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라이브


트리트먼트 형식으로 걍 싸갈긴거라 여기저기 엉성한게 보일거임. 양해좀.

빌드업이나 여러가지 좀 더 깔끔하게 하고싶긴 한데 필력 구려서 걍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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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붕이는 매니저가 되기 전 작곡가였다.

중소 연예 기획사에서 프로듀싱을 했다는 나름 그럴듯한 이력이 있지만

사실 아웃소싱 업체의 직원처럼 작곡했던 곡들은 기획사에게 착취당했고 정당한 보상을 받지도 못했다.

얀붕이는 월급마저도 제대로 받지 못해 생활고에 시달렸다. 설상가상으로 집안 빚이 늘어나 퇴사하고 작곡을 잠시 접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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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백수가 된 얀붕이는 돈을 벌기 위해 여러가지 일을 찾아보는데

대형 매니지먼트에서 일하고 있던 지인이 얀붕이에게 매니저 일을 제안하고

얀붕이는 넙죽 제안을 수락하여 새로이 매니지먼트 업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얀붕이는 나름 연예계 근방에서 뒹굴었기에 가요계에 대해선 빠삭했고 인맥도 있었다. 회사에서도 이를 높게 쳐주었다. 그래서 음원 발매만 하면 차트를 올킬하는 걸그룹의 로드매니저로 배정받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얀순이를 만나게 된다,

이전부터 워낙에 사람에 치이고 살았던 얀붕이는 어느정도 인간 관계의 트러블엔 맷집이 있었고

그 덕에 온갖 갑질에 시달려야 하는 매니저 일을 나름 수월하게 버틸 수 있었다.

다만 얀순이가 그를 유독 힘들게 했다.

얀순이의 미모나 인기는 그 그룹에서 탑 아니 모든 걸그룹 중에 탑이라고 기자들이 사석에서 떠드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다른 멤버들도 있었기에 얀붕이도 고개를 끄덕이진 않았지만 내심 동의했다.

헌데 그만큼 성격이 앙칼지면서도 예민했고 자기애가 굉장히 강한 성격이었다.

뭐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기가 맘에 안 드는게 있으면 무슨 짓을 해서도 원하는 대로 바꿔야 했고

자기가 먹고싶은거는 언제 어디서든 갖다 바치길 원했다.

그녀의 감정은 열대우림의 하늘마냥 변덕이 심했다.

매니저를 무슨 장난감이나 화풀이용, 감정 배수구정도로 취급하며 하대했다.

얀순이는 기분이 나쁘지 않아도 그저 '재미'로 매니저를 괴롭힐 때도 있었다.

그녀는 독특한 취향이 있었는데 바로 비 맞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가 아니라 매니저가 맞는 것 말이다.

그녀는 매니저가 비에 홀딱 젖은 채로 벌벌떨며 자기를 기다리는 것에 재미를 느꼈다. 그래서 비오는 날에는 유독 밖에 나가야 하는 심부름을 자주 시켰다. 매니저는 그녀에겐 소모품이었기에, 다치고 고통받아도 그녀에겐 별 감흥이 없었다.

얀붕이는 언제부턴가 출근 전 일기예보를 보며 비옷과 여분의 옷을 챙기는게 루틴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청아하고 고고한 외모와는 다르게 악랄하고 영악했다, 

얀순이는 고아에다 고립된 연습생 생활로 외로운 유년시절을 보내 내면이 불안정했었다.

얀순이 때문에 매니저들은 대부분 삼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그러면서도 방송에선 그녀는 여리고 순한 소녀로 돌변했다.


얀붕이는 그녀의 성격때문에 처음 한 두달정도 고생했지만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얀순이의 기분을 맞춰주는 법을 터득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그녀가 원하는대로 다 해주는 것이다. 

동료들이나 회사 직원들이 보기엔 이 일이 얀붕이에게 잘 맞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얀붕이는 워낙 인간에 데이고 살아서 이미 감각신경이 썩어 문드러진 곳을 더 지져봐야 고통이 덜해서 버틴 것일뿐. 

사실 그의 몸과 마음도 남들처럼 망가지는 건 똑같았다.


