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점심 쯤, 오르카 호... 가 아닌 대륙의 어딘가.








"다녀왔습니다."



 현관문의 방울이 딸랑이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신발을 대충 벗어던지고 집에 들어가니 엄마와 함께 누군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모가 오셨나? 아니면 오랜만에 아빠가 찾아왔나?



"우리 귀여운 조카 왔니? 오랜만이네."


"흥, 귀여운 네 조카가 아니라 귀여운 내 아들이거든? 마틴, 어서와. 금방 점심밥 다 되니까 세수만 간단히 하고 나오렴~"


"응, 엄마."



 이모였구나.


 곧바로 방에 책가방을 던져놓고 세수를 하고 거실에 나와보니 금새 상차림이 완성되어있었다.


 참기름을 보통의 레시피보다 과하게 넣은 뒤 야채와 감자, 베이컨을 넣고 센불에서 볶은 뒤 계란후라이를 올린 볶음밥.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이다.


 친구들을 집에 초대했을 때 친구들은 다들 너무 느끼하다고 말했지만 그렇게 느끼한 점이 맛있는 포인트인데. 전부 맛알못들이다.


 이윽고 접시에 담긴 볶음밥을 보고나니 더 이상 참기 힘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계란 노른자를 숟가락으로 터뜨린 뒤 흰자를 잘개 쪼개서 밥과 섞으면 말 그대로 황금빛으로 빛나는 밥알들을 볼 수 있다.


그대로 한 숟갈 떠서 입에 넣고 씹으면...



"쾌락!"



 무심코 감상을 입 밖으로 뱉고 나니 훈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엄마와 이모가 눈에 들어왔다.



"헤헤, 성장기에는 밥을 잘 먹어야지 쑥쑥 크지. 먹는 걸 보니 우리 아들은 키가 엄청 크겠어."


"정말이지, 이모랑 못 본지 며칠이나 됐다고. 저번보다 더 커진거 같은데?"


"그러니까 말이야. 우리 아들은 엄마보다 두 배는 커질거라고."


"아니, 언니. 아무리 언니 키가 작아도 그 정도는 무리에요."


"뭐? 갑자기 왜 시비야? 우리 서로 역린은 안 건드리기로 하지 않았어?"


"아니, 나도 엄마의 두배씩이나 커지기는 싫은데.."



 그러니 엄마는 배신당했어! 라는 표정으로 이 쪽을 쳐다본다.



"그래요, 아들을 3미터에 가까운 괴인으로 만들고 싶은게 아니라면 조용히 밥이나 드세요, 언니."


"비유법이었어! 비유법이었다고!"



 사실 따지자면 비유법이 아니라 과장법이라 해야 할 것 같지만, 엄마의 체면을 위해서 여기선 모른척 해주자.



"엄마 그거 비유법이 아니라 과장법이야."


"그그그그 그래! 말이 헛나온거야! 당연히 과장법이지! 내가 그걸 헷깔릴 리가 없잖아?"



 실수로 말해버렸다. 뭐 상관 없겠지. 엄마는 뭐 항상 금방 까먹고 회복하는 편이니까.



"아, 그래. 아들 오늘이 기말고사 마지막 날이었지? 시험은 잘 봤어?"



 순간적으로 표정이 딱딱해졌다. 이러면 안되는데.



"응, 그럭저럭 잘 봤어."



 그리 말해 봤지만 아니나 다를까, 두 분 다 믿는 표정은 아니다.



"언니, 애 아직 열살이에요. 한창 놀 때잖아요. 왜 벌써부터 성적을 신경쓰고 그러실까."


"하지만... 미리미리 해둬야 나중에 뒤쳐지지 않는다고..."



 이모 나이스! 역시 이모는 내 편이야.


 이모가 어그로를 끌어주는 사이에 빠르게 밥을 전부 먹어치우고 밖으로 놀러 나간다. 이것이 나의 퍼펙트 플랜이다.



