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니거든! 나 완전 똑똑하거든!”
“그럼 왜 시험 점수가 이 모양인데?”

 

조니의 말에 황녀가 입을 꾹 다물었다.

22점, 100점 만점인데 1/4도 못 맞히다니.

 

“하아, 황녀님, 우리 황녀님! 이래서야

시집이나 가겠어? 으응?”

“이익! 그러는 조니도 공부 못하잖아!”

“나야 원래 머리 쓰는 사람도 아닌데?”

 

그건 그랬다. 황녀는 또 할 말을 잃었다.

황녀의 호위 기사가 무슨 공부란 말인가?

그녀가 생각해도 그건 말이 안 됐다.

 

“이걸 폐하한테 어떻게 보고하지? 쓰읍.

이거 이대로 보고하면 나도 혼나겠는데.”

“그, 그걸 왜 아바마마한테 보고하는데!?”
“하지만 이 대참사를 그냥 덮어뒀다가

나중에 문제 생기면 나만 죽는데?”

“에이! 괜찮아, 괜찮아! 나만 믿으라니까!”


누굴 믿으라고…….?

조니가 기가 차서 짧게 웃고 말았다.

 

“황녀님, 우리가 왜 아카데미에 왔더라?”
“그것도 몰라? 내 학식과 품격을 갈고

닦기 위해서잖아. 조니 혹시 바보야?”

“황녀님한테 바보 소리를 들을 줄이야.”

 

그걸 그렇게 잘 알면서 성적은 이 모양이라.

진심으로, 이쯤 되면 지능에 심각한 하자가

있는 것 아닌지 걱정됐다.

 

“이거 진짜 심각한 문제거든? 후우…….”
“조, 조니……화났어?”
“살짝 짜증은 나네.”


제국 제2황녀, 아르마이아 드 유스타겐.


제2황녀지만, 지지 세력이나 정치 기반은 

전무하다. 그리고 그건 전적으로 그녀의 

잘못이 컸다.

 

‘이런 바보가 무슨 정치를 한다고.’

 

용모,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출신, 황제의 딸이니 할 말 없음.

인품, 애가 머리가 나빠서 그렇지 착하다.

 

단점은 딱 하나뿐이지만, 그게 좀 치명적이다.

 

황녀는 아카데미에서도 유명한 바보였다.

 

아카데미에 들어온 것도 아버지가 황제라서

들어온 거지, 자기 실력으론 죽었다 깨어나도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좋아, 황녀님. 우리 진지하게 생각하자고.”
“그보다 점심 언제 먹어?”
“이거 진짜 심각하거든? 응? 나 화낸다?”

“우, 우으…….”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울먹였다.

아이고, 또 이런다.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좋아, 그럼 밥만 먹고 얘기하는 거다?”

“아자!”


결국 못 이겼다.

조니는 아르마를 데리고 식당으로 향했다.

 

“오, 저기 황녀님 지나간다.”
“말 걸어볼까?”

“내버려둬, 말 걸면 실망할걸?”


수군수군, 주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씩씩하게 걸어갔다.

 

“황녀님, 그렇게 걸으면 품위 없다?”
“엥? 왜? 당당하고 씩씩한데?”

“뭐……그렇게 말하면 그렇기는 한데.”

 

조니는 매 순간마다, 그녀가 안타까웠다.

 

용모는 정말 흠잡을 곳이 없었다.

 

밝은 갈색 머리카락에는 윤기가 흘렀고,

피부는 티 하나 없이 깨끗했다.

키나 몸매도 훌륭하고, 얼굴은 어머니를

쏙 빼닮아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이 아카데미에 다니는 남자들 대부분이

한 번쯤은 그녀에게 말을 걸었을 정도니,

외모만은 어딜 가도 꿇리지 않았다.

 

“밥! 밥! 밥! 바바바바밥!”

“황녀님, 애도 아니고 얌전히 있어.”
“와! 오늘 메뉴 끝내준다! 조니, 이거 봐!”
“오, 새우튀김……얘기 할 때가 아니잖아.”

 

조니가 황녀의 머리를 한 손으로 잡았다.

그의 필살기, 베어 클로다.

 

“아파파파파!”

“품위 지켜, 품위. 황녀잖아?”
“씨이, 황녀는 밥도 안 먹어!?”
“그래도 그렇게 밥밥 노래를 부르진 않아.”

 

이 모질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이제 조만간 시집도 가야 할 텐데,

약혼자인 루덴부르크 왕자가 과연 

이 바보를 좋아해줄지 의문이었다.