얀붕이는 얀순이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얀순이에 대한 건 위키든 뭐든 과거 인터뷰까지 다 뒤져서 취향 가정환경 식습관 심지어는 어떤 동물을 좋아하냐 하는 것까지 다 연구해서 얀순이를 물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전부 만족시키려 노력했다.

퇴근 후에도 시간을 투자해 얀순이에 대해 공부했다.


얀붕이가 이렇게 필사적으로 노력한 것에는 그가 가진 집안빚도 있었지만 얀순이에 대한 사랑도 한 몫 했다.

그냥 일로 대하기엔 그녀가 너무 아름다웠던 것이다. 

매니저와 연예인의 관계에서 이성의 마음을 가지는건 절대 금기이기도 했다. 

매니저 일이 처음인 얀붕이는 이걸 알았지만 일이 미숙해서 지키지 못 했던 것이다.

그녀와 함께하면서 그녀에 대한 마음이 점점 커졌다.

하지만 얀순이 주변에는 존잘 배우 모델 재벌들이 우글거렸고 그정도 되는 남자여야 그녀에게 '사람'취급을 받았다.


연예계 생활을 오래한 얀순이는 눈치가 정말 귀신같이 빨랐다. 

심지어 얀붕이가 자신을 좋아하는 걸 눈치 채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것까지 이용해서 얀붕이의 마음을 철저하게 짓밟았다.

잘생긴 배우와 꽁냥거리며 얀붕이를 불러서는 그렇게 생겨먹어서 살기 힘들겠다는 식으로 조롱하고 

얀붕이보다 한참 어린 걸그룹이 있는 대기실에 불러서는 바닥이 지저분하니 손으로 걸레질 하라 시키기도 했다.

자기가 마시는 브랜드 생수가 아니라고 리허설 중에 물을 그의 얼굴에 끼얹기도 했고

얀붕이 폰에 노출 사진을 몰래 넣고는 스탭과 코디가 있는 앞에서 공개시켜 인간 쓰레기로 만들기도 했다(매니저 올때마다 그 짓거리 해서 다들 실상이 뭔지 알고잇엇지만)

넌 할 줄 아는 게 남 수발 드는 것 밖에 없냐고 얀붕이의 가치를 깔아뭉개기도 했고

심심하면 얀붕이에게 모멸적인 말을 퍼부었다. 

그렇게 얀붕이의 연심을 오랜 기간에 걸쳐 철저하게 망가뜨렸다.

얀붕이는 그래서 얀순이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 아니, 접는다기보단 짓이겨져서 회복불능의 상태가 된 것에 가까웠다.

톱스타인 그녀에게 매니저니 스탭이니 뭐니하는 떨거지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얀붕이는 이를 깨닫고 절망했고 오래지 않아 모든걸 받아들였다. 


*

얀순이의 그룹도 얀붕이가 서폿하는 1년 새에 동아시아권 나라의 음원차트를 싹다 점령할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고

얀순이의 악랄함에 골머리를 앓던 회사에서는 드디어 임자를 찾았구나 싶어 얀붕이에게 얀순이의 단독 활동을 서포트하는 일을 맡게 했다.

그렇게 얀순이와 단 둘이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 뒤로 얀붕이와 얀순이는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모든 걸 함께하게 된다.

얀붕이는 그녀에 대한 연심이 망가졌어도 일을 절대 대충하지 않았다. 

얀붕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가 무슨 짓을 해도 얀순이 곁을 지켜주었다.

매일 아침 그녀의 집 앞에 마중나왔고 매일밤 그녀가 안전히 집에 들어가게 해주었다.

그녀가 몸살이 나면 본인이 나서서 관계자들의 욕을 받아가며 스케줄을 취소하고 밤새도록 그녀를 간호했고

악성 루머가 퍼지고 소속사까지 술렁이던 와중에 앞장서서 그녀를 변호해주었다.

공항에서 인파가 몰려 라인이 무너졌을 때도 자신의 몸을 던져 그녀를 지켜냈다.

해외에서 극성팬이 흉기를 들고 달려드는 걸 심각한 부상을 당해가면서까지 막아내기도 했다.

얀순이는 자기만을 생각해주는 매니저 얀붕이에게 가랑비에 옷이 젖듯 깊은 감정에 빠져버렸다.

그녀는 근데 이 감정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그녀에게 이건 사랑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사랑은 조금 달랐다.