"그러니까, 애초에 공부가 그렇게 꼭 중요한 것도 아니고, 마틴은 공부에 별 흥미를 못 느끼는 것 처럼 보이는데. 꼭 그렇게 시켜야 할 필요가... 아니 마틴, 어딜 그렇게 급하게 나가니?"



"친구랑 약속이 있어서요!"


"아들! 아직 얘기 안 끝났는데..!"


"우리 조카, 언니 말은 어차피 쓸데 없는 걸 테니까 무시하고,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오렴?"


"네 이모, 엄마! 다녀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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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라에게 문자를 넣은 뒤 기다리기를 약 삼십 분, 저 멀리서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여자아이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미안~ 마틴! 조금 늦었지?"


"야, 필라. 왜 이렇게 늦었어?"


"엄마가 나보고 설거지 좀 도우래잖아. 진짜 손에 물 묻는거 짜증나는데.."


"너네 집은 엄마가 너한테 설거지도 시켜? 우리 엄마는 나랑 누나한테 한 번도 설거지 시킨적 없는데."


"와, 부럽다.. 우리 엄마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우리 엄마는 미리미리 습관을 들여놔야 한다고 꼬박꼬박 설거지 시킨단 말야."


"그럼 내일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저녁 먹을래? 그럼 설거지 안해도 되잖아."


"그럴까? 오늘 엄마한테 허락 받으면 내일 학교에서 말해줄게!"


"좋아. 그럼 오늘은 어디로 갈지 정하자."




 우리 둘은 천천히 마을을 걸어다니며 오늘의 '탐험놀이'의 대상이 될 장소를 물색했다.




"마을 동쪽에 있는 폐가는 어때, 필라?"


"바보야, 거기는 폐가가 아니야. 멀쩡히 사람이 살고 있다고. 그냥 키르케 아주머니의 집이 좀 특이하게 생긴 것 뿐이야."


"그럼 하수도는 어때? 혼자서 거기에 들어가면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던데."


"거긴 냄새가 나잖아! 물도 묻고! 그런 데를 어떻게 가!"



 여러 군데를 말해 봤지만 바이오로이드 설비 공장에는 시끄럽다고 가기 싫대고 광산에 숨어들어보자고 하니 거긴 몸이 더러워져서 싫단다.



"누가 고양이 아니랄까봐.."


"고양이 아니거든! 고양이 귀도 없고 꼬리도 없다고!"



 되도 않는 잡 소리는 한 귀로 흘리고, 어떤 장소가 좋을지 곰곰히 생각해봤다.


 흠.. 혹시 거기라면..



"필라, 저긴 어때?"


"저기라니? 지금 어딜 가리키고 있는거야?"



 이 마을은 외곽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숲 바깥쪽엔 높이가 족히 10미터는 될 법한 거대한 벽이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그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벽에 한번 가보자. 저 밖은 어떻게 생겼을 지 궁금하지 않아?"


"벽? 으으으음... 저긴 가면 안되지 않아?"


"혹시 무서운거야? 필라는 쫄보. 쫄보 쫄보 쫄보~ 완전 심장도 고양이 심장이네."


"누가 쫄보야! 그래, 가자고! 가!"


"그럴줄 알았어."


"그리고 난 고양이도 아니야."



 그렇게 우리 둘은 천천히 마을 서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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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숲은 벌레가 많아서 싫어."



 숲을 지나는 동안, 필라는 옆에서 시종일관 투덜거렸다. 발이 아프다, 나무가 많아서 햇빛이 안들어 어둡다, 벌레가 많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곤 표정은 그리 싫어보이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고양이라서 야생이랑 궁합이 잘 맞는 걸 수도 있다.



"그래도 나름 재밌지 않아? 현장학습 때도 숲을 다녀오긴 했지만, 거긴 예쁘게 포장된 길이랑 공원이었는데, 지금 우리는 정말로 사람의 손길이 안 닿은 숲에 있는 거잖아. 게다가 이렇게 깊게 들어온 사람은 친구들 중엔 우리가 처음일걸?"


