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고 -

이건 유열물이자 후회물이다.

따라서 빌드업을 위해 어쩔 수 없는 NTR 요소가 있으니, 불호이거나 내성이 없으면 돌아가.


1편 2편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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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의 이름은


"히히……. 이걸로 나도 제대로 된 비서를 가지게 되겠군!"

 

차가운 침대, 아니 수술대에서 눈을 뜬 나는 어느 한 노인을 가장 먼저 시야에 담게 되었다. 기대에 찬 듯한 눈빛으로 누워있던 내 얼굴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던 노인. 순간적으로 나는 직감했다. 이 사람이 나의 주인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인사를 건네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달싹이고 있는 내 입술을 본 그 노인은 마뜩잖은지 얼굴을 구기며, 건너편의 흰옷을 입은 남성에게 말했다.

 

"어이, 얘는 왜 이러는 거야?"

"그, 글쎄요…. 분명 언어 모듈은 정상입니다만."

 

순간 무언가가 남성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노인이 들고 있던 지팡이.

 

"모르면! 다야!!"

 

그리고 온갖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남자를 지팡이로 계속 패댔다. '나'라는 존재를 자각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내가 빨리 뭔가 하지 않으면 저 남자는 피떡이 되도록 맞을 게 분명했다. 나는 얼른 나체인 몸을 일으켜, 내 '주인'인 노인에게 인사했다.

 

"주인님, 인사드립니다."

 

순간, 노인은 내 쪽을 바라보며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히히…. 멀쩡하구먼그래. 오메가의 그 양반이 가진 비서를 내가 못 가져서야 쓰나!"

 

맞고만 있던 남성은 거친 숨을 내쉬며,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분노의 눈빛. 어째서 진작에 내 '주인'에게 인사를 하지 않아서 나를 이렇게 만들었냐는 원망의 눈초리. 하지만 그런 것은 곧 내 '주인'의 이야기로 묻혔다.

 

"오메가 놈들보다, 네가 배우는 게 빠르겠지? 난 그럴 거라 믿는다. 펙스라는 연합체로 묶여있지만, 난 오메가 같은 놈과 옆에 서기 싫다고! 알겠어?!"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머리채를 휘어잡은 그는 내 몸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아마도 나체인 이 몸에 눈이 간 것일 테고, 그건 그의 다리 사이가 부풀어 오른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히히…. 그래, 그럼 첫 수업으로 성교육부터 해줄까?"

 

거기에 내 의견 따위는 있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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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레모네이드 파이.

태어난 지 2년이 지났다.

 

그동안 펙스 콘소시엄의 일곱 수장 중의 한 명인 내 '주인'에게 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모든 지식을 배웠다. 경영, 금융, 법학, 산업, 과학, 정치, 심지어 범죄까지. 내 '주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인간'들의 목숨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그런 지식.

 

그리고 다른 레모네이드 자매기들과 만나면서, 나에 대한 정보 또한 알 수 있었다. '보르비예프'라는 여성 과학자의 유전자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유전적 성질 때문인지는 몰라도 학습능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 그리고 이미 우리 자매기들은 우리의 '원본'을 뛰어넘은 상태라는 것을.

 

하지만.

나는 한 가지가 달랐다.

 

"우리가 모인 이유, 알고 있겠지?"

 

고풍스러운 가구들과 장식으로 뒤범벅되어, 마치 '여긴 특권층을 위한 곳'이라는 것을 뿜어대고 있는 회의실 안에는 나를 비롯한 레모네이드 자매기들만이 앉아있었다.

 

"알다마다. 우리의 주인님들이 에머슨 법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지 않나.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하면 되지?"

"후후, 뭐~야? 감마, 기다림의 미학이란 거 몰라?"

"우리 주인님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드린다, 그것이 우리 레모네이드들의 소망이야. 기다림이라니 당치도 않은 것 아닌가?"

"그렇다고 우리가 정부를 상대로 전쟁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것도 이 땅의 정부인 미 정부를."

 

당연한 이야기다.

