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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돌아오셨습니까!"


고향 루블린에 돌아온 바실리를 처음으로 반겨주는 저 늙은이는 이 저택에서 수십년째 살아온 폴란드인 집사였다. 바실리는 마차에서 내리며 늙은 집사에게 인사했다. 바실리는 고향의 공기를 가슴 깊숙히 들어마셨다. 상관도 부하도 전쟁도 명예도 모두 잊을수 있는 평화로운 고향. 집사와 바실리는 끊임없이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며 넓은 정원을 걸어갔다. 프랑스에서 봤던 어마어마한 정원과 비교하면 너무도 투박했지만 바실리는 러시아의 향취가 깊게 풍기는 이 정원이 너무도 좋았다.


문을 열고 저택에 들어가자 어머니가 계단을 뛰어 내려와 바실리를 끌어안았다. 집사는 웃음을 터트리며 바실리의 모자를 벗겨 문 옆 고리에 걸어뒀다. 가족과 하인들이 하나둘 나타나 몇년만에 휴가를 받아 집에 돌아온 군인을 축하해줬다.


바실리는 모두의 환영을 받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오늘 저녁식사는 대단하겠군. 바실리는 해실해실 웃으며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그리고는 침대에 풀썩 누웠다. 아, 이 얼마나 오랜만에 느끼는 아늑함인가! 행복을 참을수 없었던 바실리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그때 사랑하는 여동생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별 일도 없이 낄낄대고 있는 바실리의 표정이 우스웠던건지 피식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나타샤! 내 방까지 들어오고, 원일이야? 수백일만에 집에 들어온 오빠를 놀리러 온건가? 아니면 전공에 대한 수훈으로 받은 훈장이라도 구경하러 온거야?"


바실리는 침대에서 일어나 코트에 차여있던 훈장을 풀어 여동생에게 자랑하듯 보여주었다. 나탈리아는 또 한번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는 바실리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 그리뇨프. 아, 그 여자로군. 바실리는 편지를 책상 위에 휘리릭 던지고는 여동생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나탈리아는 바실리를 밀어내고는 책상 위에 던져진 편지를 다시 들어 바실리의 손에 쥐어주었다.


"바샤, 제발 소냐의 편지를 무시하지 말아줘. 집안도 꿇리지 않고, 내가 한번 만나봤는데 성격도 부드럽고, 얼굴도 예쁘더라니까. 거기다 사교성도 좋아. 도데체 뭐가 문제인거야? 오빠가 전쟁에 나가있던 와중에도 직접 뛰어다니면서 둘 사이를 주선해준 아버지를 봐서라도 한번정도 마음을 좀 주는게 어때?"


"바로 그게 문제야 나타샤. 아버지가 결정해준 결혼상대, 그게 문제라고. 나는 내 상대를 내가 선택하고 싶어. 인간으로서 그런 권리를 가지고 있으니까.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건 내가 선택한 관계가 아니라는거지. 만나본 적도 없고 얼굴도 본적 없는 여자랑 결혼하라고? 말도 안돼!"


바실리는 또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나탈리아는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도데체 뭐가 문제길래 저러는 걸까. 그녀는 바실리가 말하던 그 '자유'가 뭔지 이해할수 없었다. 그냥 조용히 자기 자리에서 주어진대로 살아가면 안되는걸까. 그냥 괜찮은 사람과 행복하게 사는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래도 한번만 만나 보라고. 제발 그 편지 한번만 읽어보고. 어차피 법원에 참석한 아버지께서 돌아오려면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일이니까 그동안 만나보고, 그래도 영 아니면 그때 말해봐. 결과는 내가 책임 못져줘."


나탈리아는 그렇게 쏘아붙이고는 방을 나가버렸다. 바실리도 동생의 부탁을 애써 무시할 정도로 냉혈한은 못되었기 때문에 바로 책상에 앉아 편지를 손에 들었다. 나탈리아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일단 만나보고 결정하는게 더 낫겠지. 바실리는 작은 칼을 들고 봉투 윗부분을 살짝 잘라 편지지를 꺼냈다.


소피야가 쓴 글은 상당히 침착했다. 담담한 어투로 자신을 소개한 그녀는 시비드니크에서 바실리가 올때까지 기다리고 있겠노라고 썼다. 문체는 고요하지만 수려했고 어딘가 모를 장엄함까지 갖추고 있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여인이 분명하군. 마침 시비드니크는 루블린에서 그렇게 먼 도시도 아니었다. 흠. 잠깐 고민하던 바실리는 걸어뒀던 코트를 다시 집어들고 방 밖으로 나갔다.


