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이라고 뭐든 특별할 것 같은가?


'돈으로 뭐든지 살 수 있어'라면서

관심가는 남자 싸대기를 현찰다발로 때리고


봉지라면을 먹으면서

‘이게… 서민의 라면?’같은 대사를 치는건

TV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다.


“야, 어제 막내아들 봤어? 너네집도 그래?”

여자의 친구가, 등교하자마자 여자를 부여잡고 물어본다.


“봤지 봤지, 지랄은, 우리집에서 그랬다간 바로 매타작이야”


“너네 어머니, 엄청 기풍 있으시던데, 때리기도 하셔?”


“야, 그거 다 카메라 앞에서만 그러시는거야, 엄마도 아침엔 수면양말에 수면바지입고 머리 산발에 하품이라고”


“뭐.. 너만 봐도 양갓집 규수하곤 거리가 한참 멀긴 하다”


“내가 뭐? 어때서? 이게~”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를 보며,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사치를 부리지 않는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극적인 소설처럼 막나가는 것도 아니다.


친구들이 갤럭시 탭을 쓸 때 

자신은 아이패드 프로를 쓰는정도의 사치.

초등학교때 우유에 네스퀵을 자유롭게 넣어먹던 사치.


그래봤자 학생이고, 어린아이다.

수요일날 급식이 기대되고

잘생긴 아이돌이 좋고

친구들과 지하철에서 왁자지껄 떠드는게 일상인 여자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서 본 것과, 경험한 것이 많아

자신감도 넘치고 성적도 좋다.

가정교육도 철저한지 예의도 바르고 친구들과의 사귐도 좋다.

그녀의 돈과 집안배경을 보고 접근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으나,

그녀의 곁에 남아있는 친한 친구들은 그녀 자체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그녀의 무리엔 잘사는 집도, 못사는 집도, 성적이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인다.


형편이 어려운 친구에겐 '계열사'의 괜찮은 알바자리를 소개해 준다.

공부를 못하는 친구와 함께 잘하는 친구에게 수학문제를 물어본다.


활기차고 호기심 많은 그녀에겐 연애 또한 관심사중 하나다.

비록 자신에겐 마땅한 기회가 없었지만, 친구들의 연애사에는 두 눈을 반짝인다.


자신의 친구들처럼, 자신에게도 백마탄 왕자님 같은 남자가 올까?


친구들에겐 조언이랍시고 확 자빠뜨려라, 그런 쓰레기같은 놈 차버려라 소리를 치지만,

그녀는 막상 자신의 연애에 있어선 초짜고 쑥맥이다.


그래, 쑥맥이다.

처음으로 자신의 배경이 아닌, 자신을 바라봐주는 남자가 나타났을땐 여자는 어쩔 줄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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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중위소득보다 하위소득이 가까운 집안의 둘째다. 


부모님은 얼마 없는 가산을 첫째에게 몰아준다.

언제나 형은 새 옷, 새 신발, 새 문제집을 받는다.

과외까진 힘들어도, 형은 대치동에 있는 학원까지 다니지만, 막상 남자는 온라인강의나 겨우 들으며 수능을 준비한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형이란 사람이 드라마에 나오는 등장인물처럼 못되먹지 않았다.

장남으로써의 책임감을 버거워하고

항상 뒷전으로 밀려나는 자신의 동생이 안타깝다.


맏이로써 느끼는 막중한 책임감과 동생에 대한 죄책감을, 동생을 살뜰히 챙기는 것으로 덜어나간다.


자신이 쓰던 문제집은 항상 깨끗하게 쓰면서, 중요한 부분은 형광펜으로 체크해주고.

옷이나 신발은 언제라도 동생이 쓸 수 있도록 깔끔하게 사용한다.

맛있는 반찬을 어머니가 제 앞에 놓아주기라도 한다면, 꼭 하나씩 집어 동생의 밥그릇에 올려준다.


이러한 배려가…어쩌면 남자에겐 다행이 아닐지도 모른다.

차별대우를 받는것에 익숙해 하면서도,

남이 챙겨주는 것을 당연시 잘 받아들인다.


막나가는 어리광쟁이가 되진 않았지만

자기주장이 약하고 소심한 사람으로 자라난다.


그런 남자가 처음 자신의 힘으로 해본 것이

대학을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다.


말이 좋아 온라인 강의지, 좋은 대학을 나온 형이 48시간동안 상시 대기중인 단독과외다,

남자는 유명 국립대학의 사회복지학과에 입학 할 수 있었다.


부모야 학비가 적게 나오고, 여차하면 학자금대출로 쉽게 전환할 수 있는 국립대학이 좋지만,

힘들기만 하고 별로 돈이 되지 않아보이는 사회복지학과가 맘에 들지 않는다.


"얘, 성적도 충분한데, 너도 형처럼 이공계를 가는게 어떻겠니?"

수능 성적표를 앞에 두고, 남자의 부모가 남자를 훈계한다.


"하..하지만 나도…"


왠일인지, 남자가 뜻을 굽히지 않고 버틴다.

남자의 친형은, 뒤에서 가만히 지켜볼 뿐이다.


"사회복지학과 나와서 뭐 해먹고 살려고, 요즘 취업도 힘든데… 평생 요양원에서 남 뒤나 닦아 주려는 거니?"

남자의 어머니는 머리를 감싼채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그게 아니라"

남자는 부모에게 설명하려 하지만


"고집부리지 말고, 부모님 말 들어. 너도 형처럼…"

부모는 이미 결정된 사안이라는 듯이, 남자의 이야기를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좀, 적어도 동생 이야기라도 들어보셔…"


보다못한 형이 나서서 부모를 제지한다.

하려고 했다.


"갈꺼야!!"

남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를 지른다.


"이.. 이번만큼은 양보 못해요. 나도, 나도 생각이 다 있다구요"

처음으로 소리를 지르는 남자의 모습을 보고, 온 가족이 벙 찐다.

 

그나마 남자의 아버지가 체통을 지키려는듯 


"네가 뭘 안다고 그래? 어른들 말씀엔 다 이유가 있는거란다."

항변해보지만


"나도.. 이제 어린애가 아니에요. 내가 할 일은 내가 결정해요.”


남자는 뜨문뜨문, 하지만 확실히 자신의 의지를 관철한다.

나서려던 형은 어쩌지도 못한 채, 뒤에서 동생을 지켜본다.


“난 내 말을 듣지 않는 자식에게 학비 안대준다.”

부모가 그나마 가진 무기인 경제권을 가지고 남자를 협박한다.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남자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자식의 성장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모.

동생을 이해함에도 도와줄 수 없는 형은, 그저 묵묵히 부모를 달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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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남자는 자신이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로 진학할 수 있었다.

시작부터 등록금을 전액 학자금대출로 메꾸었지만….


2인실 기숙사에 짐을 옮겨놓고,

남자는 생각에 잠긴다.


부모님 말씀은 솔직히 틀린 것 하나 없다.

돈은 하늘에서 떨어지는게 아니다.

하물며 복지사들은 세금이나 자선단체에서 모인 기부금으로 먹고살기 때문에

재산을 축적하긴 더욱 더 힘들다.


하지만, 남자에겐 목표가 있다.

과거의 자신과 이별하고, 이상적인 어른이 되고 싶다.

지금처럼 남들의 도움만 받고 사는게 아니라.

자립하고, 남을 돕고 사는 삶을 살고 싶다.


설령 지방 요양원 치매 노인들의 뒤처리를 하며 살더라도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삶은, 자신을 더욱 빛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위대한 한걸음을 시작한다.


“안녕~, 너도 여기 방 배정받았니? 짐 옮기는것좀 도와줄래?”


하지만 그러한 생각도 잠시, 기숙사 문이 열린다.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까무잡잡한 피부의 동년배 남학생이 들어온다.

다짜고짜 큰 소리로 인사를 하며, 남자의 짐보다 배는 많아보이는 물건을 옮겨달라고 부탁하는 룸메이트.


남자는 방금까지의 각오가 무너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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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여유가 없는 대학생활은 빡빡하다.


기숙사의 통금은 엄격하기 때문에 야간알바도 알아보지 못한다.

1학년 1학기 학생이 할 수 있는 근로장학생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형이 챙겨준 용돈은 식비를 제하고 나면 책을 사기에도 빠듯하다.


남자가 첫 학기에 장학금을 받고자 계획한다.

그나마 자신의 편이 되어준 형과 계산기를 두드려 보았을 때, 

8학기의 등록금 중 4학기 이상 학자금 대출을 받는다면

남자는 20대 전체를 이자만 내면서 손가락만 빨고 살아야 한다.


껄렁껄렁한 룸메이트는 착하지만, 시끄럽다.

4월이 지나자 벌써 여자친구가 생긴건지, 아니면 이미 사귀던 애인이 있던건지

밤마다 통화하느라 바쁘고, 주말엔 다른 학생들과 방에서 몰래 술판을 벌인다.


그나마 염치라는게 있는지 청소만큼은 깔끔히 해놓는다.


“야, 너도 주말에 같이 놀자니까~”


본지 얼마나 되었다고 말도 편하게 하고, 남자를 술판으로 끌어들이는 룸메이트


“나 일하러 가봐야 한데도.”


“그렇게 공부 공부, 일만 하다가 언제 놀려고?”


“....별 수 없는걸”


“에휴 됐다. 올 때 세제좀 사와~, 세제 다 떨어졌드라, 청소는 내가 내일 할테니까”

룸메이트는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일하러 나가는 남자의 등을 툭툭 두드려 준다.


솔직히랄 것도 없이, 남자는 자신의 룸메이트가 부럽다.

자신도 돈 걱정, 밥 걱정 없이 공부하고 남는시간엔 놀고 싶다.

저렇게 껄렁해 보여도, 고등학교 성적이 좋았으니 같은 대학에 온 것이다.

할 일도 똑 부러지게 하는 걸 보면, 필시 좋은 집안에서 자란 친구다.



학교에서 가까운 카페

언제나 테이크아웃 하는 학생들과, 공부하려는 취준생들, 잠시 숨돌리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남자는 최저시급보다 5백원 많은 돈을 받고선, 마감시간인 10시 반까지 계속 닦고 치우고 버리고 주문을 받는다.


가게 마감 후 부리나케 뛰어나가야, 겨우 기숙사 통금시간 전까지 방으로 들어온다.

스마트폰 손전등에 의지해 내일 수업준비를 한 뒤에야 잠에 든다.


주말에도 대부분을 행사장 알바나, 그마저도 없으면 도서관에서 공부를 한다.

먹고 사는게 바쁘다 해도, 과제의 마감기한을 늘려주는 교수따윈 없다.


5월이 되자 후회가 밀려온다.

부모님 말씀만 잘 들었으면, 좀 더 편한 생활을 했을까?


고개를 흔든다.

애초에 엎질러진 물이거니와, 부모님이 행여나 등록금을 내줄리 만무했다.

곧 있을지도 모를 형의 결혼식과 혼수를 위해서 아끼겠지…


그렇게 어제 밤을 새며 준비한 과제를 제출하고

수업이 끝나자 쉴 틈도 없이 카페로 향한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머그잔을 치우고 테이블을 닦는다.

허리를 한번 쭉 피고 시계를 보면,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것에 실망한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쑤실 때 즈음에야 마감시간인 다가온다.

헌데, 취객 한명과 커플 한쌍이 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미리 다가가서 나가달라고 말했다간, 클레임이 들어온다.

체인점이 아니라 직영점이기 때문에, 월급쟁이인 점장은 클레임에 민감하고 인색하다.


저번에 한 번, 라떼와 모카를 헷갈려 주문을 잘못 받았을 때,

마감시간에 점장에게 상상도 못한 욕설과 모욕을 당해야 했다.

무슨 갑질이네 어쩌네 하는 것들은 만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이야긴 줄 알았다. 

볼때마다 당하고만 있는 멍청이들이 답답했는데...


막상 자신의 목구멍이 포도청인 입장이 되자,

남자는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 폭언과 모욕에 고개를 숙인다.


이곳에서 잘린다면, 지금 시기에 다시 가까운 거리의 일자리는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0시 35분에, 밍기적거리던 커플이 드디어 매장을 나선다.

하지만 취객은… 엎드린 채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손님. 일어나세요 손님, 매장 닫을 시간입니다.”


“으….잠깐만, 어지러우니까 건들지마”


취객은 자신이 주문한 아메리카노는 입도 대지 않고선 손사레를 친다.

알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손님, 일어나보세요.”


“으…건들지 말라고…으……우욱ㅇ…”


“으악!”


중년의 취객은 결국 매장 바닥에 피자를 한 판 굽는다.

입가심으로 아메리카노를 원샷하더니


“이거…크… 미안해서 어쩌나”

남자에게 3만원을 건넨다.

비틀거리며 매장 현관을 열어제낀다.


남자는 엉망이 된 바닥을 치운다.

눈물이 난다.


기숙사로 돌아왔을 땐, 이미 통금시간은 지나버렸다.

입구에 있는 사감실 문을 두드려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벌점이 쌓이다보면 다음 학기 기숙사 입실은 꿈도 꾸지 못한다.


[많이 늦냐? 인원체크는 내가 적당히 넘겼다 ㅋ]


카톡에 와 있는 룸메이트의 문자.

그나마 그 껄렁이 덕분에 오늘 밤만 넘긴다면 벌점을 피할 수 있다.


자신에게 남은건 수중에 있는 3만원과

배터리가 30% 남은 핸드폰이 전부다.


5월의 밤은, 얇은 외투 한장으로 버티기엔 춥다.


근처 PC방이라도 가볼까, 아니면 적당한 곳에서 바람을 피할까.

남자는 깜깜해진 학교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얘, 너도 갈 데가 없니?”


시계가 밤 12시를 넘긴 시간, 교내 흡연부스에서 별안간 목소리가 남자에게 날아든다.


“으..응?”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 흡연부스에 신경을 집중한다.


“뭐야.. 나 누군지 몰라? 우리 같은 학과잖아, OT때 본거 같은데”


그곳에선, 재벌집의 딸인 여자가 나온다.


여자는 부모의 강압에 못이겨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했다.

가업을 잇는 건 둘째 치고, 재벌기업의 이미지 개선이 중요하데나 뭐래나.

5개월 전, 그녀의 아버지는 딸아이의 수능 성적표를 쥐고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나, 도덕성이나 윤리의식에 대해 일장연설을 했다.


“아 알았어요!, 간다고. 가면 되잖아!!”


여자는 부모에게 소리를 지르고, 방문을 콱 닫는다.


“고맙다.”

여자의 부모는, 그걸로 됐는지 방문에 대고 고마움을 표현한다.


여자에게 꿈이라던가, 해보고 싶은 공부가 있던건 아니었다.

그런 것을 생각하기엔 여자는 아직 어렸고,

그런 것을 생각해야할 정도로 부족한 삶도 아니다.


언제나 자신에게 관대하고 별 간섭이 없었던 부모님이

처음으로 고압적으로, 그러고도 유하게 자신을 회유한다.

마치…거래를 하는 것 처럼.


여자는 그런 부모의 모습이 무섭다. 이질적이다.

자식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 부모가 이세상에 어디 있을까?


어제까지만 해도 인자한 부모님의 모습이

언제든지 자식마저도 팔아버릴 수 있는 장사치의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사회복지학과를 가는 조건으로,

대신 여자는 자취를 선언했다.