얀순이는 잘생긴 영화배우, 모델, 재벌들과 어울리기도 했지만 정식으로 교제한 적은 없었다. 서로 게임하듯 밀고당기다가 남자가 못참고 사랑을 고백하면, 흥미가 확 식어버려 즉시 내동댕이 쳤다.

얀순이에게 사랑은 바로 이런 거였다. 가지고 놀다 단물빠지면 버리는 것.

그래서 그녀가 얀붕이에게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이해하기도 납득하기도 힘들었다.

한 번은 그런 적이 있었다.

비가 많이 오던 날.

촬영을 마치고 세트장 밖에 나오자

얀붕이가 비에 홀딱 젖은 몸으로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에게 와서 우산을 씌워준 것이다.

얀붕이는 그러고 얼마나 서 있었는지 얼굴은 창백해지고 입술은 시퍼렇게 변해 있었다. 추위에 팔이 떨리는 걸 억지로 참으려 드는게 애처롭게 보였다.

그녀는 소모품들이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망가질수록 즐거워했다. 다른사람이 그랬다면 얀순이는 재밌어했겠지만

그녀는 얀붕이를 보고 돌연 미칠듯 아파온 것이다.

그가 느끼는 한기, 고통, 아픔, 쓸쓸함 같은 아린 감각이 그대로 자신에게 전해져서 가슴이 너무 저릿했고

무언가 울컥 올라오는 바람에 눈물이 뚝뚝 떨어진 것이다.

배터리나 필터처럼, 소모품 역할에 지나지 않았던 얀붕이가 어느새 그녀의 마음 속 큰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얀순이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나 자신이었는데, 그게 하나 더 생긴 것 같았다

그게 웃으면 자신도 웃고, 아프면 자신도 아프고, 그게 슬퍼하면 자신도 슬프고

그게 다른 여자에게 떠날 걸 상상하면 나라는 존재가 처참하게 두동강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과 가까워질수록 자신이 완전해지는 것 같았다.


*

얀순이 본인은 얀붕이를 분신처럼 느꼈는데

정작 얀붕이는 다르게 느끼는 것 같아 얀순이는 무척이나 아프고 괴로웠다.

자신이 웃으면 얀붕이도 웃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고

자신이 슬퍼하면 얀붕이도 슬퍼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얀붕이는 심지어 언제부턴가 얀순이를 향해 단 한번도 미소짓지도 않았으며

차를 타고 이동할때나

대기실에 있을때나

회의를 할떄나

둘이 있을 때면 그는 항상 매말라 있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형식적인 미소만 보일 뿐이고 얀붕이의 마음은 동떨어진 어딘가에 향해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얀순이는 이 괴리를 없애기 위해, 자신 안에 들어온 얀붕이를 밀어내려고자 그를 더욱 모질게 대했고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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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갈 수록 얀붕이는 얀순이에게 질리는 걸 너머 일 자체에도 지독한 회의감과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새 해외 일정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고

휴식기에 접어들게 되고 스케줄이 널널해지자

얀붕이는 무언가에 홀린듯 다시 작곡을 시작하게 되었다.

가끔 있는 일정이야 cf, 화보같은 게 전부라 얀붕이는 혼자 대기하는 시간이 많았고, 그럴때마다 끄적끄적 곡을 적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잠들어 있었던 열망들이 활기를 얻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짬짬히 멜로디를 적고 집에 가서는 악기를 만지고 프로그램에 입력하고 

운전하면서 코드와 가사들을 생각하고.

그렇게 조금씩 작품을 하나씩 완성해 나갔다.

그간의 변고 때문이지 그의 작품은 이전과 달리 깊이와 울림이 있었다.

그렇게 짬내며 작업하면서 몇몇 곡들을 완성하게 되고 여러 기획사에 자신의 곡을 투고하게 되었다.

얀붕이는 이젠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 할 때라고 믿었다.


*

얀순이는 명품 화보 촬영을 예상보다 일찍 끝마치고 얀붕이가 대기하는 차로 돌아갔다.

사실 얀붕이와 단 둘이 있고 싶어서 무리하게 일을 끝마친 것이었다.

