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금과 같이 읽는 건 어때?)



산들바람이 부는 탁 트인 고원.


황금색을 품은 드래곤이 거친 숨을 내뱉었다.


푸른 잔디는 온데 간데 없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여기까지인가-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드래곤은 임종을 기다렸다.



검은 빛으로 어둑한 저녁.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살포시 울려퍼졌다.


이윽고 한 소녀가 드래곤 앞에 섰다.


"으앗!"


소녀는 깜짝 놀란 듯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인간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줄이야.


게다가 이런 끔찍하고 잔혹한 모습이라니.


얼마나 우스운 꼴인가.


드래곤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드래곤의 얼굴 앞에 쪼그려앉았다.


드래곤과 눈을 맞춘 소녀는 인자한 미소를 건넸다.


그리곤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은은한 달빛이여. 어두운 저녁을 비추는 한줄기의 희망이여.

내 모든 걸 걸고 간절히 기도하노라."


은은한 빛이 소녀의 주변을 멤돌았다.


얼마만에 느껴보는 포근함일까?


드래곤은 빛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았다.



첫 만남 이후 몇 주가 지났다.


소녀는 끊임없이 드래곤을 찾아왔다.


매일같이 기도를 하는 걸로 모자랐는지 광주리에 음식들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수건에 물을 적셔 정성스레 몸을 닦아주었다.


그럴 때 마다 드래곤은 지평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화없이 고요한 일상.


소녀는 그저 묵묵하게 드래곤의 곁을 지켰다.


드래곤이 잠에 들기 전까지.


그리곤 아침이 오기 전에 드래곤을 다시 찾아왔다.



꽃샘 추위가 끝나갈 무렵.


"오늘도 날씨가 좋네요. 몸은 좀 어떠세요?"


소녀는 어김없이 드래곤을 찾아왔다.


드래곤은 슬슬 소녀가 귀찮게 느껴졌다.


거리낌없이 거리를 좁히는 소녀가 부담스러웠다.


이에 소녀를 내쫓기로 마음을 먹었다.


"당장 물러나지 못할까!"


드래곤의 포효가 고원을 크게 흔들었다.


소녀도 놀라 다리에 힘이 풀렸다.


푹 주저 앉자마자 의식을 잃어 푹 쓰러졌다.


드래곤은 만족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더 이상 찾아오진 않을 터.


진작 이리 했음 좋았을 것을.


소녀의 모습을 확인한 후 등을 돌렸다.



해가 중천에 떴다.


그럼에도 소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드래곤은 불안했다.


일어나지 않는 소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바보같은 년...


은혜를 갚진 못할 망정 해를 끼치다니...


드래곤은 죄책감에 소녀를 살며시 껴앉았다.


그러자 소녀가 눈을 번쩍뜨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살아 있었느냐!?"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도 웃음이 나오느냐!"


드래곤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드디어 저를 봐주셨네요."


"어리석은 것..."


드래곤은 고개를 황급히 돌렸다.


붉어진 드래곤의 얼굴을 바라보며 소녀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따뜻한 햇살이 스며드는 초여름.


소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드래곤을 찾아왔다.


그리고는 품 안에 있던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엎드려있는 드래곤의 머리에 꽃머리띠를 씌워주었다.


"망측하다."


"주변에 꽃이 많길래 한 번 만들어봤어요."


드래곤은 그저 콧방귀를 뀌었다.


"아름다우세요."


"무엄하다."


소녀는 환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매미 소리가 진동하는 뜨거운 한 여름.


땀을 뻘뻘흘리며 소녀는 드래곤에게 다가왔다.


"이리 더우면 오지 않는 게 상책이거늘."


퉁명스러운 반응에도 소녀는 그저 미소를 지었다.


"드래곤님 옆에 앉으면 시원한 걸요?"


소녀는 그림자가 생긴 쪽을 향해 몸을 뉘였다.


드래곤은 얕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마법으로 체온을 낮추었다.


소녀가 시원하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만.


덕분에 소녀는 잠시 눈을 붙였다.



가을비는 끝없이 고원을 적셨다.


소녀는 온 몸이 젖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드래곤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다.


"오너라."


소녀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드래곤은 소녀를 자신의 품에 쏙 안아주었다.


"고마워요."


예상치 못한 드래곤의 행동 때문일까?


평소와 달리 소녀는 수줍은 듯 얼굴을 붉혔다.


드래곤은 품 안에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비에 젖어 훤히 들어난 가녀린 몸매.


요염한 소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소녀도 이를 의식한 듯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엉큼하시네요..."


"무... 무엄하다!"


안절부절못하는 드래곤은 큰 기침을 내었다.


그러자 소녀는 눈웃음을 지었다.



고원에도 겨울이 찾아왔다.


비는 눈이 되어 고원을 하얗게 수놓았다.


해는 잠시 뜰 뿐 밤 어둠이 고원을 뒤덮었다.


살이 찢어지는 듯한 추위와 강렬한 바람 소리가 고원을 지배하였다.


그래서일까?


가을비가 내린 이후 소녀는 고원에 찾아오지 않았다.


아니, 드래곤을 찾아오지 않았다.


이에 드래곤은 내심 기뻤다.


더 이상 자신을 귀찮게 구는 이가 없어졌기에.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허전함이 생겨났다.


그래도 시원섭섭한 감정이라 생각하려 했다.


그런데 감정은 당췌 예측할 수 없는 법.


자신을 찾지 않는 소녀에게 서운함이 들기 시작했다.


밀어내도 계속 자신을 찾아온 소녀가 이젠 미울 지경이다.


그렇게 또 날들이 지나갔다.


그럼에도 소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드래곤은 분노에 휩싸였다.


감히 필멸자가 장생의 존재에 신경을 끼치다니.


다시 찾아온다면 엄히 벌을 내리겠노라 드래곤은 결심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드래곤은 걱정이 들었다.


소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드래곤은 상념에 빠졌다.


소녀는 더울 때나 비가 올 때나 항상 자신을 찾아주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소녀를 찾아갈 때.


고고한 드래곤의 긍지와 자존심 따윈 필요없다.


드래곤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후각에 의존한 채 소녀의 흔적을 찾아나갔다.


마침내 우거진 숲 사이에 허름한 오두막 집을 발견했다.


드래곤은 주저없이 집을 향해 하강하였다.


집 앞에 내려 앉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문을 열자 칠흑같은 어둠이 드래곤을 반겼다.


그 사이로 희미하게 비추는 호롱불이 소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누구세요...?"


익숙한 목소리.


하지만 평소와 달리 힘이 없는 목소리.


소녀의 질문에 드래곤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다."


소녀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드래곤님...?"


"그렇다."


소녀는 놀라운 기색으로 드래곤을 새삼 쳐다보았다.


"폴리모프를 했을 뿐이다."


드래곤으로서 가진 고유의 능력.


그리고 이 작은 터전을 부수지 않기 위한 나름의 배려.


드래곤은 인간의 형태로 자신의 모습을 바꾸었다.


"정말 아름다우세요. 눈을 어디다 둬야할 지 모르겠어요."


진한 금색의 긴 생머리와 푸른 바다와 같은 벽안.


새하얀 피부에 잔근육이 보이는 볼륨있는 몸매.


성인 남성보다 큰 키에 늘씬한 다리.


소녀는 드래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 확신했다.


"혀 놀림은 여전하구나."


드래곤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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