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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에 간 멸망 전 라붕이-1: https://arca.live/b/lastorigin/9200564

정글에 간 멸망 전 라붕이-2: https://arca.live/b/lastorigin/9406851




“라주임, 다리 아프면 업히지 그래?”


라붕이는 휩노스 병 때문에 신체를 건강한 몸으로 바꿨지만 어린 소년의 몸이라서 신체 능력은 바이오로이드보다 약했어.


“하아.... 네 죄송합니다. 주지사님.”


“주지사는 무슨, 격식 차릴 게 뭐가 있다고. 어서 업히게.”


다리가 퉁퉁 부어서 못 걸어 갈 것 같아 결국 라붕이는 요안나의 등에 업혔어. 왠지 모르게 라붕이라는 짐을 등에 업었지만 요안나의 발걸음은 가벼워졌어.


“요안나는 예루살렘의 검은 방패에 나온 요안나 맞죠?”


철충들은 이미 안전하게 모두 처리해서 목적지까지 가는 길은 마치 아침에 소풍 가는 기분이었어.


“그래, 내가 예루살렘의 검은 방패의 프레스터 요안나지.”


그 말을 들은 라붕이의 눈이 초롱초롱해졌어. 예루살렘의 검은 방패라는 드라마는 멸망 전 일본의 덴세츠 그룹에서 만든 역대급 명작이었어. 영화 한 편에 쓸 돈을 드라마 한 편마다 써서 만들었으니 그 인기는 어마무시했지.


“와, 정말요? 저 어릴 때 좋아했어요. 팬이에요!”


“앞으로 영원히 나의 팬을 만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 고맙네.”


백 년을 넘어서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남은 팬을 만난 요안나는 가슴이 뭉클했어. 정말 고마워서 이 세상 모든 걸 주고 싶었지.


“저 시즌 1부터 8까지 전부 봤어요. 계속 눈앞에 계셨는데 이제야 알아봐서 죄송해요.”


라붕이는 감격했는지 자기가 감명 깊게 봤던 명장면들을 요안나에게 말해주었어 


“라주임 미안하지만, 시즌 2의 롱테이크씬은 내가 찍은 게 아니라네. 나는 시즌 3부터 출연해서 말이야.”


“네? 그러면 그 롱테이크씬을 찍었던 요안나는....”


요안나가 출연했던 드라마는 액션신을 연기가 아니라 사실적으로 찍어서 배우 바이오로이드가 도중에 사망하면 똑같은 바이오로이드를 투입해 찍었지. 그래서 라붕이가 시즌 2에서 봤던 요안나는 사망했고, 그 뒤를 이은 바이오로이드가 지금 라붕이를 업고 있는 요안나였어.


“아, 미안, 미안해 라붕씨 내가 그러려고 한 게 아닌데.”


“요안나님 지금 라붕이의 동심을 파괴하면 어떡해요.”


“전.... 괜찮아요. 뭐 어린애고 아니고 그것도 몰랐던 내가 바보죠. 하하....”


“근데 꼬맹이 너 도대체 몇 살이었어? 내가 알기로 예루살렘의 검은 방패는 2060년대에 나온 거로 알고 있는데.”


“에? 그러면 라붕씨는 적어도 그러니까 인간님들이 멸망한 게 2114년이니까 어디보자.”


“최소 60세는 넘는데?”


각 부서 팀장들의 말에 요안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어. 설마 지금 내가 어부바를 하는 조그맣고 귀여운 라붕이의 원래 나이가 적어도 60은 넘은 할아버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지금의 요안나는 2060년대의 드라마가 아니라 2095년에 만들어진 리메이크판의 요안나였어. 하지만 리메이크판은 원작의 모습을 그대로 가져와서 다시 찍은 거라 그녀가 입은 갑옷, 그녀가 찍었던 명장면들은 원작과 똑같았지.


“아니, 설마 팀장님들 제가 이 몸뚱아리처럼 꼬맹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어, 어? 요안나 힘들어요? 미안해요. 그럼 내릴게요.”


라붕이를 어부바한 요안나의 두 팔의 힘이 빠지기 시작했어. 다시 다리 힘을 되찾은 라붕이는 갑자기 걸음걸이가 느려진 요안나를 걱정스레 바라보았어.


“요안나 지쳐 보이는데 괜찮아요?”