부모는 아무런 상관 없다는 듯, 학교 주변 치안이 좋은 오피스텔에

세콤까지 계약해서 여자를 입주시켜 주었다.


뭐, 고급 오피스텔에 보안업체까지 계약해주는 의미는 뻔했다.

여자를 위하는 척 감시하려는 것이겠지.


새로운 지역에서

새로운 자신의 집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삶이라!


처음 아무도 없는 휑한 방에 들어왔을 땐

부모님에 대한 불만보단 고양감이 여자의 몸을 감쌌다.

 

하지만, 남의 도움없이 사는 생활은 여자에게 어색하기 짝이 없다.

음식물 쓰레기는 어떻게 버려야 하는지

쓰레기봉투는 몇 리터 짜리를 사야하는지

하다못해 전기밥솥에 밥은 어떻게 해먹는지

욕실에 수챗구녕은 주기적으로 닦아줘야 하는지 까지도 몰랐다.


지금만 해도, 편의점에 간식거릴 사러 왔다가

오피스텔의 도어락이 잠겨서 집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분명, 몇 번인가 열고 닫을때마다 알람이 울리긴 했는데…

별 상관이 없을 줄 알았더니, 별안간 망가져버려 열리지 않는다.


집으로 연락을 하고싶어도 핸드폰이 방안에 있다.

도움을 청하고 싶어도 어디에 해야 할 지 모른다.

어디론가 바람을 피하고 싶어도 수중엔 간식거리 조금 뿐이다.


그나마 가까운 곳, 학생이면 출입이 자유로운 학교의

흡연부스에서… 여자는 바람을 피하고 있었다.


“아아… 안녕”


남자는 흡연부스의 어두운 조명에 의지해서, 겨우 여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분명, 수업시간때 몇 번인가 마주친 기억이 있다.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친구도 많아보이고 당돌했던 여자로 기억한다.


“뭐야. 너, 내 이름도 모르는거야?”


어색해하는 남자에게서, 눈치를 챈 듯한 여자.

이 남자는 자신이 어떤 집안의 사람인지도

자신의 부모가 어떤 기업집단을 운영하는지도

심지어 메스컴이나 SNS에도 부모와 함께 오르내렸던 자신의 이름마저도

모른다.


“그..그게… 미안”

남자는 손을 비비며 어쩔줄 모른다.

여자는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며 남자에게 앉으라 시늉한다.


흡연부스 벤치 끝자락에 겨우 걸터앉는 남자.

여자는 자신을 시기하거나

자신을 부러워하거나

자신을 대등하게 여기거나

자신을 업신여기거나 하는 사람들은 많이 보아왔지만

이렇게 자신을 까맣게 모르는 사람은 처음이다.


남자에게 있어서 여자는 그저 같이 수업듣는 동급생일 뿐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흥미가 샘솟는다.


“이거, 서운한데? 난 네 이름 알고있는데”


OT이후로 이야기를 한번도 나눠 본 적 없던 남자를 놀리는 여자


그렇게 어두운 조명이 반짝이는 불빛 아래서

여자의 이름을 가지고 씨름을 하다가

남자의 오늘 근무지에서 있던 일에 대해서 분노 하다가

모레까지 제출인 과제에 대해서 이야길 하다가

여자가 어쩌다 집에 들어가고 있지 않은지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온다.


“글쎄, 도어락이 아무리 건드려도 반응조차 없는거 있지?”


“그거, 건전지 다 된거 아냐?”


“건전지? 갈아줘야 하는거였어?”


“그.. 보통은”


“어떡해, 나 이사오고나서 한번도 그런거 갈아준 적 없는데. 편의점 가서 아무거나 사면 돼?”


“AA사이즈 3~4개쯤 사면 될거야, 근데 아예 잠겨버렸으니까, 9V짜리도 하나 더 사야겠다.”


“에이에이? 구볼트?”

여자는 잘 모르겠다는 듯이 남자를 쳐다본다.

건전지에 종류가 많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한번도 자신의 손으로 교체해 보거나 만져본 적이 없다.


"그게… 그러니까… 같이 가자, 알려줄게”

세상은 넓으니까. 모를 수도 있겠지 라고 남자는 생각한다.

자신도 작년까진, 갑질이란건 인터넷에서나 보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두 남녀는 편의점에 들어가

AA건전지와 9V건전지를 구매했다.

평소같으면 절대 사지 않을 가격이지만, 남자의 수중엔 3만원이란 거금이 있다!


현금영수증으로 형의 전화번호를 집어넣고

남자는 여자의 오피스텔로 향한다.


고급 오피스텔이라도, 도어락의 모양새는 피차일반이다.

월셋방에 비싼 도어락을 쓰는 집주인따위, 존재하지 않으니까.

번호 커버를 올리고, 비상전원단자에 9V 건전지를 가져다 대자

도어락에서 소리가 울린다.


“와! 켜졌다!!”

여자가 소리를 치다가, 복도에 반사되는 자신의 목소리에 놀라 입을 막는다.


“비밀번호 눌러봐”

여자는 남자에게 보여도 상관없다는 듯, 숫자를 차례대로 누른다.


이윽고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손잡이가 돌아가며 현관문이 열린다.


“오오오오오~”

여자는 다시한번 감탄사를 내다가, 자신의 목소리에 놀라 한번 더 입을 막는다.


“건전지부터 갈자”


남자는 도어락 안쪽의 전지커버를 열고, 건전지를 교체한다.

몆 번 버튼을 눌러보자, 도어락은 처음 입주했을 때 처럼 쌩쌩하게 작동한다.


"진짜진짜 고마워, 오늘 그 흡연부스에서 자는 줄 알았다니까?"


"뭘, 금방 해결되서 다행이다. 난 돌아가볼게"


"너 기숙사 문 잠겼다며, 갈 데는 있어?"


"주변메 PC방이라도 가려고, 이참에 밀린 과제라도 해야지"


"그러지 말고. 여기서 자고 가. 내가 미안해서 그래"


"아냐아냐 괜찮아."


"그래도~...아"

남자를 붙잡으려는 여자는 그제서야 눈치를 챈다.

남자의 얼굴이, 방금전부터 빨갛게 달아올라 있고 눈도 자신과 마주치지 못한다.


생각해보니 

자신의 옷차림은 잠옷바람에,

외간 남자를 붙잡고선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자고 가라 붙잡는 것이다.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한 여자는 남자를 놔주었다.


"조.. 조심히 들어가구. 내일 봐"


"그래, 너도"

남자는 빨개진 얼굴로 손을 흔들며 여자의 집에서 나온다. 

흡연부스에선 어두워서 몰랐던 여자의 옷차림이 그제서야 눈에 들어온다.

여자에게서 시선을 피하느라 오피스텔이 얼마나 넓고 좋은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건전지를 사고 남은 돈으로, 남자는 PC방 8시간을 충전한다.

라면 하나만 겨우 주문하는게 마지막 사치다.


—----

그 뒤로, 여자는 남자를 볼 때마다 멀리서부터 손을 크게 흔들며 인사했다.


"안녀~~엉"


"안녕"

남자는 그에 비해 간결하게 답해주었다.


"저기저기, 너 오늘 수업 끝나고 바빠?"


"오늘도 일하러 가야지"


"그럼 주말엔?"


"으음…. 아직 잡힌 일은 없고, 도서관에서 과제 해야지"


철벽을 치는건지, 아니면 삶이 바쁜건지.. 가드가 단단한 남자.


"오늘 나온거? 같이하자 같이. 나도 좀 알려줘"


여자는 상관없다는 듯, 남자의 커다란 성벽을 정면으로 깨부순다.


"으…응?"


"저번에 네가 나 도와줬잖아, 내가 대신 점심 한끼 사줄게"


"에이.. 뭘 그정도가지고"


"안 돼! 엄마가 빚진건 꼭 갚으라고 그랬단 말야. 핸드폰 줘봐봐"


여자는 남자의 손에서 핸드폰을 채가선, 자신의 번호를 누르고 통화버튼을 누른다.

잠시 뒤 여자의 핸드폰이 울리며, 여자는 남자의 전화번호를 손쉽게 따낸다.


"자. 내 이름 기억하고 있지?"


여자는 남자에게 핸드폰을 돌려주면서, 주말 약속을 강제로 성사시킨다.


"어…어…응."

핸드폰을 들고 벙 쩌있는 남자.


"그럼 난 다음 수업 들으러 간다~~"

여자는 폭풍처럼 다가왔다 바람처럼 사라진다.


"...."

지금 상황이 정리가 안되는 남자의 옆으로.


"야~. 우리 친구, 완전 선수네 선수야. 여자한테 번호도 따이고. 비싸게 구는 이유가 다 있구나?"

껄렁이 룸메이트가 어깨를 툭 치며 남자를 놀린다.


—----

남자와 약속이 있는 주말 전 금요일 저녁.

여자는 다급하게 고등학교 친구들을 동네 카페로 불러모은다.


"야 어떡해 어떡해. 내일 남자랑 만나기로 했어"


막상 약속을 잡고나자, 걱정이 되기 시작한 여자.


"누군데? 대학교?"


"같은 과 남자애"


"어쩌다가? 어디서?!"


"그 밤에 잠깐 만났었는데, 우리 집에 왔었다가…"


여자는 감정이 고양되는지, 앞뒤 문맥을 모두 자르고 자극적인 단어만 나열한다.


"꺄악!!. 이 기집애가 벌써부터 사고를 쳐? 자취한다더니 발랑 까져가지고는"


친구들이 테이블을 치고 소리를 지르고 난리다.

사랑과 연애에 관심이 많을 시기에, 드라마보다 자극적은 소재가 친구의 입에서 직접 나온다.


"그런거 아니라고!, 내일 어쨌든 만나기로 했는데.."


"됐고, 잘 생겼어?"


여자가 하는 말은 들을 생각조차 없이 

자신들의 관심사를 물어보는 친구들.


"....응. 잘 생겼어"


여자는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인다.


"사진 있어? 사진 있어?"

남자나 여자나, 이런 부분에서 별반 차이가 없다.


"아니, 카톡 프로필도 봣는데 아무것도 없어"


"야야야. 만나는게 내일이랬지? 너 지금 여기서 커피나 마실 때가 아냐, 나가자 나가자"


여자의 친구들은 여자를 데리고 카페 밖으로 나간다.

그리곤 눈에 보이는 번화가 로드샵마다 여자를 끌고 다닌다.

가게마다 진열된 옷을 입혀보고, 립스틱을 발라보고, 머리핀을 꽂아보고, 

하다 못해 스마트폰 케이스까지 바꿔보며 들쑤시고 다닌다.


여자가 집으로 돌아갈때 즈음엔, 양손에 한아름 쇼핑한 물품이 가득하다.


여자는 짐들을 던져두고 식탁앞에 쓰려졌다가, 이내 맘에 들었던 원피스를 쇼핑백에서 꺼내본다.

앞을 보고 뒤를 보고, 거울 앞에 서서 어깨에 대보기도 한다.


까치발을 실짝 들어보기도 하고, 입술을 뻥끗뻥끗, 눈을 깜빡여 보기도 한다.

내일을 생각하며, 여자는 미소를 짓는다.


—--------


다음 날 아침 10시


도서관 앞에서 미리 나와있던 남자.

여자랑 대화하는 것도 어색한데, 막상 만나기까지 하려나 목까지 탄다.


한 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며 건물 입구를 서성이는데.


"안녀~~~엉"


저 멀리서 여자가 손을 흔든다.

아직 잘 보이지 않는 점을 향해 남자도 손을 흔들어 본다.

여자는 남자를 발견하고 나선 총총걸음으로 도서관을 향한다.


여자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남자는 여자의 모습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깨닫는다.

소매부분에 프릴이 달린 원피스

계단이나 언덕에선 위험할지도 모르는 치마길이

아직 발에 익숙치 않믄 구두까지


이전까지 보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모양새다.


"안녕"

여자에게 겨우 눈을 맞추고 인사를 건네는 남자.


"오래 기다렸어? 일찍 왔네?"


"아냐, 나도 방금왔어"


"들어가자 들어가자"

두 남녀는 도서관에 들어가, 칸막이 없는 4인석에 나란히 앉는다.


[도서관에는 조용히]

라는 팻말 아래서 두 남녀는 쌓인 과제들을 해결해 나간다.


간간히 필담을 나누기도하고, 웃긴 일이라도 있는지 키득거리기도 한다.


조용히 전공서적을 펼쳐두고, 노트에 필기를 하는 남자의 옆모습을 여자가 힐끗힐끗 쳐다본다.


시선이 느껴진 남자가 고개를 여자쪽으로 돌리면,

부끄러운지 여자는 자신의 태블릿으로 다시 시선을 내린다.


3시간 정도 지나자, 여자의 과제물은 어느정도 끝이 보인다.

여자는 남자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남자가 여자를 쳐다보자, 여자는 귓속말로 소곤소곤 이야기 한다.


"저기~ 이제 밥먹으러 갈까?"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주섬주섬 짐들을 정리하는 남자의 귀가 새빨간 것을 여자는 알지 못했다.




"먹고싶은거 있어? 말만 해"

도서관 입구에서, 여자는 가슴을 펼치며 당당하게 이야기 한다.


남자는 식사메뉴를 고민한다.

아무리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도 멍청하게 국밥이나 떡볶이 같은 걸 고를 순 없다.


학생들 수준에 그리 비싸지 않으면서도

옷에 묻지 않게 먹기 간편한 그런 것.


"피자 먹으러 갈까?"


남자는 피지헛에서 페퍼로니 피자를 먹을까 생각했다.

샐러드바도 있으니 합리적인 가격에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괜찮네. 근처에 내가 아는 데 있어, 거기로 가자"


 "어.어…. 그래"

남자는 핸드폰으로 프랜차이즈 피자집을 검색하려 했지만, 여자의 손에 이끌려 나갔다.


—----


"여기 고르곤졸라도 맛있고, 빠네도 괜찮아. 리조또도 하나 시켜서 먹자"


"빠네?....응?"


남자는 메뉴판을 넘겨보며 이걸 어떻게 읽어야 하나 고민한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갔던 피자집을 생각했지만,

지금 온 가게는 그곳과 느낌이 많이 달랐다.


은은한 조명이 있고

시끄러운 음악도 나오지 않고

입구에서 배달기사들이 오고가지도 않는다.


메뉴판엔 한글이 적혀있지도 않고

가격표는…. 남자가 한끼로 지출하는 금액의 몇 배는 커보인다.


"넌 뭐 먹을래?"

자신이 시킬 메뉴는 다 골랐다는 듯, 남자의 메뉴를 재촉하는 여자.


"그.. 난 이런데 처음 와봐서,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남자는 메뉴판 쪽으로 고개를 푹 숙인다.


고등학교때 까진 쓰는 핸드폰이나 다르지

동급생끼린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취미 생활도, 관심사도 비슷비슷하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고나니 모든게 다르다.

룸메이트만 해도 그렇다.

자신은 일하느라 과제할 시간도 빡빡한데, 그녀석은 과제에 힘겨워 한 적이 없다.


지금 눈앞에 있는 여자도 마찬가지다.

기숙사도 아닌 월셋방에서 혼자 자취를 한다.