얀붕이는 다른 잡다한 일들 때문에 밤을 새고 운전석을 뒤로 젖힌채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얀순이는 조수석에서 얀붕이를 조용히 감상하다 얀붕이 폰에 연결된 이어폰에서 나오는 소리에 주의가 끌렸다.

얀순이는 폰을 슬쩍해서 자신의 귀에 꼽았고 얀붕이가 작곡한 음악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얀순이는 놀라고 당황스러워 몸이 굳어버렸다.

그녀는 작곡한다고 뭔가 끄적거리는 걸 그냥 심심풀이나 취미 정도로만 취급했었다. 그리고 그걸 주제넘는 짓이라고 놀리기도 했다.

하지만 얀붕이는 프로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유명 기획사 소속 탑 프로듀서들과 견줄 정도로

얀순이는 갑자기 너무 혼란스러워졌다.

얀붕이는 언제까지나 자신의 매니저로 남아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매니저가 아닌 얀붕이는 상상이 가질 않았고 상상하고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얀붕이 폰에 쌓인 메시지들을 염탐하게 된다.

그녀는 충격에 휩싸였다.

얀붕이의 곡들 받았던 여러 기획사에서 컨텍을 요청했던 것이다.

얀순이와의 분리가 물밑에서 구체화되고 있던 것이다.

그녀는 얀붕이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이렇게 차에서 단 둘이 있는 시간

자신의 집 앞으로 매일 데리러 오고, 같이 밥을 먹고, 자신과 항상 붙어있는 일상들. 

그리고 얀붕이를 밀어내면서도 은연중 갈망해왔던 관계의 진전은 더이상 없을 거라 느끼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얀붕이를 자기 곁에 묶어둘 강제력이 없어질거라는 게 얀순이를 두려움에 떨게했다. 

얀순이는 얀붕이에게 애정 미움 분노 배신감 집착 이 모든게 뒤섞여 휘몰아치는 격정을 느끼게 된다.

그동안 얀붕이에게 애정을 감추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얀순이의 정신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긴다.

탑스타가 되고 슈퍼카 명품의류 펜트하우스같이 갖고싶은 건 뭐든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반쪽인 얀붕이를 가질수 없다니. 얀붕이가 떠나는 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얀순이는 이런 격정 속에서 사실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다.

세상 모든 이의 사랑과 관심을 받지만 정작 그녀는 어떻게 사랑하는지는 몰랐다. 

그래서 어딘가 어긋난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얀순이는 이 모든게 작곡 때문이라고 여겨버린 것이다.

작곡을 못하게 하면

작곡을 포기하게 만들면

탈출구를 막아버리면

다시 매니저 일에 집중하게 되고

얀붕이가 다시 자신만을 생각하게 될 거라고 생각해버린 것이다.

사실 얀순이의 내면 깊숙한 곳에선 이게 틀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동안 저질러 온 것을 전부 되돌리고 얀붕이의 마음을 회복하고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얀붕이는 자신에게 질려서 떠날거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도무지 인정할 수 없었다.

그 진실이 너무 절망적이어서 얀순이는 외면해버렸다.

얀순이는 그 후로 스케줄을 무리하게 늘리게 되었다.

그 덕에 얀붕이는 잠도 두 세시간 정도 잘 정도로 엄청나게 바빠져 버린 것이다.

거기에 얀순이는 일을 더 힘들게 만들기까지 했다. 

지각을 한다거나, 심부름을 시키고는 갑자기 말을 바꾼다거나 연락도 없이 실종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얀순이는 잠적할 때마다 수십통씩 걸려오는 그의 전화, 그리고 애타게 자신을 찾는 얀붕이를 보며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고 믿었다. 

이렇게 자신만을 찾는 얀붕이가 갑자기 떠나갈 일은 없을거라고.

관계자들은 톱스타 얀순이에겐 뭐라 할 수 없으니 만만한 매니저만 들들 볶아 얀붕이를 더욱 고통케 했다.

이런 기행에 얀붕이는 혼신을 다해 얀순이에게 하루종일 찰싹 붙어 케어했고

얀순이는 자기에게 꼭 붙어 있는 얀붕이를 보고 안도하고 행복해했다.

하지만 얀붕이의 속내는 달랐다.

