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






2.

집에 떨어진 식재를 사러 읍내에 들린 겸, 늦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이 읍내의 거의 유일한 식당인 백반집에 들어간 정우였다.

들어간 백반집은, 꽤나 오랫동안 장사를 해온 듯, 세련되기는 커녕 투박하면서도 오랜 생활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정감이 가는 풍경이었다.


식사 때를 조금 넘긴 탓인지, 안에 손님은 없었다.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람이 많은 곳은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기에, 정우는 나름 속으로 안심하며 아무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사장님, 여기 백반 하나요."


"예~"


평소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나 들어오던 식당에, 갑자기 젊은 남자가 들어오니, 식당 주인의 눈이 약간은 이채를 발했지만, 그 뿐, 호기심은 오래 가지 않았다.


백반 하나를 시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이 직접 쟁반을 들고와 상을 차렸다.

찬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서울에 즐비한 백반집들에 비하면 최대한 좋은 말로 포장해봐야, '소박하다' 수준이었다.

허나, 오랫동안 혼자 식사를 차려왔던 정우는 곧장 그 음식들이 꽤나 많은 정성이 들어갔음을 대번 알 수 있었다.

정우가 곧장 기대감에 숟가락을 들었다.

제법 오랫동안 장사를 했을테니, 맛을 기대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음.

약간의 기대감으로 국을 한 술 뜬, 정우의 입에서 이내 만족한 듯한 짧은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기대감을 충족시켜줄 만큼 맛이 좋았다.

앞으로 자주 올지도 모르겠는데.

그리 생각하며, 하나 둘 찬찬히 맛을 보던 차였다.


딸랑~


문에 걸려있던 종이 흔들리며, 손님이 왔다고 알렸다.

어느 누구나 그렇듯, 새로운 사람의 등장에 주인장은 물론, 정우도 저도 모르게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오, 오?"


백반집 주인은 처음보는 얼굴이지만, 정우에게는 구면이었다.


"정우 씨!"


"아, 안녕하세요 근태 씨. 미연 씨도 안녕하세요."


자신의 옆집으로 새로 이사온 신혼부부.

으레하는 인사치레처럼, 헤어지면서 다음에 또 보자는 말을 둘에게 듣긴 했지만, 제 생각보다 훨씬 이르게 다시 만났다.


"어제 주신 떡은 잘 먹었습니다. 맛있었어요."


어제, 이사떡을 받았던 때가 생각이나, 정우가 곧장 둘에게 잘 먹었다고 마저 감사함을 전했다. 

그저 말로만 하는게 아니라, 좋은 팥을 썼는지 시루떡은 정말로 맛있었다.


"에이 뭘요~ 아, 혹시 합석해도 되죠?"


"아, 그럼요."


정우의 감사를 받으며 자연스레 합석을 제안하는 채미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니, 부부가 곧장 정우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어차피 메뉴가 하나 밖에 없었기에, 정우처럼 백반을 시킨 둘은 이내 식사를 같이 하며, 정우와 여러 주제의 대화를 나누었다.


"아, 그러고보니 정우 씨도 어제 이사오셨다 하셨죠?"


"예. 그렇죠."


"그럼 혹시 전입신고 하셨어요?"


아.

잊고 있었다.

김근태의 말에 그제서야 아차 한 듯한 표정이 정우의 얼굴에 절로 튀어나왔다.

그럴만도 하지.

당장 희수에게서 벗어난다는 일념만으로 무작정 내려왔는데,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있을리가 없었다.


"아뇨. 아직 안 했네요."


"그럼, 저희랑 같이 가실래요? 안 그래도 오늘 신청하려던 참이었거든요."


"아...감사합니다. 그럼 죄송하지만 신세좀 질게요."


"에이 뭐, 서로 돕고 사는거죠."


김근태에 시원한 웃음에, 정우도 선선한 미소를 지었다.

요즘따라 참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느낌이었다.

수진, 기사님, 모텔주인장, 그리고 지금 눈 앞에 있는 둘.

희수와 헤어지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찾아온 소중한 인연들이다.


문득 머릿속에서 오 년 전의 그 첫 날이 떠올랐다.

그 날, 만약 희수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오 년 전, 그 계약서에 도장을 찍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희수에게 얽매이지 않은 자신은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그녀에게 갇힌채 무의미하게 소비되던 그 오 년의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아니지

허나, '이기적이다' 라는 생각에 정우가 머릿속을 흩트렸다.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망상이었다.