여자는 자주 와본 듯한 이 양식집이

자신에겐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신세계다.


"이거 먹어봐 이거, 완전 맛있다니까?

여기요~ 저희 주문할게요"


여자는 남자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신경 쓸 필요 조차 모르는건지.

남자에게 자신이 추천하는 메뉴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녀에게 있어서 이러한 상황은

한국에 처음 온 외국인에게 맛있는 국밥을 먹여보려는 한국사람들과 비슷할 것이다


피자부터 여자가 주문한 메뉴가 차례대로 나오고.

두 남녀는 도란도란 대화를 나눈다.


"이 씬피자, 처음 먹어보는데 바삭한게 맛잇네"

음식에 대한 이야기


"교양강의 나중에 재수강 할까봐"

대학교 수업에 대한 이야기


"학식, 인간적으로 너무 맛없지 않아?"

쓸데없는 이야기 등등


남자가 그러했듯이

여자는 남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자신이 건전지를 교체할 줄 모르듯

남자 또한 먹어보지 못한 음식이 있는 건 당연하다.


서로가 어떻게 자라 왔는지

어떤 사람들인지 몰랐기에

오히려 그들은 더욱 잘 맞았다.


"아~ 잘먹었다"

여자는 후식으로 나온 샤베트까지 먹어치웠다.


"나도 정말 잘 먹었어"

남자도, 소중한 한끼를 여자덕분에 잘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럼 나는 과제도 다 했고…"


여자는 남자의 앞에서 우물쭈물이다.

도움에 대한 보답도 했고,

빌미로 삼았던 과제는 오전 나절에 벌써 끝나버렸다.


집으로 돌아가자니 아쉽다.

하지만 남자를 붙잡아 둘 명분이 없다.


어제 쇼핑하는데만 4시간을 넘게 썻는데,

남자는 자신의 옷을 1시간이나 봐주었을까?

괜시리 치마자락 끝을 부여 잡는다.

머리카락 한쪽을 귀 뒤로 쓸어넘긴다.


"저..저기. 시간 괜찮으면…"

남자가 반 걸음, 용기를 내본다.


"웅웅? 나 시간 괜찮아, 완전 많아"

놓치지 않는다, 반 걸음 나온 남자에게 두걸음을 내딛는 여자.

역시 뻔하게 재는건 성미에 맞지 않는다.


"커피..라도 한잔 할래? 내가 살게"


남자는 손가락으로 번화가 폴바셋 커피점을 가리킨다.

대용량 커피체인이 남자의 지갑사정에 더 알맞을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얻어먹는데, 별다방보다 비싼 곳을 가는게 맞다.


"나나, 케잌 쿠폰있어!"

여자는 방문도장이 여러개 찍힌 쿠폰을 남자에게 흔들어보였다.


비싼 카페를 자주 방문하는건 그럴수 있다 치더라도,

방금까지 배부르다는 사람이 조각 케익이 넘어가나?


남자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앞장선다.


—---------


"조심히 들어가~"


"너도, 오늘 잘먹었어"


여자의 오피스텔 입구 앞에서

남자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 까지 지켜본다.


헤어진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오늘 하루를 알차게 보냈다는 성취감이 여자를 감싼다.


방으로 들어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로 다이빙!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줄 몰라한다.


핸드폰을 들어 오늘 찍은 사진들을 둘러본다.

SNS에 몇몇 사진들을 올린다.

#피자, #케이크, #친구칭구, #남사친, #과제끝


관심도 없던 대학교에선 매일매일이 지루했는데

앞으론 하루하루가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른 이야기긴 하지만

남사친에서 ‘사’자가 빠지는 날이 올지도…


“A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여자는 베게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를 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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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녀~~엉”


“그래, 안녕”


여자는 남자와 같은 전공수업에서 만나 인사를 나눈다.


어제 먹은 음식이 어땠는지

남은 과제는 잘 해왔는지

오늘도 알바가 있는지

점심시간엔 어떤지 등등

물어보고 싶은게 한가득 있었지만

교수가 수업을 위해 부리나케 강의실로 밀고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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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저기, 오늘 점심에~~~”

수업이 끝나자마자, 여자는 남자에게로 향한다.


“미안, 나 바로 건너편 건물에서 교양수업 있어. 이따 봐”

남자는 여자를 뒤로한 채 다음 강의실을 향해 달려간다.


명문대학의 넓은 부지는 이런 면에서 좋지 않다.

부지 끝과 끝에 위치한 건물은 10분이라는 쉬는시간동안 이동하기엔 너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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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도 비슷한 날들의 반복이다.

어쩌다 시간이 맞아 같이 밥을 먹더라도

사람들에 치여, 시간에 치여 허겁지겁 식사를 마쳐야 하고

방과 후엔 남자는 일하는 카페로 직행한다.


대화 몇 번, 카톡 한두개, 어쩌다 밥이나 같이 먹는 사이…

여자는 집으로 들어와 한숨을 내쉰다.


“하아… 철벽인거야? 아니면 정말 시간이 없는거야?”


이쯤 했으면 남자도 자신의 마음을 알텐데!

저번주의 반응을 보아하면 관심이 없어보이는건 아닌데…


“에휴, 나한테도 꽃피는 봄에 님이 오나 했더니만”


여자는 화장을 지우고,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핸드폰을 보며, SNS에 올렸던 저번주 남자와의 데이트 사진을 둘러본다


웃고 있는 자신의 얼굴,

피자를 먹는 남자의 얼굴

맛있던 음식들

화창한 날씨


"에이씨"

여자는 핸드폰을 침대에 던진다.

머리카락이 갈라지기 전에 헤어드라이어를 콘센트에 꼽는다.


위이이이잉


치직


"어 뭐야? 왜 안돼?"


헤어드라이기를 탁탁 친다


위이이잉

치직

치지직


타닷

타다다닷


탁!


순간의 굉음과 함께 눈앞이 깜깜해진다. 

전등, 냉장고 할거 없이 모든 전기가 내려간다.


"으악!"


헤어드라이어를 꼽아둔 멀티탭에서 빨간색 불꽃이 일렁인다.

난연성 소재 덕분인지 화재가 발생할 정도로 큰 불꽃이 튀진 않지만.

콘센트 안쪽에서 나오는 붉은색 플라즈마의 그 시각적 효과만큼은 대단하다.


"으아아아악! 불이야!!!!!"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싱크대를 향해 뛰어간다.

어두운 집안을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뛰어다닌다. 

식탁에 찢고, 싱크대에서 물을 담다가 옷이 젖고, 컵째로 물을 멀티탭에 붓고, 떨어진 컵이 쨍그랑 깨진다. 


약간의 탄내음과 함께, 순식간에 난장판 아수라장이 펼쳐진다.


"으..으으…으아아아앙"


결국 여자가 울음을 터뜨린다.

핸드폰을 들어, 부모님도 친구도 아닌 남자에게 전화를 건다.


시계는 9시 17분을 가리킨다.

남자는 저녁 피크시간대를 넘긴 뒤이다. 한숨 돌리고 남는 시간에 화장실을 청소해야하나 생각한다.


하지만, 커피메이커 옆 충전기에 꼽아둔 자신의 핸드폰이 울린다. 번호는… 


그 여자?

"여보세~~"


"으아아아앙. 몰라. 어떡해에에에"

남자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여자가 대성통곡을 한다.


"왜 그래? 무슨일 있어?"


"머..머리말리는데, 훌쩍. 갑자기 터졌는데. 훌쩍. 

불 다꺼지고 물부었다가 컵 깨고 막…"

여자는 두서없이 이야길 쏟아낸다.


"그.. 괜찮은거지? 다친 데 있어?"


"훌쩍… 아니…"


여자는 다친데도 없지만, 괜찮지도 않다.


"일단 여기 가게로와, 나 마감하고 나면 같이 가보자. 알았지?"


남자는 조금 용기를 내서, 한번 더 여자를 도와주기로 한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119가 아닌 자신을 찾은걸 보면 그리 큰일은 아닐 것이다.


"웅. 훌쩍"


"그만 울고, 주소 문자로 보내줄테니까"


애들 달래듯 찬찬히 다독인다.


15분쯤 뒤에, 여자가 남자가 일하는 카페로 들어온다.


말리다 만 머리는 산발이고

잠옷바람에 슬리퍼만 겨우 신었다.

찬바람을 맞으며 여자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는지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인다.


여기까지 와서 남자를 안 볼수도 없다. 아니 보고싶다.

10분만에 도착한 카페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가게로 들어왔다


"여기, 잠깐만 앉아 있어. 조금만 있으면 마감이니까"


남자는 여자를 자리로 안내한다.

그리고 카운터에서 핫초코를 한 잔 누르고, 자신의 체크카드를 긁는다. 


여자는 지금 지갑도 뭣도 없다.

애플페이는 도입된다고 떠들어대기만 바쁘다.

이럴땐 아이폰은 값비싼 액세서리일 뿐이다.


30분어치 노동의 대가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남자는 그런 것들에 신경쓰지 않는다.


머그잔을 따뜻한 물로 데운 다음 비우고,

우유스팀기에서 따뜻한 우유를 받아, 

초콜릿 파우더를 정량보다 한스푼 더 넣고 휘젓는다.


구석자리에 풀이 죽어있는 여자에게 직접 음료를 가져다준다.


"마시면서 기다려"


"고마워"


여자는 기다리는동안 핸드폰도 만지지 않는다.

남자가 건네준 핫초코를 홀짝거리다, 가게를 둘러보다, 남자기 일하는 모습을 힐끗힐끗 지켜본다.


남자가 일하는 가게에 와보고 싶긴 했지만, 적어도 이런 모양새를 원한건 아니었다.


남자는 마감 15분전까지 꾸역꾸역 커피를 먹겠다며 들어오는 손님들을 받고, 

쓰레기를 치우고, 화장실을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여자가 마시던 머그컵을 가져와 닦는다.


마지막 정리를 남겨두고, 자신의 룸메이트에게 문자를 보낸다.


[나 인원체크좀. 부탁해]


[여자냐? 걔?]


[아 쫌.]


[콘돔, 잊지말고]


이 친구는 꼭 한마디가 많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넣는다.


고개를 들고 여자를 쳐다본다.

여자와 눈이 마주친다.

눈물때문인지 촉촉한 눈망울

노출이 있고 헐렁한 잠옷.

맨다…리와 슬리퍼


남자는 고개를 한번 흔든다.


"이제 가자"


남자는 전등을 끄고, 여자를 밖으로 내보낸다

가게의 문을 잠근다. 보안카드를 대고 경비를 세팅한다.


"..."

여자는 아까부터 말이 없다.

같은 나이의 대학생인데도 이렇게 차이가 난다.

옆에 있는 남자는 학비는 물론 생활비도 자신이 직접 번다.

배달음식이나 겨우 시켜먹는 자신과 달리 설거지도 능숙하다. 

위기에서 울고불고 난리치는 자신과 달리, 그는 자신을 다독여주고 챙겨준다.


"별 일 아닐거야"


멋쩍은 남자가 여자를 달래본다.

여자는 남자의 옷자락 끝을 꾹 잡는다.



"불좀 비춰줄래?"


여자의 집으로 들어온 남자가 여자에게 말한다.

스위치를 똑딱여 보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다.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서 여자의 방으로 향한다.

기숙사 방 두개를 합쳐도 그것보다 넓을 것 같은 오피스텔.


"깨..깨진 컵 조심해"


여자가 남자의 어깨 너머로 불빛을 비춘다. 반사된 유리조각들이 반짝거린다.


약간의 탄내음과 새까맣게 그을린 멀티탭이 보인다.

남자는 멀티탭 선을 조심조심 따라가 벽에 꼽힌 콘센트를 뽑아낸다.


"이제 차단기만 올리면 될거야"


남자는 핸드폰을 들어 이리저리 불빛을 비춰본다.

현관쪽으로 성큼성큼 걷는다.


"어..어디가? 가려구?"


"아니야, 차단기는 보통 현관쪽에 있어"

하지만 현관쪽 벽면엔 차단기가 보이지 않는다.


"음.. 차단기 어디있는지 알아?"


"차단기? 두.. 두꺼비집?"


"아냐.. 찾아보자"

어두컴컴한 집안을 여자와 이리저리 둘러본다.

그리곤 부엌에서 베란다로 나가는 통로 벽면에 차단기함을 발견한다.


"찾았다. 올린다?"

남자는 차단기함을 열고 메인스위치부터 전등을 까지 하나씩 올린다


딸깍, 딸깍, 딸깍

띠리링


냉장고의 작동음이 들리고, 전등이 모두 켜진다.


"우와.."

신기한 듯 남자의 등 뒤를 여자가 쳐다본다.

그리고 나서야 둘은 눈치챈다.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어두운 방안을 돌아다니기 위해 두사람은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남자가 황급히 손을 놓는다


"이제 잘 될거야, 어서 깨진 컵부터 치우자"


남자는 뒤로 돌아, 오피스텔 내부 전체를 조망한다.

제대로 눈에 들어오는, 기숙사 방 2개보다도 넓은 집.

드럼세탁기가 싱크대 밑에 있고, 300L 짜리 냉장고가 설치되어있는 그런 자취방.


격차라는게 실감되려는 찰나.


"아안돼!. 보지마!!"

여자가 남자에게 달려들어 남자의 눈을 손으로 가린다.


거실 곳곳에 대충 벗어놓은 속옷들.

빨래건조대에 널부러진 옷가지들

어제 먹고 치우지 않은 싱크대의 머그잔들. 

과자봉지들.

생활감이 넘치는 풍경을 여자는 보여주기 싫었다.


"괜찮아. 남자들 기숙사는 이것보다 더해"


남자는 거짓말로 여자를 어른다.

실제론, 껄렁이 룸메이트가 청소며 정리까지 똑부러지게 해놓는다. 

일 때문에 늦는 그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이유는, 겉모습만 껄렁스러운 그의 룸메이트 덕분이다. 

외관만 좀 더 단정히 한다면 참 믿음직스러운데…


"우으, 그래도 싫어"


여자는 발을 동동 구른다.


"깨진 컵부터 치워야지"


"내가.. 내가 할테니까 넌 여기 뒤돌아서 잠깐 앉아있어"


여자는 남자를 식탁의자에 앉혀두고

베란다 방향으로 돌렸다.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베란다 창문에

여자가 속옷을 줍고, 청소기를 돌리는 모습이 비춰진다.


"보라색…"


남자는 나지막히 색깔을 읋조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취향에 직격한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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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분정도 우당탕탕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이제 됐어! 괜찮아"


여자의 허락이 떨어진다.


잠시 번뇌를 내쫓던 남자가 고개를 든다.

여자는 캡슐커피 머신에 디카페인을 넣고 추출한다.


"이사오고 처음 써보네"

금새 남자가 하루종일 만들던 커피보다 맛있는 음료가 만들어졌다.


남자는 여자가 건네주는 머그잔을 들고 좌우로 살핀다.

일반적인 세라믹 머그컵보단 탁한 백색의 색을 띄는 머그컵. 

고급스럽단 느낌이 있다,


남자는 그게 본차이나 도기인줄 모른다.


"그 멀티탭 봐봐"

남자는 머그컵에 관심을 끄고, 본래 이곳에 오게된 목적을 살폈다.