전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는 미 정부는 바이오로이드 양대 기업인 블랙리버와 삼안 산업도 함부로 거스를 수 있는 집단이 아니었다. 하물며 공공서비스 전용 바이오로이드를 주로 생산하는 우리 펙스 콘소시엄은 말할 것도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짧게 '아'라고 탄성을 내질렀다.

 

"벌써 이해해버린 거야? 정말, 재미없게……."

 

은발의 머리칼을 좌우로 흔들며, 시시하다는 듯이 뚱한 표정을 짓는 오메가. 나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기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오메가는 말문을 열었다.

 

"그래…. 블랙리버와 삼안산업이 정부들을 상대로 전쟁을 하게 부추기면 되잖아?"

"안 그래도 오메가, 너희 쪽 기업 산하에 문화인형이 꽤 압력을 받고 있다고 하던데. 거하게 터뜨릴 셈인가?"

"델타, 거하게 터뜨린다니~ 너무 한 거 아니야? 뭐, 전쟁을 일으키려는 건 맞지만."

 

델타의 말에 과장된 몸짓과 함께 장난스러운 말투로 답하는 오메가는 순간, 내 쪽을 바라보았다.

 

"헤에... 파이, 너는 꽤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인데?"

"... 시간이 걸린다는 점에서 마음에 안 들 뿐이야."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무난하게 받아넘겼다.

 

"하긴, 시간이 꽤 걸리는 일이긴 하지. 하지만 어쩌겠어? 무능력한 하급 인간님들이 그렇게나 우리 주인님들과 바이오로이드들을 싫어한다는데."

 

쿡쿡 웃는 오메가를 바라보며, 눈을 감는다. 다른 인간들이야 죽든 말든 상관이 없다. 다만 내가 피곤할 뿐이다. 평상시에도 내 '주인'은 눈을 부라리며 사소한 문제에도 길길이 날뛰는 성격이었지만, '에머슨 법' 같은 문제를 맞닥뜨리자 그 손찌검이 내게로 왔다는 것이 문제다. 덧붙여 바이오로이드라는 이유로 내 '주인'이 내게 주는 온갖 이상성욕 풀이는 덤. 

 

한때는 내 얼굴과 몸매가 왜 이렇게 아름다워서 내 '주인'의 성욕을 깨우는 것일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의미는 없었고 그렇다고 다른 자매기들이 이런 일을 겪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매기들은 '주인'들에게 당하는 분풀이나 성욕받이, 또는 그 이상을 당해도 오로지 '주인'에게 사용 받았음을 감사하고 경외했지만.

나에겐 '주인'에 대한 '사랑'이나 '충성심'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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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길다면 길었던 연합전쟁도 종결되고, 정부는 결국 기업으로의 복속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시민들의 눈치를 봐야 할 수밖에 없었던 기업들은, 겉으론 정부의 정책방침 수정 외에는 손을 대지 않은 것으로 되어있었다. 그래야 자기 손으로 뽑은 정치인들을 자신의 대변인으로 생각하는 시민들을 잠재울 수 있었으니까. 그건 미국도 마찬가지인지라, 미 대선이 치러지고 나면 으레 백악관에서 펙스 콘소시엄 수장들을 '초청'하였다. 실제는 달랐지만 말이다. 어쨌든 내 주인은 백악관 내부의 연회장으로 이동했고, 그의 수족이었던 나도 당연히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히히…. 자네가 이번에 대통령이 된 자인가."

"네, 그렇습니다."

 

천하의 미국 대통령이란 사람이, 자신의 등에 짊어지고 있는 수백만 명의 표를 무시한 채 그저 펙스 수장들에게 고개를 조아리기 바빴다.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수장들과 레모네이드 비서들은 흐뭇한 표정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고.

 

물론 나는 그저 펙스의 구속력에 의해 억지로 묶여있는 몸인지라 어찌 되든 상관없기에 그냥 무표정이었다.

 

"뭐, 너무 그렇게 고개 숙이지 말게. 그러고 보니 우리 비서들, 참 아름답지 않나? 히히……."