 

“얌전히 있어, 얌전히. 알겠지?”
“알겠다니까! 그보다 빨리 밥!”


잠시 후, 두 사람이 배식을 받은 후 자리에

앉았다. 

 

“새우튀김은 언제 먹어도 맛있다니까!

우물우물…….”

“황녀님, 입에 튀김 가루 묻었는데.”

“잔소리 좀 그만해! 엄마도 아니고!”

“하아…….”

 

입가랑 머리카락에까지 튀김 가루가 묻었고,

심지어 소스까지 교복에 다 묻혀 놨다.

 

그 모습을 훔쳐보던 다른 학생들이 킥킥

웃거나 서로 소곤거리는 게 다 보였다.

 

“와씨, 황녀 맞아?”

“어째 우리집 메이드보다 품위가 없냐.”
“사실 황녀가 아니라 대역이라던데.”

 

저저 오만불손한 것들 같으니.

마음 같아선 당장 혼내주고 싶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 또 화내기도 애매했다.

 

“조니, 아앙!”


그때, 아르마가 새우튀김을 건네주었다.

 

“난 괜찮은데.”
“빨리! 아앙! 먹어!”
“쯧, 아앙.”


그가 입을 벌리자, 그녀가 웃으며 휙 하고

새우튀김을 도로 자기 입에 넣었다.

 

“으음, 맛있어!”
“황녀님……어휴……됐다, 됐어.”


벌써 나이가 16살인데, 하는 짓은 겨우

6살짜리 꼬맹이랑 다를 게 없었다.

 

몇 번이나 예의범절을 가르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유모, 메이드, 심지어 그녀의

어머니마저 실패하고 말았다.

물론 조니도 실패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보다 빨리 가야지, 강의 시작하는데.”

“아, 맞다! 근데 나 책을 어디 뒀더라?”

“설마 안 가져왔어?”

“응!”

 

세상에 맙소사.

그가 한숨을 내뱉으며 일어섰다.

 

“가져올 테니까 강의실에서 기다려.”
“올 때 크림빵!”
“크림빵 자꾸 먹으면 살찐다니까.”

 

조니가 식당에서 나와, 기숙사로 돌아갔다.

그리고 방에서 교과서를 챙긴 후 나가려던

찰나,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잉? 누구야?”
“야호, 정원 관리는 잘하고 있어?”


팔랑, 문 너머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여우 수인, 베스카. 

 

그녀가 여기 왔다는 건…….

조니가 한숨을 내뱉었다.

 

“뭐, 그럭저럭.”
“그렇구나. 이야, 고생이 많으셔.”

“장미가 좀 사고를 치긴 해도 뭐.”

“그보다 옆집 아주머니한테 들은 소식인데.”


조니가 고개를 살짝 들어, 그녀를 보았다.

옆집 아주머니…….

 

“조만간 뻐꾸기가 찾아갈 것 같아.”
“……그래? 고마워, 좋은 소식이네.”
“그러니까 정원 관리, 소홀히 하지 마?”

 

휙! 그녀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여간, 사람 귀찮게 하네.”

 

조니가 책을 가지고, 곧장 강의실로 향했다.

강의는 한참 진행중이었다. 그가 자연스레

황녀의 옆으로 가 앉았다.

 

“크허어……크헙, 푸우우…….”
“아이고, 강의 시작한지 5분도 안 됐는데.”


빠악! 그가 책 모서리로 그녀의 머리를

찍었다.

 

“아팟!?”
“강의할 때 자지 마, 황녀님.”

“그렇다고 때릴 건 없잖아, 씨잉.”


그녀가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자자, 강의에 집중해야지. 책, 여기.”
“으에……너무 어려워……죽겠네 진짜.”
“그래도 해야지, 안 그래?”

“눼에…….”

 

아르마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 버릇도 고치라고 6살 때부터 그리

말했거늘, 결국 고치지 못했다.

아마 평생 가지 않을까, 그가 생각했다.

 

“마법이라는 건 왜 이리 어려운 거야?”
“마법 배우고 싶다고 한 건 황녀님인데.”

“나는 불 나와라 얍! 하면 나오는 줄 알았지.”

“켁, 그렇게 쉬우면 동네 똥개도 마법사지.”

 

마법이란 수많은 학문의 집합체다.

먼저 수학과 기하학을 알아야하며, 

화학과 물리학, 생물학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제대로 된

마법은 쓰지 못하며, 그래서 아르마처럼 

마법의 화려함에 매료되었다가 수학의

마수에 빠져 그만두는 사람이 매년

100명도 넘게 나왔다.

