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문득 옛날 일을 떠올리곤 깊은

감회에 젖는 경험이 있을 터였다.


특히 내겐 수많은 추억 중에서도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어린 시절의 짧은 인연과

작별에 대한 슬픈 추억이 있었다.


그 아이는 난데없이 나타났다.


누구의 아이인지, 혹은 고아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녀는 홀연히 나타났고, 거기엔

그 어떤 징조도 없었다.


나는 지금도 그 소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잡티 하나 없는 하얀 피부, 두꺼운 눈썹,

긴 은발, 그리고 여느 아이들보다 훨씬

작은 체격. 나는 그 아이를 보자마자 문득

산토끼가 생각났다. 겨울에 산을 오르면

만날 수 있는 그 새하얀 토끼 말이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동네 아이들은 그 꼬마애를 왠지

모르게 두려워했고, 가까이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왜였을까, 왜 나만은 그러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지금에 와서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 그때의 그 표정이란. 마치 두 번 다신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한 부모를 만난 듯,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보인 그 환한 미소.

나는 여전히 그 미소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튼 우린 금세 친구가 되었다. 아니, 

우리의  관계란, 그저 친구라는 단어로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굳이 말하자면 의남매라고 해야 할까.

나는 그 아이를 온갖 곳에 데려갔고, 온갖

일을 함께했다. 얼어붙은 강으로 데려가

함께 빙판 위에서 놀았고, 봄이 왔을 땐

파릇파릇 풀이 오르는 언덕에 올라가 꽃을

따고 놀았다.


여름엔 더위를 피하고자, 나뭇가지로

엮어 만든 우리만의 은신처에서 놀았다.

그리고 밤이 되면, 몰래 밭에 들어가서

과일을 서리하곤 했는데 드물게 잡히는

날에는 내가 모든 매타작을 감당했다.


일 년 동안, 우린 그 누구도 감히 끊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맺었고, 또 그 소녀가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한 약속을,

나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른이 되면 데리러 올게, 반드시.」


마치 우리가 언젠가 헤어지리라는 걸 알고

있는 듯한 말투였고, 실제로 우린 머지않아

헤어지고 말았다.


내 어머니께서 내가 그 소녀와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평생 내게 손 한 번 

올린 적 없는 당신께서 내 뺨에 손을 올려

붙이곤, 두 번 다신 그 아이를 만나지 마라

강하게 명령했던 것이다.


나는 거의 한 달 넘게 집 밖으로 나가질

못했고, 겨우 집을 빠져나왔을 때, 그녀는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울었을까. 얼마나 그리웠을까.

너의 미소가 기억 속에서 희미해질 무렵이

됐을 때, 그제야 난 비로소 널 놓아줄 수

있었다.


“……아니, 놓아주지 못했나.”


닭 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오늘은 왠지

평소보다 닭이 빨리 운 것 같았다.


옷을 대충 갖춰 입고, 차갑게 식은 물에

얼굴을 슥 닦고 나서 나는 일하러 나갔다.


곧 봄이 온다. 겨울엔 미리 밭을 갈아두고

돌을 골라내 씨앗 뿌릴 준비를 해두어야만

했다. 지루하고 고된 작업이지만, 원래

사는 게 그렇다. 즐겁고 행복한 일은 고작

1할 정도고, 나머지 9할은 대체로 지루하고

한숨 나오는 일상이 채웠다.


오늘도 그런 날이 되겠지.

나는 밭을 갈다가, 뭔지 모를 위화감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서 말을 탄 무사들이 손가락으로 날

가리키고 있었다. 깃발엔 우리 영주님의

가몬인 검은 바탕에 흰 X가 그려져 있었다.


그들은 재빨리 내 쪽으로 오더니, 뜬금없이

내 앞에서 두루마리를 펼쳤다.


“이봐, 거기 너. 우리랑 같이 가줘야겠다.”


“뭡니까? 제가 무슨 죄라도 지었습니까?”


“잔말 말고 말에 타라! 널 한시라도 빨리

데려오라는 명령이 있었다.”


“사람 잘못 본 거 아닌지…….”


그들은 내가 더 말하길 기다리지 않았다.

그 대신, 나를 반강제로 끌어내 말에 앉힌

뒤 그대로 끌고 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내가 무슨 죄라도 지었던가?

그럴 리는 없었다. 난 한평생 내 나름대로

정직하게 살았으며, 하늘에 맹세코 죄라고

부를 만한 짓은 저지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내가 죄인이었다면.’


그랬다면 나를 포승줄에 묶었으리라.

하지만 그들은 날 묶기는커녕, 마치 귀한

손님이라도 되는 듯 은근히 예의를 차려

대하는 듯했다. 


‘하지만 왜?’


무사란 족속들은 대개 오만하고 난폭하다.

옛날엔 눈이 마주쳤단 이유만으로 잔혹한

벌을 주거나,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남편이

있는 여자를 범하는 일이 흔했다.


물론 요즘에야 대놓고 그런 짓을 벌이지는

않는다만, 그럼에도 그들의 특권 의식이란

상당히 대단했다.


그런 무사들이 날 정중하게 대한다고?

도통 무슨 이유인지 난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몇 시간이 갔을까, 우린 거대한

성 앞에서 멈췄다. 난 평생 본 적도 없는,

우리 영주님 ‘오니가시라’의 성이었다.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산다고?’


마치 으리으리한 저택을 몇 층이나 겹겹이

쌓아놓은 듯했다. 대체 몇 층인지 가늠도

못할 정도로 높고 웅장한 성이었다.


“말씀하신 귀빈을 데려왔다, 문을 열어라!”


“귀빈께 예를 갖춰라! 영주님의 손님이다!”


쿠웅, 거대한 나무문이 열리고 우리는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그들은 나를

데리고 성 안으로 안내해줬다.


그곳은 내가 본 적 없는 장소였다.