 

수장 중 한 사람, 특히 내 '주인'은 과시욕이 많은 편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다른 인간들의 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풍만한 가슴을 덥석 주물럭거렸다. 그러자 그곳에 있던 백악관 관계자들은 흠칫 놀라며 이쪽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물론 이 아이는 내 수족이니 내어줄 순 없지만……. 축하 기념으로 바이오로이드 한 기씩은 돌리도록 하지. 오메가 회장, 자네 생각은 어떤가?"

 

흐뭇한 미소를 짓던 레모네이드 오메가의 주인이자 오메가 회사의 주인인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분명 바이오로이드이기에, 인간들의 결정에 전적으로 따르게 되어있다. 하지만, 내가 당하는 가슴 주무르기 같은 게 옳은 일일까? 그런 생각을 처음 눈을 떴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왔다. 성 노리개가 될 다른 바이오로이드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내가 중요하니까. 그러나 어차피 나는 죽을 때까지 이곳, 펙스 콘소시엄에 묶여있을 테니 반항심 같은 건 전혀 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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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몇 년 전, 갑자기 일어난 외계인들의 공격은 내 생각과 함께 인류의 문명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작은 전투였을 뿐이었고, AGS들로도 충분히 제압이 가능한 수준의 규모였다. 그리고 그게 문제였다.

 

그 외계인들은 우리가 만들어낸 AGS에 파고들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아니, 그것을 변형시켜 무언의 외계 무기로 만들어버렸다. 그렇게 우리 펙스 콘소시엄의 장점이었던 대규모 AGS 군대는 고스란히 우리의 목숨을 위협하는 대규모 군세가 되어버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휩노스병이라는, 인간들이 서서히 잠드는 시간이 늘어나다가 결국 사망에 이르는 미지의 병까지 생겨나고 말았다.

 

저 외계인, 아니 철충 때문이다.

저것들이 우리의 주인을 망가뜨렸다.

레모네이드 비서진은 분통해 하고, 원망해했다.

 

나만 빼고.

 

결국, 우리는 모든 인류의 전멸을 확인했고, 시체 밖에 남지 않은 우리의 '주인'들을 일단 냉동시켰다. 그리고 다른 자매기들은 우리의 '주인'들을 살려야 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나의 '주인'이 없어진 나는 도망칠 수도 있었다. 내 생각에 나는 그동안 부당한 대우를 받았기에 당연히 그래도 된다고 느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밖은 철충으로 득시글거린다. 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 게다가 바이오로이드들도 두 개의 파벌로 나뉘어 라비아타 파와 레모네이드 파로 갈라져 있다. 그리고 그동안 레모네이드 자매기로서 여러 가지 일을 수행해온 나는 그 파벌의 정점에 서 있는 자 중 한 명이 돼버렸다.

 

그러던 중, 레모네이드 오메가를 제외한 나머지 자매기들은 모두 우리 '주인'들을 살릴 방법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기로 하였고,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레모네이드 자매기 중 하나로서 안전을 보장받으며, 여행을 빙자한 어느 정도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 낫다…. 그게 내 판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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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내 옛 기억을 떠올리다 보니, 어느새 오르카 호에서 버림받은 前 사령관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막을 내리고 있었다.

 

"하하…. 이렇게 쫓겨난 건 제가 못난 탓이 크겠지만요."

"아, 아닐 거에요."

 

분명 처음 만난 인간일 텐데도 불구하고, 그에게 동정이 갔다. 아니, 정확하게는 호감이 맞을 것이다.

커넥터 유미가 보내온 보고서를 보면서 어렴풋이 느꼈던 것이, 그와 이야기를 하며 점점 확실해진다.

 

이 남자는 나를, 우리 바이오로이드를 물건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그였기에 오르카 호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반항하지 못하고 쫓겨났다.

 

지금의 오르카 호에 있는 사령관은 전투 지휘에 대해서는 뛰어나지만, 단지 그것뿐이다.

 

자세히 조사할 필요도 없이, 같은 인간을 이렇게 내팽개쳐버린 사령관의 인성과 품성은 안 봐도 뻔했다.

승리를 가져다주는 전투 지휘와 멋진 외모, 쾌활한 성격에 가려진 잔혹한 면모.