 

“나, 마법사는 못할 거야…….”

“그래도 기본 이론 정도는 배우고 가야지.

폐하께 뭐라고 말할 건데? 점심시간에

새우튀김만 먹다가 졸업했다고?”

“히잉…….”

 

쯧쯧, 그가 아르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도와줄 테니까 열심히 해. 자자, 응?

열심히 하면 저번에 사온 케이크 또

구해올 테니까.”

“진짜?! 이번엔 초콜릿으로 사와!”
“알겠어, 그러니까 열심히 하자고.”

“응!”

 

그녀가 싱글벙글 웃으며 책을 펼쳤고.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또 잠들어버렸다.

 

“커어어억……크어어…….”
“하아.”


그래, 착하고 건강하면 됐지.

그가 외투를 벗어 덮어주며 말했다.

 

 

 

 

 

오후, 수업이 끝났다.

황녀는 얼마나 푹 잤는지 오전 때보다도

더 생생하고 기운이 넘쳤다.

 

“자! 약속한 케이크 먹으러 가자!”

“양심은 어디 두고 온 거야, 황녀님?”

“에이, 열심히 했다니까. 5분이나 집중했어!”

 

5시간도 아니고 5분……?

금붕어도 그보단 집중력이 강하겠다, 라고

말하려던 찰나 그녀가 누군가와 부딪혔다.

 

“아야.”
“응? 어, 어어.”


웬 남학생이 눈만 껌뻑였다.

검은 곱슬머리에 둥근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아마 같은 마법부 학생처럼 보였다.

 

“아프잖아! 너, 뭐하는 거야?!”
“그, 황녀님, 저기, 저는 그게…….”


그 순간, 조니가 황녀의 뒤통수를 잡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게 했다.

 

“아이고, 미안해요 학생. 저희 황녀님이

앞도 똑바로 안 보고 다녀서.”

“네? 네?”
“조니! 부딪힌 건 내쪽―”


그 순간, 아르마가 입을 다물었다.

조니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황녀님, 고개를 드세요!”
“아냐, 아냐. 우리 잘못인데요 뭐.

자자, 별거 아니지만 이걸로 맛있는

밥이라도 사드셔. 응?”

 

조니가 슬쩍 돈주머니를 그의 주머니에

넣고, 그의 등을 떠밀었다.

 

“조니― 화났어?”
“황녀님, 있지. 잘 들어봐.”


그가 아르마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아르마는 겁먹은 듯 어깨를 움츠렸다.

 

“황녀님은 정치라는 게 뭐라고 생각해?”
“어……위에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
“아니야. 정치라는 건 말이지, 최대한 많은 

사람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거야.”

 

그걸 모르는 사람은 정치를 할 수 없다.

왕, 귀족, 심지어 마을 촌장도 아는 사실이다.

 

“사소한 일로 싸우지 마. 목숨을 걸어야 할

때가 아니면 절대 싸우지 말라고. 응?

최대한 좋게 넘어가, 황녀님의 무기는 

마법이 아니라 그 신분과 이미지야.”

 

조니는 이 말괄량이 황녀가 늘 걱정됐다.

 

아는 건 너무 없고, 위치도 불안정하다.

 

정치판이라는 게 얼마나 위험천만한

곳인지는 그녀보다 조니가 더 잘 알았다.

 

“가뜩이나 자기편도 없는데 괜히 나중에

말 나올 사고치지 마. 아무리 화나도 일단

한 번은 참아. 정치는 인내심이야.”

“으응……알겠으니까, 화내지 마…….”

“화 안 냈어, 아르마.”


조니가 그녀의 머리를 팍팍 쓰다듬었다.

―그가 어릴 적부터 종종 해주던 것이었다.

 

“나한테는, 조니밖에 없으니까…….”


그녀가 조니의 옷을 꽉 잡았다.

 

바보지만, 그럼에도 알 수 있었다.

 

자기 자신이 얼마나 무시당하고 있는지.

진정 자기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조니뿐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았다.

나머지는 믿을 수 없는 사람뿐.

 

“버리지 말아줘…….”

“내 목숨을 버려도 널 버리진 않아.”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자, 기운 차려. 케이크 사줄 테니까.”
“응!”

 

아아, 정말이지.

조니는 그녀가 귀여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

 

 

 

 

 

밤.

 

이미 아카데미에 있는 모든 이가 잠든 

시간이건만, 조니는 깨어있었다.