이렇게 넓은 실내는 처음이었고, 무사들이

험악한 표정으로 줄지어 서 있었다.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건 제일 안쪽에

있는, 천을 친 방이었다.


“영주님, 명을 수행하고 돌아왔습니다.”


무사 중 하나가 무릎을 꿇자, 다른 모든

무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그 기세에 눌려, 나 또한 얼떨결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꽤 빨리 데려왔구나, 좋다. 그 아이는

기다리는 걸 싫어하니…….”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피곤에 찌든

중년 여자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고개를 들어라, 아이야.”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천 너머에 누군가가 앉아있었는데, 여기선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여의 이름은 오니가시라 시마히메. 이곳

동쪽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이니라.”


영주님, 진짜 영주님이다. 

평생 만날 리 없는 영주님이 바로 저기에

있었다. 


‘인간이 아닌 영주.’


소문으로만 들었지만, 이 근방을 다스리는

영주님은 인간이 아닌 오니라고 했다.

오니. 인간을 닮았지만, 인간이 아닌 종족.

머리엔 뿔이 있으며 힘은 황소보다 세고

피부는 강철보다 질기다는 괴물이다.


“저, 저는 왜…….”


“왜 여기로 데려왔냐고? 안 그래도 지금

그걸 말하려 했다. 그래……네가 내 여식을

홀린 놈이로구나. 흠.”


여식? 홀려? 그게 다 무슨 말이지?

뭔가 오해가 있는 게 분명하다. 나는 평생

여자와 자본 적도 없는 놈이었다.


“뭔가 오해가…….”


“오해는 없다. 여는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사람을 싫어하느니라. 내 말이 틀렸느냐, 

시기리?”


“맞습니다요, 영주 나리.”


검은 안대를 낀 무사가 심드렁하게 답했다.


“아무튼 요는.”


그녀가 잠깐 말을 끊었다.


“네가 여의 여식과 혼인해야 한다는 거지.”


“……네?”


“여는 같은 말을 두 번 하는 걸 싫어한다.

또 같은 말을 시키면 목을 베겠다.”


난 입을 다물었다. 어이가 없었기도 했지만

고작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목이 잘리고

싶지는 않았다.


“자세한 건 차차 알게 될 것이다. 여봐라,

저놈을 깨끗이 씻긴 후 침소로 데려가라.

마에루에겐 여가 직접 말하겠다.”


“네, 영주님.”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모를 두 소녀가 날

일으켜 세우더니, 자연스럽게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저, 저기요? 저 어디 가는 겁니까?”


“…….”


그들은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나를

홀딱 벗기고선 뜨거운 물에 담긴 나무통에 

담근 뒤 솔로 몸을 박박 닦았다.


“잠깐, 아, 아파요! 좀 살살하세요!”


“…….”


강제 목욕이 끝난 뒤, 난 원래 입고 있던

옷 대신 하얀 유카타를 입어야만 했다.

그리고 옷을 다 입은 후에는 웬 어두컴컴한

방 안에 던져졌다.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뭔가 설명을―”


탁! 바로 내 앞에서 미닫이문이 닫혔다. 


“―진짜 아무 설명도 안 해주는 건가.”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나는 이 모든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일단

그 자리에 앉아 생각을 좀 해보았다.


그나저나 이불이 참 좋네, 침소라고 했더니

과연 좋은 방이었다. 평소에 자는 내 방이

돼지우리처럼 느껴졌다.


‘혼인이라고 했지. 여식? 영주님께 딸이

있었던가? 하지만 왜 나지? 보통은 일종의

계약처럼 맺는 걸로 아는데?’


영주나 호족의 결혼은 사랑이 아닌 계약의

일부다. 더 많은 힘과 영지를 가지기 위한

동맹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난 무지렁이 농부일 뿐이다.

기껏해야 어릴 적에 글을 조금 배우고 책을

좀 읽은 게 전부였다. 내게 특별한 구석은

없다고 봐야 했다.


‘아니면 아무나 상관없다던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수상한 점이 너무

많았다. 그랬다면 굳이 저 멀리 구석진

곳에 사는 날 데리고 올 필요는 없었다.


그럼 대체 나는 여기 왜 끌려온 것인가.


그때, 누군가가 미닫이문을 벌컥 열었다.


“아…….”


어째서 네가 여기에.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던 네가, 어떻게.


“아, 아으, 아아아아아아…….”


그녀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조금 더 덩치가 커졌고, 머리카락이 조금

더 길어졌고, 살집이 붙었고, 이마에 긴

뿔이 생겼지만, 너는 여전히 너였다.


“아아아아아아아……!!”


그녀가 몸을 내던지듯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두 번 다신 놓지 않겠다는 듯,

강하게 나를 끌어당겼다.


“드디어, 드디어 다시, 다시 만났어……!

그리웠어, 보고 싶었어, 만나고 싶었어!!”


“나, 나도…….”


그런가.

나는 그 순간 모든 걸 이해했다.


마에루, 내가 아무리 물어봐도 답해주지

않았던 너의 이름.


오니가시라 마에루.

영주의 딸, 그리고 오니의 여식.


“다행이야, 건강해서……살아있어서……!”


마에루가 내 품속에서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엉엉 울며 얼굴을 내게

비벼댔다. 


그나저나 일단 좀 진정시켜야겠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상황인지 말해줄 수

있는 건 마에루뿐인 것 같으니.


“이제 좀 진정됐어?”


“응……훌쩍…….”


“자, 흥해. 흥.”


“흐응!”


나는 마에루의 콧물을 풀어주었다.

벌써 십 년이 지났건만 이 녀석은 정말로

뭐 하나 변한 게 없는 듯했다.


……몸만 빼고. 나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커다란 가슴을 봐버렸다.


“마에루, 너한테 듣고 싶은 게 있는데.”


“뭐든지 물어봐, 크응.”