"그러게, 그리고 확실히 숲 냄새만큼은 좋아. 그러니까 이번엔 봐줄게."



 필라는 숨을 몇번에 걸쳐 깊게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마치 숲의 냄새를 음미하는 것처럼. 나 역시 숲 내음이 좋다고 느끼지만 후각이 나보다 몇배는 예민한 만큼 현재 필라가 느끼는 만족감은 나보다 훨씬 더할 것이다. 저런 모습을 보고 고양이라고 놀리지 않는걸 참는 것도 힘들지만, 어찌됐건 내가 더 어른스러운 만큼 참아야겠지.



"진짜 누가 고양이 아니랄까봐, 그렇게 숲 냄새가 좋아?"



 이내 필라가 나를 무서운 표정으로 마구 때렸다. 필라의 손은 조금, 아니. 상당히 많이 아프기에 즉시 사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저 밖에 나가면 철충을 볼 수 있는걸까?"


"마틴, 역사 수업에 좀더 신경 쓰라구. 지구 상에 철충이 사라진 지 15년이나 흘렀어."



 과연, 수업을 딱히 듣는 건 아니지만 마리 선생님이 그런 식으로 말했구나. 그럴 만 하지. 가끔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시지만, 기본적으로 착한 분이시니 아이들에게 일부러 굳이 알 필요 없는 진실을 알려줘서 겁을 주기 싫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진실은 다르다. 과연 나 마틴은 필라의 현명하고 자비로운 친구로써 알려주지 않을 수 없었다.



"필라, 사실은 거기엔 비밀이 있어. 역사 시간에는 철충이 전멸했다고 말했겠지만, 진실은 달라. 지구상의 철충 생산기지는 전부 파괴한 게 맞지만, 사실 철충은 완전히 전멸하지 않았어. 정확히는 '거의 다' 전멸시켰다는 게 맞아. 여전히 저 벽 밖에서는 여러 부대가 철충들을 지속적으로 추적하며 소탕하고 있는 중이고, 이 마을에도 1년에 많으면 10번 정도, 철충들의 습격이 조금씩 이어지고 있어. 저 벽은 그것 때문에 있는 거라더라."


"뭐? 누가 그래?"


"우리 엄마가 그렇댔어."



 필라는 예상치 못한 사실에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그리고 조금은 겁에 질린 것 같았다. 어쩌면 학교에서 다 같이 갔던 박물관에 있던 철충들의 모형을 떠올리고 있는 걸 지도 모른다. 가장 약하다는 나이트칙 철충조차 우리보다 크기가 몇 배는 컸다. 심지어 연결체 모형들은 너무 커서 그걸 쳐다보고 있다보면 목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 그럼 우리 이만 돌아가야 되는거 아냐?"


"아니, 어차피 1년에 많아야 10번 정도밖에 철충들이 안 온다니까. 심지어 작년엔 철충이 한번도 안왔다고 하니까 사실상 위험할 건 없어."


"그래도..."



 이 답답한 새가슴을 보고 있자니 괜히 말해줬나 싶기도 하다. 아니, 고양이가슴인가?



"됐어 이 쫄보야, 그럼 넌 돌아가. 나 혼자서 좋은 구경 다~ 하고 올테니까."


"누가 쫄보야! 철충들이 무서운게 아니라, 저길 갔다가 걸리면 혼날 거 같으니까 그러지!"


"그걸 보고 쫄보라고 하는거야. 쫄보~ 쫄보~ 필라는 이제 보니 고양이가 아니라 새가슴이였네. 가서 스노위랑 노는게 어때? 같은 새라서 마음이 잘 맞을 거 같은데."



 눈물이 맺힌 표정으로 필라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곧 이어 "나 쫄보 아니야! 좋아, 간다고 가!" 라며 역정을 냈다.



