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순이



시골에서 만난 소꿉친구가 조금 이상한 이야기 - 2




1화 : https://arca.live/b/yandere/77863942?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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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호들갑을 떨었던 것이 무색하게도

얀붕이와 얀순이는 하루만에 병원에서 퇴원했다.


현대 의학의 힘은 이토록 얕잡아 볼 것이 아니었다.




둘 모두 주사를 맞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이 내렸고, 이후 의사의 진단 결과는


'오늘, 내일은 무리하지 말 것'이라는 다소 싱거운 내용이었다.





"수속은 끝내뒀다."




얀붕이의 아버지가 얀붕이에게 약 봉투를 건네며 말했다.




"약은... 되도록이면 챙겨 먹고, 말썽 피우지 말고 지내라."




형식적인 인사.



그리고 돌아온 대답.

얀붕이의 아버지가 원하는 활기찬 대답이었지만,


대답의 주체는 그가 원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네!"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얀순이가 얀붕이의 팔에 찰싹 매달린 채로

얀붕이의 아버지에게 대답했다.




"아버님도 조심히 올라가세요!"




작달막한 머리가 땅에 닿을 것처럼 숙이는 이 꼬맹이가 아버님이라는 말의 의미는 알고 있을까.




그는 열 살짜리 소녀가 하는 말의 진의를 의심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소녀의 익숙한 행실은 그로 하여금 소녀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오히려 어린 나이이기에 일직선인 것이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단어를 사용함에 있어,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뱉어버릴 수 있는 어린 아이에게만 허락된 권력.



눈 앞의 얀순이라는 이 소녀는 그러한 권력을 사용함에 거리낌이 없었다.




"...넌 잠깐 들어와라. 혼자서."




얀붕이의 아버지는 생글생글 웃는 소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얀붕이를 차 안으로 불렀다.




얀순이는 팔짱이 풀리지 않도록 얀붕이를 꽉 잡았지만,


평소와는 다른 얀붕이의 분위기에 곧 팔짱을 풀고 얀붕이를 보내주었다.



그리고는 한번의 눈 깜빡임도 없이 얀붕이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상황을 더 심각하게 만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운전석에 앉은 얀붕이의 아버지가 얀붕이에게 말했다.




"즐겁게 지내고, 정 주는 일은 없게끔.


피차 힘들어지니. 너도, 저 애도."




"..."




얀붕이는 아버지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조수석 창 밖을 바라보았다.


유리 너머로 약간의 거리를 둔 얀순이가 우산을 들고 얀붕이에게 다른 한 손을 열심히 흔들고 있었다.




"내 아들이라서 하는 말이야. 그 밖에는...


혹시... 혹시라도,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오면 연락해라."




- 내 아들이라서 하는 말.



엄마가 없어지면, 아버지라는 사람과 아들의 관계는 이토록 서먹해지는 것이던가.


그 관계가 쉬이 내 아들이라는 말을 들먹일 만한 관계인가.



얀붕이는 목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내린 열이 다시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이 말이 한 편으로는 긍정적인 의미가 아닐까 생각하고 마는 자신이 싫었다.





시동이 걸린 차 안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언제나 그렇듯 아버지가 무어라 말을 꺼내지 않으면, 자신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만 가 봐."



"예. 가세요."





얀붕이가 차에서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얀붕이의 아버지가 타고 있던 차가 움직여 시야에서 사라졌다.


찰박찰박 소리를 내며 뛰어온 얀순이가 얀붕이에게 우산을 씌워 주고는 배시시 웃었다.






위험한 상황 따위 있을리가.


만약 있다고 한들, 여기에 날 던져 놓은 게 누군데.




얀붕이는 왠지 모를 반발심에 조금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얀붕이의 옆을 따르듯, 얀순이 또한 미끄럽게 걸음을 옮겼다.




얀붕이의 발걸음에 동화된 것처럼 따라 붙는 얀순이의 발걸음은


마치 숙련된 무언극(無言劇)*의 배우와도 같이, 한없이 자연스러웠다. 