뭐부터 물어봐야 좋을까, 일단은 지금 내게

처한 이 상황에 대해 듣고 싶었다.


“네가 날 여기로 데려온 거야?”


“응, 내가 불렀어. 약속을 지키려고.”


약속.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구나.

물론 나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언젠가 날

데리러 오겠다는 그 약속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너랑 혼인하려고, 이제 영원히 함께야.

두 번 다신 헤어지지 않을 거야, 절대로.”


마에루, 너 역시 날 잊지 않고 있었다.

찌르르 울리는 그 감동에 나는 말없이 몸을

떨었다. 옛 친구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아.


“어머님이 날 막았어, 성인이 되기 전까진

부를 수 없다고. 근데 이제 나도 성인이야!

그러니까, 이제 너랑 있을 수 있어.”


마에루가 특유의 말투로 말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이제 막 말을 배운 애가

최대한 조리 있게 말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있지, 서방님…….”


그때, 마에루가 웃으며 내게 더 바싹 몸을

밀착시켰다.


“이제 우리 부부니까, 응……?”


“마에루?”


그 순간, 마에루의 눈빛이 달라졌다.

굶주린 짐승, 혹은 먹잇감을 붙잡고 기쁨에

젖은 맹수처럼, 그녀가 날 빤히 노려봤다.


“그러니까……있지…….”


나는 말없이 그녀를 보았다.


품 안에 쏙 들어갈 것처럼 작은 너의 몸,

그러나 그에 비해 여느 여자에게서 본 적

없는 풍만한 가슴, 빠져들 것만 같은 그

커다란 눈, 땀에 젖은 하얀 피부―


‘아니.’


찰나의 순간, 나는 이성을 되찾았다.

나는 아직 이 모든 걸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마에루가 날 데려왔다는 건 알아도

정확한 내막이 어찌 되는지는 몰랐다.


그런 와중에 마에루를 안았다가, 대체 어떤

후폭풍이 따를지도 알지 못한다.


조급하게 굴 필요는 없다.


“일단 오늘은 같이 잘래? 좀 피곤해서.”


“아! 그, 그래! 한 이불에서……옛날처럼

같이 자자……응…….”


마에루도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녀를 품에 안고, 이불로 함께 들어

가서 누웠다. 마에루는 예전하고 똑같은

냄새가 났고, 그때처럼 뜨거운 몸을 가지고

있었다. 


“앞으론 쭉 함께야……매일 같이 자고……

매일 같이 놀고……쿠울…….”


벌써 잠들었다고? 그제야 나는 예전에도 

마에루가 굉장히 빨리 잠드는 아이였다는

걸 떠올렸다. 거의 베개에 머리가 닿으면

잠드는 수준이었지.


“…….”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마에루가 어째서 오니인지,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날 만날 수 있었던 것인지, 지금껏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그러나 지금 당장은.


지금은, 그저 널 껴안고 자고 싶었다.






…….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잠결이지만 착각이 아니었다.


“어르신, 주무시는데 깨워서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허나 어르신께서 알아야

할 정보가 있습니다.”


문 밖에 그림자가 보였다. 목소리를 들으니

아마 나보다 조금 어린 여자애 같았다.


“누구……?”


“제 이름은 키사키, 오니가시라 가문을

모시는 시종 중 하나입니다. 어르신께서

긴히 아셔야 할 일이 있어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단잠을 깨웠습니다.”


내가 알아야 할 일……?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키사키가 이어서

말했다.


“우선 첫날밤을 무사히 넘기신 것을 경축

드리옵니다. 만약 어르신께서 자제하지

않으셨다면, 아마 내일쯤 어르신께선 죽어

시체로 발견되셨을 겁니다.”


“그게 무슨……!”


시체라고? 죽는다는 말인가? 하지만, 왜?


“오니의 신체 능력은 인간이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 한손으로 황소를 집어 던지고

날붙이론 상처 하나 낼 수 없사옵니다.”


그 정도란 말인가. 문득 난 오니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다시금 떠올렸다.


“거기다 마에루 님께선 아직 힘 조절하는

법을 모르시니……만약 교접했다간…….”


“…….”


그런 체력과 근력을 가진 마에루와 교접한

결과를 떠올렸다. 십중팔구 몸이 견디지

못하고 부서지고 말았을 것이다.


첫 날밤에 죽은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같은 인간하고도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나는데, 오니라면…….


“제가 어르신께 감히 충고하자면, 앞으로도 

마에루 님과 교접하지 마시고 최대한 조심

또 조심하십시오. 마에루 님이 무심코 한

행동에 크게 다칠 수 있사옵니다.”


“충고 고마워, 키사키 씨.”


“그냥 키사키라 불러주십시오.”


앞으로도 조심해야겠다……나는 내 마음도

모르고 곤히 잠든 마에루를 보며 생각했다.


“묻고 싶은 게 많아, 키사키.”


“대답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라면 뭐든지

답해 드리겠사옵니다.”


“우선……마에루는 오니가시라 가문의 사람

인데, 어떻게 일 년이나 바깥에서 지낼 수

있었던 거야?”


줄곧 그것이 궁금했다.

마에루에겐 부모나 형제도 없어 보였고, 난

당연히 그녀가 고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인제 와서 오니가시라의 사람이라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답은 간단하옵니다. 마에루 아가씨께서

가출하셨기 때문입니다.”


“가출?”


“대사건이었죠. 설마 그런 곳에 계실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런가, 그러면 그 모든 게 이해됐다.

마에루는 어떤 이유로 여기서 가출했고,

떠돌던 끝에 나를 만났다.


“일 년 만에 돌아오시자마자 한 말씀이……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으니, 혼약을 맺을 수

있도록 허가해달라는 것이었죠. 영주님이

그렇게나 웃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하긴 나 같아도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일 년 만에 돌아온 탕아가 한다는 말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으니 결혼을 맺도록

허락해달라는 거라니. 나 같아도 웃었다.