"여기여기, 이쪽에서 팍! 터지는 거 있지?"

여자가 콘센트 한부분이 검게 그을린 멀티탭을 남자에게 흔들었다.


"....이거.. 어디서 난거야?"


"몰라? 원래 있던건데"


"뭐뭐 연결 해놨어?"


"가습기랑, 충전기랑, 헤어드라이어랑 또…"


"음…그게. 다른 것도 버리는게 좋겠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도 모르는 누렇게 변색된 멀티탭.

안전차단스위치 같은 것도 없고, 심지어 가습기나 헤어드라이어처럼 고용량 제품을 동시에 연결했다.


이런게 어제까지 버틴게 오히려 용하다.


"내일 마트나 철물점가서 바로 멀티탭 새걸로 사는거다?"


"아무거나 사면 돼?"


"어..음.. 스위치 달린 거 비싼걸로"


남자도 전기쪽은 문외한이다. 그저 알음알음 알고있는 기초상식들을 말할 뿐이다.


"하아… 얼마나 무서웠다구"


여자는 마치 방안에서 대형화재가 난 것 처럼 이야기를 이어갔다.


남자는 여자의 이야기를 듣다 하품을 한다.

사태가 일단락되자 졸음이 몰려온다.


"어머, 내 정신좀 봐. 잠깐만."


여자는 남자에게 수건과, 남성용 츄리닝을 건넨다.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왠 남자옷인가 싶지만.

남자와 첫 데이트(?) 전날, 친구들이 필요할 거라며 여자에게 구매를 종용했다.


음흉한 미소를 짓는 친구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로 그런 것인지 잘 몰랐다,

친구들은 이런 사태를 예견한 것이다.


주인이 누구든, 자취방엔 외간 남자가 찾아오는 법이다.


"아..아냐. 나는 가볼게"


"지금시간에 갈데가 어디 있다구. 기숙사도 잠겼잖아"

여자는 남자의 퇴로를 하나 막는다.


"피씨방이나 카페라도.."


"안돼! 이 밤중에?. 돈도 많이 들잖아"

돈 이야긴 치사한 감이 있지만, 여자는 필사적으로 남자의 퇴로를 하나 더 막는다.


"그래도, 남자가 여자 자취방에 함부로 묵기엔.."


"왜? 나쁜 짓이라도 할 생각이였어?"


"아니.. 그건 아닌데"

남자는 엉겁결에. 마지막 퇴로를 자신의 입으로 막았다.


"그리구.. 나도 무섭단말야. 오늘 하루만 자구가. 응?"

여자는 남자에게 한번 더 옷가지를 내밀었다.


이제와선 이판사판이다.

남자에게 볼 꼴 못볼 꼴 다 보여준 이상

오늘을 흐지부지 넘겨버린다면 더이상의 기회는 없다.

여자는 위기를 기회로 삼는다는 아빠의 말씀을 떠올린다.


남자는 마지못해 옷가지를 받아든다.

욕실에서 샤워하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여자가 닫힌 샤워실을 바라본다.

침을 꼴깍 삼킨다.


—----


다음날 아침.

남자의 휴대폰 알람소리가 울린다.

오전 수업이 없는 날 이지만, 시간이 있을 때 과제와 공부, 청소와 세탁도 해야한다.

언제나 알람은 오전 7시 30분에 울린다.


알람소리에, 남자는 여자와 같은 침대에서 일어난다.


눈을 뜨니 바로 보이는 여자의 얼굴. 

그리고 침대 맡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휴지더미와 피임용품들…


[지갑말고, 박스채로 들고다녀. 찢어진다]

껄렁이 친구는 남자가 여자에게 번호를 따인 날 저녁.

남자에게 피임용품 3개들이 한 갑을 내주었다.


나중에 커피라도 한잔 사줘야 겠다고 생각한다.


살며시 침대에서 나와 쓰레기들을 줍는다.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를 한다.

여자에게서 나던 향기가 나는 샴푸, 바디워시


남자는 뜨거운 물에 번뇌를 쫓는다.


"씻구 나온거야?"


여자는 부은 눈을 비비며 방에서 나온다.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던 남자를 보자 웃는다.


가만히 서서는, 팔을 쭉 뻗어 벌린다.

안아달라는 표현.


남자는 여자를 품에 폭 안는다.

머리카락에서, 방금 사용했던 샴푸와 비슷한 향기가 난다.


"..."

남자는 말없이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헤헤… 오늘부터 우리 1일인거다?"


"...2일차 아니야?"

남자의 말에, 여자가 더욱 세게 끌어안는다.

남자의 가슴팍에 묻힌 여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넘쳐 흐른다.


—-----


"사귀면 다 된줄 알았는데..에휴" 

여자는 친구들과 카페에 모여 한숨을 쉰다.


"왜 그래? 저번달에 사귄다고 말할 땐 좋아 죽을라 하더만"


"글쎄. 남친이 너무 바빠서 만날 시간이 없어"


"대학생이 뭐가 바빠. 뭐라도 한데?"


"일, 카페에서 알바해"


"주말엔 시간 있을거 아냐"


"그때도 일, 행사장이나 물류센터 간데"


"그게 뭐야. 연애하는거 맞긴 해?"

여자의 친구들은 아우성이다.


남자가 기숙사 사감 몰래 외박을 하는것도 어쩌다 한 두번이다.

주말에 도서관이 아니라 여자의 집에서 과제를 하기도 하고, 

남자가 근무하는 카페 한 구석에서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일하는 남자를 관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다할… 그래 연애적인 행동을 할 수가 없다. 

일-공부-집만 반복하며 보내기엔 자신의 청춘이 너무나 뜨겁다.


"네가 좀 도와주는게 어때?"

여자의 친구중 한명이 넌지시 제안을 건넨다.


"그래. 너네 집 잘 살잖아"

맞장구를 치는 다른 친구들.


"야, 부모님 돈이 내돈이냐? 아빠한테 연애한다고 돈달라 그랬다간, 당장 자취방 계약부터 끊어버리실걸?"


"너도 막내아들 드라마 봤잖아. 막무가내로 돈을 쓰라는게 아니라, 부모님과 거래를 하는거야"


"....거래? 뭘 걸고?"


예전 같았으면 가족간에 그런거 하는것 아니라며 성을 낼 여자였지만.

그새 머리가 컷다.  바라는 것도 있다. 


"그건, 네가 생각해야지"


"에이 뭐야. 드라마좀 그만 보래두"

여자는 친구들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길 나눈다.


—--


기말고사도 이제 막바지다.


다음주엔, 모든 학과가 정규 강의를 마친다.

여름방학이다.


남자는 그나마 있는 최선을 다해서 시험에 임했다.

이 이상 공부를 더 할 수도 없었다. 

장학금에 떨어진다면, 비참해 질 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저기.. 방학땐 어떻게 할꺼야?"

여자는 도서관에서, 남자의 귀에 속삭인다.


"글쎄.. 카페일도 방학동안은 쉬기로 했으니, 다른 일거리를 찾아보려고"


카페는 단순히 가까워서 다니는 일이다. 

방학처럼 여유로운 기간엔, 멀더라도 시급이 센 일거리를 알아볼 생각이다.


여차하면 기숙사를 제공해주는 공장이라도...


"우리, 같이 일해보지 않을래?"

여자는 저번주에 부모님과 통화한 내용을 떠올린다.


—--

---

-

"아빠. 나, 방학때 집으로 안가려구"


"왜 그러니? 방학땐 당연히 집으로 돌아와야지"


"아니.. 나도 일좀 해볼까 해서. 계열사중에 단기근로자 뽑는데 하나쯤은 있지?"


"네가 왜 그런 일을 해. 돈 필요하면 말하거라"


"친구들도 다 자기가 일해서 자기 밥벌이하는데. 나만 그러긴 쫌 부끄럽단말야. 

나도 내 앞가림은 내가 해야지. 그게 남들 보기에도 좋지 않겠어?"


"크흡.. 우리 딸. 벌써 이렇게 다 컸구나. 그래 애비가 일자리 있나 알아봐 주마."


"근데… 친구도 한명 같이 해도 돼?"


"물론이다 마다"


"히히. 아빠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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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 자기도 알바하게?"


남자는 여자가 아직도 재벌집 고명딸인지 알지 못한다. 

그저 집이 좀 잘사는 집이겠거니, 예상만 할 뿐이다.

연인의 집안 사정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묻는것도 좋은 모양새는 아니다.


"아빠 아시는 곳에서 사람이 급하게 필요하데서, 도와주러 가려고. 같이 해보자"


여자는 적당히.. 있는 사실을 꾸며 남자에게 둘러댄다.


"흠… 좋아. 자기 가족분들 도와드리는 거면 나도 좋지"


남자는 무슨 일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여자의 제안을 단번에 수락한다.

여자친구와 같이 있을 수 있는데다가,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

더군다나,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손 닿는 곳 까지 도와주고 싶다.


연인으로서든, 자신의 변한 모습을 위해서든.


—-

 "이야, 바로 일 구한거야?"


기말고사가 끝나자, 남자의 룸메이트는 여행용 캐리어에 짐을 한가득 꾸린다.

방학동안엔 본가에서 지낼 것이라고 한다.


"남는게 시간인데, 벌 수 있을때 바짝 벌어야지"


"난 놀 수 있을때 놀란다"

저리 말해도, 과제 한번 밀린적 없고. 남자와 성적도 비슷하다.


"하하. 그래. 그리고 저번엔 고마웠다."


"뭐, 콘돔? 부족해?"


"아 쫌. 좋은 말을 해도 진짜"


"나 없다고 대충 청소하지 말고, 2개월 뒤에 봅시다"


등으로 마치 '아디오스' 라고 말하듯

껄렁이 룸메이트는 기숙사를 나간다.


"쟨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남자도 데이트겸 출근을 준비한다.


---


여자친구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시내 유명 5성 관광호텔


"....와"


남자는 유리로 된 외관과 샹들리에를 보며 탄성을 지른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일하러 온 사람인데요"


여자는 컨시어지에게 당연하다는 듯 안내를 부탁한다.


"아. 오셨군요.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컨시어지는 정중하게, 두 남녀를 STAFF ONLY 라 적힌 방 안으로 안내한다.



"오늘부터 같이 일하게 된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이 호텔의 총지배인 입니다"


그리고 안에서 나온 사람은 무려 호텔의 총괄 관리자.


'꼴랑 알바 뽑는데도 지배인이 나오나?'

이상하지만, 카페도 사장이 직접 채용을 결정하니 그려려니 한다.


"안녕하세요"

여자는 정중히 호텔 지배인에게 인사한다.

남자도 따라서 꾸벅, 고개를 숙인다.


"흠흠… 남성분이 있으신줄은 몰랐습니다만.."

지배인은 전달받은 사항과 다른 내용을 꼬집어보지만.


"..."

여자가 그런 지배인을 아무말 없이 쳐다볼 뿐이다.


"뭐, 상관없습니다. 여기, 근무하시는 동안 입을 유니폼입니다."

지배인은 능숙하게 화제를 전환한다.


지배인이 가져온 옷은, 하의에 앞치마가 달린 여성용 유니폼과, 

아까 자신들을 안내해준 컨시어지와 같은 남성용 유니폼이다.


"남성분께선 호텔 프론트 업무를 담당하실 겁니다. 고객분들의 안내와 짐정리를 도와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아가ㅆ..크흠, 여성분께선 2층 뷔페에서 서빙과 접객을 해주시면 됩니다."


최소한의 면피를 하려는 듯. 남자와 여자의 근무지를 떼어놓은 지배인.


"..."

여자는 다시 지배인을 바라본다.


"그럼, 옷을 갈아입고 각자 맡은 지역으로 가주시면 됩니다"


지배인은 물러서지 않는다. 

자신도 자식이 있는 부모인지라, 부모의 마음은 누구보다도 잘 안다.

재벌집 하나뿐인 딸아이가 몰래 데려온 남자. 어찌보면 다이너마이트보다 위험한 존재다.


어차피 회장님이 오신다 한들, 적당히 부페에서 일하는 딸아이의 모습만 보고 갈 것이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겨야 하는 법.

남자의 외모가 준수하니, 프론트맨 이라도 시키면 된다. 

호텔은 첫 인상이 중요하기 때문에, 언제나 정문엔 외모가 단정한 직원들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어있다.


'이런.. 이래서 자신의 신분을 숨겨달라고 부탁한거구만.'


지배인은 재벌3세 놀이라도 하려는 듯한, 여자의 이상한 부탁을 이제서야 이해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내노라하는 5성 고급 관광호텔이

그저 재벌일가 딸내미의 사내질이나 하려는 장소로 취급된다는 사실에 지배인은 한숨이 절로 나온다.


물론 직접적으로 내뱉지 않는게 그의 연륜이다.


"감사합니다. 이런 기회를 주셔서"

남자는 유니폼을 받아든다.


아직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지만,

이런 호텔이라면 시급도 적지 않을 것이다.

기숙사에서 출퇴근하기에 부담스러운 거리도 아니다.


잘만 한다면, 한학기 이상의 등록금을 이번 방학에 벌 수 있다.


"...감사합니다"

여자는 영 못마땅하다는 듯, 유니폼을 받아든다.



"아 힘들어!!"


퇴근길 지하철, 여자는 남자와 첫 근무를 마치고 같이 돌아간다.


"진짜… 카페보다 힘들 줄 몰랐다"


어쩐지, 근로계약서에 명시된 시급이 쎄나 했다.

남자는 고객들의 무거운 여행가방을 나르고, 

되지도 않는 영어로 고객들을 안내하고. 하루 종일 서서 일했다.


"뷔페는 정말… 최악이야"


손님들이 먹은 접시를 치우고, 조리사들이 요리한 음식을 계속 나르고, 닦고, 다시 그릇을 치우고.

여자는 세상 살면서 해본 청소보다 오늘 해본 청소가 더 많다.


"다들 돈 많나봐, 그런 고급호텔에 오는 사람들이 왜 그리 많은지 원.."


여자는 남자의 말에 뜨끔한다.

친척들의 결혼식이다 생일잔치다 뭐다 해서 이런 호텔은 뺀질나게 드나들었다. 

특히 집안의 계열사인 저 호텔의 주식 일부는 여자의 명의로 되어있다.


"자기도 이런데 와봤어?"

남자는 말이 없는 여자에게 질문을 건넨다.


"아..아니! 나라고 저런델 어떻게 가봤겠어"

여자는 얼떨결에, 남자에게 거짓말을 한다.


"아. 나도 부페 먹어보고 싶다"

남자의 원초적 욕구가 가득한 탄성

직원식당은, 호텔 식음료매장과 분리되어 있다.

양이나 질에서 차이가 나는건 당연하다.


"그..그러게. 나도 먹어보고싶다"

조리장이 직접 준비한 파인 다이닝만 먹어보아서,

이 호텔 부페를 먹어보지 않은 건 여자도 마찬가지다.


—---


"신입, 잠깐 이리로 와봐요"

프론트 데스크에서 남자를 찾는 소리.


"네! 금방 가겠습니다"

남자는 하던 일을 잠시 내려두고, 카운터로 향한다.


"여기. 이 서류좀 들고 날 따라와요"

프론트 직원은, 고객들이 작성한 동의서나 영수증 뭉치를 남자에게 가리킨다.


