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카 호는 꿈을 꾼다 1편 https://arca.live/b/lastorigin/9679372


※해당 작품은 픽션입니다. 이 작품의 설정은 공식 설정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해프닝이 있던 그 날, 리리스는 제 일을 페로에게 맡기고 닥터에게 찾아갔다.


평상시에 닥터와 상담받으려면 적어도 며칠 전에 약속을 잡아야 하지만, 바이오로이드들 자신의 신체나 정신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면 닥터는 사전약속은 무시하고 자신에게 긴급메시지로 보낸 후 그 날 바로 편한 시간에 오라고 했다.


닥터가 기다리는 연구실 앞에 선 리리스가 문 옆에 있는 통화 모양의 벨을 눌렀다.


띵-동



"리리스에요 닥터 양. 들어가도 되나요?"


"응, 언니. 들어와도 돼."



리리스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곧바로 닥터의 허락이 떨어졌고 슬라이드 형식의 잠금 문이 스륵하고 열렸다.


방 안을 보고 리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녀가 자주 봐온 닥터의 연구실은 멸망 전의 과학자들이 사용하던 장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런 모습은 어디론가 가고 소규모의 식물원을 옮겨 놓은 듯 한 느낌이 들었다.


방에 채워진 향긋한 라벤더 향과 활짝 핀 상태로 자신을 뽐내는 형형색색의 꽃들은 악몽에 시달리던 리리스의 마음을 조금이지만 치유해 주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가며 꽃들을 구경하던 리리스를 향해 닥터가 다가왔다.



"어서 와 리리스 언니. 미안하지만 조금만 앉아서 기다려줄래? 해야 하는 일이 덜 끝나서..."



닥터가 가리킨 방의 중앙에는 적당한 크기의 원형 탁자와 나무 의자 두 개가 자리하고 있었다.


페로에게 일을 맡기고 왔으니 오늘 하루는 여유롭다고 생각한 리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 앉았다.



"그러죠. 근데 이 식물들은 뭔가요?"


"세레스티아 언니한테 부탁했는데 그냥 놔뒀는데도 저렇게 자라더라. 언니 말로는 열두 시간 뒤에 다시 씨앗으로 돌아간다니까 굳이 신경 안 써도 돼."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한 닥터가 수술대처럼 생긴 기계 앞에 서서 열심히 조작하기 시작했다.


닥터가 하는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 리리스는 의자에 편하게 몸을 맡기자 졸음이 쏟아져 오는 것을 느꼈다.


10분 뒤, 닥터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자 그녀는 편안한 안색으로 의자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그런 리리스를 본 닥터가 장난기 넘치는 웃음을 짓더니 살금살금 다가가 리리스의 뺨을 톡 건드렸다.



"일어나 언니. 오빠가 왔어."


"에? 으갹! 죄, 죄송해요 주인님! 제가 추태를 보였어...요?"



벌떡!


흐트러진 모습을 바로 정돈하고 자세를 바로잡는 리리스의 모습을 보자 닥터가 큭 하고 웃음을 참았다.


멍하니 있다가 주위를 둘러본 리리스는 닥터가 한 말이 장난임을 깨닫고 '후'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주인님 앞에서만큼은 서투른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리리스의 마음을 엿 볼 수 있었다.



"으, 나빴어요 닥터 양. 주인님이 왔다는 거로 장난을 치시다니."


"후후 이런 거짓말에 속을 줄은 몰랐지~"



손으로 브이자를 그린 닥터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와 앉기 전 간단히 스트레칭을 했다.


손깍지를 끼고 기지개를 켰다가, 몸을 이리저리 틀고 만세 자세를 취한 닥터는 개운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넘어갈 게 언니. 언니도 악몽을 꾸기 시작한 게 닷새 전에 있던 안개의 섬 탐색 작전 이후부터야?"



닥터가 자신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확하게 집어내서 리리스는 순간 할 말을 잊었다.


그런데 언니'도' 라니 설마 자신과 같은 고민으로 먼저 온 이가 있었나?


그렇게 생각한 리리스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저 말고도 더 있나요? 악몽을 꾸는 사람이?"


"언니가 말한 악몽까지는 아니었어. 다들 그저 불쾌한 꿈이라고들 했으니까"



며칠간의 기억을 떠올린 닥터가 후 하고 고개를 뒤로 젖히고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간단하게 얘기해 주었다.


작전이 끝난 이후 닷새 동안, 불쾌한 꿈을 계속 꾸고 있다고 자신을 찾아온 바이오로이드들이 한두 명도 아니고 무려 다섯 명이나 되었다.