“물론 당시엔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에루 님께선 정말 매일매일 혼약을 맺을

것이니 허락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영주님도

그제야 농담도 장난도 아닌 진심이라는 걸

깨달으셨겠지요.”


매일, 매일인가. 매일 그랬단 말인가.

문득 나는 내가 마에루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달았다. 내겐 그저 어릴 적

추억에 불과했으나, 마에루에게 나라는 

존재는 고작 그 정도가 아니었다.


“이윽고 성인이 되신 지금, 마에루 님께선

마침내 허락을 받고 어르신을 여기로 데려

오신 겁니다. 놀라운 집념이지요.”


“그러게, 거의 십 년이나 지났는데…….”


십 년이란 세월이 흐르면 절친하게 지내던

사람의 얼굴도 가물가물해질 터였다.


그런데도 마에루는 매일 나를 그리워하며,

오늘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던 것이다.


“하지만 어르신, 어르신께선 아직 마에루

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게 있사옵니다.”


“그게 뭔데?”


“마에루 님은……인간이 아닌 오니입니다.

오니의 성정은 인간하고 다릅니다.”


키사키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듯했다.


“오니란 기본적으로 폭력적이고 난폭하며

탐욕스러운 존재이며, 마에루 님께선 특히

한 번 분노하면 쉽사리 풀리지 않사옵니다.

그러니 절대 마에루 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주의하시길 바라옵니다.”


마에루가? 나는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이 아이는 예나 지금이나 내게 잘해주었다.

어릴 적엔 화를 내는 법이 없었고, 특히나

내게는 절대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아침부터는 마에루 님과 함께 생활하실

터인데, 모쪼록 잘 적응하시길 바랍니다.”


“응……가르쳐줘서 고마워, 키사키.”


“그리고 하나 더, 마에루 님 앞에서는 절대

다른 여자와 대화하지 마십시오.”


순간, 키사키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럼 저는 이만, 좋은 밤 보내시길.”


그리고 그림자가 서서히 사라졌다.

키사키라고 했나, 생각해보니 난 그녀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일단 잘까.”


지금 걱정해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나는 그리 생각하며 도로 이불에 누웠다.






“빨리, 빨리! 서방님, 빨리 가자!”


“가고 있으니까 뛰지 마, 마에루.”


마에루는 아침부터 기운이 넘쳤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끌려다니며 성 내부를

구경하거나 이곳의 사용인들과 만났다.


그리고 마침내 식사 시간이 되었고, 나는

그곳에서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마주했다.


커다란 멧돼지가 통째로 구워져 있었다.

그 넓은 방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음식이

쌓여있었고, 사용인들은 벽 쪽에 붙어서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오늘은 멧돼지 구이네!”


“저걸 다 먹으려고……?”


“응! 서방님도 잔뜩 먹어!”


그러고선 마에루가 거침없이 손으로 고기를

뜯어 와구와구 입에 쑤셔 넣었다.


옛날에도 잘 먹기는 했는데, 그래도 이렇게

많이 먹지는 않았다. 저 커다란 멧돼지를

어찌 혼자서 다 먹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한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나는 그게 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나저나 진짜 맛있네, 이름도 모르겠지만

내가 이런 음식을 먹게 될 줄이야.”


생선과 고기라니, 일 년에 몇 번 먹을까

말까한 진수성찬을 먹고 있자니 새삼 내가

마에루의 남편이 되었다는 게 실감 났다.


어머니도 드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고 보니 여기 갑자기 끌려와서 뭐라고

말도 못하고 왔는데, 조만간 돌아가서 내가

잘 지낸다고 말이라도 해줘야겠다.


‘아니면 여기로 데려와……?’


마에루에게 물어보긴 해야 할 테지만……

어머니와 여기서 함께 살면 좋겠다.


먹는 거라곤 부실한 보리밥에 나물 정도가

전부고, 그나마 영주님이 경사가 있을 때

하사하는 고기나 생선이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전부였다.


“잘 먹었습니다.”


“엥? 서방님 그걸로 충분해? 안 배고파?”


“벌써 배불러. 너야말로 그렇게 먹었는데

아직도 더 들어가는 거야?”


“응! 마에루는 아직 더 먹을 수 있어!”


이제야 마에루가 정말 오니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배가 저렇게 나오도록

먹었는데, 그녀는 아까와 똑같은 속도로

게걸스럽게 고기를 뜯어 먹었다.


식사는 무려 한 시간이 더 이어졌다.

마에루는 멧돼지 한 마리를 다 먹어치우고

후식으로 수박을 세 통이나 더 먹었다.


“잘 먹었습니다! 끄윽.”


“마에루, 입에 다 묻었잖아.”


“에헤헤, 미안.”


나는 마에루의 입가를 닦아준 후, 앞으로

뭘 해야 하나 생각했다.


“근데 내가 여기서 할 일이 있어?”


“없어! 서방님은 나랑 같이 먹고 자고 놀면

끝이야! 힘든 일은 하지 마!”


이걸 좋아해야 하나? 왠지 모르게 죄책감이

들었다. 아무 일도 안 하면서 이렇게 좋은

대접을 받아도 정말 괜찮은 걸까?


“아참, 마에루는 잠깐 어머님이랑 할 일이

있으니까 서방님은 혼자 놀고 있어!”


“응, 기다리고 있을게.”


“어디 가면 안 돼? 특히 성 밖에 나가면

절대 안 돼! 알겠지!?”


“알겠어, 알겠다고.”


마에루는 몇 번이나 내게 나가지 말라고

당부한 뒤에야 자리를 떠났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그저 이 상황을 즐기는 것도 가능하지만,

나는 묘하게 이 모든 상황이 어색하기만

했다. 또, 뭔가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

거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키사키한테 물어봐야겠어.’