여성 혼자서 들기에도 어렵지 않을텐데, 이 직원은 굳이 남자를 찾는다.


"네!"

남자는 괘념치 않고, 이 여성 직원이 가리키는 서류를 들고 직원용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이제 들어온지 2주 됐나요?"


"네. 맞습니다."


"너무 딱딱하게 하지 않아도 돼요"


"아..네"


"후훗. 이렇게 숫기가 없어서야"

말과 다르게, 이 남자가 깨나 맘에 든 모양새다.


자기보다 나이가 10살은 어린 학생인데. 어리벙 해 보이면서 하는 일은 열심이다.

요즘 애들처럼 허영이나 사치가 심해 보이지도 않고. 뺀질거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남자, 잘 생겼다.

호텔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모두 머리카락부터 옷까지 단정하게 유지하기 때문에 대부분 풍기는 인상들이 비슷비슷하다.

잘 생겨도, 조금 덜 잘 생겨도, 오히려 좀 못생겼다해도 천편일률적인 느낌을 낸다. 


하지만 이 남자는 그런 말이 쏙 들어가게 잘 생겼다.

처음 봤을 땐 잘 몰랐지만, 유니폼을 입히고 머리를 차분히 정리하자 멀끔한 얼굴이 유난히 돋보인다. 

거기에 기존 컨시어지들보다 족히 5살 이상 어리다.


뭐.. 10살이나 많은 자신이 뭘 어찌 해보겠다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잘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프런트 직원이 이야기한다.


"너무 혼자 다 하려고 안해도 되요. 우리, 오래 같이 일해야죠."

 약간의 본심을 담아 조언을 하는 직원.


"아닙니다. 모두 친절히 잘 해주시는걸요"

예의인지 철벽인지… 의중을 모르겠는 남자.


"아휴. 누구한테 배워서 말을 이쁘게 할까?"


엘리베이터가 도착한다.

문이 열리자 보이는 남자의 여자친구. 혹은 이 호텔의 최대주주.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마주쳤기 때문일까? 둘은 주춤거리다 가볍게 목례만 한다. 


낙하산 알바에 연인사이라는걸 들키면 좋을게 하나 없다,

총지배인 말고는 여자의 정체와 두 남녀의 관계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 신입은 여자친구는 있고?"

아는지 모르는지, 예상조차 못하는 건지.

여자친구의 앞에서 남자에게 연애관계를 물어보는 프런트 직원.


남자의 동공이 흔들린다.

없다고 할수도 없다.

하지만 바로 옆에 엘리베이터에 동반한 이 식음료매장 단기근로자가 제 여자친구라고 소개할 수도 없다.


"이…있습니다."


식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겨우 대답을 꺼내는 남자.

거짓말을 할 수 없다면, 진실을 조금만 전달하면 된다.


"하긴, 이렇게 잘생겼는데. 여자친구가 없으면 이상하지."


"감사합니다"


"..."

여자는 고개를 돌린채 거울만 쳐다본다


"그래서, 여자친구는 한 명? 두 명?"


"하..한 명입니다"


"에이. 그 나이땐 여러명 만나보기도 하고 그러는 거야."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남자는 보이지 않는 뒤통수가 따갑다. 

빨리 서고가 있는 층에 도착하고 싶은데.. 엘리베이터는 느릿느릿 올라간다.


"뭘 부끄러워하고 그래."

프런트직원은. 쑥스러워 하는 남자의 어깨를 토닥인다.


그리고 열리는 엘리베이터, 여자가 먼저 내리고. 남은 두명은 서고가 있는 층으로 계속 올라간다.


"..."

뒤돌아서 엘리베이터를 쳐다본 여자는 아까부터, 말이 없다.



—----

"미안해! 들키면 안된다는 생각에.."

지하철 퇴근길. 남자는 여자에게 연신 사죄한다.


"아냐. 내가 숨기자고 한 일인걸. 괜히 난처하게 만들어서 내가 미안하지. 자긴 나쁜거 하나도 없어"

여자는 웃는 얼굴로 남자를 위로한다.


"그래도…"

허우대만 멀쩡한 남자. 행여나 처음 생긴 여자친구의 마음이 돌아설까 걱정이 앞선다.

남자의 이런 의존적이고 수동적인 모습이… 여자를 더욱 고양시킨다.


"괜찮다니까~. 우리 남친, 마음이 이렇게 여려서 어떡하나"

 남자의 약한 모습이 보일 때 마다, 자신에게 기대는 모습이 보일 때마다,

 남자를 가지고 싶다.


이미 남자는 자신의 것 이라 어쩔 수 없는데도, 남자를 가지고 싶은 욕구가 끓어오른다.


이미 자신의 소유인 것을 소유하고 싶은 모순적인 욕망…

여자는 최대한의 자제심을 끌어모아서, 남자의 손을 꼭 붙잡는 것으로 참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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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발령 공고와 함께, 프런트 직원 한명이 전출 되었다. 


사유는 사내 성희롱. 

사안의 심각성을 고려하여 피해 당사자에게 사유를 알리지 않고 조용히 처리되었다.


프런트 직원은 어이가 없다.

어제까지 잘 다니던 5성 호텔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지방의 콘도로 발령받았다. 


이유도 얼토당토 않은 성희롱이라니,

아무리 상부에 따지고 하소연을 해봐도. 엘리베이터 CCTV 영상을 보여주며 받아들이란다. 


고작 어깨 한 번 만진거 가지고!


사유가 저래선, 고용노동부에 신고를 하지도 못한다.

갑작스레 CCTV 영상을 인사과나 보안팀에서 돌려봤을리 없다. 

누군가 신고를 했으니 징계위원회가 열린 것이다. 


새로온 신입을 의심해보지만, 그럴 리 없다.

남자의 반응을 보아하니, 자신이 전출가는 것 조차 모르는 모양새다.

 

그렇다면..


"같이 탔던 그 여자애!"


언제 무슨 원수가 졌다고 처음 보는 자신에게 이러는 것인가!


입고 있던 앞치마가 달린 유니폼 때문에 알 수 있다.

2층 부페에서 일하는 서버겠지.


프런트 직원은 득달같이 부페로 향한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 식기류를 나르는 여자를 발견한다.


"잠깐, 나좀 봅시다."


"...무슨 일이시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프런트 직원을 쳐다보는 여자


"잔말 말고, 우리 이야기좀 해요"


"필요한게 있으시면, 여기서 말씀하시죠"


"좀 따라오라니까!"


직원은 소리를 버럭 지르곤, 여자를 끌어당긴다.

비상계단실 문을 열어제낀다.

여자를 계단실에 쑤서넣는다.


여자는,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는다.


"왜 그러시죠?"


직원을 비스듬히 쳐다보며 묻는다.


"당신이죠?"


"네?"


"시치미 떼지 말고, 나 신고한 사람. 당신이죠?"


"...네"

여자는. 단호하게, 물러서지 않는다.


"하아… 지금 뭘 모르나본데, 당신이 무슨 일을 저지른건지 알고 있어요?"


"사내에서, 권력을 위시하여, 성희롱을 일삼는 상사를, 신고했죠"

여자는 직원의 면전에 대고, 또박또박 이야기 한다.


"그으으으으게 뭐가 성희롱이라는거야?!!! 네가 그 놈 뭐라도 돼?!"

여자의 언행에 폭발한 직원이 소리친다. 

계단실에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 

여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지금 상황파악이 안되나본데, 너 때문에, 지금 사람 하나 인생 종치게 만드는거라고. 

나 그 콘도 못가, 아니 안가. 

내가 뭣하러 그 시골짜기 산속에 쳐박혀서 있으란거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프런트 직원은 해명인지 변명인지, 이야기를 쏟아낸다.


"..."

여자는 대답하지 않고서 직원을 쳐다본다


"그깟 어린애, 어깨 한번 만진거 가지고 사람하나 병신을 만들어버릴 수 있어?!"


"그 말, 지금 당장 취소하세요"

드디어, 여자가 입을 연다.


"ㅁ..뭐?"


"그깟 어린애 라는 말, 당장 취소하세요. 후회하기 싫으면"


"이게 보자보자하니까 미쳤나. 야. 니가 무슨 걔 여자친구라도 돼?

후회? 신고 한번 해보니까 네가 여기 호텔 사장이라도 되는 줄 알아?"


"네"


"하.. 니가 그 여자친구니?? 남친이 너랑 다르게 성~숙한 여자랑 이야기좀 나누고 바디터치좀 있었다고 질투 하는거야?"


"아뇨. 둘 다요"


"뭐라는거야.  좀 알아들을 수 있게 이야기 해봐아아아아!!"

속이 터지는 직원이 이젠 고함과 괴성을 지른다.


"둘 다요, 그 남자의 여자친구고. 이 호텔 체인의 최대주주입니다"


"...네?"

직원이 갑자기 공손해진다. 여자의 말을 들으니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제가, 이 호텔 체인의, 최대주주라구요."


"서…설마. 그 따님…"

분명. VIP 행사에서 본 낯익은 얼굴이다.

모기업의 재벌집단 일가의 하나뿐인 딸이 분명…


프런트 직원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당신 이력을 좀 찾아봤어요. 입사한지도 꽤 되었고, 실적도 괜찮고, 

직원들 사이에서 평판도 좋더군요. 


아마 차기 팀장이 될 수도 있었겠죠."


"저..저기 제가 무례를 저질러…"


"아직 제 말 안끝났습니다."


"죄송합니다"

프런트 직원이 고개를 숙인다. 드디어, 직원과 여자의 머리 높이가 알맞게 조정되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머리의 높이가 높은 자가 지배자다


"하지만, 저희 호텔 체인에선 직원간 갑질이나 성희롱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발령 정도로 끝난걸 다행으로 생각하세요"


"선처에 감사…합니다"

프런트 직원은 무어라 변명하지 않는다.

여기서 입을 잘못 놀리면… 앞을 장담할 수 없다.


"그래도, 그간의 실적을 보아서. 2~3년 정도 그곳에서 근무하신다면, 새로 개장하는 업스케일 호텔의 오픈맴버로 넣어드리죠."


"기대에 보답하겠습니다"

직원의 머리 위치가 좀 더 낮아진다.

채찍은, 당근이 있을때 그 효과가 커지는 법이다.


"단, '조용히' 있어야 합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아 들으시죠?”


"명심 하겠습니다"


여자는 계단실에서 나와 다시 뷔페로 향한다.

프런트 직원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대로 계단실에서 주저앉는다.


남자는, 곧 있을 월급날 생각에 기분이 좋기만 하다.


—-----


두달이 흘렀다.

개강을 준비하기 위해 호텔 아르바이트를 그만둔다.


근무 마지막 날, 지배인은 남자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언제라도, 일이 필요하면 이쪽으로 연락하세요. 저희 호텔은 당신과 다시 일하고 싶군요”


최대주주인 여자에게 잘 보여서 나쁠 건 없다. 

혹여나 헤어지기라도 하면 불채용의사를 밝히면 끝날 일이다.

더군다나, 남자의 업무적 능력은 기대 이상이다.

그 돋보이는 외모 덕분이든, 외모가 아니여도 그의 성실함이든.


“정말 감사합니다.”


남자는 지배인이 건네준 명함을 받아든다.

한달 전,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우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다음학기는 장학금이 지급될 것이라고! 


더군다나 이번 방학때 벌어들인 소득은, 학기중 벌어들인 알바보다 수 배나 되었다.

이번 학기는 좀 더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다.

여자친구와 만나는 시간을 더 늘릴 수도 있다.


“아가ㅆ..크흠. 당신도 다음에 다시 뵙길 바랍니다.”

여자에게도, 명함을 건네주는 지배인.

하지만, 다시는 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부디… 다음번엔 고객 혹은 주주와 사업장의 관계로 만났으면 한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뵐게요”

여자의, 이중적 의미가 함축된 답변.

지배인의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곧, 사귄지 100일째가 되는 날이다.

장학금도, 소득도 있는 남자는 가장 먼저 여자친구와의 기념일 선물을 사기로 마음먹는다.

적어도, 선물만큼은 잘 사는 집안의 여자도 좋아할 만한 것으로...


여자의 비어있는 왼쪽 손목이 눈에 띈다.

왼손 약지도 좋겠지만… 그건 부담스러워 할 지도 모른다.


대신, 여자의 핸드폰과 연결할 수 있는 애플워치를 이미 주문했다.


남자가 기숙사로 돌아오자


“야 택배왔드라, 뭐냐?...애플워치?”

껄렁이 룸메이트가 남자를 맞이한다.


“오랜만이다. 맞아. 여자친구꺼”


“이열, 돈좀 썼는데? 방학때 어디 좋은 일자리 구했나봐?”


“뭐... 어쩌다 보니까 잘 됐어”


여자친구 덕분에 낙하산으로 고수익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이야길 하긴 껄끄럽겠지


남자는 택배박스를 뜯는다.

전화로 아웃백에 예약을 한다.

온라인으로 식사권을 할인된 금액에 구매한다.


“야, 너 통신사 어디냐?”

이제, 통신사 할인만 챙기면 완벽하다.

알뜰폰을 쓰는 남자는 룸메이트의 통신사를 확인한다. 


“나? SK”


“멤버쉽 한번만 쓰자”


“딜”


“딜은 원딜이고 좀 걍 빌려줘”

이젠 룸메이트와  티격태격 티키타카도 한다.


벌써, 다음 주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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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을 하고, 전쟁같은 수강신청을 해내고, 강의 OT를 듣고,

가방의 애플워치를 확인하고, 화장실에서 머리도 한번 매만지고,

옷깃에 뭐 묻은건 없는지 살펴본다.


곧 강의가 끝나는 여자친구와, 처음으로 패밀리 레스토랑을 간다.

주문하는 방법과 맛있는 메뉴까지 모두 조사했다.


간단하다.

직원이 이것저것 물어보면

모두 ‘네’라고만 대답하면 된다.


학교 정문에서 여자를 기다린다.

저 멀리 건물에서 나오는, 후광이 비치는 인물이 한명.

눈에 콩깍지라 해도 할말은 없지만, 멀리 있어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손을 흔들어 보니, 상대방도 손을 흔든다.

조금씩 가까워져 오는 그녀.


“많이 기다렸어?”


“아냐, 나도 방금나왔어”


“오늘은 어디로 가는거야?”


“저녁밥부터 먹자”


남자는 여자를 번화가에 위치한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들어간다.

안내직원은 예약자 명단을 확인하고, 두 남녀를 자리로 안내해준다.


"주문 바로 하시겠어요?"


"투움바 파스타하고 베이비 백 립 세트로 주세요"


"네, 베이비 백 립은 작은걸로 드릴까요?"


"네"

좋아. 외운 대로만 말하면 된다.


"에이드는 딸기, 키위 있는데 뭘로 드릴까요?"


"딸기로 주세요, 자기는 뭐 먹을래?"

상정외 질문이 왔지만, 이정도마저 못 고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어.. 키위로 주세요, 이야. 자기가 예약한거야?"

여자도 이런 패밀리 레스토랑이 처음인 듯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맞아"


"말씀중에 죄송한데, 사이드는 볶음밥으로 드릴까요 감자샐러드로 드릴까요?"


"....네?"