"그래야지. 탐험놀이를 하는데 엄마가 혼내는 걸 걱정해서야 탐험대원 실격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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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우리는 숲을 벗어났다. 그러자 눈 앞에 오랫동안 손질이 안되어 담쟁이 덩쿨이 줄기줄기 뻗어있는 거대한 벽이 드러났다.



"드디어 도착했네. 가까이서 보니까 훨씬 높잖아, 이거."


"그러게, 그런데 여길 어떻게 올라갈 생각이야?"


"거기까진 생각 안 하고 왔는데."


"바보야! 너가 오자고 해놓고 그걸 생각을 안하면 어쩌자는거야!"


"난 사다리라도 있을 줄 알았지. 대체 어른들은 여길 어떻게 지나다니는거야?"


"글쎄."



우리 둘은 한 동안 저 벽을 기어오를 방법을 생각해 봤지만 뚜렷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저 담쟁이 덩쿨을 붙잡고 올라가기엔 덩쿨이 너무 약하다.


 벽을 따라서 한쪽 방향으로 30분 정도 걸어 봤지만 그래도 계단이나 사다리가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필라가 말을 걸었다.



"저기, 마틴? 저 덩굴들, 좀 튼튼해보이지 않아?"



 그 쪽을 보니 확실히 어린 아이 둘이 매달려도 벽에서 분리되지 않을 것 처럼 보이는 넝쿨이 있었다.


 즉시 우리 둘은 확인 차 둘이서 넝쿨에 매달려 이리저리 몸을 흔들어 보았는데, 보아하니 꽤나 안전해 보였다.



"좋아. 이걸 타고 올라가면 되겠다. 그런데 필라, 문제가 하나 있어."


"응? 뭐가?"


"나는 이걸 타고 올라가기엔 힘이 너무 약해."


"그럼 못 올라 가는거야?"


"하지만 다 방법이 있지."



 그리고 이어서 궁금한 표정의 필라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너가 날 업고 올라가면 돼! 넌 힘이 세잖아."



 필라의 어이없는 표정이 내 마음을 아프게 찔러오지만 여기선 더 뻔뻔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물러서선 죽도 밥도 안되는 것이다.



"잘 생각해봐, 필라. 내가 저번에 너가 나무 위에서 떨어지는 걸 받아서 널 구해준 적도 있잖아."


"너가 매지컬 모모 공연 티켓이 바람에 날아가 나무에 걸렸다고 나보고 가져와달라고만 안 했어도 내가 나무에 올라갈 일 자체가 없었겠지."


"그건 공연을 같이 데리고 가주는 걸 대가로 너가 가져와주겠다고 한 거잖아. 같이 재밌게 봐놓고선 이러기야? 게다가 사실 너 나무에 올라가는거 좋아하잖아."


"어쨌거나 너 너무 무거워서 못 업어줘."


"필라, 잘 생각해. 여기까지 와 놓고 그냥 돌아갈 생각은 아니지?"


"흐응, 너를 내버려두고 나 혼자서 올라가서 벽 밖에 뭐가 있는지 구경하고 와도 난 상관 없는데?"


"혼자서 구경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 따지고 보면 내가 오자고 안 했으면 여기에 올 생각도 못했을 거면서."



 말은 당당하게 하고 있지만 속에선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것 같다.


 저러다 정말 혼자서 휙 올라가버리는 건 아니겠지?



"모모스티커 줄게. 5장."



 무반응? 그럼 이건 어떠냐.



"10장"



 그제서야 샐쭉 웃더니 좋다고 빨리 이리 오라고 한다. 쉬운 필라, 그렇게 순진해 빠져서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남을까. 사실 내 방 비밀 서랍엔 모모스티커가 산 처럼 쌓여있건만.



"꽉 잡아, 마틴. 떨어져도 안 도와줄거야."


"걱정 말고 올라가기나 해."



 등 뒤에 업혀서 다리와 팔을 필라의 몸통에 감아 단단히 고정하니 필라가 넝쿨을 타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상한 데 만지면 가만 안 둘줄 알아."