“히익, 괜, 괜찮네! 너무 걱정말게. 나, 난 정말 괜찮으니까.”


요안나는 라붕이의 얼굴을 보고 60세 할아버지의 얼굴과 겹쳐져 보이자 흠칫 놀라면서 뒷걸음질했어.


“와아, 그러면 라붕이는 할아버지네 소름이다.”


“에이 더치걸 팀장님, 설마 제가 60살 넘은 할아버지겠어요?”


“이보게, 라붕이 자네가 봤다고 한 건 리메이크판인가?”


“요안나님, 진짜로 제가 60년생인 줄 아셨어요? 80년생이 어떻게 원작을 생방송으로 봤겠어요? 저는 리메이크판을 봤죠.”


“아, 원작과 똑같게 만들었다고 했으니까 헷갈릴 수 있나?”


라붕이의 말을 들은 요안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 


“근데 80년생이면 대충 35살 정도겠네? 라붕이 아저씨네?”


“아저씨 아니에요!”


아저씨란 말에 라붕이는 빼액 소리 질렀어. 아무리 어른 취급 받고싶어도 아저씨는 인정 못 하지.


“그렘린, 나이 가지고 아저씨 아줌마라고 말하는 게 레아 같은 분들께 얼마나 실례되는 말인지 아세요?”


“으음... 35.”


“네? 저 부르셨니요? 그거 아세요? 아침에 요안나님이 혼자서 트릭스터를 무찔렀을 때, 그동안 봐왔던 명장면보다 훨씬 멋졌어요.”


“고맙네. 그래 지금이 중요하지 그렇고말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새 라붕이 일행은 목적지에 도착했어.


“라붕이, 이건 우리 바이오로이드는 열 수 없어 그러니까 부탁해.”


라붕이 눈앞에 보인 건 마치 거대한 금고와 비슷한 느낌의 철문이었어. 철문에 달린 조그마한 단말기에 인증해야 열 수 있는 구조였지.


라붕이가 다가가자 사용자 인증을 하라는 안내가 들려왔어. 처음에 그렘린이 혹시나 해서 해킹을 시도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단말기는 ‘해당 모델의 사용자가 인증해야 합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했지.


결국, 라붕이는 단말기가 시키는 대로 단말기에 손과 단말기에 달린 조그마한 카메라에 눈을 마주쳤어. 그러자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은 철문의 잠금장치가 풀리고, 문이 열렸어. 


“혹시 들어갔다가 갇히는 건 아니겠죠?”


“걱정말게나 여차하면 구조하러 올 수 있게 해두었네.”


먼저 미나와 요안나가 들어갔고 나머지 일행이 따라 들어갔지. 다행히 바이오로이드가 문을 못 열뿐이지 안에 들어갈 수 있었어.


철문 안쪽에는 마치 리조트나 백화점의 정문처럼 유리문과 회전문이 있었고, 그 위에 조그맣게 은색 필기체로 로고가 쓰여 있었어.


𝒷𝑒𝓇𝑔𝒶𝓂𝑜𝓉 𝒶𝓅𝓅𝒶𝓇𝑒𝓁


“베르가모트 어패럴.”


라붕이가 혼잣말로 읊자, 옆에 있던 더치걸 팀장이 말했어.


“펙스 컨소시엄의 자회사야. 어패럴 말 그대로 의류 기업이지. 그것도 명품.”


회전문을 나오자 분수대가 있었고, 크리스털과 금으로 장신 된 샹들리에가 시선을 사로잡았어. 게다가 바닥은 대리석으로 되어있는지 우윳빛이 도는 복숭아색을 띠었어. 이 압도적인 광경에 모두 넋을 놓고있었지. 


“안타깝지만 이 아름다운 곳에 묶여 넋 놓고 있을 시간이 없네. 분명 시설 안내문 같은 게 있을걸세.”


라붕이는 요안나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다 호텔 체크인하는 카운터가 보여서 그쪽으로 갔어. 라붕이가 다가가자 카운터에 홀로그램이 나타나며 인사했어.


“여기 좀 안내해주실 수 있나요?”


그러자 라붕이 옆에 또 다른 안내원 모습을 한 홀로그램이 나타나 안내를 했어. 라붕이 일행은 홀로그램의 안내를 들으며 따라갔지.


