의 추악한 비밀이.

 

 

[글쎄, 추악한 건 너의 비밀이겠지.]

 

“......”

 

[너도 알잖아. 저기엔 네가 죽인 사람들의 명부가 다 있다는 거. 이곳에 와서 가장 먼저 한 짓이 저 방문을 잠군 거잖아. 뭐 때문이었을까?]

 

“... 오늘따라 말이 많네.”

 

[아이들은 오르카 호에서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겠지. 애들을 보낼 수 없다면 오르카 호를 여기로 초대하면 될 일이고. 그런데 넌 그러지도 않았어. 대체 왜?]

 

“......”

 

[이유는 내가 알지. 

오르카의 사람들에게 들키기가 무서웠으니까.]

 

 

 

환영은 천천히, 내가 있는 곳을 향해 다가왔다.

 

그림자가 내 목덜미 위를 덮었다. 사자가 목덜미를 물어 뜯는 것처럼.

 

 

 

[세상에는 숨길 수 없는 것이 세 가지 있다. 태양, 달, 그리고 진실.

오래된 격언이지.]

 

“......”

 

[이제가 네가 숨을 수 있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넌 평생 그 진실로부터 달아나려 했지만, 결국에는 여기로 돌아왔어. 귀소 본능을 가진 연어마냥 꼬리치며.]

 


 

탁, 탁, 탁.

 

이명이 메아리처럼 반복된다. 넓은 방 안에 울려 소리와 소리의 간격이 점차 줄어들었다.

 

 

 

[죄책감? 죄악감? 이제 와서 속죄라도 하고 싶어졌나? 자신의 죄를 제대로 마주하는 것도 못하는 주제에? 

고작 인간 한 명을 위해 희생하려 했다는 사실이 네가 죽인 수천 명을 대신해줄 거라 생각했어? 

정말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

 

[아니. 넌 평생 여기서 벗어날 수 없어. 

왜냐면 너는 지옥에서 태어났거든. 내가 그렇게 만들었지.]

 

 

 

목 위로 칼이 들어오는 듯하다.


살아있음에도 뛰지 않는 심장.


멈춘 혈류에 손끝이 저릿하다. 시야가 멍하니 흐려진다.


꿈 속에서 소리치려는 것처럼 입을 벌려 숨을 쉬려 했으나 입술이 떼어지지 않았다.

 

아까 먹은 썩은 참치캔이 혀 끝에서 넘어져 악취를 풍긴다.


 

 

[애새끼들 갈고리에 걸어 올린 거? 자 자식을 스프로 끓여 먹은 거? 

하하하, 고작 책에 나온 것 때문에 구역질이 나? 정말? 천하의 장화가, 교회에서 수십 명을, 그것도 어린아이까지 와이어로 목 졸라 죽인 장화가 고작 그런 거로 토악질을 한다고?]

 

“......”

 

[아하하... 아니지. 절대 아니야. 정말로 네가 토하고 싶은 건 네가 그 책의 주인공처럼 보인다는 사실이지. 

학살자. 도살자. 절대 인간이 될 수 없는 괴물.]

 

 

 

생각을 길게 잇지 않았다.

 

밥이 필요하면 밥을 구했고, 집이 필요하면 잠잘 곳을 찾았다.

 

늘 지평선만 바라보는 것처럼 동공을 푼 채로 살았다. 누군가의 목을 잘라 버릴 때마다 그랬다.

 

그러면 몸이 떨리지 않았다. 그냥 커다란 곤약을 자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됐으니까. 사람 따윈 붉은 즙이 나오는 곤약 정도로 생각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선생? 친구? 가족? 저 방 건너편의 것을 보고도 그렇게 남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 닥쳐.”

 

[내일이 되면 또 어린 애새끼들을 돌보겠다고 선생 노릇을 하겠지. 책을 읽어주고, 그림을 그려주고, 가족 행새를 하겠지. 

네가 평생 혐오하던 몽구스 그 개새끼들처럼. 

아, 불쌍한 장화야. 그래도 네가 절대 잊을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단다.]

 

 


환영의 얼굴이 서서히 벌어지면서 싱그러운 미소가 드리웠다.

 

 

 

[넌 평생 괴물일 거란 것.]

 

“......”

 

[그렇게 평생을, 평생을 살다가 딱 한 번. 단 한 번만 실수를 해라. 