 

기숙사의 지붕 위, 그곳에선 주위가 환히

보였다. 감시하기엔 딱 좋은 위치다.

 

‘가능하면 조용히 처리하고 싶은데.’

 

황녀, 아르마는 기숙사에서 자고 있다.

 

한 번 잠들면 누가 깨우기 전까지는

절대 일어나지 않으니, 어지간한 소동이

일어나도 문제는 없을 터였다.

 

“오, 왔군.”


그때,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움직였다.

하나, 둘……그가 하나씩 숫자를 세었다.

 

총 12명, 몸놀림을 보아하니 그럭저럭

훈련을 받은 놈들이다.

 

“하여간 그 의심병 환자 같으니.”


왜 자꾸 이런 귀찮은 짓을 벌이나 모르겠다.

이래서 형제자매는 없는 편이 나았다.

 

휙! 조니가 기숙사 앞, 마당에 착지했다.

 

“자자, 거기까지.”
“!”


암살자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그들은 모두 검은 옷을 입고, 단검과 도끼, 

클로로 무장한 상태였다.

 

“어떻게 우리가…….”

“거 알 필요 없고, 황녀님 주무시니까 그냥

얌전히 돌아가서 잠이나 자라.”

 

그가 손을 휙휙 내저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너희 주인은 왜 그 모양이냐?

에렉 그 새끼는 어째 지 아버지한테서

나쁜 것만 배웠대. 응? 그런 주제에 능력은

쥐뿔도 없으면서 말이지.”

“입을 함부로 놀리는구나…….”


암살자들이 그를 포위하듯 둘러쌌다.

숫자는 그들이 훨씬 많았고, 조니에겐

무기조차 없었다.

 

“제2황자라는 놈이 말이야, 응? 아무리 

배가 달라도 그렇지 자기 여동생을 죽일 

생각을 해? 부끄럽지도 않나?”

“모두 제국을 위해서다.”
“허이고, 대단한 애국자 납셨어.”


그가 짧게 웃었다. 

분명히, 그건 비웃음이었다.

 

“나는 정원사다.”

“뭐라고?”

“정원에는 말이지, 꽃도 있고 나비도 날아다녀. 

시끄러운 곳이지만 그래도 아름다워. 아무도

알아보진 못해도, 내겐 너무나도 소중해.”

 

평생, 그 정원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아르마라고 불리는, 자신만의 정원을.

 

사랑에 빠졌다.

그건, 가족애이며 동경이기도 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쭉 그랬다.

 

어리고, 약하고, 어리석었다.

하지만 남들에겐 없는 아름다움이 있었고.

그는, 그 아름다움에 반해버렸다.

 

줄곧, 지금까지, 영원히.

 

“그 정원에 독사나 지네는 필요 없어.

아름답고 훌륭한 것만 있으면 되는 거야.

그 아이는 아무것도 몰라도 돼. 나쁜 건

전부 내가 잘라버릴 테니까, 괜찮아.”

“헛소리를 지껄이는군…….”

 

암살자들이 조금씩 그에게 다가갔다.

 

“유언은 그게 다냐?”

“아니, 하나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가 손을 풀며 말했다.

 

“너희 말이야, 진짜 빡대가리냐?”

“허, 그게 무슨 말이지?”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라. 왜 제국 황녀한테

호위 기사가 한 명밖에 없는지. 아무리

그래도 황녀인데 말이야, 이상하지 않아?”

 

그러고 보니…….

일반적으로, 황자나 황녀에겐 최소 10명

이상의 호위 병력이 붙어 다녔다.

 

하지만 아르마이아 드 유스타겐에게

붙은 건 단 한 명, 조니뿐.

또, 그들은 조니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답은 어렵지 않아.”

“하압!”


그 순간, 등 뒤에서 칼날이 번뜩였다.

동시에 그의 손이 암살자의 목을 잡아챘다.

 

“나 한 명이면 충분하고도 남거든.”


점화.

 

그 말과 동시에― 암살자의 머리가 터졌다.

 

“뭐, 뭐야!?”

“마법인가!”
“정답. 이래 뵈도 나, 마법사거든?”


펄럭! 그가 자신의 상의를 벗어던졌다.

 

그 몸에는 흉터와 문신이 가득했다.

마법의 문신, 소서러 타투. 그것은 마법진을

대신하여 바로 마법을 발동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몸에는 군살이 전혀 없었고,

오로지 피비린내 나는 전투와 가혹한

훈련으로 만들어진 근육만이 있었다.