볶음밥? 감자? 그런게 있었나? 추가금액이 나오면 난감한…데


"사이드는 볶음밥이랑 감자샐러드랑 있어요. 뭘로 드릴까요?"


"음…추가금이 있나요?"

남자가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세트에 포함된 금액이라 따로 더 내실건 없으세요"


"그럼 아무거나 주세요"


"....네. 그러면 볶음밥으로 드릴게요"

직원은 '아무거나'라는 답변에 잠깐 움찔 했지만,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었다.

여자는 그런 직원을 유심히 쳐다본다.


"오늘 우리 100일이잖아, 기념일인데 맛잇는거라도 먹을까 해서 알아봤지"


“진짜?”


“그럼, 선물도 준비했는걸?”

남자는 비장의 애플워치를 꺼낸다.

내용물이 잘 보이도록, 투명한 포장지에 쌓여있는 박스


“와!, 이거 애플워치야?  지금 풀어봐도 돼?”


여자는 신난듯 박스를 들고 이리저리 둘러본다.


“얼른 차 봐, 잘 맞나 보자”


여자는 포장지를 벗겨내고, 박스를 뜯고, 시계를 꺼낸다.

전원을 켜고 나서, 자신의 아이폰과 연동을 한다.


“이제 나도 얼리어답터네?”

여자는 긴팔 가디건을 걷어올려,

자신이 차고있던 아날로그 시계를 빼고, 애플 워치를 착용한다.


“하하..어? 자기, 시계 있었어?”

남자는 여자의 아날로그 시계를 처음 본다.


“어..어?.. 어어.. 하나 집에 있던거 잠깐 차고나온거야..”

말을 얼버무리고, 파텍 필립(Patek Philippe)시계를 가방 속으로 넣는 여자.

알루미늄 케이스와 밝은 스타라이트 색상의 시계끈이 맘에 드는지

연신 시계를 만지작 거린다.



“브레드 드릴게요~”

이윽고, 빵부터 시작해서 패밀리 레스토랑의 음식들이 나온다.


–—--


“아, 잘먹었다.”


“그러게, 처음 먹어봤는데 맛있긴 하다”


“빵도 몇개 서비스로 주고, 좋네”


“난 이 망고버터가 맘에 들어”

식사를 하고 난 뒤, 양손에 한봉지씩 서비스로 나온 빵을 챙겨든 두사람.


“그럼, 이제 우리 남친 선물 사러갈까?”

여자는, 남자를 이끌고 번화가 한가운데로 향한다.


“어? 내 선물도 있었어?”

내심 기대하긴 했지만, 정말로 있을 준 몰랐다.

애초에, 그녀가 빈손으로 나왔었으니까.


“그럼, 내가 옷 선물해줄게. 옷은 입어보고 사야해. 저쪽에 매장 있으니까 가보자 가보자”


애플워치를 선물받고 옷을 준다 그러면 남들이 손가락질을 하겠지만

남자는 그런 것 따위 신경쓰지 않았다.


배도 부르고, 여친도 같이 있고, 날은 화창하고, 연애 100일차.

자잘한걸 신경 쓸 수 있을 정도로 뇌의 여유가 넘치지 않는다.


그는, 지금 반경 100km 내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라고 자부할 수 있다.


자부할 수 있었다.


“다리 아프니까, 잠깐만 앉아있다 가자”


시계는 저녁 7시 반을 가리키고, 여자가 남자를 백화점으로 이끈다.


“저쪽에 벤치 있어”

엘리베이터 옆에 있는 고객휴계실을 가리키지만


“아냐아냐, 이쪽으로 들어와. 여기가 더 편해”

여자는 1층 안쪽,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위치한 VIP 라운지로 향한다.


벽인줄 알았던 VIP 라운지의 문이 열리고

넓은 공간에 비어있는 테이블들이 줄지어 있다.


시끌시끌한 바깥과 다르게,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사람들도 얼마 없다.


“우리.. 여기 들어와도 되는거야?”


“괜찮아 괜찮아, 엄마랑 올때도 맨날 여기 들어왔는걸?”

여자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 자리에 앉는다.


남자도 짐을 내려놓고 착석하자, 백화점 직원 한명이 커피를 한잔씩 내온다.


“환영합니다 고객님”


“아..아뇨, 저희 이거 시킨적 없는데요”

남자가 손사래를 친다.


“아닙니다. 고객님을 위해서 저희가 준비한 것이니, 부담갖지 마세요”

직원은 커피를 마저 세팅한다.


“한 숨 돌리고, 옷 보러 가보자”

익숙하다는 듯, 여자는 커피를 홀짝인다.


남자도 커피를 마셔보는데.. 평소에 마시던 커피와는 사뭇 다른 맛이 난다.

쓴맛이 있지만 산미가 적고 고소한 맛이 강하다.

그래, 맛있다.

이런 커피라면 잠을 깨는 목적이 아니라, 맛으로 몇잔이든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직원이 위치한 쪽을 보자, 일리(ILLY) 브랜드가 적힌 원두가 보인다.

뭔진 모르겠지만, 기억해 놓도록 하자.


“하아. 난 아직도 배부른거 같아, 옷 입어볼 수 있을까?”

남자는 배를 쓰다듬으며 농담을 건넨다.


“그러엄, 우리 남친 몸매가 얼마나 탄탄한데”

여자는 남자의 상체를 쓰다듬는 시늉을 한다.


….

수다를 떨며 커피를 비우고, 직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여자가 이끄는 매장으로 향한다.


“날씨가 추워지니까 바람막이는 어떨까?”

여자는 유니섹스&스포츠웨어 층에 위치한 매장을 둘러본다.

나이키, 아디다스, 데상트


“흐음.. 역시 포멀한게 자기한테 잘 어울려”

몆 층 내려와서 남성복 층으로 이동한다.

닥스, 빈폴, 헤지스, 레노마


“신발, 신발도 보자”

같은 층에 위치한 금강제화, 에스콰이아, 소다, 텐디….

“랜드로바는 좀 아저씨 같잖아” 하며 지나친다.


남자가 입어본 옷의 가짓수가 20벌은 넘어가고

신어본 신발이나 구두의 수도 6~7가지.


시계는 8시 반을 넘어 9시를 가리킨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점점 사라지더니… 이제는 두 남녀와 직원들만 보일 뿐이다.


“아까 안내방송 나오던데… 폐점한거 아냐?”

남자는 머뭇머뭇 주변을 둘러본다.


“아냐아냐, 괜찮아. 저번에 엄마랑 왔을때도 10시 넘어서도 운영했는걸”


“그..그런가?.. 저기요. 오늘 몆시까지 운영하시나요?”

남자는 눈에 띈 직원 한명에게 질문을 구한다.


“편하게 쇼핑 하시면 됩니다.”


“..네?”


“신경쓰지 마시고, 편안한 쇼핑 되십시요. 고객님”

말은 통하는데, 대화가 성립하지 않는다.

약간의 공포를 느낀다.


“거봐, 괜찮데두. 자기 이거봐 이거”

여자는 연신 남자에게 물품들을 가리킨다.

여자가 쇼핑하는 방식은 무언가 이상하다.


옷을 고르고, 신발을 고르는 동안, 직원들이 옆에서 항시 대기중이다.

무언가 물건을 집으면, 여자에게서 옷을 받아 남자에게 시착시켜준다.

대부분 맘에 들지 않는지, 벗어둔 옷을 직원에게 건네기만 한다.

여자의 맘에 드는게 있으면, 달라는 요청을 하지만

결제도 하지 않고, 물건을 들고 나오지도 않는다.


그저 다음 매장으로 향할 뿐이다.


드라마에서 보는, 돈많은 부자들이 쇼핑하는것과는 다르다.

애초에 1층~2층에 있는 명품매장은 둘러보지도 않는다.

직원들이 옆에서 재잘재잘 설명하느라 떠들지도 않는다.

F/F 신상이라느니, 시즌아웃 세일품목이라느니, 고객님께 잘 어울린다느니 그런 미사여구도 하나 없다. 


그저 직접 고르고, 입히고, 아니에요, 주세요의 반복

배려와 감사가 오가는 의사소통이 아니다.


당연하다는 듯 요구하고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인다.

남자는 느껴지는 이질감이 계속 불편하다.


시계가 9시 반을 가리키자, 드디어 여자는 쇼핑을 마치고 백화점을 나선다.


입구 옆 안내데스크에, 여자가 고른 옷가지들이 준비되어 있다.

아디다스 바람막이 하나, 빈폴 폴로 셔츠, 금강제화 헤리티지 리갈 캐주얼 로퍼, 지오다노 슬림 팬츠, 헤지스 가디건 등등….

쇼핑백 두개에 남자가 입어본 옷들이  빼곡히 담겨있다.


“어…이게 다 우리꺼야?”


“자기꺼지, 내가 주는 선물이야”


“너무 많은데. 이렇게는 못받아”

물품 하나하나는 남자가 준비한 애플워치에 미치지 못하는 가격이지만

다 합한다면 두개를 사고도 남을 듯한 기세다.


“아냐, 명품도 아닌데, 하나도 안비싸”

여자는 남자에게 쇼핑백을 밀어넣는다.


“아니..그래도”


“자기한테 얼마나 어울리는 옷들인데, 내가 열심히 고른걸 안받을거야?”


여자의 강권에도 남자가 머뭇머뭇 거리자.

여자는 옷에 달려있는 텍을 모두 손으로 뜯어낸다.


“자..자기야!”


“..으…짜!, 이제 환불 하나도 못한다~. 무조건 자기가 입어야해.

 그쵸? 이제 환불 안되죠?”

여자는 안내데스크의 직원에게 동의를 구한다.


“고객님께서 원하시면 저희는 언제나 환불을…”

안내데스크 직원은 규정대로 답변을 하려 했으나


“환불, 안되죠?”

여자가, 재차 동의를 구한다.


“....네! 고객님, 텍이 제거된 상품은 환불이 힘듭니다.”

여자의 질문에 미소로 답변하는 안내데스크 직원. 프로라면 프로답다.


 “고마워, 잘 입을게”

자신이 새 옷을 사본적이 얼마만인가,

하물며, 이만한 옷들을 받아본 적이 있기라도 한가

캐주얼이지만 가죽구두는 또 처음 신어본다.


선물을 한아름 받아든 남자는 그제서야 만면의 미소를 짓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직원들한테 세탁방법을 물어볼 걸 그랬다.


웃는 얼굴의 남자를 바라보는 여자의 얼굴이 더욱 환해보인다.

두 남녀가 떠나간지 10분도 채 안되어, 백화점의 문이 잠긴다.


—---------

“크으.. 때깔 죽인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줄 알아요. 너 진짜 여친한테 잘해야한다.”

껄렁이 룸메이트는 새 옷을 입고 있는 남자를 연신 돌려본다.


“권리는 무슨, 나 그런사람 아니거든”


“알지, 그래서. 이렇게 입고 데이트 나가는거야?”


“아냐, 일하러가”


“야, 새옷을 입고?”


“하지만 빨리 입어보고 싶은걸”


“어휴.. 애냐?”


남자는 여자가 사준 새옷을 입고 외출한다.

받은 만큼 돌려주기도 하는 법.

원래는 이번 학기를 공부만 하려고 했지만

여자에게, 더 좋은 선물을 해주고 싶다.


크리스마스를 목표로, 반지를 선물해주자!

비록 100일땐 부담이 될까 두려워 못해주었지만

이제는 명분이 선다.


더군다나, 저번에 일하던 카페에서 부디 도와달라는 요청이 왔다.


“점장님~ 저왔어요”


“어어, 그래. 얼른 들어와”

월급쟁이 카페 점장은 밝은 미소로 남자를 받아들인다.

카페 안에는 언제나 그랬듯이, 사람들로 북적인다.


이전과 다른점이라면

키오스크가 사라지고

카운터를 보는 인원이 2명이다.


남자가 일할땐 언제나 혼자서, 주문은 키오스크로 받았는데…

주문을 받는 카운터 너머로, STAFF ONLY라 적힌 창고겸 사무실로 남자를 데려가는 점장.


“본사 지침이 바뀌어서, 사람을 여러명 고용하기로 했단다. 여기 근로계약서 읽어보렴”


다짜고짜 근로계약서부터 들이민다,


“어…네. 음… 시급이.. 없네요?”


“월급제란다. 정해진 근로시간만 준수하면. 월 급여로 나갈거야”

남자에게 지정된 근로시간은 월 수 금 17시부터 마감까지.

기재된 월 급여는…


“배..백이십만원이요?”

남자는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본다.

한주에 15시간 일하니까

한달이면 약 60시간… 시급으로 치면 2만원이다.


“주휴수당에 매일 야간근로 30분이 포함된 거니까, 시급은 생각보다 그리 높지 않단다. 어때. 그래도 해볼래?”


총 급여는 아무래도 호텔에서 일할때가 높았지만 그땐 일도 힘들고 근로시간도 월등히 길었다.


남자는 대답 대신, 근로계약서 밑에 싸인부터 한다.


“이번학기도 잘부탁드려요 점장님”


“나야말로 고맙지… 정말 고맙다.”

오히려 남자의 양 손을 붙잡고 흔드는 점장이 약간 이상해보였다.


키오스크가 사라졌어도

동시에 일하는 사람도 3명

여차하면 점장도 음료를 만들러 나온다.


예전에 비하면 키오스크가 없어도 훨씬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다음손님~”

남자의 동료 점원이 포스기 앞에서 소리친다.


“네!. 저기.. 아메리카노 한잔이랑…그리고…”

얼굴을 붉히며 뜨문뜨문 주문하는 여성손님.


그 뒤로, 대기줄이 매장 바깥까지 나갈 기세다.

이상한 점이라면, 손님들의 대부분이 여성이다.


남자를 포함한 모든 점원은 남성으로 구성되어있는데.

한명은 주변 대학교에 재학중인 모델학과 학생, 다른 한명은 체육학과 학생이다.

하나같이 외모가 준수하고, 키가 남자보다 훤칠한 사람들이다.


모델학과 점원이 주문을 받고

남자와 체육학과 점원이 커피를 만든다.

하지만, 주문을 받는 대기줄이 계속해서 길어진다.


하는 수 없다.

“점장님, 음료 만드는 것좀 도와주세요”


“으..응! 갈게”

안쪽에 있던 점장이 우당탕탕. 얼굴을 가리는 마스크를 쓰고 지원을 나온다.


남자는 꺼져있던 포스기를 키고 소리친다.

“뒤에 계신 손님! 이쪽에서 계산 도와드릴게요”


일순간, 여자 손님들이 우르르르 남자의 포스기 앞으로 줄지어 모인다.


“하하…”

모델학과 점원이 기가 꺾였는지, 헛웃음을 짓는다.

자신도 어디가서 외모로 꿀리지 않는데, 세간의 평가는 냉담하고도 정확하다.


커피를 만드는 점장의 얼굴은, 마스크 밑으로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미소가 한가득이다.

이 기세면 이번달도 매출 신장이다.


본사 지침이다 뭐다 

채용부터 직원들 급여의 책정까지 하나하나 간섭 할 땐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이번에 새로 취임한 대표이사의 안목은 정확했다.


대기업에서 월급쟁이 점장이 일하는 카페 프랜차이즈를 인수했다.

그리곤 기존 임원진들을 싹 갈아엎어버리고 새로운 대표이사를 선임했다.