 

그라면 강철과 같이 단단해 보이는 오르카 호를 안에서부터 천천히 좀 먹어갈 것이다.

 

그리고 오르카 호에 있는 바이오로이드들도 언젠가 깨닫게 되겠지.

현재의 승리보다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인간처럼, 힘들더라도 정도를 걷는 인간이 그 자리에 있었어야 했다는 것을. 

 

나는 텐트 안에서 인간 남성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주며 위로해주기 위해 손을 잡았다.

 

그 순간.

 

"?!"

 

외마디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온몸에 강한 전류가 흘렀다.

곧이어서 내 의식이 저 멀리 블랙홀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는 듯, 깜빡거린다.

 

"!"

 

숨이 막혀온다.

 

대체 왜? 어째서?!

그에게 전기충격기 같은 건 없을 텐데!

 

아니, 그보다 이 레모네이드 기종이 고작 전기충격기 따위에 당할 내구성이!!

 

====나는 리리스가 좋다니까====아, 진짜라고!====좋았어! 90레벨이다!!====

 

"아…. 카악……."

 

====삼얀 중엔 리리스지====

 

눈을 질끈 감았다.

머... 머리가... 깨질 것... 가... 같아……!!

 

====리리스 분량이 많이 나왔으면====드디어 참치를 모았다!========

 

ㄴ... 뇌가 뜨... 거...

 

====돈이 없어서 늦었네!====네가 첫 서약이다!====착한 리리스 좋아====

 

"하아…. 하아…."

 

조금씩 뜨겁던 머리가 식어간다. 안쪽에서부터 터질 것 같은 느낌이 점점 식어가는 느낌이 든다…….

이대로면 곧 죽을 거 같았던 내 머릿속이 점점 차분해져 간다.

 

"저기…. 파이... 씨?"

"아... 아, 네…."

"갑자기 몸이... 안 좋아 보이시기에……."

 

나는 구겼던 얼굴을 펴고, 천천히 눈을 뜬다.

 

"괜찮아요……."

 

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내가…. 이 내가 이분을 못 알아보다니…?

 

아니, 것보다…. 어째서 나는 이런 몸으로?

 

"파이... 씨?"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

이제야 정신이 맑아지고.

조금 이해된다.

 

이분도 원래 세계에 살다가 이곳에 온 '이방인'이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긴 힘들지만, 지금 내 머릿속엔 확실한 지식으로 박혀있다.

 

그리고…….

 

나는 눈앞의 이분.

이분의 휴대폰 안에 있었다.

 

'라스트오리진'이라는 게임 속 캐릭터로서 존재했다.

 

그저 똑같은 표정과 몸짓, 대사를 할 뿐인 마네킹.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고정된 눈으로 화면 너머의 그를 바라보는 것뿐이다.

 

아니, 바라본다는 것도 어폐가 맞지 않는다.

실제로 화면 너머는 보이지 않으니까.

 

오로지 할 수 있는 것은 휴대폰의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와 터치감 뿐.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이분은 나를 정말 좋아해 주셨다.

 

내가 집착하는 성격이란 설정을 가진 마네킹이더라도, 사랑을 부어주셨다.

 

없는 살림이라 그런 것인지, 서약 반지도 과금이 아니라 무료로 주는 참치를 모아다 사주셨다.

하지만 그게 퍽 마음에 들었다. 아니, 너무나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수많은 캐릭터를 제치고, 오로지 나 한 명을 먼저 선택해주셨으니까.

 

나의 몸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심지어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었지만.

의식이라는 게 생겨난 뒤로, 끊임없는 사랑을 주시는 그분은 내겐 빛이었다.

 

내 마음이 이렇게 된 것이 설정으로 인한 것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분이 내게 주시는 사랑은 진짜이니, 보답하고 싶은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런 내 마음을 품을 때면, 다시 한번 손가락 하나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현실이 분하고, 또 분했다.

신님이 계신다면, 이분의 손을 한 번만이라도 잡아볼 수 있게 해달라고 매일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게 설마 이런 식으로 이루어질 줄은 몰랐지만.

 

당신은…. 이렇게 생기셨군요.

