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라이브

"얀붕아. 나 천원만!"


또다.


-띵동댕동.


4교시 수업이 끝나고 찾아온 점심시간. 

항상 같이 점심을 먹는 친구와 만나기 위해 복도로 나가기 전, 어느 날인가부터 이 여자아이는 나에게 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


-스윽...


그렇다고 해서 내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거나, 이 아이에게서 큰 불편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하루에 딱 천원.


이 아이는 나에게 그 이상도, 그 이하의 돈도 바라지 않았다.

용돈이라면 따로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부모님에게 부탁하면 선뜻 오천원짜리를 건네주셨기에. 천원이라는 금액은 나에게 있어 딱 그 정도의 가치에 불과했다.


언제나처럼, 나는 교복 마이 안주머니에서 지하상가에서 만원에 산 지갑을 꺼내 파란색의 지폐 한 장을 꺼내 들었고.


...싱긋


"고마워."


꾸깃.


내 손에서 천원짜리 지폐를 받아간 여자아이는 나 같은 서민들은 들어도 모를 정도의 고가의 명품 지갑을 꺼내 들곤,

형형색색의 카드들과 5만원, 만원짜리 지폐들 사이에 나에게서 받아간 천원짜리 지폐를 꽂아 넣을 뿐이었다.


"그럼. 점심 맛있게 먹어!"


이러한 일상이 반복된지도 어연 이주일이 지났다.


이주일. 그동안 매일 천원이라 해봤자. 주말을 제외하곤 딱 만원정도다.

부모님에게서 '요즘 매점 자주가나봐?' 라는 질문을 들을 정도의 수준.


하지만...


'...돈이 없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걸까.'


시작은 단순한 의문이었다.


어째서. 돈이 많기로 소문난 저 여자애가 나에게서 매일 천원을 빌려가는걸까?

어째서. 나에게 말을 걸기 위해 천원을 빌려가는 거라면. 돈을 빌려달라는 것 외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걸까?


어째서...


-뒤척.


'맨 처음부터 천원을 빌려주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안 되겠다.


"후우..."


꿀꺽-꿀꺽-


이대로는, 잠도 제대로 오지 않았다. 이제 곧 기말고사 기간이었기에 수업 시간에 졸기라도 한다면 큰일이고.


결국 나는 다음 날.


"미안."

"...어?"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이 없네."


나는 처음으로, 그 아이에게 말해버린 것이다.


마치 정말로 깜빡했다는 듯, 텅 빈 지갑을 손가락으로 벌려 과시하듯 보여주며.


'...'


어떻게 나올까? 

왜 천원을 안가져왔느냐며 화를 낼까? 아니면 나 말고 내 옆자리의 다른 아이에게서 천원을 빌려갈까?


찰나의 순간.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경우의 수들 중에.


-씨이익.


적어도. 눈앞에서 일어나는 광경은 없었다.


그저 가벼운 눈웃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실망했다는 눈빛조차 없는. 그저 눈웃음이었다.


"그... 미안. 내일 2천원 빌려줄테니까."

"아니야."


-달칵.


"야. 왜이렇게 안나와?! 오늘 점심 뭐냐? 나 방금 몰래 웹소설보다 과학한테 뺏겨서."

"...쫄면에 돈까스."

"오. 먹고나서 매점에서 나나콘 죠지면 딱이겠는데."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다음 날 산산이 조각나게되었다.


"얀붕아. 오늘 국어 필기 놓친게 있어서...."

"아 맞다! 얀붕아. 매점에 새로 나온 민초아이스크림 먹어봤어?"


어제. 천원을 빌려주지 않은 날을 기점으로, 문득 이 여자아이가 나에게 친한듯 말을 걸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어."


그렇게 하루가 지날수록, 그 아이는 조금씩 조금씩.


-콰직.


뒷 걸음질 치는 나보다 훨씬 더 넓고 빠른 보폭으로.


-...있잖아...방금...

-프린트..숙...했어?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달이 지났을때 즈음.


"얀붕아!"


그 사건이 찾아왔다.


"...왜?"


기말고사 준비가 한창인 주간.

집에 돌아가는 길에 붕어빵이라도 사갈까 고민하던 나에게.


"주말에 우리집에서 국어좀 가르쳐주라... 너 국어 잘하잖아."


그 아이가 나에게 스터디를 권유해온 것이다.


다른 과목은 처참히 발리는 나였지만, 국어만큼은 아슬아슬하게 이 아이보다 성적이 높았다.


국어는 좋았다.

다른 과목처럼 지독한 암기나, 머리가 지끈거리는 연산 능력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그저 저자의 의도를 파악할 뿐.


잘하는거라곤 사람들의 표정과 행동을 관찰하며 눈치를 보는 것 정도인 나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 자신있는 특기였다.


"...그럼. 마침 옆반 친구랑 주말에 공부하기로 했는데 같이..."


그때.