새로 내려온 대표이사는, 시대를 역행하는 발상을 내놓는다.


‘키오스크를 모두 없에 버리고, 직원을 더 채용할 것. 음료의 가격은 현상유지’


월급쟁이 점장도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어이없는 발상이다.

저 대표이사란 사람, 현장에 나와보긴 한걸까?


요즘 학생들은 싸다고 커피를 먹지 않는다.

아무리 비싸더라도 스타벅스나 폴바셋을 애용한다. 

브랜드를 소비하는 것이다.


자신들같은 중저가브랜드는, 원가 1원도 애껴서 마진을 남겨야 하는데..

뭐? 사람을 더 뽑아? 키오스크를 없애?


직원들의 반발에 대표이사가 하는 수 없이 시범지점을 지목했다.

한 지점만 금년도 하반기에 시범사업을 해보고, 효과를 증명하겠다는 것이다.


시범지점엔 재수가 없게도 월급쟁이 점장의 지점이 뽑혔다.

본사 투자자라던가 관계인 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와선

하나부터 열까지 꼬치꼬치 간섭이다.


급여를 올리고

주변 대학에서 직원들을 직접 스카웃해오고

인테리어를 바꾸고

키오스크를 매장 밖으로 빼버린다.


당연히 시범개장 첫 주엔 파리만 날린다.

어쩌다 한번씩 뜨문 뜨문 오는 손님들이 있을 뿐이다.

월급쟁이 점장은 일요일 저녁에 직접 폐점하면서, 이직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새로 채용한 직원들과 개점을 하려는데….

몇몇 사람들이 문이 잠긴 카페 앞을 서성인다.


“어서오세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점장은 손님들을 놓칠세라 빨리 안으로 들이고, 가게의 불을 킨다.


“아니에요. 천천히….해주셔도 괜찮아요”

손님들은 별 상관 없다는 듯,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자리에 앉는다.

하나같이, 여성 손님들이다.


그때부터, 손님들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온다.

어디서 소문이 퍼진건지, SNS에 연신 매장 사진과 직원 사진, 커피 사진이 줄지어 올라온다.


직원들이 잠시 숨을 돌리고, 점장이 대신 나오면 

손님들은 메뉴도 고르지 않고 딴청이다.


하는 수 없이 점장은 마스크를 쓰고 사무실로 들어간다.

성과를 본 점장은 본사에 채용의뢰를 더욱 재촉했다.


“거 직원이 부족하다니까요! 저도 커피 뽑다가 죽을 맛이라구요!!”

아무리 지랄을 해도, 본사 인사과는 들은 척도 안한다.


그래서 점장은 직접, 같이 일하던 남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른다.


남자는 출근하고 나서부터 하루종일 커피를 뽑고, 주문을 받고, 미소를 짓는다.

그럴리야 없겟지만, 체육학과 점원의 이두근도 수척해진 모양새다.


기숙사 방으로 들어와 씻는둥 마는둥 하고

여자친구와 통화를 한다.


“많이.. 힘들어?”

여자는 걱정이 되는듯, 조심스레 묻는다.


“말도 마, 손님이 물밀듯이 밀려온다니까”

남자는 신세한탄을 내뱉는다.


“나도, 한번 가봐도 될까?”

여자는, 남자의 일하는 모습이 궁금하다. 

아니, 봐야겠다.


“그래, 한번 와. 근데.. 자리가 있을지 모르겠다.”


“괜찮아, 얼굴만 한번 보지 뭐”


그리고 다음 근무일,

남자가 연신 미소를 지으며 주문을 받는데

문이 열리고, 여자가 들어온다.


많고 많은게 여성 손님이지만, 남자는 여자가 들어오는 모습을 눈치챈다.

여자가 손을 흔드는 모습에, 남자가 손을 작게 흔들어 보인다.

물론, 아무것도 모른 채 줄을 서있는 여성 손님들도, 남자에게 손을 흔든다.

여자가, 앞에 있는 여자들을 바라본다.


순간, 점장이 사무실에서 뛰쳐나온다.


“아이고, 사장님, 오신다고 하면 말씀하시지!”

한달음에 여자 앞에 달려가, 악수를 건네며 아는 체를 한다.


‘사장님? 무슨소리야?’

남자는 당췌 이해를 할 수 없다.


“아..아니에요. 오늘 그렇게 온거 아니에요, 저 커피 마시러 왔어요”


“줄 서있지 말고 저한테 말씀하세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들어가보세요”

여자는 난처하다는 듯, 점장을 밀어낸다.


둘이 아는사인가?


남자는 손님에게서 받아든 카드로 결제를 진행하면서도

눈은 여자친구에게서 떼지 못한다.


20여분이 지났을까,

드디어 여자의 차례다


“다음손님~”


“네~”


“무엇을 시키시겠어요?”


“음. 아메리카노랑, 여기 점원 하나요”

잠시, 장난을 치는 여자


“죄송합니다, 점원은 비매품입니다.”


“그럼, 아메리카노 한 잔만 주세요, 따뜻한걸로”


“진동벨 받으시고,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남자는 평소보다 좀 더 쾌활하게 응대를 한다.

굳이 여자의 손을 잡아서, 진동벨을 건네준다.


5분만에 커피가 완성된다, 남자에게 작게 손을 흔든다.

남자도, 여자에게 작게 손을 흔들어 보인다.

주변에 있는 다른 고객들도, 얼굴을 붉히며 남자에게 손을 흔들다가, 여자와 눈이 마주친다.


—---


“점장님, 아까 그 사장님이라고 하는 사람. 누구세요?”


폐점시간, 남자는 넌지시 월급쟁이 점장을 불러세운다.


“어? 아아.. 아냐, 그냥. 아는사람이야”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얼른 들어가. 기숙사 닫힐라”

저번에 느껴봣던 기시감, 말은 통하지만 대화가 성립하지 않는다.

소심한 남자는 더 캐묻지 못한다.

대신, 여자에게 전화한다


“일 끝났어?”


“어.. 응. 지금 끝나고 돌아가는 길이야”


“오늘도 많이 힘들었지, 사람 엄청 많더라”


"그러게, 근데 자기, 우리 점장님이랑 아는 사이야? 사장님?”


“아.. 아아. 아냐! 우리 아빠랑.. 아는 사이야, 아빠가 자기네 프랜차이즈에 커피 공급 하시거든…”

여자는,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분명 남자가 일하는 프렌차이즈는, 계열사에서 유통하는 커피만 취급하니까.


“진짜? 세상 참 좁구나, 아버님이 커피사업하셔?”


“으..응? 응…”

다시한번 말하지만, 여자는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호텔을 운영하는 외식사업부에서, 이번에 커피 프랜차이즈를 인수했으니까.


여자의 반응이 좀 어설프지만

남자는 느껴지는 기시감을 뒤로하고, 오늘 하루 있던 일을 여자와 이야기했다.

몇년 전과는 다르게. 하루하루가 잘 풀려나간다.


생각보다 돈도 잘 벌리고, 장학금도 받았고, 여자친구도 있다.

빚으로 시작했던 대학생활이였지만

앞길은 이제 빛으로 가득할 것 같다.


하지만, 너무 밝은 빛은 오히려 눈을 멀게 한다.

여자가 그랬다.

남자라는 빛에 눈이 멀었는지, 조금씩, 조금씩, 한걸음씩 폭주한다.


남자가 받은 월급으로 맛있는 순대와 돼지곱창을 먹으러 간 적이 있었다.

여자는 곱창도 가릴 것 없이 맛있게 먹는다.

푸아그라도 즐겨 먹는 입장에서, 돼지의 내장따위에 거부감은 없다.


그리고, 남자를 데리고 수제 초콜릿 카페를 향한다.

남자가 사준 식사비보다, 주문한 조각케잌 하나가 더 비싸다.

여자는 조각 케익을 잘라서 남자부터 한 입 먹인다.


위에 뿌려진 반짝이는 이거… 진짜 금가루 아니겠지?


수산물 시장을 돌아다니며 데이트를 한 적도 있다.

비린내에 코를 막으며 물고기들을 구경하는데

여자가 저번에 먹어봤다며 킹크랩을 가리킨다.


한마리 쪄달라고 하려는 여자를

남자가 잡아 끌며 말린다.


겨우겨우 여자를 설득해서 우럭과 광어만 포장한다.

식당으로 가지 않고, 강변에 위치한 공원으로 향한다.

돗자리를 펼치고, 흐르는 강물을 구경한다.

소주와 함께 낭만을 즐긴다.


주말에 데이트를 할 때 마다.

여자는 남자에게 꼭 무언가 선물을 해준다.

지갑, 시계, 구두, 와이셔츠, 가방, 집업후드, 향수, 샴푸, 로션…심지어 속옷까지


남자의 형이 쓰다가 물려받았던 물품들은

하나씩 하나씩, 여자가 사준 물품들로 바뀌어간다.


단풍이 새빨갛게 물들었다가 이내 우수수 떨어질 즈음엔

기숙사 방에 껄렁이 룸메이트의 짐보다

남자의 짐이 훨씬 많았다.


하는 수 없이, 남자는 형이 물려준 옷과 가방을 버린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여자가 사준 것들로 꾸밀 수 있게 되었다.


부담스럽다.

언제까지고, 받기만 하는 생활을 이어갈 순 없다.

그러기 위해 선택한 대학 진학이다.


남자의 수중엔, 학생치곤 꽤나 많은 돈이 모였다.

4달을 넘게 그 월급제 카페에서 일했으니까, 

생활비나 여가비를 제외하고도 백만원이 훨씬 넘는 여윳돈이 있다.


남자는, 용기를 내어본다.

곧 찾아올 크리스 마스를 위해, 주변 귀금속 상가로 향한다.


“저기… 다이아몬드 반지는 얼마나 하나요?”


“음, 학생같은데. 선물하려고?”


“네, 여자친구에게 선물하려구요”


“생각보다 비싼데, 괜찮겠어?”

나이가 지긋한 귀금속 상가의 주인.

말은 저래도, 남자를 업신여기는게 아니다.

보석중의 보석인 다이아몬드는, 그만큼 가치가 높다.


“..네! 저 돈 많아요”

남자는, 여차하면 2백만원이라도 반지에 쏟아부을 생각이다.

지금까지 만져본 돈들 중에서, 가장 큰 금액이다.


“허허.. 어디보자, 그럼… 이건 어떠니?”

노인은 안경을 고쳐쓴다.

몆번 손으로 다른 반지들을 제치고, 알이 굵고 반짝이는 반지를 하나 꺼낸다.


“와….”

빛을 여러방향으로 반사하는 세공 다이아몬드.

단순한 빛의 반사로 생겨나는 반짝임일지라도, 

보석의 반짝임은 사람의 혼을 흔들어 놓기 충분하다.


“이게 보통 프로포즈용으로 쓰이는 반지인데, 가격이…어디보자…”


“꿀꺽”

남자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주인에게까지 울려퍼진다.


“5백만원이네”


‘...네?”


“5,000,000원”


“저기.. 죄송한데, 좀 저렴한건 없을까요?”


“그럼… 이건 어떠겠니? 한 백이십만원 정도 할거다.”

옆에 있던 작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내는 주인.


아무리 보아도, 다이아몬드는 점으로 보일 정도로 작다.


“저…그…”


“하하하, 생각보다 많이 작지?”


“....네”


“그럼… 이건 어떠니?”


주인은 남자에게 노란빛을 띄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건넨다.

지금까지 보았던 다이아와는 다르게, 색깔이 들어가 있었고

링의 모양새도 다른 것들과 비교해서 더 화사했다.


“와.. 이것도 예쁘네요…근데…”

보석의 아름다움에 눈이 가지만. 가격이 문제다


“이건 팔십만원”


“..네?”


“800,000원, 아까보다 좀 살만 하지?”


“네. 이건 다이아몬드가 아닌건가요?”


“아니야, 다이아몬드가 맞단다. 다만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거지”


“아…”


“비싸다고 좋은게 아니란다? 천연 다이아몬드는 채굴하는데 환경파괴도 일어나고, 전쟁도 일어나지.

하지만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이 인공다이아몬드는, 오히려 그런면에서 깨끗하다고 할 수 있단다.”

저렴한 가격의 상품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주인장의 언변.


“그럼. 이걸로 할게요”


“그래, 사이즈는 어떻게 해줄까?”


“..그게…”


“녀석, 아무것도 안알아보고 무작정 달려왔구나.”


“네..”


“내가 좀 큰 걸로 해줄게, 안맞으면 나중에 여자친구랑 같이 와, 내가 잘 맞춰줄게”

나이가 지긋한 주인은 반지 케이스에 인공다이아 반지를 담아 남자에게 건넨다.


남자는 소중한 듯이, 가방 깊숙히 케이스를 넣는다.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지난 다음날.


“사장님. 안녕하세요”


“어서오세요”

자리에 앉아서 신문을 보던 주인장이 무릎을 짚고 일어난다.

보아하니, 저번에 왔던 학생과….


“여자친구랑 같이왔니?”


“네. 아무래도 사이즈가 좀 커서요”


“허허.. 한번 봅시다”

여자가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남자의 손을 붙잡는다.



—-----------


그리고 다음해에, 남자는 군대를 가게 되었다.



지금까지 여자에게 선물받은 모든 물품을 여자에게 돌려주면서.


 "왜? 내가 뭘 잘못했어? 바꿔볼께, 나 버리지마"


매달리는 여자에게, 자신이 차고있던 반지를 들려보내는 남자.


 "넌, 잘못한거 없어. 그냥 내가 못난 탓이야"


남자가 방금까지 차고 있던 반지는, 천연 다이아몬드가 박힌 백금반지다.

만약 저번의 그 귀금속 상가에서 산다면, 5백만원 즈음은 해보이던 그런 비싼 반지.


크리스마스에 우연찮게도, 남자와 여자는 서로 같은 선물을 준비했다.


“뭐가 부족한거야? 내가 다 구해줄게, 나 군대도 기다려줄 수 있어. 그러니까 응?”

여자의 자취방에서, 남자를 붙잡고 늘어지는 여자

입구엔 파란색 플라스틱 박스 2개에 여자가 지금까지 선물해준 물품들이 가득 담겨있다.


“아냐, 기다려주지 않아도 돼. 넌 나한테 너무 과분해”


“아냐아냐아냐, 오히려 네가 나한테 넘치지. 나 봐봐, 설거지도 아직 제대로 못하는걸?

 자기없으면 나 못살아. 그니까. 제바아아알”


“...지금까지, 나한테 숨긴 것 하나도 없어?”

마지막으로, 남자는 여자에게 질문한다.


“없어. 내가 자기한테 왜 거짓말을 해. 응?”


“그래? 정말로?”


“진짜야, 나.. 나나 한번도 자기한테 거짓말 한 적 없어”


“....네 아버지 성함. 말해줄 수 있니?”


“딸꾹”

평생 모를거라 생각했다.

아니, 알게 되더라도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여자는 남자에게 ‘비싸지 않은’ 물품만 선물했으니까


마음같아선 가방은 구찌, 지갑은 입생로랑, 코트는 버버리, 시계는 못해도 롤렉스를 사주고 싶었다.

셔츠나 구두도 그런 기성품이 아니라, 수제 맞춤으로 꼭 맞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찾아보고 찾아보고 줄여서 겨우 고른게 지금까지 남자에게 선물해준 물품들이다.