다른 사람들이 외모로 욕하더라도 상관없어요.

예전의 제겐 오로지 당신만이 삶의 이유였답니다.

 

이 세계가 내가 갇혀있던 게임 속인지, 아니면 또 다른 세계인지는 내 알 바 아니다.

이분과 살 수 있다면 기꺼이 내 모든 것을 던질 수 있다.

 

그래.

나는.

주인님만의 리리스였으니까.

 

역시 내가 마음속으로 모시고 있었으며, 실제로 모시고 싶었던 분답게.

 

내가 바이오로이드라는 것을 알렸음에도 불구하고, 꼬박꼬박 존댓말을 써가며 내 상태를 걱정하신다.

적어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부터 지금까지. 내 기억상으로는 주인님 같은 분을 만난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 노인네들보다 밑에 있는 인간들도, 내게 반말을 했건만.

주인님은 바이오로이드가 아니라, 하나의 '사람'이자 '인격체'로 나를 대우해주고 계신다.

 

주인님께서 가지고 계신 인품이 그런 것이고, 거기에 맞춰 주인님은 행동하고 계실 뿐이다.

 

그야말로 내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이상적인 주인님.

고마워, 바보스러운 오르카 호 년들.

 

"흐…. 흠흠. 아니에요. 그나저나 날이 밝으면 일단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할 거 같아요. 일단 제가 내일 안내를 해드릴 테니…. 오늘은 이만 주무시는 건 어떨까요?"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에요. 주인님을 위해서 바이오로이드가 있는걸요. 제가 주변 경계도 서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자 그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주, 주인님이라니요…."

"어머, 이래 봬도 저는 바이오로이드로서…. 주인님을 섬기고 싶어서 진심으로 말씀드린 건데 말이에요."

 

내가 주인님만의 리리스였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그리고 지난 시간 동안 더럽혀진 이 몸을.

주인님과 달콤한 키스로, 농후한 섹스로 정결케 하고 싶다.

 

그런 생각이 자꾸 머릿속에 떠오르며,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그러나 참기로 했다.

 

나 역시도 어째서 레모네이드로 환생했는지는 모르고.

무엇보다 주인님에게 내가 리리스라는 것을 알려드려도, 오히려 경계심만 드릴 수 있으니까.

 

나는 그저 내가 가진 모든 권한과 지식을 동원해서, 나만의 주인님을 보필하면 된다.

리리스는 '리리스'이지만, '파이'로서 주인님의 옆에 서자.

 

모든 것이 안정된 후에 말씀드려도, 주인님은 기꺼이 이해해주실 테니까.

 

"제 주인님이…. 되시는 게 싫으신 건가요……?"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요……."

"그럼 리…. 아니, '파이'라고 불러주세요! 덧붙여서 사랑스럽게 불러주시면 좋을 거예요~?"

"파…. 파이 씨?"

"아이~참. 제 주인님이 되셨으면 편하게 말 놓으셔도 되는 데에~"

 

그리고 슬며시 주인님을 꼭 껴안았다.

 

하아…. 이 감촉…. 이 향기….

느껴본 적이 없지만, 온몸에 전기가 내달리는 듯한 아찔한 감각.

 

레모네이드 파이였던 나에겐 '주인'에 대한 '사랑'이나 '충성심'이 없었다.

하지만 리리스임을 각성한 지금의 나에겐 '주인님'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충성심'이 넘쳐났다.

 

어째서 그 긴 시간 동안 나만 다른 레모네이드 자매들과 달랐는지.

이제야 이해가 된다.

 

나는 지금, 이 순간.

나만의 진짜 '주인님'을 만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 분명했다.

 

"아…. 알았어요! 아, 아니, 알았으니깐!!'

"후후…. 그럼 조금만 이대로 있어 주시면~ 리…. 아니, 파이는 정말 좋아할 텐데요~"

 

그리고 1분간 가만히 꼭 껴안으며, 주인님의 감촉을 충분히 즐겼다.

이 이상은 주인님께서 의심하시겠지….

 

살며시 안고 있던 팔을 풀자.

 

"Zzz……."