"브와디스와프, 잠깐 가볼 곳이 있소. 어머님과 메이드에게 말해주길 바라겠소."


늙은 집사는 살짝 목례하며 모자를 챙겨 밖으로 나가는 바실리를 바라봤다. 문이 닫혔고 집사와 여동생은 계획이 성공한 기념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이로써 일단 자작에게 혼날 이유도 없어졌을 뿐더러 하나뿐인 도련님(또는 오빠)에게 짝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니, 이 어찌 기쁘지 않으랴?









...










바실리는 좁은 선실에서 눈을 떴다. 얼마나 잤을까. 너무도 오래 잠들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머리가 아파왔다. 꿈 속에서 마주친 그들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혁명이 실패한 이후로 항상 그는 죄책감에 시달려왔다. 반역자의 가족. 그들이 얼마나 큰 고초를 치러왔을지는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과거에 짓눌려 있을 수만은 없다. 바실리는 눈을 비비며 옷을 갈아입고 화장실을 찾아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화장실이든 샤워실이든 하나밖에 없었다. 그렇다. 이 세계의 남성은 멸종해 버렸다. 유일한 예외는 저들이 부르는 '사령관'이었는데, 그 높으신 사령관이 이렇게 작은 코르벳에 탈 리가 없으니 여자화장실만 짓는건 나름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다행이도 아직 못 참을 정도로 급하지는 않았다. 어쩌지. 일단 요강에 소변을 보고 나중에 처리해야 하나.


중요한 문제로 고민 끝에 바실리는 몰래 갑판 위로 올라가 으슥한 구석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저 아래로 멀찍이 내려다 보이는 깊은 바다에 소변을 휘갈겼다. 아! 이 청량감이여. 시원하게 배설을 마친 바실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바지를 정리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본 순간... 누군가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와우! 정말 크기도 해라."


바실리와 눈이 마주친 린트블룸이 피식 웃으며 한마디 했다. 바실리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리고는 누구도 알아들을수 없는 괴성을 내지르며 자신의 선실로 득달같이 뛰어갔다. 그렇게 크지도 않은 배에서 저렇게 소리를 질러대니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가 과연 어디에 있을까. 모두가 바실리의 선실 앞으로 모여들어 잠긴 문 앞에서 웅성거렸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바실리는 안에서 계속 괴성을 내지르고 있을 뿐이었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온 린트블룸이 영문도 모른채 문 앞에 모여있는 이들에게 해맑게 웃으며 모든 상황을 설명해줬다. 순식간에 방 밖은 웃음소리로 가득 찼고 그에 따라 바실리의 비명소리도 함께 커졌다. 상황이 별거 아니었다는 점을 깨달은 모두가 각자 자리로 돌아갔고, 그 자리에는 하르페이아 혼자 남아있었다.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고 비명소리가 잦아든 이후 하르페이아는 문을 두드렸다. 여전이 얼굴이 시뻘건 바실리가 힘없이 문을 열었다.


"음... 괜찮아?"


초췌한 몰골의 바실리는 맥없이 침대에 주저앉으며 대답했다.


"괜찮... 지... 아니, 괜찮... 소. 너, 너무 민망해서, 이런일은 처음이라 그... 으..."


"너무 마음에 두지 말았으면 해. 린티도 나쁜 의도가 있어서 그런건 아니니까. 좀 장난기가 많은 아이기는 하지만 진짜로 나쁜 친구는 아니야. 그리고 그... 그 반응은 예전 사령관이라면 절대로 보이지 않은 모습이다보니 다들 과민모습한것일 뿐이야. 마음 풀어."


하르페이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웅얼거리는 바실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바실리는 여전히 삐진 표정으로 하르페이아의 손을 쳐냈다.


"무슨 내가 어린애라도 되는줄 아시오?"


하르페이아는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아니지. 그냥 달래주려고 그러는거야. 그럼, 모두를 대신해서 하나 선물을 줄게. 아직 모르는게 상당히 많지? 딱 하나 솔직하게 대답해줄테니 뭐든 하나만 물어봐. 아직 정보 모으는 중이잖아? 레프리콘한테 들었다고."