 

마투사(魔鬪士)

 

격투기와 마법을 동시에 쓰는 전사.

넓은 제국에서도 몇 명 되지 않으며,

한 명, 한 명이 전술 병기로 취급된다.

 

몸값 귀하다는 기사보다도 훨씬 고급 

인력으로 취급받는 존재.

 

암살자들은 일이 단단히 틀어졌음을

깨닫고, 동시에 그에게 달려들었다.

 

“마법을 쓰기 전에 죽여라!”
“틈을 주지 마!!”

 

찰나의 순간, 조니가 씩 웃었다.

 

고작 암살자 12명만 보냈다고?

이쪽을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과열.”


푸슈욱― 그의 몸에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이어서, 그가 암살자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뭐야!?”
“어, 어디―”


퍼억! 암살자의 몸뚱이가 폭발하듯 찢어졌다.

 

“빠, 빨라!”
“힉!”

 

투두두두―! 그의 연타에 또 다른 암살자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절삭!”
“어?”


키잉! 손날이 목 끝에 스치자, 암살자의

목이 뎅겅 잘리며 머리가 떨어졌다.

 

“너, 너무 강해! 이 녀석!”
“이런 괴물이 있다고는 못 들었다고!!”


약하다.

이런 허접한 것들을 암살자라고 보냈다고?

그는 어쩌면 이게 함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곧 생각을 바꿨다.

 

에레스투스 드 유스타겐, 제2황자.

놈은 의심만 많고, 능력은 없었다.

아마 조니의 존재도 몰랐을 터였다.

 

욕심, 의심, 허영심의 덩어리 같은 남자.

 

―정원에는 필요 없는 쓰레기다.

 

“철완!”


까앙!! 칼날이 그의 팔에 맞아 뚝 부러졌다.

 

“헉.”

“뒈져!!”

 

콰득! 암살자의 안면이 그대로 뭉개졌다.

 

―너무 강하다.

 

기사라도 한꺼번에 덤비면 충분히 죽일

수 있을 텐데, 이 남자는 강해도 너무 강하다.

 

“여기서 탈출해야―”
“이미 늦었다고, 멍청이들아.”

 

그들은 등 뒤에 있는 ‘결계’를 만졌다.

투명한 막이 있었다. 아주 얇지만, 무슨

짓을 해도 찢거나 뚫을 수 없었다.

 

“이, 이건?”

“결계. 이 안은 보이지도 않고,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도 밖으론 새어나가지

않아.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냐?”

 

조니가 씨익 웃었다.

 

“아무도 모르는 죽음을 맞이해라, 벌레들아.”
“흐, 흐아아아악!!”


―학살은 5분 뒤에 끝났다.

 

암살자들은 그에게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하고, 전신이 찢기고 으깨져 죽었다.

 

“후우, 오랜만에 몸 푸니까 좋네.”

 

조니가 피 묻은 손을 털며 말했다.

약하다. 암살자라 부르기도 애매할 정도로.

 

‘이건 아마 견제 정도겠지.’

 

아르마는 다른 형제, 자매들에 비해서 그

위험도가 낮았다. 기반 세력도 없는 황녀에게

괜히 힘을 빼고 싶진 않았을 터였다.

 

이것도 아마 찔러보고 안 되면 말지, 식으로

필요없어진 암살자들을 보낸 것이리라.

 

“어이, 베스카.”

“뻐꾸기 사냥은 벌써 끝났어?”


그녀가 결계를 해제하며 걸어왔다.

 

제국 첩보부 요원, 베스카.


그녀의 임무는 조니의 호위를 보조하는 것.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이는 그와 첩보부

고위층뿐, 나머진 그녀가 아카데미에 다니는

외국 학생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우와, 또 치우기 힘들게 해놨잖아.”
“미안, 미안. 모처럼 날뛰어서 신났거든.”

“치우는 사람 생각 좀 해주면 좋겠네.”


포식충.

 

그녀가 손짓하자, 사람 머리통만한 벌레가

나타나 시체를 우적우적 씹어 먹기 시작했다.

 

“황녀님은?”

“코― 주무시는 중. 왜? 걱정돼서?”
“그게 내 할 일이잖아.”

 

휙, 베스카가 조니에게 수건을 던졌다.

피나 좀 닦으라는 뜻이었다.

 

“하여간 그 자식은 왜 그 모양인지 몰라.

딱히 위협하는 것도 아닌데, 무작정 의심하고

자기 여동생을 죽이려고 하다니.”