그녀는 뭔가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방을 떠나, 하인들에게 물어물어 가며

키사키를 찾아다녔고, 머지않아 침소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녀를 찾아냈다.


“당신이 키사키 씨입니까?”


“네. 어젯밤엔 실례했습니다, 어르신.”


그녀는 나보다 4살 정도는 어려 보였다.

특이하게도 머리카락이 짙은 보라색에

가까웠고, 앞머리를 길게 늘어트려 왼쪽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체구는 꽤 작았고

꽃무늬가 새겨진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냥 키사키라고 불러주시길.”


“아, 그랬지.”


“아무튼 뭔가 여쭤보고 싶어서 저를 애타게

찾아다니신 거겠지요?”


“대답해줄 수 있어?”


“가능한 범위 내에서는, 뭐든지.”


그럼 뭘 물어봐야 할까…….

우선 그거부터 물어볼까.


“마에루는 나랑 혼약을 맺고 싶어 했지.”


“네. 그리고 그 꿈을 이루셨지요.”


“하지만 이해가 안 돼. 그걸 그냥 허락해

줬다고? 영주의 딸이 구석진 시골에 사는

농부랑 혼인하는 걸 그냥 용납해주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본래 영주나 호족의

자식은 비슷한 수준에 놓인 타 지방의

귀족과 결혼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근데 나처럼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농부랑

혼약을 맺게 해주다니, 너무 이상했다.


“마에루 님은 대가를 치렀습니다. 자세히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그분께서 당신을 여기

데려오려고 많은 걸 희생했다는 사실만은

절대 잊지 마시길 바라옵니다.”


희생……이라. 대체 뭘 희생했을까.

하지만 거기까지 말해주지 않는 걸 봤을 때

내가 알아서는 안 될 일 같았다.


“그리고 어르신께서 아셔야 할 게 몇 가지

더 있사옵니다. 어제 영주님, 오니가시라

시마히메 님을 만나셨지요?”


“아, 그랬지. 얼굴은 못 뵈었지만.”


“그분께서 이 혼약을 허가해주신 데는 다른

이유도 있사옵니다. 어르신께선 타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들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없었다.

나야 일개 무지렁이 농부일 뿐이고, 애초에

알고 싶어도 이런 시골에선 정보가 거의

흘러들어오지를 않았다.


“이 나라는 현재 크고 작은 수십 개의 가문

들이 다스리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크게는

4개 가문이라 할 수 있지요. 먼저 동쪽을

다스리는 오니, 오니가시라. 서쪽 지방을

다스리는 용족, 류온지. 북쪽을 다스리는

곰, 쿠마노. 마지막으로 남쪽을 지배하는

해왕 사메키치.”


전부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그나저나 이 나라에 인간이 다스리는 곳은

하나도 없구나. 새삼 깨달았다.


“특히 류온지는 오니가시라 가문과 크고

작은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데……그쪽에서

동맹을 맺고자 류온지의 차남과 마에루 님

을 혼인시키자는 제안이 들어온 일이 얼마

전에 있었사옵니다.”


그럼 더더욱 나와 혼인시키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허나 오니가시라 영주님은 누구에게 절대

머리 숙이지 않는 분. 그 동맹을 일종의

굴복이라 생각하셨기에, 오니가시라 님은

그걸 거부하시고 어르신과 마에루 님을

혼인시켰사옵니다. 즉, 너희 같은 버러지들

하고 혼인시킬 바엔 무지렁이 농부하고

혼인시키는 게 낫다……라는 뜻이지요.”


……그것참 너무하네.

새삼 내 위치가 얼마나 낮은가를 느꼈다.


“당연히 류온지는 지금 길길이 날뛰면서

전쟁을 준비하고 있사옵니다만, 아마도

거기까지 노리고 거절하신 거겠지요.”


“그래도 괜찮은 거야?”


“오니가시라는 강합니다. 거기에 그쪽도

전력으로 덤비진 못하는 사정이 있으니,

아마 큰 문제는 없을 것이옵니다.”


뭔가 복잡한 사정이 있는 모양이다.

지금 당장은 이 정도만 알아도 되려나.


“고마워, 키사―”


그 순간,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몸을 낮췄다.


뒤를 돌아보니, 마에루가 거기 서서 나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에루?”


“―너, 왜 서방님이랑 말하고 있어?”


그 순간, 어제 새벽에 키사키가 내게 말한

당부를 떠올렸다.


「그리고 하나 더, 마에루 님 앞에서는 절대

다른 여자와 대화하지 마십시오.」


마에루는 내가 말리기도 전에, 성큼성큼

다가와 키사키의 목을 쥐고 들어 올렸다.


“컥!”


“누가 멋대로 서방님하고 대화해도 된다고

허락했어? 난 그런 적 없는데.”


무시무시한 힘이다, 한 손으로 사람을 잡아

들어 올리다니. 거기에 이 살기, 내가 감히

나설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압박감이 뼛속

깊이 느껴졌다.


“저, 저는 단지 질문에 답을―”


“거짓말.”


쾅! 마에루가 그녀를 벽에 처박았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난 거짓말쟁이가

제일 싫어, 내게! 거짓말하지 마!!”


우드득! 마에루가 키사키의 손목을 손쉽게

부러트리고선, 그녀의 목을 다시 낚아챘다.


“커흑, 끄으윽―”


“나한테서 서방님을 빼앗아 가려고 한 거지?

내가 속을 것 같아? 또 나한테서 떨어트려

놓으려고 한 거지? 그런 거지!?”


“제, 제발 용서― 꺼어어억―”


이대로면 목이 부러지고 말 거다.

뭔가 해야 하는데. 하지만 내가 섣불리 

나섰다간 상황을 더 악화시킬 게 분명했다.


‘내가 함부로 키사키를 감싸줬다간.’


그럼 정말로 그녀를 죽일지도 모른다.

여기선 반대로 해야 한다.