어차피, 그 때의 나에겐 선택지라고는 그 어느것 하나 없었던 일이었다.

아마 그 제안을 거절했다면, 그 계약서에 도장을 찍지 않았다면, 보나마나 자신은 여전히 빚더미에 짓눌린채 하루를 겨우 연명하는 그런 비루한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과 결혼하는 조건으로, 희수는 정우의 빚을 대신 탕감해주었다.

지금 산 집도, 엄연히 따지면 희수가 준 돈으로 산 것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만큼은 고맙게 여겨야 한다.

그 사실 마저도 부정하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너무 이기적인 것이었다.


"정우 씨?"


"아, 미안해요. 잠깐 생각할게 있어서...무슨 일이시죠?"


"다 드셨으면 슬슬 일어날까 해서요."


정신을 차리고보니, 먼저 먹고있었는데도 밥이 조금 남은 자신과는 달리, 둘의 밥그릇은 벌써 비워져있었다.

괜찮으니 마저 먹어도 된다는 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우는 숟가락을 놓았다.

더 먹었다간, 괜히 속만 안 좋아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차를 끌고왔는지, 식당을 나선 부부는 곧장 정우를 데리고, 한 곳에 주차되어있던 SUV로 향했다.

부부의 차는, 겨우 면허만 달랑 따놓았을 뿐, 차에 대해 무지(無知)한 정우가 보기에도 제법 비싸보이는 차였다.


"일단 정우 씨 집으로 가시죠! 계약서랑 신분증 챙겨가라고 하더라구요."


"아, 죄송해요. 번거로울 텐데..."


"에이, 괜찮다니까요. 어차피 금방인데요 뭐."


거듭 부담을 주는 것 같아, 미안해하는 정우의 말을 부부는 별 일 아니라며, 웃어넘겼다.

정말 좋은 이웃이다.

정우는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끼며, 이내 집에 있던 계약서와 신분증을 챙겨, 부부와 함께 인근의 주민센터로 향했다.

에어컨이 빵빵히 나오는 주민센터 안에는, 오후의 늦더위를 식히기 위해 찾아온 어르신들로 북새통을 이루었지만, 의외로 대기자가 없어 신고를 처리하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소재지를 새로 이사온 집으로 변경한 정우가, 곧장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피해 밖에 나가있던 사이, 얼마 지나지 않아 부부도 등록을 마쳤는지 센터를 나왔다.


이제 슬슬, 장도 봐야 하는데.

정우가 본래 오늘의 목적이었던 것을 다시금 상기시키던 차에, 김근태가 문득 말을 걸었다.


"정우 씨, 혹시 지금 시간 비나요?"


"네?"


"괜찮으면 저희랑 쇼핑이라도 가실래요? 어제 안사람이 살게 좀 있다더라구요."


"아아..."


시선을 돌려 채미연을 바라보니, 괜찮다며 그녀도 같이가자 입을 열었다.

공교롭네.

어째선지 모르게, 약간의 기이함이 머리에 감돌긴 했지만, 정우는 머지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장 보고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아무렴 어떠냐는 생각이었다.


"좋습니다. 마침 저도 살게 좀 있었거든요."


"오케이. 타시죠!"


"기왕 갈 거, 큰 데로 갈 생각인데, 조금 멀어도 괜찮죠?"


채미연의 물음에, 곧장 집에 혼자 있을 나리가 생각났지만, 사료는 혹시나 싶어 두둑히 담아두었다.

저녁까지는 괜찮겠지.


"네."


이내, 정우를 태운 차가 천천히 읍내를 벗어났다.

뒷자석에 앉은 정우의 바로 앞.

조수석에 앉아있던 채미연이 빠른 손놀림으로 휴대폰을 만졌다.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고 있는 듯 싶었지만, 카 시트가 가리고 있어서 정우는, 그 내용을 보지 못했다.


[현재 YC마트로 이동 중. 이동 및 소요 예상 시간 약 5시간.]


수 초도 지나지않아, 채미연이 보낸 문자의 옆에 있던, 상대방의 문자 확인 여부를 가르키는 숫자인 '1'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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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수의 이정우 관찰일기 시작.


잘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