네가 감추고 싶었던 비밀들을 단 한 번의 실수로 모두 퍼트려라.

그러면 모두가 널 괴물처럼 봐줄 테니.

그 때가 되면 너도 깨닫게 되겠지. 내가 너를 어떤 괴물로 만들었는지.]

 

 

 

본능적으로 팔을 휘둘렀다. 와이어가 격벽에 닿고 콰드득 으스러뜨렸다.

 

벽의 촉감이 느껴지자마자 서둘러 손에 힘을 뺐다. 


와이어를 거둬들이자 벽 뒤쪽으로 십수 미터의 자상이 났다.

 

 

 

[아하하하! 얘 좀 봐! 이젠 자기가 만든 환상에다가 헛손질을 하네?]


"그만! 그만하라고! 그만!"


[그래, 그만해봐! 어디 한 번 과거를 다 잊고 새출발 해보라고!

그래도 혹시 알아? 내가 네 모듈 속에 코드를 숨겨 놔서 그 인간을 만나자마자 눈 뒤집고 죽여버리게 될지?

어디 평생 속죄하면서 살아봐. 그것만큼 우스운 꼴도 없을 테니까! 캬하하!]

 

 

 

손끝이 저릴 만큼 기괴한 웃음 소리.

 

저건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얼굴에 핏대가 솟았다. 자리에 웅크린 채 손으로 귀를 막았다.

 

 

 

“아냐...! 아냐! 아니라고!”

 

 

 

몸이 떨었다. 내가 떨고 싶어서 떤 것이 아니었다.

 

고장 난 것처럼 눈을 깜빡거렸다. 울고 있지 않다는 걸 증명하려고 눈썹을 깜빡였다.

 

무의미한 짓이었다.

 

손에 낀 와이어가 타오를 것처럼 뜨거워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벗겨진 손등 위로 수십 개의 자상이 부어오른 채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무의미한 짓이었다.


갑자기 그 좁은 복도가 한없이 넓게 느껴져 떨리는 다리로 복도 구석에 웅크리고 몸을 숙였다. 


속이 터질 것 같아서 입을 막고 고함을 질렀다. 손바닥으로는 막을 수가 없어 아예 입 안에 주먹을 처박아 넣었다.

 

무의미한 짓이었다.


소리가 밖으로 세어나가면 안 되니까 이빨로 주먹을 와그작 물었다.


어금니가 자상 위를 짓씹었다. 간신히 아문 상처가 다시 벌어졌다.

 

머리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반대로 이가 시렸다. 


당장이라도 뻥 터질 것 같았다.

 

 

 

“아냐... 아냐...”

 

 

 

이제야 잠에서 깬 것 같았는데.

 

겨우 눈앞에 뭐가 있는지 보고 살 수 있게 된 것 같은데.

 

지금껏 내가 보지 않고 살아온 것들이 뭐였는지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다. 내가 죽인 사람들이, 죽인 바이오로이드들의 썩은 살점들이 태풍처럼 불어온다.

 

삐빅.

 

삐빅.


조용한 방 안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마리아의 환영은 방 안의 모니터를 보았다.

 


[... 뭐?]



얼굴이 일그러졌다. 귀신을 본 것처럼.

 

대체 뭐를 봤길래?

 

떨리는 몸을 간신히 진정시킨 다음, 간신히 고개를 들어 모니터를 보았다.

 

 

 

-어머니.

 

 

 

검은 단발 머리와 고양이처럼 노란색 눈.

 

바르그였다.

 

아니, 바르그와 함께였다.

 

 

 

-이제 그만 쉬십시오.

 

-바르그. 약속은 지켰다.

 

-고맙다는 말은 나중으로 미루지.

 

 

 

왜.


왜 여기 온 거지.


여기 와서는 안 될 사람이다.


여기에서 보기엔 너무도 반짝이는 자다.


그런데도, 그 긴 시간 떠올리고 있었던, 너무도 그리운 얼굴이어서.




-내가 뭐 이런 거로 생색 내고 그러겠어? 그냥 주는 게 있으니 받는 것도 있어야 한다는 거지.


-약속을 지키란 말이군. 잘 따라와라. 사령관. 저런 방범용 카메라가 있다는 건 주변에 숨겨진 함정이 있다는 뜻이다.


-각오하란 얘기지? 나도 알아.




피가 흐르는 손을 조용히 내려놓을 수 있었다.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 쉬울 리가 없잖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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