짜악!!


나는 망설임 없이 키사키의 뺨을 때렸다.


“어?”


“누가 감히 나한테 말 걸어도 된다 했지?”


그러자 당황한 마에루가 키사키를 놓아주고

날 보았다. 다행히 먹힌 듯하다.


“마에루, 걱정하지 마. 나는 이렇게 못난

여자한테는 조금도 관심 없어. 널 두고

내가 이런 버러지한테 마음을 줄 거라고

생각한 거야? 진심으로?”


“아, 아니, 그, 저기.”


“내게는 너뿐이야, 마에루.”


나는 그리 말하며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뿐이야.”


“아, 그, 그렇지! 그렇구나! 내가 오해한 게

맞구나! 응, 서방님이 그럴 리 없지.”


미안, 키사키. 하지만 이게 최선이었어.

나는 슬쩍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마에루를 흘겨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후우.”


내가 말리지 못했다면, 마에루는 키사키를

주저하지 않고 죽였을 것이다.


‘이게 바로 오니인가.’


그 살기는, 그리고 그 힘은.

만약 그게 내게 향했다면, 나는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죽었으리라.


“에헤헤, 서방님……사랑해…….”


“응, 나도.”


앞으론 좀 더 조심해야겠다.

나는 그리 다짐하며, 마에루를 끌어안았다.






두 번째 밤이 찾아왔다.


나는 아직도 이곳에 영 적응을 할 수 없어

죽을 맛이었다. 너무 넓어서 어디가 어딘지

헷갈렸고, 하인들은 나만 보면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그들이 두려워하는 건 내가 아니라

마에루일 것이다. 나하고 말을 섞었다는

이유만으로 키사키는 목숨을 잃을 뻔했다.


“호오, 아직 살아있었구나.”


“음?”


그때, 누군가가 내 등 뒤에서 말했다.


뒤를 돌아보니, 마에루와 쏙 빼닮은 오니가

그곳에 서 있었다. 난 그녀를 본 동시에

얼른 무릎을 꿇고 조아렸다.


“시, 시마히메 님.”


“일어서거라. 우린 가족이지 않느냐? 누가

가족에게 엎드려 절하라 시키겠느냐?”


가족, 가족이라. 난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오니하고 가족이라?


나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세웠으나, 역시

그녀를 똑바로 마주볼 순 없었다.


‘마에루는 어머니를 닮았구나.’


흰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 두 개의 긴

풍만한 체형……마에루보다 키가 훨씬

크다는 걸 제외하면 그녀와 별로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근데 대체 몇 살이지?’


겉보기론 서른 살도 안 될 것 같았으나,

마에루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그녀는 꽤

나이가 있을 터였다.


“난 당연히 어제 네가 죽을 줄 알았느니라.

흠, 생각보다 머리가 좋거나……아니면……

운이 좋거나, 어느 쪽이건 다행이로구나.”


“네, 시마히메 님.”


운이 좋았다고 해야겠지. 아니면 직감이.

내가 참지 못하고 마에루와 교접하려고

했다면……아마 난 여기 서 있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 네가 여의 여식을 홀린 괘씸하고

앙큼한 남자라고. 흠……그리 대단해 보이진

않은데. 하여간 오니란 족속들이란…….”


“네?”


“오니는 한 번 사랑하게 된 인간을 절대로

잊지 못하느니라. 그리고 무슨 수를 쓰든

가지려고 애쓰지. 일생에 딱 한 번, 오직

한 사람만 사랑하는 종족……미련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시마히메 님이 큭큭 웃었다.


“가능하면 네가 오래 살아남기를 바라마.

네가 죽어버리면 간신히 얌전해진 녀석이

이번에야말로 미쳐 날뛸 테니 말이지…….”


“제가 죽으면…….”


“네가 죽으면 아마 마에루도 죽으려고 들

것이다. 물론 그전에 이 성에 있는 모든 걸

죽여 버리고 난 뒤에 말이지. 아하하하!”


대체 뭐가 웃긴 건지, 나로선 도무지 이해

할 수 없었다. 그저 소름만 돋는다.


“잠깐은 피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 뒤엔?

네가 계속 거부하면 마에루는 네놈에게

점점 더 집착하게 되겠지. 더 적극적으로

유혹하려 들 테고. 만약 그래도 안 되면

힘으로라도……그걸 네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참으로 기대되는구나.”


마에루와 교접하게 되면, 나는 죽는다.

그야말로 독이 담긴 꿀통. 달콤한 냄새에

혹해 손댔다간 죽음을 면치 못하리.


“이런, 여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구나.

가보거라, 아내를 혼자 두는 남편이 되면

안되지 않겠느냐?”


“네……감사합니다, 시마히메 님.”


“가능한 한 오래 살아남아 보거라, 애송아.”

나는 그녀가 자리를 떠날 때까지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에루와 교접하면 난 죽는다. 그리고 아마

마에루는 이 성에 있는 모두를 죽이고 나서

자기도 죽으려고 들 것이다.


즉, 내 행동에 따라 이곳에 무시무시한

참극이 벌어질 수도 있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한다.’


언젠간 피할 수 없게 되겠지만, 그전까진

뭔가 수를 내야 한다. 마에루와 교접하지

않거나, 혹은 교접해도 죽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하지만 내 짧은 식견으로 그런 묘수를

내는 게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아니면 아예 여길 떠나버리거나?’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으나, 이곳에서

달아난다면 어떻게든 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마에루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나는 그런 고민을 하다가, 아직 내가

씻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서는

매일 밤마다 몸을 깨끗이 씻어야만 했다.


“어?”


“서방님, 어서 와.”


욕탕에 들어가니, 마에루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오직 수건 한 장으로 몸을

가리고 있었다.


“마, 마에루?”


“에헤헤, 같이 씻자, 서방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그냥 거부하고

혼자 씻을까, 생각했다가 문득 키사키가

당한 일을 떠올리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에루를 화나게 해선 안 된다.