분명히 지금 바실리에게 가장 중요한 선물이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 물어볼 기분은 아니었다. 이 민망한 기분 속에서는 어떤 대화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바실리는 우물쭈물하던 끝에 대답했다.


"있다가, 나중에 다시 와 주시오. 그때까지 질문을 정리해 두겠소. 잠시만, 잠시만 혼자 있게 해주시오."


하르페이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없이 방을 나가고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바실리는 침대에 몸을 뻗고 누웠다. 애매한 베개나 두들겨 패고 음침하게 중얼거리기를 얼마나 했을까, 온 몸을 뒤덮던 수치심이 어느 정도 가셨다. 그래. 질문. 어떤 질문을 해야 하지? 개인적으로 조사할 수 있는 문제는 이런 질문으로 낭비할 필요가 없다. 책에 쓰인 기록만으로는 조사할 수 없는 내용이어야 했다.


지금 가장 의문인 것? 당연히 본인의 정체지 않을까.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이바노비치는 지금 자신이 자신이 맞는지조차 믿을 수 없었다. 거울을 보는 순간 항상 보이던 그 남자. 그리고 여인들이 말했던 그대로 남성이라고는 '사령관' 밖에 없는 이 세계. 그리고 초면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익숙한 저 여인들의 대우. 지금이야 말로 그 명백한 가능성이 시사하는 진실을 밝혀야 할 때였다. 진실이 아무리 쓰더라도 진실은 진실로 남아야 한다. 그는 진실을 찾아 나서야 했다. 그 결과가 또 다른 죽음으로 이어질지라도.


바실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 문 안쪽에 달린 거울을 바라보며 흐트러진 옷 매무새를 정리했다. 바실리는 거울 속의 남자를 노려봤고, 남자도 바실리를 응시했다. 저 남자. 저 매서운 눈매를 가진 남자의 정체를 밝히겠다. 그 순간 리리스가 문을 두드렸고 바실리는 문을 열었다.


"방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안된다고요. 식사라도 하셔야지요. 자! 이게 오늘 식사당번 그리폰이 준비한 '전자레인지로 뎁힌 고추참치와 즉석밥'이에요. 기분 풀고 어서 나오세요."


바실리는 리리스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리리스 손에 들린 적시를 들어 책상에 내려놓고 말했다.


"리리스 양. 하르페이아를 여기로 데려와 주실수 있겠소? 준비가 끝났다고, 방으로 와달라고 전해주시오."


리리스는 살짝 인사하고 방을 나갔다. 바실리는 책상에 앉아 숟가락을 들고 '전자레인지로 뎁힌 고추참치'를 한입 먹었다. 이 답답한 식감은 어디 안가는군. 그래도 어쩌겠는가. 굶어 죽기 싫으면 이거라도 먹어야지. 바실리는 천천히 식사를 씹어넘겼다. 계속 먹다보니 익숙해지는 맛이다. 그러던 와중, 하르페이아가 문을 두드렸다.


바실리는 주머니에 들어있던 손수건으로 입을 닦고 문을 열어주었다. 하르페이아는 싱글싱글 웃고있었고 바실리는 긴장한 표정이었다. 하르페이아가 방에 들어오자 바실리는 침대에 앉았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어떻게 말해야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잠깐 고민하던 바실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장롱 문을 열어젖히고 문 뒤쪽에 붙어있는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 건너편에서는 또 다시 그 남자가 바실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바실리 본인과 같은 긴장한 눈빛이었다. 바실리는 숨을 크게 몰아쉬고는 하르페이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질문하겠소. 단 한가지. 명확하고 확실하게 답해주시오. 당신들이 사령관이라 부르던 남자는 이 방 안에 있소?"


하르페이아는 살짝 주저하는듯 하더니 피식 웃으며 한숨을 살짝 쉬고는 짧게 대답했다.


"응."



















[오늘자 TMI]

러시아식 애칭 : 바실리=바샤, 나탈리아=나타샤, 소피야=소냐

애칭은 존나게 다양해서 똑같은 이름이라도 애칭이 다른경우도 있음. 바실리를 싹다 바샤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뜻.

당연하겠지만 친한 사이에 부르는 이름이 애칭임. 싸가지 있게 예의 차려서 부르고 싶으면 이름+부칭 으로 부르면 됨.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이런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