갑자기 악의적으로 자신을 힘들게 하는 얀순이를 보며

어떤 이유에선지 그녀가 자신을 더더욱 싫어하게 됐다고

그래서 일을 그만두게 할 껀덕지를 만들고 있다고, 자신을 절벽으로 밀어넣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얀붕이의 마음은 영원히 떠나버리고 만다.


*

어느날 방송국 복도를 지나던 와중에

한 여자를 마주치는데 그녀가 얀붕이를 아는 척을 했다.

그녀는 한창 떠오르고 있는 예쁜 솔로 여가수였고, 얀붕이에게 컨텍을 보냈었던 회사 소속이기도 했었다.

그러고는 발그래한 얼굴로 얀붕이에게 그쪽이 만든 곡 마음에 든다, 같이 작업하고 싶다, 번호좀 달라 그러며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이다.

그러다 작곡은 어디서 배웠냐 신기하다 몇살이냐 하며 질문이 오고갔고

그녀는 얀붕이가 매니저 일을 하기 전부터 쭉 눈여겨보고 같이 곡 작업을 하고 싶어했던 걸 알게 된다.

얀붕이는 자신의 과거를 기억해주는 사람을 만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듯 무척이나 기뻤다.

서로의 목소리가 복도 가득히 울릴 정도였고 마침내 휴게실로 자리를 옮겨 긴긴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 둘은 처음 만났는데도 마치 오랜 친구나 연인처럼 잘 맞는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둘은 자석처럼 서로에게 이끌리는 걸 느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모습을 얀순이가 멀찍이서 목격하게 되었다.

얀순이는 얀붕이가 보고싶어 그새를 못참고 촬영하다 말고 몰래 튀어나왔지만

얀붕이는 어딘가로 사라져 있는 것이다.

화가났던 얀순이는 초조한 얼굴로 얀붕이를 찾아다녔고

휴게실 너머로 들리는 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녀는 자신이 직감한걸 완전히 부정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 모습을 멀찍이서 마주하게 된다.

얀붕이가 다른 여자랑 히히덕 거리는 걸 보고 돌처럼 굳어버린다.

얀순이는 얀붕이가 그 여자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얀붕이가 매니저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에게 보였던 발그레하고 수줍은 소년같은 미소.

언제부턴가 자신에겐 두번다시 보이지 않는 그 미소를 띠고 있던 것이다.

심지어 얀순이와 그는 2년 가까이 함께했는데 그가 그토록 즐거워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자신과 함께할땐 단 한 번도, 1초도 보이지 않았던 모습.

둘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진해질수록 얀순이의 눈은 점점 죽어갔다.

얀붕이는 그녀가 갈 수 없는 다른 세계에서 행복해하고 있었다.

그 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징검다리를 자신이 불태웠다는 생각에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얀순이의 가슴은 무참히 난도질 당하는 것 같았다.

얀붕이의 대화 상대를 보고는 살면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진심으로 찢어죽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얀순이는 대화 도중에 끼어들어가서는 얀붕이의 멱살을 잡고 끌고 나와버렸다. 

더 놔두었다간 얀순이의 이성이 끊어져 정말 무슨 짓을 벌일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고 그를 비상계단으로 밀어넣고는 얀붕이의 따귀를 때렸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려서

또 때리고, 다시 때리고, 더 세게 또 때리고

그러면서도 오히려 때리는 쪽인 얀순이의 눈이 붉어지고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얀순이는 자기 마음이 이렇게나 아픈데, 정말 죽을듯이 아픈데

그 원흉이자, 자기의 분신인 얀붕이가 아무렇지 않다는게 너무나도 분했고 그가 너무도 미웠다.

그래서 너도 느껴보라고 따귀를 때리고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연신 내려쳤다. 

때리고. 때리고, 때리고...

얀붕이는 시체같은 얼굴로 맞기만 할 뿐이었다.

얀순이는 이런 것들로는 한없이 부족하다는 걸 느끼고는 그를 계단 아래로 밀어버렸다.

이렇게라도 해야 그를 다른 세계에서 끌어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계단을 구른 얀붕이는 다행히 무릎과 정강이, 팔꿈치가 좀 까지고 손목 인대가 늘어난 정도의 부상만 입었다.

얀순이는 가혹하게도 그에게 회복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는 손목에 깁스를 하고 바로 다음날 출근을 해야 했다.