지금은 내게 잘해주지만, 만약 분노케 하면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이 닥칠 게 분명했다.


“응……오랜만에 같이 씻자.”


“그럼 마에루가 등 밀어줄게!”


그러고 보니 옛날에 종종 함께 씻곤 했지.

그때는 그랬다, 우린 더운 여름날 개울에

함께 들어가 물장구를 치고 함께 씻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참 좋았는데.


“서방님의 등, 엄청나게 커졌네.”


“너는 여전히 작은데 말이지.”


“마에루도 자랐어! 가슴도!”


그건 지금 내 등으로 느끼고 있다.

열심히 등을 밀어주는 마에루에겐 정말로

미안하지만, 아까부터 그……닿고 있다.


“서방님은 뭐 하고 지냈어?”


“나? 농사만 열심히 지었지.”


“다른 여자랑……그…….”


“없었어, 그런 거. 먹고 사느라 바빴거든.”


“그, 그렇구나! 다행이다, 후후.”


다행이라……어머니는 이 나이를 먹고도

변변한 여자 하나 데려오지 않은 나한테

못 써먹을 놈이라고 불렀는데 말이지.


“자, 다 됐어! 이제 마에루도 해줘!”


“아, 응.”


나는 몸을 돌려, 마에루의 등을 보았다.

작고 새하얀 등짝 너머로, 숨기려야 도저히

숨길 수 없는 그 압도적인 가슴을 보고

순간 이성이 끊어질 듯했다.


“서방님?”


“아무것도 아냐.”


참아야 한다, 이겨내야 한다.

아무리 그래도 마에루에게 손을 대어선

안 된다. 모두의 목숨이 내 손에 달려있다.


“너는 어떻게 지냈어, 마에루?”


나는 조금 어색한 분위기를 이겨내려고

말을 꺼냈다.


“……음, 내내 갇혀 지냈어.”


“갇혀 지냈다고?”


“어머님은 내가 멋대로 나간 것 때문에

화가 잔뜩 났어. 그래서 가두고 바깥에는

못 나가게 했어. 나갈 수 있을 때는…….”


마에루가 고개를 돌려 날 보았다.


“아무것도 아냐. 어쨌거나 이젠 괜찮아!

서방님하고 같이 살 수 있으니까, 전부

용서해줬어!”


“그렇구나……혼자 둬서 미안해, 마에루.”


그 순간, 마에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서방님이 사과하는 거야?”


“그건.”


어쩔 수 없었던 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머니가 날 못 나가게 막았고, 다시 나갈

수 있었을 때는 이미 널 잃어버린 뒤였다.


“……그러게, 어째서일까.”


“서방님 잘못 아니야. 그러니까 앞으로는

사과하지 마, 마에루는 서방님이 슬퍼하는

거 보고 싶지 않아.”


“알겠어, 네 앞에선 슬퍼하지 않을게.”


“약속한 거야?”


목욕이 끝난 후, 우리는 옷을 갈아입고선

일전에 함께 잤던 침소로 향했다.


“…….”


그리고 그녀는 아까 전부터 말을 잃었다.

뭔가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고, 왠지

조금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서방님, 마에루는 지금……너무 행복해서

무서워.”


“왜?”


“이 행복이 사실 전부 꿈일지도 몰라서……

그리고 이게 얼마나 오래갈지 몰라서.”


그녀가 내 손을 꼬옥 잡으며 말했다.


“참, 그게, 있지……마에루, 얼마 전에……

성인이 됐거든? 그러니까……아이도……

가질 수 있고…….”


그녀의 손이 점점 더 내게 얽혀왔다.


“……마에루……매일 밤마다 서방님을……

부끄럽지만, 서방님을 떠올리면서 혼자서

위로했어. 그러고도 몸이 달아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


위험하다.

이 분위기는, 그리고 이 색기는.


‘마에루와 교접하게 되면 나는 죽는다.’


하지만 이 사실을 그대로 말해줄 순 없다.

만약 우리가 교접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 잔혹한 진실을 알게 되면……마에루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었다.


순진무구하나 한편으론 폭탄처럼 위험하다.


“서방님도……그랬어?”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 마에루.”


나는 그녀를 안아주며 말했다.


“앞으로 쭉 함께 있을 거잖아, 그렇지?”


“응, 그렇지. 앞으로 쭉 함께야.”


“난 어디로도 안 갈 거니까, 조금만 더……

시간을 줄 수 있어?”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한다. 뭔가 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그래야만 한다.


“싫어.”


그때, 마에루가 나를 밀어 쓰러트렸다.


“마, 마에루?”


“싫어, 싫어. 기다리는 거 싫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해? 벌써 십 년이나 못 만났는데.

십 년이나 참았는데,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거야? 마에루는, 마에루는―”


그녀가 내 위에 올라타, 옷을 한 꺼풀씩

벗었다.


그 요염하고 생명력 넘치는 몸이란.

이런 걸 보고도 참으라니, 내가 평소에

색을 밝히는 편이 아니어서 망정이지,

보통 남자 같으면 진작 손을 대고 말았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마에루는 서방님하고 교접하고 싶어.”


네가 싫은 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마에루와 교접한 뒤에 내가 맞이할

참혹한 최후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마에루, 난―”


“마에루 님, 영주님께서 호출하셨습니다.”


그때, 키사키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다리라고 해, 지금 중요한 일 하는 중.”


“지금 바로 오라고 하셨―”


“내 말에 토 다는 거야, 지금?”


아까 전과는 전혀 다른, 차갑고도 무거운 

목소리가 방에 울렸다.


“―영주님을 기다리게 하지 마시옵소서.”


쾅!! 키사키가 말한 동시에, 그녀가 문을

부수고 밖으로 튀어 나갔다.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어머님이라도 내가

죽일 거야. 확실하게 죽여 버릴 거야.”