“원래 그런 놈이니까. 그보다, 괜찮겠어?”

“뭐가.”

“황녀님한테 말 안 할 거냐고.”


섬뜩한 기운에, 베스카가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화내지 마, 그냥 해본 말인데.”
“황녀님은 아무것도 몰라야 해. 끝까지.”

“네가 오빠라는 사실도?”


조니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진짜 화났구나. 그녀가 손을 저었다.

 

“그래도 알 필요는 있지 않을까 싶은데.”

“알아서 뭐해? 애초에 난 사생아라고.

아르마는 아무것도 몰라도 돼. 이상.”

“알겠어, 그럼 내일 보자.”

 

조니가 그녀를 두고 자리를 떠났다.

 

‘그래, 몰라도 돼. 아무것도.’

 

창녀가 낳은 사생아, 아무도 원치 않은 아이.

 

그럼에도 그는 살아남았다.

 

재능이 있었다, 집념도 있었다.

황제가 보낸 요원이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가르쳐준 후, 그는 내심 기대했다.

 

어쩌면 자기도 황가의 일원으로 인정받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평생 정체를 숨기고 황가를 위하여

봉사할 기회는 주어졌다.

 

“오, 다행이다. 깨어나진 않았네.”

 

그가 방문을 열고 들어가며 말했다.

황녀는, 아르마는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이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황제는 아르마를 지키라고 명령했고, 

그는 그 명령대로 했다.

 

허나 단지 명령이기 때문에 따른 건 아니었다.

반해버렸다. 자신의 동생에게, 그 아름다움에.

 

처음으로 생긴, 진짜 가족.

아르마는 그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평온하고 행복한 삶을.

정원에 들어오는 나쁜 것은, 그가 모조리

제거할 것이다. 

 

“잘 자, 동생아.”


그가 아르마의 이마에 키스한 뒤 말했다.

 

 

 

 

 

“―끄응.”

“일어나, 일어나! 황녀님, 지각하겠어!”
“힝, 오늘 그냥 쉬면 안 돼?”


아르마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왠지 모르게 오늘따라 영 피곤이 가시질

않았고, 방에 피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생리할 때는 아직 멀었는데.

그녀가 침대에서 일어나며 생각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황녀님, 진짜

빡대가리야? 생각 좀 하고 말해, 응?”

“이씨! 빡대가리 아니라고!”

“자, 얼른 와. 머리 빗어줄 테니까.”

 

아르마가 화장대 앞 의자에 앉았다.

이어서 조니가 능숙하게 머리를 빗어주고,

머리에 장신구도 꽂아주었다.

 

‘히히, 난 오늘도 예쁘구나.’

 

그녀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거울을 보며

생각했다.

 

‘조니도 그렇게 생각해주면 좋겠는데.’

 

아르마는, 조니를 좋아했다.

 

조니뿐이었다. 모두가 그녀를 떠나갈 때에도

그만큼은 언제나 그녀의 곁을 지켜주었다.

 

약혼자가 있는 몸이라지만, 그까짓 건

사랑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씁, 근데 어떻게 해야 꼬시지.’

“황녀님, 어제 몰래 과자 먹고 잤지?”
“아, 아니거든? 증거 있어?”

“입가에 과자 가루 다 묻었어.”


아.

그녀가 입가에 묻은 가루를 털었다.

 

“하여간……하이고오, 누가 이런 모질이를

데려간다는 거야. 우리 불쌍한 루덴부르크

왕자님, 이런 바보를 마누라로 삼아야하다니.”

“씨이, 나 개랑 결혼 안 한다고!”
“네네, 그러시겠죠.”


하지만 조니는 그녀를 아이로만 보고 있었다.

이래선 안 된다. 이쯤에서 변화가 필요했다.

 

“조, 조니!”
“음?”
“쪼……쪼옥…….”

 

황녀가 키스 날리는 시늉을 했고.

이어서 조니가 눈살을 확 찌푸렸다.

 

“죄송합니다……제가 무슨 죄를 그렇게

지었는지는 몰라도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어, 어어?”

“황녀님, 제가 평소에 갈구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너무하지 않아요?”

“아이 씨! 반응이 왜 그따구야!?”

 

황녀가 난동을 부리자, 조니가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꾹 짓눌렀다.

 

아무것도 모르는 황녀님.


그녀는 자신만의 정원사를 사랑하고 있었다.

 

 

 



 

 

 


 

 



근친 순애도 역시 순애 아닐?까

데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