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금과 같이 읽는 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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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지날수록 소녀의 안색이 창백해져갔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쇠약해 진 몸.


끊임없이 나오는 기침.


처음 봤을 때 느꼈던 활발하고 해맑은 소녀의 모습은 없었다.


드래곤은 소녀의 곁을 지켰다.


소녀가 드래곤의 곁에 있어주었던 것 처럼.


힘들 법도 하지만 소녀는 미소를 지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어느 날.


소녀는 드래곤의 손을 잡았다.


"고마웠어요."


갑작스러운 소녀의 한 마디.


드래곤은 걱정스레 소녀를 내려보았다.


"당신과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했어요."


소녀의 눈망울이 촉촉히 젖어들었다.


그럼에도 소녀는 입꼬리를 올렸다.


"마지막까지 제 곁을 지켜줘서 고마워요."


이윽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드래곤은 담담하게 소녀의 말을 경청할 뿐이었다.



소녀는 성스러운 힘을 지니고 있었다.


신의 간택을 받아 각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왔다.


그로인해 소녀는 성녀로 추앙을 받았다.


하지만 자신을 헌신해가며 남을 도운 탓일까?


소녀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었다.


마침내 성력마저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소녀를 외면했다.


소녀는 무시를 당하고 사람들에게서 버려졌다.


이에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그러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드래곤을 조우했다.


소녀는 마지막 남아있던 성력을 발현했다.


이 드래곤을 살려주시길.


그리고 자신과 같은 처지가 되지 않기를.


자신에게 신탁을 내려준 달의 신을 향해 기도했다.



"성녀는 세 가지 소원을 이룰 수 있어요."


소녀는 베시시 웃었다.


"첫번째는 드래곤님이 죽지 않기를 부탁드렸어요."


"알고 있다. 방금 말했잖느냐."


드래곤은 소녀의 머릿결을 쓸어내려주었다.


"두번째는 드래곤님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길 부탁드렸어요."


"미련하구나."


"저를 성녀가 아닌 한 사람으로 대해주셨으니까요."


소녀는 나지막이 미소지으며 두 손을 모았다.


"은은한 달빛이여. 어두운 저녁을 비추는 한줄기의 희망이여.

내 모든 걸 걸고 간절히 기도하노라.

내가 사랑하는 이 드래곤의 앞날에 평생 행복한 일만 가득하길.

성녀로서 누릴 수 있는 마지막 소원을 바라노라."


기도에 응답하듯 은은한 빛이 소녀를 감쌌다.


소녀는 다시 드래곤의 손을 잡았다.


"한 가지 소원이 있어요."


"말해보거라."


"드래곤님의 이름을 알고 싶어요."


바보 같은 계집.


곧 헤어질 운명에 이름 따위 무엇 중요하단 말인가.


그럼에도 드래곤은 무릎을 꿇었다.


소녀의 귓가에 부드럽고 상냥하게 속삭였다.


"아르카나."


"고귀하신 이름, 반드시 기억할 게요."


소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아르카나에 뺨에 손을 갖다대었다.


"고마웠어요, 아르카나."


쏟아지는 소녀의 눈물을 아르카나는 피하지 않았다.


"네 이름을 알려다오."


"루나 릴리스."


"너와 어울리는 이름이로구나."


루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입에서 피를 내뱉었다.


이에 아르카나의 눈이 붉어졌다.


"오늘은 제 생일이에요. 18살이 되었죠."


가파른 숨소리가 집 안에 울려퍼졌다.


이별의 순간이 당도하고 있었다.


"아르카나는 저를 여자로 만들어주셨어요."


루나는 아르카나 무릎에 몸을 기댔다.


"사랑했어요..."


마지막 한 마디.


아르카나는 루나를 꼭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지자 루나는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장례를 치른 후.


아르카나는 서랍 안에 종이 봉투를 발견했다.


봉투를 열자 루나가 직접 쓴 편지가 있었다.


아르카나는 차분히 편지를 읽어나갔다.


그러자 조금씩 잉크가 번져나갔다.


편지지는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되었다.


"루나, 너를 결단코 잊지 않겠노라."


그리고 참아왔던 슬픔을 펑펑 토해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계절은 바뀌고 바뀌어 또 다시 봄이 찾아왔다.


루나와 함께 추억을 쌓았던 고원은 더 이상 없다.


아르카나는 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둥근 달을 보며 루나를 그렸다.


검정색과 갈색이 뒤섞인 곱슬 머리.


그리고 달의 성녀를 뜻하는 하얀 브리지.


초롱초롱한 갈색 눈동자와 작고 앙상하지만 아름다웠던 몸.


발랄한 목소리와 해맑은 미소, 그리고 상냥한 태도.


아르카나는 가슴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마음을 담아 노래를 불렀다.


사랑스러웠던, 사랑했던,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루나를 기억하며.


청아한 음색이 바람을 타고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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