“…….”


“서방님, 나 잠깐 볼일 좀 보고 올 테니까

먼저 자도 돼. 알겠지?”


“아, 응. 알겠어.”


쿵, 쿵, 쿵……마에루가 걸을 때마다 땅이

울리는 듯했다. 어지간히도 짜증 난 것

같았다.


“어르신, 이번엔 위험하셨습니다.”


“응, 그러게……위험했네.”


허나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넘길 수 있을지 

나도 모르겠다.


“저 키사키, 불초한 몸이나 어르신께 입은

은혜는 반드시 갚겠사옵니다. 어르신께서

겪고 계신 문제는 제가 어떻게든…….”


“어떻게?”


내가 묻자, 키사키가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든 해보겠사옵니다.”


과연 그런 묘수가 있을지는.

나는 거기서,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방님을 되찾기 위해, 나는 어머님과 그리

맺고 싶지 않은 계약을 맺어야만 했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 나도 그 정돈

알고 있었다. 


철컥, 철커덕……하인들이 내게 정성스레

갑주를 입혔다. 그리고 하인 네 명이서

힘겹게 강철 몽둥이를 들고 내 앞에 왔다.


“여어, 잔뜩 뿔이 나셨구먼요. 아씨.”


“닥쳐, 시기리.”


서방님 외에 남자하고는 말조차 섞기 싫다.

특히 이 남자는 더더욱 싫다. 어머님이

신뢰하건 말건 내 알 바 아니다.


“너무하시구먼요~ 그 샌님하고 떡치지

못한 게 그리도 화―”


콰앙!! 내가 휘두른 몽둥이가 성의 바닥을

뚫었다. 


“닥치라고 했어, 마에루는.”


“크흐, 네이. 입 다물고 있겠습니다요.”


그 후, 우리는 말을 타고 성 밖으로 나갔다.

목적지는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서쪽

지방으로 가는 도로의 입구였다.


“히야, 많이도 데려왔구먼요. 이런 밤에

뭐가 보이기는 하나 모르겠지만.”


시기리의 말대로, 횃불을 든 병사들이

열을 맞춰 행군하고 있었다.


‘류온지.’


용족의 군대다. 병력의 수를 보아하니 아마

정찰대로 보였다. 


“게다가 저기 보십쇼, 가샤도쿠로도 데리고

왔구먼요. 정찰치곤 제법 거한데요?”


그의 말대로, 행렬의 중앙에는 밧줄로

묶여있는 거대한 인골의 요괴가 있었다.

가샤도쿠로. 키가 무려 30척에 가까운

거대한 요괴. 길들일 수 있는 놈은 아니다.


“저희 애들 먼저 보낼깝쇼?”


“아니.”


그래 봤자 수도 얼마 안 되고, 저기서 날

위협할 수 있는 건 가샤도쿠로뿐이다.


“마침 기분이 나빴거든.”


서방님하고 보내는 밤을 방해했다.

그것만으로도 죽어 마땅하다.


타타탓, 나는 재빠르게 언덕을 내려갔다.

그리고 먼저 앞서 가던 무사에게 소리쳤다.


“뒈져!!”


“뭐야, 이건!?”


콰아앙!! 말과 무사가 하늘 높이 날아가다

바닥에 처박히며 터졌다.


“오니다! 오니가시라의 마에루다!”


“가샤도쿠로를 풀어라!”


전부 죽인다, 하나도 빠짐없이 죽인다.


“크아아아아아!!”


콰앙, 쾅! 나는 미친 듯이 몽둥이를 휘둘러

주위에 있는 병사들을 박살 냈다.


터져나간 내장과 팔다리, 살점이 사방에

흩날리며 피를 마구 튀겼다.


“아하하, 터진 과일 같아! 아하하하하!”


“크오오오!”


그때, 거대한 해골이 내게 주먹을 날렸다.


“느려!!”


쩌엉! 주먹과 몽둥이가 맞부딪힌 그 순간,

가샤도쿠로의 주먹이 그대로 으스러졌다.


“이런 미친, 가샤도쿠로가 밀린다고!?”


“후퇴해라! 상대가 안 된다!”


서방님하고 교접하고 싶었는데.

이것들만 없었으면 그럴 수 있었는데.


“마에루를.”


나는 몽둥이를 힘껏 휘둘러 가샤도쿠로의

다리를 부러트렸다.


“방해하지 마!!”


―그 뒤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방에 피와 시체가

널려있었고, 가샤도쿠로는 산산조각이

나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하아…….”


벌써 서방님을 다시 보고 싶다.

한 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데,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은데.


‘서방님은 왜 나를 피하는 걸까.’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다.

오니니까. 우리는 냄새로 사람의 감정이나

상태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서방님이 내게

품은 감정에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어째서? 왜 나를 무서워하는 거지?

나는 이렇게나 사랑하고 있는데.

그토록 그리워하던 나를 다시 만났는데.


‘반드시 사랑받고 말겠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서방님을 두 번 다신

내보내지 않겠다. 어디로도 보내지 않고,

죽을 때까지 함께 할 테다.


그리고 언젠가, 서방님의 아기를…….


“헤, 에헤헤, 으헤헤헤…….”


사랑받을 수 있다면 뭐든지 하겠어.


도망치려고 하면 팔다리를 부수겠어.

날 피하려고 하면 발목을 자르겠어.

교접해주지 않으면, 내가 먼저 덮쳐서라도.


―어떻게든 사랑받을 거야.


나는, 서방님을 사랑하니까.














분량 씨바 왤케 길어...이것저것 쓰다 보니까 너무 길어졌다...

그보다 쓰는 것마다 200추를 넘는 걸 보아하니 역시 모두들 1화만 쓰는 걸 좋아하는 게 분명함

역시 100편짜리 장편보단 1화짜리 단편이 나은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