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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평탄해서 이래도 되는 걸까 싶었던 나의 인생에 굴곡이 생기는 일은 결코 어렵지 않았다.


나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었던 타인의 몇 가지 잘못된 선택은 나의 버팀목이었던 가정을 흔들었다. 달리 갈 곳이 없었던 나는 그저 무너져 내리는 그 곳에서 애매하게 살아 남았을 뿐이다.


다행히 나는 내가 해야만 했던 일을 하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었고, 그렇기에 도전했지만 애석하게도 비정한 현실이 나의 이상을 배반했다. 불확신과 함께 찾아 간 꿈은 아주 긴 악몽이었다.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내 꿈을 깨 버린, 살갗을 파고드는 가시는 뽑혔지만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아직도 이따금, 아니 꽤 자주 욱신거리는 상처는 잊지 못할 과거를 되새긴다.


돌아 온 곳은 여전히 불안하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나조차도 모르겠다. 무엇이 허락되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일견 모든 것이 완벽하게 돌아가는 듯하다가도 어느 순간 그 뒷편에 선 현실이 날카로운 비수로 나의 가슴을 찌른다.

풍족한 듯 보이는 우리의 미래는 지극히 불투명하고, 멀쩡한 척 하는 사람들의 상처가 그늘 속에서 언뜻 모습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아무도 나에게 이 현실과 맞닥드릴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넘치도록 감사하지만,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만든 현실이 너무도 차갑다. 칼날이 피부를 파고드는 것 만큼이나 애리다.


나는 항상 그랬다. 예민하고 까다롭고 복잡한 나의 내면을 알기 쉽게 풀어놓는 재주 따윈 없다. 천근처럼 꼬인 속마음을 단칼에 잘라놓듯이 말하는 것이 어느새 습관이 되었다. 두 모습이 다 나였기 때문이다. 나는 괜찮지 않았다. 항상 무언가 부족했다. 나는 행복했다.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 나도 모르겠다. 아니, 둘 다 나의 진심이다.

하지만 아무도 나에게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나는 행복하고도 남을 환경에서 살아왔고 실제로 그랬다. 


그래서 나는 만족해야 했다. 그런데 가끔 무언가 부족하다.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부족함이 호강에 겨워 가진 것에 만족할 줄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나조차도 생각해 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렇게 나 자신을 설득해도 부족함은 채워지지 않는다.


나는 대체 뭘 바라는 걸까. 나는 외로운 것이다. 나를 넘치도록 사랑하고 배려하는 가족이 있는데도 나는 외로운 것이다. 더 바랄수도 없을 만큼 좋은 사람들과 사는데도 나는 외로운 것이다. 누군가가 나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칭찬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는 칭찬받고 싶다. 무조건적인 지지와 응원이 아니라 냉정하고 객관적인 칭찬을 원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능력을 누군가가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해낼 수 있다는 근거없는 자신감이 아니라 나에게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누군가의 입으로부터 듣고 싶은 것이다. 나는, 무언가를 아주 잘 하고 싶은 것이다.


사랑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있었다. 하지만 결단코 구체적이지는 않았다.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건 아닐까-라는 의심과 함께 환상은 상상이 되었다. 나는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건 여자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꿈을 꾸고 싶다. 세상과 인간과 나 자신에 대한 막연한 긍정성을 품은 채로,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별 근거없는 희망을 간직한 채로 살고 싶다. 그리고 그 여정길에 누군가가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마음을 나눌 진솔한 친구 몇 명, 언제나 내 편이 되어줄 가족. 아마 이 정도면, 정말로 더 바라는 게 욕심일 만큼 행복한 인생이 되겠지만, 나는 이미 산다는 일이 그렇게 간단치 않다는 것을 깨달을 만큼은 살았다.


앞으로도 나의 인생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든 역경이 수도 없이 찾아 올 것이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그런 역경에 쓰러지지 않을 만큼은 튼튼하지만, 아직 역경과 싸워 이겨낼 만큼 강인하지는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그럴지도 모른다. 애초에 맞서 싸우는 걸 좋아하지도 않으니까. 이때까지 살아 온 경험으로 미루어 짐작하자면 나는 누군가의 싸움을 응원하는 건 잘하지만 스스로 나가 싸울 용자는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어찌하리. 고난과 역경에 치이고 넘어지면서도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사람의 인생길. 끝 모르고 펼쳐진 듯한 이 삶에도 언젠가 마지막이 찾아올테니, 그 날에 후회하지 않도록, 떳떳치 못한 기억이 남지 않도록, 스스로 부정한 삶의 방식을 따라가진 않도록,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