여자아이의 눈빛이 단숨에 뒤바뀌었다.


능글맞게 눈웃음을 지어오던 미소에서, 시리도록 차가운 무표정으로.


"..."


-스으윽.


갑작스런 분위기의 변화의 굳어있는 나에게 다가와,

기다란 손가락으로 천천히 내 볼끝을 어루만지고는.


"...토요일 아침11시까지. ㅇㅇ아파트 앞으로 와."


일방적인 통보를 귓가에 속삭이며.

나에게서 멀어져갔다.


다음날 아침.


"...여기서 내려주세요."


-부우웅!!!


결국 그 아이의 말대로, 친구와의 약속을 미룬 채 ㅇㅇ 아파트 정문을 찾아왔다.


핸드폰을 바라보니 약속시간인 11시가 찾아오기 10분전.


반강제... 아니. 일방적으로 잡은 약속임에도 불구하고, 10분이나 일찍 도착해버린 내 자신이 싫었다.


1분.... 5분...


10분이 지나 약속시간인 11시가 찾아오자.


"얀붕아! 기다렸어? 전화라도 해주지... 이쪽으로 와!"


거대한 입구의 안쪽에서, 그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네에서 가장 고가이기로 유명한 아파트의 정원을 지나,


-삑!


우리 아파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보안 장치들을 통과하니.


"흠흠흠~"


어느샌가 엘레베이터의 앞까지 도착했다.


카드키를 인식했는지, 자동으로 로비 층으로 내려와있는 엘레베이터를 타고 오른쪽 구석의 손잡이로 이동하자,

싱긋 웃으며 37층 버튼을 누르고는 내옆에 다가와 올라가는 디지털 액정의 숫자를 바라보는 여자아이.


그 많은 층수를 올라가는동안, 우리 둘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삐리링!


그저 현관문이 열리고, 드넓은 거실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안녕하세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에 계실 여자아이의 부모님을 향해 인사를 건넸을 뿐.


"집에 아무도 없어. 부모님이 학교에 가까운곳으로 나 혼자 살라고 구해준 아파트거든."

"아..."


-타악!


"저쪽이 내 방이니까 대충 가서 앉아있어. 아. 주스 마실래? 포도? 오렌지?"

"...포도."


-스으윽.


여자아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 안으로 들어오자,

우리집 거실보다 넓은 방안. 덩그러니 침대와 테이블. 그리고 고급 데스크탑 PC가 놓여진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이 테이블은 평소에 놓지 않는 것 같으니, 이 바닥이 오늘 함께 공부를 하기 위한 공간이겠지.


적당히 교과서와 필기도구가 담긴 가방을 내려다놓고, 프린트철과 필통을 테이블위에 올려놓은 채 앉아있자,

여자 아이가 쟁반에 접시를 든 채 들어왔고.


그렇게 한동안 펜이 사각거리는 소리와. 드문드문 나에게 질문을 하는 여자아이의 목소리만이 울려퍼졌다.


하지만...


"좋아해."


결국에는 와버렸다.


"1학기때 부터 계속. 좋아했어. 나랑 사귀지 않을래?"


그 아이의 고백이.


"...왜 대답이 없어?"


눈치채지 못했던 건 아니다.


"싫어...?"


언제나처럼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던 나는,

차마 뒤에 있는 침대를 보지 못하고 넘어져버렸고.


-촤르르륵!!!


넘어지는 와중 손에 쥔 침대보가 벗겨지자.


"..."


이상하게 볼록 솟아있던 침대의 위에는.

정체모를 기구들이 셀 수도 없이 쌓여있었다.


"...부모님께 연락드려야겠네. 아. 지금 시간이면 일하고 계시려나?"


한 걸음.


"응. 괜찮아. 퇴근하실 6시에는 제대로 문자할 시간을 줄테니까. 그러니까..."


한 걸음.


"...오늘 저녁은 먹고 갈 것 같다고. 말씀드려."


-달칵!


조용히 방문을 걸어잠구며 내쪽으로 몸을 돌려 다가오는 이 아이의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아.'


국어가 특기인 나는,

단번에 저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가 있었다.


아니...


-꽈아악...


"네가 나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니까. 너한테 있어서도 나쁘지만은 않은 일일거야. 되도록 너무 오래걸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얀붕아!


어쩌면...


-김얀붕... 맞지? 혹시 나 천원만 빌려줄 수 있어?


훨씬 전부터.


손깍지를 죄어오며 나를 침대에 넘어뜨리는 여자아이의 뒤로,

나란히 놓여진 컵과 그안에 담긴 포도 주스가 눈에 들어온다.


여자아이의 컵에는 오렌지. 내 컵에는 포도.


나는. 주스는 오렌지와 포도가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


그렇게. 왼손에 깍지를 쥔 채 오른손으로는 내 머리칼을 쓰다듬는 여자아이의 향수 냄새를 마지막으로.


"사랑해."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