"만질 데도 없어, 이 껌딱지야, 야! 흔들지마! 미안해!"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필라는 능숙하고 빠르게 벽을 기어올라갔다.


 이렇게까지 필라와 밀착한 건 처음인데, 필라는 의외로 되게 좋은 향기가 나는구나. 뭔가 우유 냄새같은... 응?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마틴, 숨이 거칠어. 혹시 무서운거야?"


"하나도 안 무섭거든? 이정도로 무서워 하면 탐험대원 실격이야."


"히히. 무서워 보이는데? 걱정 할 필요 없어. 사실 이 정도는 별로 힘들지도 않으니까. 절대로 떨어질 일은 없다구."


"...그것 참 안심되네."



 다행히 필라는 그저 내가 무서움을 타는 줄 알았나 보다. 사실 겁쟁이라고 생각되는 것도 마음에 들진 않지만, 지금은 차라리 이 쪽이 나을 것 같으니 뭐. 그나저나 정말로 필라는 피부가 부드럽네.



"마틴, 이제 금방 다 올라가니까 조금만 참아?"


"그래, 필라.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걱정 마."



 이윽고 우리 둘은 벽을 끝까지 오르는 데 성공했다. 벽을 오르기 전에 볼 땐 알 수 없었지만, 벽의 두께가 상당했기에, 발 디딜 곳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넓다고 해야 할까? 드러 누워서 10 바퀴는 굴러도 반대편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드디어 벽 밖을 볼 수 있게 됐는데... 뭐랄까."


"생각보다 별 거 없네."


"내 말이."



 벽 밖의 풍경에서 뭘 기대한 건진 모르겠으나, 보이는 건 오로지 끝없이 펼쳐진 숲 밖에 없었다. 필라와 나는 바닥에 앉아 천천히 그 풍경을 관찰했다.



"마틴, 마틴! 저기 봐! 뭐가 있어!"



필라가 가리킨 곳을 유심히 보니 어떤 조그만 막사가 있었다.



"아마 스틸라인 정찰부대 초소일 거야. 대체로 철충들의 습격은 위성장비와 레이더로 조기 식별이 가능하지만, 혹시 모를 일을 위해 직접적으로 정찰 역시 한다고 들었어."


"흐응, 그것도 마틴네 엄마가 가르쳐준거야?"


"맞아."


"마틴은 그런데 관심이 많나 보구나."


"그렇지. 난 군인이 될거니까. 쫄병이 아니라 엄마 같은 훌륭한 지휘관이 될거야."





15년 전 지구를 탈환하는 데 성공한 이후 엄마는 내 누나를 임신하고선 지휘관의 자리에서 내려오셨다고 한다. 앞으로는 지구를 수복할 일만 남았는데, 거기선 엄마의 부대는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고 하셨다. 지구 위에 더 이상 '멸망'은 존재할 필요는 없고, 존재해서도 안된다고...


그러나 이전에 한번 전성기 때 엄마의 전투 장면을 동영상으로 본 이후로 나는 무지막지한 폭격으로 철충들을 쓸어 버리는 그 장면에 마음을 뺏겨 버렸다. 자신감과 오만함이 가득찬 표정으로 폭격 편대를 지휘하는 엄마는 무척이나 아름답고, 또 멋져 보였다. 엄마를 닮고 싶어진 건 그 이후부터였다.




"하지만 마틴, 넌 비실비실해서 군인으로 어울리진 않는데? 키도 나보다 작잖아?"


"아직 성장기거든? 앞으로 엄청 커질거라고 이모도 나한테 말했어."


"음, 한번 열심히 해봐."




 그러더니 벽 끄트머리에 앉아서 필라는 다리를 달랑거리며 흔든다.


 자세히 보니 나를 업고 벽을 기어오르느라 미세하게 맺힌 땀방울이 목덜미를 따라 흘러 내리고 있었다.


 필라가 바람에 땀을 말리고 있는걸 조용히 지켜보는데 문득 아까 맡았던 우유 향이 다시 떠오르며 왠지 모르게 얼굴이 화끈해졌다.