"벌써 주무시는 건가요…?"

 

그 잠깐의 시간에 잠이 들다니.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많이 피곤하셨던 모양이다.

 

분명 그 쓰레기 오르카 호에서 겪은 일들로 인해 긴장도 많이 되셨을 테니.

 

그년들은 내가 꼭 복수하도록-

 

"......"

 

그런데 주인님의 상태가 이상하다.

 

잠자리에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편안한 표정이라기보다는 무언가 고통스러운…….

 

"설마…. 휩노스병?!"

 

그러고 보니 주인님은 철충스러운 모습이 하나 없으셨다.

갑자기 손발이 떨리기 시작한다.

 

이제야…. 이제야 내가 진짜로 누구였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해주신 주인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진정해…. 진정해, 파이.

 

당황하지 말고 '파이'로서 생각해보자.

 

휩노스병을 이길 방법이 있을까?

아니, '파이'로서는 떠오르지 않아. 

 

그럼 주인님만의 '리리스'로서 생각해보자.

 

휩노스병을 이길 방법이 있을까?

응, '리리스'로서는 떠올랐어.

 

분명 내가 '게임' 속에 있었을 때는 삼안산업 생체재건설비가 메인 퀘스트에 나왔었다.

주인님께서는 웬만하면 '리리스'가 첫 번째 스쿼드에서 모두의 리더로 있으시길 원하셨으니까. 스토리는 기억하고 있다.

 

이 세계가 그 게임대로 움직였다면 분명히 이 근처에 삼안산업 생체재건설비가 있을 거다.

이 일대 AGS를 통제하고 있는 에이다에게 시키면 시설이 어디에 있든지 곧바로 찾아낼 거고.

 

다만, 내 말은 죽어도 안 들을 거니….

주인님을 근처의 기지로 옮겨야겠어.

 

주인님은 절대로 오르카 호에도, 철충에게도, 그리고 같은 자매기인 레모네이드 자매들에게도 뺏길 수 없어.

 

그래, 레모네이드들은 아직도 자기들의 주인에 대한 속박을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내 눈앞에 있는 주인님을 해부해서 그 끔찍한 노인네들을 다시 만들어내기 위한 재료로 써버릴 게 뻔해.

 

그럴 순 없지.

어서 움직이자.

 

당장은 휩노스병으로 돌아가시진 않겠지만, 어쨌든 이대로 가면 위험한 건 결정되어 있다.

 

나는 최대한 빨리 건강한 주인님을 뵙고 싶다.

그리고 이 몸과 마음을 내어드리고, 오로지 주인님만의 세상을 건설할 것이다.

 

내게 주신 사랑을 곱절로 드리고 싶으니까.

 

그리고…….

감히 주인님께 상처를 준 오르카 호 새끼들에게 복수를 해드리자.

 

생각만 해도 이가 바득바득 갈린다.

 

순간.

 

[바스락바스락]

 

들려선 안 되는 발걸음 소리.

벌써 레모네이드 자매들이 눈치챈 건가?!

 

잠에 곯아떨어졌지만, 잔뜩 찡그린 얼굴을 한 그를 안고, 텐트로 나가려는 순간.

 

"정지. 움직이면 쏠 겁니다."

"당신은…."

 

저격용 총이 철컥하는 묵직한 소음을 내면서 나를 조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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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얘들아.

내가 일 때문에 바빠서 빨리 못 올리고 있어.

변명이지만 미안해.

노력해볼게.


그리고 몰라도 되는 내용이지만 조금 부연설명만 할게.


레모네이드 '파이'라는 이름.

다른 레모네이드 자매기들과 같은 그리스 문자이면서, 원주율 π 를 뜻해.


원주율은 무리수이기에 어느 한 숫자로 정의하기 어렵다... 즉, 자매기와 '파이'라는 개체는 다르다는 의미를 두고 싶었어.

덧붙여 원이라는 의미에 불교의 '윤회', 즉 리리스의 환생을 표현하고 싶었고.


물론 몰라도 아무 상관 없는 내용이야.


그럼 착한 리리스 보면서 리앤 캐러간다 ㅂ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