“으음... 이보게, 여기는 외부의 지원 없이 스스로 에너지를 생산하고, 필요한 물품들을 생산할 수 있다고 방금 한 말이 사실인가?”


안내원은 친절했지만 라붕이 일행이 원하는 생산시설이나 발전소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고 고객에게 리조트 안내를 하듯 사치와 향락을 즐길 수 있는 시설들 위주로 안내했어. 결국 요안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봤지.


“네, 물론입니다. 저희 시설은 약 100에서 200명의 고객님께서 생존에 필요한 물품은 물론 외부가 안전해졌을 때를 대비해 여러분이 살아갈 곳을 재건할 수 있는 시설도 마련했습니다.”


“그럼 그 시설로 안내해주게.”


안내원은 요안나의 요청에 따라 움직였어. 안내원을 따라 관리자 외 출입금지라 쓰인 방에 들어갔어. 방은 작았지만, 방의 한쪽 벽은 통유리창으로 되었지. 유리창 바깥을 내려다보니 그곳엔 요안나가 원하던 것 그 이상이 있었어. 원자재를 가공해서 완제품까지 한 번에 만들 수 있는 플랜트였어.


“생각보다 조금 규모가 작네요.”


의류 기업답게 섬유, 석유화학과 관련된 플랜트부터 기계 및 철강 관련 플랜트 까지 있을 건 다 있었지만, 규모가 너무 작았어. 홀로그램 안내원이 말한 대로 백여 명, 많이 쳐봐야 이백 명 조금 넘는 사람들이 쓸 물자들을 생산할 수 있었지. 규모가 작으니 꿈에 그리던 거대한 선박이나 항공기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었어. 


모두가 아쉬워한 표정을 지으며 안타까워하자 요안나가 갑자기 호쾌하게 웃기 시작했어.


“여기에 들어가기 전과 지금을 비교하면 얼마나 우스운가. 물불 안 가리고 절박하던 우리의 모습은 어디 가고 막상 원하던 것을 거의 공짜로 얻으니까 아쉬움과 불평만 늘어놓는 게 우스워! 하하하!”


방을 나와서 긴 복도를 기준으로 양옆에 질서 있게 배치 된 생산라인 하나하나를 살펴봤어. 리조트에 있을 법한 휴양시설들보다 관리가 조금 안 됐지만, 그렘린의 말에 따르면 조금만 손보면 바로 사용 가능하다고 말했어.


펙스 컨소시엄, 라붕이가 살던 시대에서는 삼안보다 기술력이 떨어지고, 블랙리버보다 군사력이나 중공업 기술과 생산력이 떨어져 이빨 빠진 사자라는 평이 많았지. 하지만 펙스가 삼안과 블랙리버에 밀리지 않는 이유가 있었어.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의식주 그리고 삶을 즐겁게 해주는 사치와 향락까지 문어발 기업이라 불린 펙스는 이 모든 것들을 손에 거머쥐었어. 상위계층부터 하위계층까지 아우르는 압도적인 고객층들은 삼안이 꽉 잡고 있는 동아시아, 블랙리버의 본거지인 아메리카 대륙까지 퍼져있었지.


라붕이는 질서 있게 정렬된 생산라인들을 살펴보면서 마치 펙스라는 기업이 이 지하시설 하나에 들어간 것 같았어. 이 시설을 잘 이용하면 요안나 아일랜드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지.


“주지사님, 약 2년 전에 누군가가 관리자로 접근한 흔적이 있는데요?”


“뭐라고? 접근한 자는 누구지?”


“어... 그게 누가 접속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어요. 대신에 업데이트한 흔적이 조금 남아있어서 알 수 있었어요.”


“무엇을 수정했는지 알 수 있나?”


“으으... 그것도 시간이 좀 오래 걸릴 것 같아요.”


그렘린의 말을 들은 요안나는 그렘린이 했던 말을 곱씹어보기 시작했어.


“모두, 출구로!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잠시 생각하고 있던 요안나는 갑자기 라붕이의 뒷덜미를 잡아 어깨에 들춰 메고 다급하게 이곳을 나가야 한다고 외쳤어. 라붕이는 자신을 들춰 맨 그녀의 동공이 다른 때 보다 커졌고,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느꼈어.