 결국 나는 조금이라도 의식을 그 방향에서 돌리기 위해 말을 걸 수 밖에 없었다.




"필라 너는 꿈이 뭐야?"


"응? 나? 특별히 생각해 본 적 없는데."


"한번 지금 생각해봐."




 필라는 조용히 눈을 감고 한참을 고민했다.


 나는 필라 옆에 나란히 앉아서 그녀가 고민하는 것을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필라는 한참을 더 생각하더니... 아니 얘는 언제까지 고민하려는거야?




"됐어. 물어본 내가 바보지."


"아, 조금만 기다려봐. 뭐가 좋을 지 생각중이란 말이야."



 이윽고 긴 시간 끝에 입을 열었다.




"신부. 신부가 되고싶어."


"뭐? 결혼 할 때 신랑, 신부 할때 그 신부?"


"응. 그 신부."


"바보야. 신부는 직업이 아니잖아. 신랑, 신부, 이런건 꿈이라고 할 수 없어."


"그럼 아내로 하면 되지."


"아내도 마찬가지야."


"그래...? 그럼 꿈은 딱히 없는 걸로 할래."



 장난으로 고양이라고 놀리곤 하지만 이런 걸 보면 정말 머릿 속에 사람의 뇌가 아니라 고양이의 뇌가 든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와! 마틴! 저기봐!"





 이번엔 또 뭘 발견한 거려나, 하고 보니 하늘을 온통 주황빛으로 밝게 빛내며 해가 저물고 있었다."


 그건 정말이지 최근에 본 것 중 가장 멋진 것이었다.



"와아..."


"우와아..."



 우리 둘은 나란히 앉아 멋진 노을을 한동안 바라 보았다.


 노을은 해가 가라앉을 수록 주황빛에서 붉은 빛에 가까운 색이 되어간다.


 갑자기, 말 그대로 뜬금없이 필라가 내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더니 나에게 말을 걸었다.



"마틴, 지금 노을색 말이야. 딱 마틴 머리카락 색 같아. 빨간 색 완전 예뻐!"



 필라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리 말했다.


 하지만 필라의 순백색 머리카락은 노을빛에 물들기 쉬운 탓일까. 그녀의 머리카락 색 역시 만만찮게 붉어 보였다.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말했다.



"그러게, 진짜 예쁘다."



 필라는 '그치 그치?' 하며 호들갑을 떨었는데 솔직히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지금 노을빛이 붉어서 참 다행이다. 아마 필라는 내 붉어진 얼굴을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변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갑자기 웃으며 말을 하던 필라가 별안간 표정을 굳혔다



"잠깐, 마틴. 잠깐 조용히 하고 있어봐."



 그녀는 잠시 집중하는 모양새를 갖추더니 자리를 털고 조심스레 일어나며 나에게 소근댔다.



"마틴, 누가 오고있어. 빨리 내려가야 해."


"뭐? 누군데?"


"나도 몰라. 빨리!"



 우리 둘은 타고 올라왔던 덩쿨을 찾아서 또 다시 내가 업히는 모양새를 갖춘 뒤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즈음, 내게도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상배임. 솔직히 상배임도 동초 싫지 않슴까? 그냥 초소근무 서도 될 걸 가지고 뭐하러 벽 위까지 동초를 돌라는지 모르겠슴다."


"브라우니, 근무중 잡담은 근무태세 위반이야. 그게 아니더라도 너가 옆에서 재잘대는걸 듣고 있으면 귀가 아플 지경이니까 좀 조용히 해."



 이런 아무도 없는 벽 위에까지 순찰을 도는거야? 정말 말도 안돼.



"필라, 너무 급하게 내려가지 마. 천천히.."


"나도 알고 있어, 마틴."


"천천히 내려가라니까? 그렇게 급하게 내려가지 않아도 돼!"


"하지만 걸리면 분명 혼날거란 말이야!"