얀순이의 내면은 그 일 이후로 심각하게 흔들렸다. 분리불안도 더욱 심해졌다.

얀순이는 얀붕이의 동선 자체를 제한하고 묶으려 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없을땐 어디어디에만 있으라고 구체적으로 명령을 하고 떠났다.


그녀는 얀붕이의 몸에다 표식을 남기는데에 점점 집착했다. 자신의 것이라는 표시를 남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처음에 시도한 건 향이었다.

얀붕이가 쓰는 샴푸를 자기가 쓰는 것과 같은거로 바꾸게 하고

자기가 쓰는 수백만원짜리 명품 향수를 매일, 코가 아플정도로 얀붕이에게 뿌려댔다. 

거기에 자신의 체취와 화장품 냄새가 배도록 실수인척 몸을 부벼대기까지 했다.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만나는 몇몇 예민한 사람들은 같은 향이 나는것에 약간 흠칫하는 낌새를 보이긴 했으나

얀순이에겐 많이 부족한 것 같이 느껴졌다.

향은 너무도 금방 날아가버렸고 같이 일하다 보면 몸에 배일수도 있다 여기기도 할테니 말이다.

'내꺼'라는 표식으로 쓰기엔 더 강한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녀는 얀붕이의 몸에 조금 더 직접적인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건 흉터였다.

시작은 팔뚝을 좀 꼬집는 거였다. 허연 피부 아래에 붉은 자국이 남도록

거기서 만족이 안 된 얀순이의 행동은 점점 과감해져 갔다. 애초에 계단에서 밀어버리며 스타트를 크게 끊었던지라 그녀는 거리낌이 없었다.

팔뚝에는 시퍼렇게 멍이 들게 한 건 기본이었고

등이랑 배, 허벅지에까지 영역을 넓히고 할퀴어서 손톱자국을 남긴다거나

다른 여자랑 조금의 터치가 이루어지면 구두로 발을 찍는다던가 비상계단으로 불러서 이상한 이유를 대며 따귀를 올려버린다던가

얀순이도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걸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인지하고 있었다. 

얀순이에겐 다른 길이 없었다. 처음부터 돌아가는 길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차라리 얀붕이의 마음이 완전히 무너지길 바랬다. 그러면 자신이 통제할 수 있으니까.

매지니먼트 관계자들도 이런 얀순이의 과잉행동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다. 얀순이는 매니지 팀장, 본부장, 심지어 부사장까지 쩔쩔맬 정도로 수퍼갑 거물이 되어 있었다. 

얀붕이가 아니면 얀순이를 감당할 사람도 없었다. 


짧은 기간동안 얀붕이의 몸과 마음 모두 심각하게 피폐해졌다. 

회사에서는 얀붕이에게 강제로 거액의 돈을 먹이고 비밀유지 각서를 작성캐 해 입을 막아버렸다.

고삐가 없는 얀순이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점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상처를 주기위해 얀붕이의 몸을 터치했지만 기분이 이상해져서 자꾸만 그의 몸을 만지는 빈도가 많아진 것이다.

얀순이에겐 이런 중독적인 감정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숙직실이나 차 안에서 깊은 잠에 빠진 얀붕이의 머리와 얼굴을 몇십분씩 쓰다듬는다거나. 

목에다 키스마크를 남기기도 했다.

매일 아침 샵에 가기전 자신의 머리를 얀붕이가 직접 빗도록 시키고

자신의 목과 어깨 마사지하게 시켰고. 점차 허리와 골반까지 영역을 넓혔다.

얀순이는 욕망에 점점 중독되었고 과감해졌다.

어쩔때는 회식으로 술에 쩔어 숙직실에 잠든 그의 몸 위에 올라타서 잠을 청하기도 했고

수면제도 조금씩 활용하기 시작했다.

한단계 한단계 강도가 올라갈수록 심장이 찌릿한 감각은 배가되었고

전단계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얀순이는 날을 잡아서 오후 스케줄을 싹다 비워버리고

수면제 범벅을 한 음료수를 얀붕이가 마시게 했다.

그녀는 으슥한 지하주차장에 세워진 미니밴 안에서, 정신을 잃은 얀붕이와 단 둘이 있게되었다.

그녀는 상기된 얼굴로 얀붕이의 옷을 한꺼풀씩 벗겨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