분명, SNS에선 연인들끼리 이정도 브랜드의 물품들을 주고받았다.


나이키, 빈폴, 헤지스, 닥스…. 다들 평범하게 구매하는 브랜드들이잖아?

자랑하는건 명품들인거지, 그정도는 자랑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선물받고서도 아무것도 아닌 척, 입고서 SNS에 사진을 올리잖아.


지금 남자가 건네주는 반지도 그렇다.

굳이 드비어스에서 장인이 직접 가공한 다이아몬드 반지가 아니라

종로 귀금속 상가에서 저렴하게 구매한 다이아몬드 반지다


연인들끼리 기념일에 이정도는 주고받는다고 분명 SNS에 써있었다.

연인들끼린, 한번쯤 오마카세도 먹고, 

대하와 킹크랩도 먹고, 파인다이닝도 가보고 그러는거 아닌가? 


아직 면허가 없어서 차를 사는것 만큼은 꾹 참고 있었는데.

요즘 차 나오는 기간이 오래걸린데서, 

남자가 군대가면 몰래 K5를 발주넣으려고 했는데.


아빠가 튼튼한 독일 차로 해준다는거

조르고 졸라 겨우 국산으로 낮춘건데. 


요즘 애들이 할부 몆개월 끼고 외제차 샀다고 올린걸 분명히 봤는데.


다들, 그 정도는 하고 살잖아.

다들 평범한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 했잖아.


왜지? 언제 들킨거지?


여자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난다.


“... 나 이만 가볼게”

남자는 여자의 오피스텔의 문을 연다.


기숙사 두개보다 넒은 오피스텔.

커다란 파란색 박스 두개 옆에서 여자가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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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들으면 믿지도 않을거다

뉴스에 연일 오르내리는 재벌가 집안의 하나뿐인 딸이 자신의 여자친구였다고

그리고 자기가 차버리고선 군대에 들어왔다고


머리를 빡빡 깎은 남자는 해군에 지원했다.

잠수함이든 참수리든, 배를 타고 멀리 도망가고 싶었다.

육지에 있으면, 그녀가 찾아올까 두렵다.


사실대로 말해서, 그녀가 잘못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자신을 위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걸 사주고 준비해주고

경제적으로 힘들어하는 자신을 위해서 방학동안 일자리도 알아봐주고

학기중엔,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아르바이트 하는 카페 프렌차이즈도 매수하고

자신이 부담 갖지 않도록 이 모든걸 숨기고

평소에도 자제하며 살아왔다라….


기숙사에서 다이아몬드 반지를 들고 골몰하는 남자를 보자
룸메이트가 말을 건다.


“이야. 있는 집안은 다르네, 다이아반지도 있고 말이야”


“내가 있는집이냐. 알면서그래”


“누가 너래? 네 여자친구지. 그거 선물받은거 아냐”


“그래. 선물받았어, 그래서 고민이다.”


“뭐가 고민이라는거야, 나같으면 재벌집 딸이 지좋다고 달려들면 쌍수들고 환영할거 같은데”


“...재벌? 무슨소리야”


“또또또 모르는척 한다. 네 여자친구 말하는거잖아”


“무슨소리야, 잘 사는건 알았지만. 재벌이라니”


“......야 지금 내가 실수한거 같은데. 그냥 잊어라. 미안하다.”


껄렁이 룸메이트가 처음으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세상에 이정도로 세상물정을 모르는 멍청인 저 남자 하나뿐이다. 


룸메이트는 다르다.

행동거지만 껄렁스럽지 셈이 빠르고 눈치가 있다.

그 짧은 대화에서 여자의 의중을 알아챈다.


“너 사실대로 아는거 다 말해봐”


남자가 룸메이트를 쏘아본다


“아니야, 난 모른다니까…”

다이아를 내려두고 실랑이를 벌이는 남자.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는 룸메이트.


결국 뉴스기사에서 여자의 아버지와 같이 찍혀있는 여자의 사진을 발견했을때

남자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자신이 얼마나 같잖았을까? 얼마나 우스웠을까?

남자친구라고 꼴에 선물해준 애플워치를 끼고다니고, 

파텍필립을 방에 모셔놓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온힘을 다해 산 인조다이아몬드 반지와, 

크리스마스에 방문했던, 우리가 같이 일한 그 호텔 식당은 얼마나 버러지 같았을까?


남자의 가슴속에 배신감과 모멸감이 소용돌이 친다.

커다란 이삿짐용 플라스틱 박스를 자취방으로 가져온다.

여자에게 선물받은 물건들을 

박스 안에, 차곡차곡 쌓아올린다.


물건 하나에 추억이

물건 하나에 자신의 감정이

물건 하나에 여자의 마음이 떠오른다.

박스 안으로 같이 구겨넣는다.


새어나오지 않도록, 단단히 밀봉한다.

땀을 뻘뻘 흘려서, 여자의 오피스텔로 옮긴다.


얼굴을 보고 소리라도 질러주고 싶었다.

화를 내고, 있지도 않은 자존심이 상처받은걸 욕해주고 싶었다.

드라마 주인공마냥 서민놀이를 하냐면서 모욕을 주고 싶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여자가 문을 연다.

분명 헤어지기 위해 찾아 온 것인데


여자의 얼굴을 보았을 때, 모든 감정이 녹아내린다.

바로 옆, 박스에 밀봉한 감정이 새어나온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한다. 그것 만큼은 사실이다.

어쩌면, 마지막에 남자가 질문했을때, 여자가 사실대로 말해주었다면

남자는 헤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여자가 마지막까지 자신을 배려해주었기에,

남자를 위해서 집안을 끝까지 숨겼기에

남자는. 여자를 놓았다.


참수리에서 내리면 다시 참수리에 타고, 남자의 피부가 룸메이트마냥 까맣게 되었을때

남자는 제대할 수 있었다.


옛날처럼 미소년의 느낌은 없지만

지금은 건장한 미청년의 느낌을 물씬 풍기는 남자.


제대하고 복학한 학교에서 그녀를 만날까 노심초사했는데, 괜한 걱정이다.

그녀는 벌써 졸업했다고 한다. 


학교 신문 한 면에서, 졸업기념으로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이유에 대해 인터뷰가 실려있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 기업의 사회적 환원에 대해서 논하는 내용이 실려있다. 

대학 총장이, 웃는 얼굴로 그녀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이젠, 딴나라의 이야기같다.


남자는 묵묵히 공부를 한다. 도서관에서 가끔 옆자리에 여자들이 앉곤 하지만 그뿐이다.

다시 옛날로, 원래대로 돌아왔을 뿐이다.

최저시급보다 500원 많은 시급을 받고. 장학금을 받기위해 주말에도 도서관을 나간다.


그래. 이게 원래 내 삶이지.


4학년 2학기때, 남자의 취직이 확정되었다.

처음 노리던 복지공무원이나, 적십자는 합격하지 못했지만

유명 사회복지재단에 입사할 수 있었다.


남자의 꿈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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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다르다.

꿈꿔왔던 사회복지사는 없다.

자신들이 돌보는 사람들은 자신처럼 힘없고 어리숙한 약자들이 아니라

범죄자, 한량, 노숙자, 알콜중독자, 전과자 등등… 사회성이라곤 없어 배제된 사람들이다.


저번주에 쌀을 배급해주러 방문했던 사람은

노년에 성범죄를 저지르고 출소해서 땡전 한푼도 없는 노인네다.

쌀을 받고서도 양이 적네 품질이 좋지않네 뭐네 하면서 적반하장이다.


동료 직원들은,  웃지도 않고 묵묵히 일만 한다.


그리고 재단 이사장의 횡령을 뉴스기사로 접했을때

처음로 동료직원들과 한번 웃었다.


“하하. 좆같네”

남자는 퇴직금도 받지 못하고 회사에서 나왔다.


남자는 사회복지사의 꿈을 접고, 일반 중소기업에 취직했다.

자격증도 특별한 기술도 없는 나이먹은 경력직을 신입으로 뽑아줄 곳이야, 그리 많지 않다.


남자는 조용히, 자신의 일에 집중한다.

필요하다면 일을 하면서 자격증을 딴다.

국비 지원을 받아 캐드나 워드 프로그램도 공부한다.

집으로 돌아오면 쥐죽은듯이 잠만 잔다.


취미생활이랄것도 없다. 

가끔씩, 뉴스에 나오는 횡령기사를 보면 “하하 좆같네”하면서 욕이나 해주다가. ‘그 기업’이 나오면 뉴스를 끈다.


단순관리직에서 영업팀으로, 헤드헌터를 통해 좀더 큰 중소기업으로. 영업부에서 전략팀으로.


10년이란 세월이 흘렸다.

이제 남자는 예전의 남자와 다르다.


비루하던 원룸 빌라에서 나와, 대출을 끼고 근교 아파트를 구매했다.

국산이지만, 커다란 자동차도 구매했다.

저번 여름휴가땐, 해외여행도 처음 다녀왔다.

손해보기 일쑤지만, 여유자금으로 주식을 시작했다.

바쁜날이면, 가사대행을 부르기도 한다.


더이상 순대에 프랜차이즈 커피나 겨우 마시던 옛날의 자신은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집에서 혼자 먹어보는, 비싼 소고기에 무형문화재 장인이 만들었다는 소주는 그닥 맛있지 않았다.

분명, 여자가 데리고갔던 그 가게는 맛있었는데… 비싸서 그런가?


“하하 좆같네”

남자는 남은 소고기를 음식물 쓰레기통에 넣는다.


이젠, 그때의 오피스텔만큼 넒은 집에 혼자 남아있는 자신이 애처롭다.

여자도, 넓은 방에서 혼자 있으면 외로웠을까?


고개를 흔든다. 10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다.

나이가 서른을 넘었는데, 20대 초반의 추억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남자는 소주를 입에 털어넣는다.


—--------------


다음날 아침, 

회사에 출근하자 공고문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공고문엔

‘최대주주등소유주식변동에 대한 건’

이란 글귀로 시작한다.


분명 남자가 이번에 이직한 회사는 ‘사모펀드’가 최대주주였다.

기존 창업주가 무리하게 사세를 확장하려다 나자빠지고

돈을 빌려주었던 은행이 사모펀드를 주주로 내세워 경영에 참여하고

월급사장이 새로들어와서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새로 직원을 들여올때 흘러들어온 것이 자신이었다.


입사할 때만 해도 회사가 뒤숭숭했다.

어제까지 회사를 다니던 사람들이 잘리고.

머리띠를 매고 회사앞에서 농성을 하거나.

놔두고 간 짐을 챙기러 돌아오고, 영영 사라져버렸으니까.


그리고 이번에 사모펀드가 대량의 주식을 팔아넘기고.

그 주식을 구매한 사람이… 아니 회사가...


“하하…”

남자는 이제 좆같다는 소리를 내지도 못한다

대한민국에서 내노라 하는 그 기업집단.

누구나 취직하고 싶어하는 그 기업집단.

그리고 자신의 옛 연인의 집안이 운영하는 그 기업집단이

최대주주로써 이름을 떡하니 올리고 있었으니까


이런 비루한 중소기업을 사들인 이유는 단 한가지 뿐이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리고, 몆몆은 환호를 지르는데

남자는 사무실로 올라가 사직서를 출력한다.

퇴직사유에 ‘개인적인 사유’를 적고

부서장에게 건넨다.


“아니.. 이게 뭐야. 앞으로 할 일이 얼마나 되는데. 너도 이제 대기업 소속이라고. 어깨 피고 살아야지”

부장이 뜬금없는 사직서를 만류한다.

옆에서 사장이 나타나더니, 사직서를 찢어버린다.


“...뭡니까?”

이유를 예상하는 남자가 사장을 쏘아본다.


“잠시. 이쪽으로 오게”

사장은 남자를 끌고 사장실로 들어간다.


“... 전 퇴사합니다. 말리셔도 소용 없습니다.”


“우리가 계열사로 들어가는데 필요한 조건은 단 한가지였네. 고용유지와 승계지”


“네?”

저번에도 느꼈다. 말은 통하는데 대화가 성립하지 않는다.

기분이 더러운 기시감이 남자의 피부를 타고 흐른다.


“자네가 그만둔다면, 출자전환이고 계열사고 다 없는 이야기가 되는거라고, 우릴 봐서라도. 여기 남아있어주게”


“전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사직처리는, 수리되지 않을게야. 자네가 출근하지 않아도 급여는 지급될걸세”


“...”

남자는 대화가 성립하지 않는 이야기들을 내버려둔다.

집으로 돌아간다.

이직할 곳을 알아봐야 한다.


하지만. 남자의 아파트엔 먼저 온 손님이 있다.


“아들 왔니?”

오랜만에 들어보는 어머니의 목소리.


“엄마? 갑자기 어쩐일이야?”

비밀번호는 또 어떻게 아신거야… 


헌데, 예상치 못한 또다른 손님이 있다.

익숙한 얼굴의 여자가, 식탁에 앉아서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눈다.


“어머, 일찍왔네?”

“얘는 이렇게 참한 색시가 있었으면, 엄마한테 먼저 소개를 시켜줬어야지”


“아니에요 어머님. 제가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요”

10년만에 만난 옛 여자친구가, 그곳에 앉아있다.


“이..이게 지금 뭐야?”

남자는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니 네 여자친구가. 아니지, 우리 며느리 될 아가가 글쎄 이런걸 다 사왔지 뭐니”

저번에 여자와 방문했었던, 백화점의 문양이 들어가있는 선물세트.


“어..엄마, 알잖아. 이 여자. 어느 집안 딸인지. 이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럼. 알다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나가는 기업의 차기 회장님이시잖니”

여자의, 아니 예비 며느리의 손을 꼭 잡으면서 이야기하는 엄마.

남자는 어머니의 눈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생기를 보았다. 


“그래. 그런 귀하신분이 우리 가족이 된다는데. 환영할 일이지”

옆에서, 남자의 아버지가 말을 거든다.


“....다들 미쳤어”

남자는 자리를 박차고 아파트를 나가려는데


“동생. 형 왔다”

언제나 자신의 편이자, 어쩌면 자신의 우상인 친형이 입구를 막는다.


“형. 미안한데. 나 잠깐만… 도와줘”

형이라면 자신의 편일 것이다. 어릴때부터 그래왔으니까


“그럼. 우리동생 결혼한다는데, 형이 도와줘야지. 어서 들어가자”

하지만 친형은, 동생의 어깨를 꼭 붙잡고 안으로 이끈다.

친형이 입고있는 작업복에선, 여자의 집안이 운영하는 기업의 로고가 붙어있다.


“하하 좆같네”

남자가 뉴스를 보며 웃을때처럼 이야기한다.


“이야 우리동생, 이제 다 컸네, 욕도 할줄 알고. 하하”


친형이란 사람이. 남자의 어깨를 더욱 쎄게 쥔다.

옛날부터 그랬다. 이 여자와 엮이면, 주변사람들과 대화가 성립하지 않는다.

불쾌한 기시감.


“자기. 이제 그만 들어갈까? 당신 돌아오는거, 얼마나 오래 기다렸다구”

형에게 끌려오는 남자의 손을 여자가 살며시 잡아본다.

10년만에, 여자가 남자에게 이야기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