"필라, 그게 문제가 아니라..."



 라고 말 하는 순간, 필라가 조금 얇은 덩굴을 붙잡는게 보였다. 그리고 아차 하는 사이에 덩쿨은 끊어져버렸다.



"어? 으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아악!"



 마지막으로 보이는 건 붉은 것을 넘어서 보라색으로 변한 하늘의 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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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나를 반긴다. 여긴 어디지?



"아들! 정신이 들어? 아들! 대답좀 해봐!"



 엄마..?



"흐허어엉... 아들... 제발 대답 좀 해봐... 엄마 여기있어..."


"엄...마...?"



 여긴... 병원인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보니 그런 것 같았다. 침대 옆에는 엄마와 누나, 그리고 오랜만에 보는 아빠의 모습도 있었다.



"죄... 죄송해요... 흐윽... 제성해여...."



 그러자 아빠가 듬직한 품으로 나를 끌어 안으며 대답해주셨다.



"괜찮단다. 멀쩡히 살아 돌아와줘서 정말 고맙구나, 마틴."


"야! 마틴! 엄마랑 아빠랑 진짜... 진짜 얼마나 걱정했는 지 알아?! 이 바보 멍청아!"



 한동안 우리는 계속해서 우느라 서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죄송하다고, 다시는 위험한 짓은 안 하겠다고. 말씀을... 드려야 하는데.



"아, 필라는 어떻게 됐어요?"



 그 말에 대한 대답은 부모님도, 누나도 아닌 새로운 사람이 해줬다.



"너가 필라의 등에 업혀있던 덕에 필라는 너의 위로 떨어졌고, 크게 다치지 않았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갈색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처음 보는 누나였다.



"안녕 마틴? 난 닥터 누나야~"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간단한 설명을 해줬다.


 나와 필라가 떨어질 때 천운으로 돌이 없는 고른 흙바닥에 떨어졌고, 필라가 내 옆에서 울고 있는 것을 경계 근무 중이던 스틸라인 병사들이 발견하고 신고해 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다고 한다. 필라는 간단한 검사만 마치고 페로 아주머니가 데려가셨고, 나는 그로부터 3일만에 깨어났다고 한다.



"우선은 간단한 검사를 좀 하고, 별 문제 없으면 하루 정도 푹 쉬게 다음에 퇴원시키면 될 것 같아, 오빠."


"정말 고마워 닥터. 예전이나 지금이나 늘 도움만 받는네."


"헤헤, 별거 아냐! 그래도 이정도 규모의 수술은 나도 정말 오랜만이어서 조금 지쳤는데, 이번 주말. 기대해도 되겠지 오빠?"


"흠흠. 저기, 지금 애들 있는 앞에서 무슨 소리를.."


"그럼 이따 봐, 오빠! 검사 준비 되면 호출할게!"


"어... 음... 메이? 매기? 둘 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아줄래? 이번엔 닥터의 공이 큰 것도 사실이고.. 잠깐! 머리채만은! 머리채만은 잡지 말아줘!!"



 저런 모습을 볼 때마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정말 아빠가 인류 최후의 희망, 철충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역사상 전무후무한 영웅이 맞는지 조금은 의심스럽다. 아무리 봐도 그냥 에로변태 아저씨 같은데...



 아빠의 바보짓을 보니 왠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에 뭉쳐있던 죄책감이 덜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엄마와 누나도 어느새 뚝뚝 흘려대던 눈물을 그치고 아빠를 줘패고 있다. 초상집이었던 분위기가 5일장 시장바닥으로 바뀌는 건 한 순간이었다.


 설마 일부러 이렇게 되도록 의도한 건 아니겠지? 아빠가 그렇게 똑똑하고 배려심 넘치는 사람일 리가 없어.


 그건 필라가 고양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 만큼이나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뭐....어쨌거나 별로 혼나지 않아서 다행이야.
















 다음엔 좀 더 준비를 열심히 한 후에 또 올라가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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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보단 딸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