요안나가 다급하게 외친 덕분인지 다른 팀장들은 그녀의 말대로 출구 쪽으로 달렸어. 어느새 지하 시설의 철문이 보였지. 철문은 처음 들어갔을 때 열어두고 간 상태 그대로였어. 요안나 일행은 철문에서 나가 어느 정도 떨어진 곳으로 가서야 멈췄어.


다들 전력 질주를 해서 그런지 숨을 헐떡이기만 하고 있었어. 라붕이와 다른 팀장들은 요안나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지.


“누군가가 이곳에 왔다 갔네.”


“펙스 컨소시엄은 자선단체가 아니야.”


더치걸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라붕이는 천천히 생각해봤어. 지하시설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건 오직 살아있는 인간. 이런 어마어마한 시설을 펙스의 사원증 같은 어떠한 인증 절차 없이 인간임을 입증하기만 하면 들어갈 수 있다. 뭔가 이상했어.


“더치걸 말이 맞네. 인류가 라붕이와 사령관 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아마도 이 시설에 접근한 자는...”


“레모네이드....”


미나는 라붕이에게 다가갔어.


“라붕씨 미안해. 내가 가자고 재촉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는데.”


미나는 갑자기 심각해져서 창백해진 얼굴로 라붕이에게 사과했어.


“펙스가 저 같은 인간을 노리기라도 하나요?”


가만 보면 이 시설은 인간을 유인하기 위한 덫 같았어. 다행히 그 덫은 지금 작동되지 않았지만. 도데체 어째서 인간을 유인하는지 라붕이는 의구심이 들었어.


“그동안 레모네이드가 사령관님과 접촉하려고 시도한 적도 있었고, 심지어 사령관님을 납치하려는 정황이 드러난 일도 있었어요. 


“아마 이것도 처음에 사령관님을 잡거나 접촉하려고 만든 덫일 거야. 내가 접속기록을 확인해봤는데 사령관님이 오르카호에서 지휘를 시작하고 2달 정도 지났을 때야.”


“내가 생산되었을 당시에 여기 적도 지방은 삼안의 세력권이 약해서 펙스가 쉽게 자리 잡을 수 있었어. 아마 동남아와 오세아니아 부근의 시설들은 모두 펙스꺼야.”


펙스는 고객층들에게 제품을 팔기만 하지 않았어. 전 세계 고객들의 사생활과 밀접한 정보들을 그 누구보다 잘 이용했지. 막대한 정보들로 다른 이들보다 몇 수 앞선 계책들을 세워 수많은 기업 그리고 정부와의 경쟁에 우위를 차지했어.


이 말을 들은 라붕이의 손은 땀으로 젖었어. 왜 인간과 접촉해서 무엇을 할 생각인지 상상이 안 갔어. 


“그들의 목적은 아마도 펙스의 회장들의 부활이네. 그 부활에 필요한 것이 휩노스 병에 면역인 인간의 신체가 목적이라고 들었네. 라붕 주임 미안하네. 내가, 내 탐욕스런 욕심만 아니었다면, 좀 더 신중했으면 이런일이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내 잘못이네.”


큰 기대를 품고 발견한 보물이 사실 라붕이를 앞으로 위협할 덫이었어. 다시 탐색팀 대원들이 주둔한 캠프에 돌아왔을 때 다들 어두운 표정이었지.


“요안나 주지사님, 일을 너무 크게 벌이신 것 아닙니까? 사령관님께서 연락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둔지에 도착했을 때 요안나 아일랜드 방위군 소속 레드후드가 맞이했어. 요안나와 탐색팀 전원 레드후드가 가져온 수송헬기(시누크)를 타고 복귀했어.


“욕심에 눈이 멀어 잃은 것이 너무 많군.”


헬기 좌석에 앉은 요안나는 주먹을 꽉 쥐었어. 그녀의 얼굴엔 후회와 걱정이 가득했지.


“제가 알고 있는 레모네이드라면 분명 중상모략을 통해 저를 차지하겠죠. 저와 사령관의 사이를 이간질할게 뻔하구요. 아니, 이미 그러고 있겠죠. 관공서에 들어가면 레모네이드가 다녀갔다고 빨리 말하죠. 그리고 해명만 하고 있을 순 없잖아요?”


“요안나님, 저는 어차피 미끼를 문 거 그걸 그냥 버리고 싶지 않아요. 우리 관공서로 돌아가서 사령관님을 잘 구슬려보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