처음에는 잦은 임무로 많이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지만 비슷한 내용으로 세 번째에 이어 네 번째, 다섯 번째 상담 요청을 받자 무언가 잘못됨을 느끼고 한 명씩 시간을 들여 상담을 시작했다.


그렇게 다섯 명과의 상담을 끝낸 후 닥터는 피해자들의 공통점을 세세하게 추려냈다.


1. 꿈의 증세가 나타난 다섯 명은 모두 '안개의 섬 탐색 작전'에 참여했다.


2. 선봉 부대에 배치되어 있었다.


3. 코드명:'나이트 매어'라 이름 붙인 식별 불가능 개체와 전투를 벌였다.


세 번째 항목을 들은 순간 리리스는 자신이 며칠 전에 마주친 괴생물체와 그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다. 그리고 설마 하는 표정으로 닥터를 바라보았다.


닥터의 말대로라면 먼저 와서 상담받은 다섯 명은...



"레오나 언니, 발키리 언니, 리앤 언니, 유미 언니와 티아멧."



자신과 같이 나이트 매어를 상대했던 전투원들이었다.


-


-


닥터와의 상담을 마치고 나서는 길.


복도에 걸린 시계를 흘끗 본 리리스는 오후 6시에 시침이 있는 것에 시간이 참 빠르게 흘러갔다는걸 느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면서 리리스는 닥터가 해준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오늘 밤에 시작할 거야. 그러니 리리스 언니도 거기에서 자면 돼.'


'세레스티아 언니가 편안하게 잘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두겠다 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임시방편이긴 하지만 해결책을 찾을 때까지는 그 방에서 잤으면 해.'



단순한 이유로 다같이 모여 자는 건 아닐 텐데 자신이 모를 이유라도 있는걸까?


자는 것 만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기에 닥터가 합숙을 요구한 걸까?


아니 애초에 닥터가 얘기해준 모든 게 진실이 맞는 건가?


그렇게 고민하면서 왼쪽 코너로 도는 순간 리리스는 다가오는 무언가랑 머리를 부딪혔다.


평상시라면 발소리를 듣고 누군가 오고 있다는 걸 알아채겠지만, 온 정신을 사고에 쏟고 있던 리리스가 피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쿵!



"아야!"


"억!"



세게 부딪히진 않았지만, 머리를 울리는 충격에 사고회로가 잠시 중단됐고 무슨 일인지 리리스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눈앞에서 사령관이 이마를 쓰다듬고 있었다.


자신이 한눈팔고 있다가 사령관과 부딪혔다 생각한 리리스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



"주, 주인님 죄송해요! 딴생각을 하다가 그만..."


"크게 부딪힌 것도 아니니까, 괜찮아 하하."



별일 아니라는 듯 사령관은 양손으로 괜찮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 말을 들은 리리스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멸망 전의 인류들과는 다른 상냥하신 인간님.


모든 바이오로이드에게 존경받는 자랑스러운 주인님.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지켜내고 싶은 나의 주인님.


그런 리리스의 시선을 느낀 사령관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몇 초간 서로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상태서 먼저 침묵을 깬 이는 사령관이었다. 


"...난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 리리스.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보자."


"...예 주인님. 그럼 내일 봬요."



대화를 마친 사령관은 리리스가 온 방향으로 걸어갔다.


사령관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아쉬운 마음으로 한숨을 내쉰 리리스가 제 방에 들어가려 했으나 순간 위화감을 느꼈다.


오후 5시에 모든 일과가 끝나기에 주인님도 항상 했던 일을 마무리 짓고 개인실로 가시는데 지금 가시는 방향은...

 


"주인님의 개인실과 반대 방향 아닌가?"



게다가 지금 시간에 일이 있다고? 서류 없이 맨몸으로 가시면서?


리리스는 사령관이 걸어간 방향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내 컴패니언 막사로 들어갔다.


곧바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리리스는 작전지역이 아닌 오르카에서 다른 부대의 인원들과 합숙하는 것은 처음이라 살짝 들뜬 마음으로 오늘 밤에 쓸 물품을 챙기기 시작했다.



-------------------------------



항상 읽어주고 격려해주는 라붕이들에게 감사함.


본편에 없는 나이트매어란 개체를 바이오로이드로 집어넣어서 써볼까 하다가 개연성이 승천할까봐


식별불가 개체로 바꿈.


수정)링크가 정상작동하지 않아서 수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