*무언극 : 소리없이 행동으로만 이루어지는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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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는 부모님의 기억이 없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돌멩이가 많은 산길을 걷던 것이 내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몸이 불편한 할머니가 여기는 시골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시골이라도 좋았다.


도시는 들어만 봤지, 그게 뭔 줄도 잘 몰랐다.







몸이 불편한 할머니를 돕느라 어릴 적부터 살림을 했다.

배우진 않았는데, 그냥 하게 됐다.






할머니를 봐야 돼서 학교에는 못 갔다.



면사무소에 가서 할머니가 준 1이라고 적힌 봉투를 아줌마에게 전해주면,


아줌마가 나는 이제 1학년이라고 알려주었다.








할머니가 준 봉투가 다 떨어졌다.



1부터 6까지의 숫자가 써 있던 봉투는 2년만에 동이 났다.



면사무소 아줌마는 2부터 6까지의 숫자가 써 있는 봉투를 모두 받고 나서야 내가 2학년이 되었다고 알려주었다.



봉투가 떨어지고, 3학년이 될 차례가 되고 나서야 깨달았다.




초등학교는 6학년까지 있었구나.





면사무소 아줌마는 내게 어려운 이야기를 하면서, 그 돈을 받으면 내가 다시 1학년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경찰 아저씨가 잡아갈 수도 있다는 말에, 나는 열심히 뛰어서 도망쳤다.




그 뒤로 나는 면사무소와 경찰 아저씨들을 피해서 다녔다.





할머니에게는 이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6학년까지 하나씩 내야 할 봉투를 2학년 때 다 주고 왔다고 말해버리면


할머니한테 혼이 날까봐 무서웠다.





할머니가 점점 힘들어했다.


이따금씩 내게 칭얼대거나, 이불에 오줌을 쌌다.




이불 빨래를 하는 날이면, 할머니랑 나는 계절에 맞지 않는 이불을 덮고 잤다.





할머니가 시킨대로, 스무 밤을 세면 20만원씩 은행에서 돈을 받아올 수 있었다.


할머니랑 나는 그 돈으로 생활을 했다.





근데 언제부턴가 할머니의 통장을 들고 은행에 가도 돈을 주지 않게 되었다.


은행원 언니는 무슨무슨 정책이라고 이야기하며 어려운 말을 했다.







돈이 없어져서 시장에 가서 감자나 근대, 아욱이나 호박 같은 것들을 살 수 없게 되었다.




우리 집에 외상이라는 게 있는데, 삼십만원도 넘는다고 했다.


한 달에 한 번 들어오던 돈보다도 큰 돈인데 어떡하지. 덜컥 겁이 났다.





할머니한테 물어봐도, 할머니는 이제 잠만 잔다.













시장 어른들이 나를 피해 다닌다.


그나마 가장 친절하게 대해주시던 다솜 청과물 아줌마가 나쁜 말까지 섞어가며 소리를 질렀다.








죄송하다고 비는데 실수로 눈물이 나왔다.


잘 모르겠지만 울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멈추라고 속으로 빌었다.








나를 피해서 다니던 시장 사람들이 모두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청과물 아줌마는 오늘 나를 경찰 아저씨에게 데려간다고 했다.



눈물로 신발이 젖어서 축축해졌다.








무서워서 심장이 콩닥콩닥댔다.








콩닥콩닥.








심장이 뛰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였다.






저 오빠 방금 넘어졌나봐, 몰래 본 무릎이 까져있다.


아프겠다.






콩닥콩닥.












'카드도 되나요..?'








이상한 오빠다. 방금까지 나를 쳐다보던 시선들이 전부 다 저 오빠를 본다.





어쩌면 저 오빠는 나보다 더 이상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을 쳐다보니까.






오빠는 한참을 아줌마와 실랑이하다가,


이제 다 해결됐다며 내 손을 잡고 어딘가로 걸어갔다.




어려운 말은 없어서,

이 오빠가 나 대신 돈을 냈다는 건 나도 알 수 있었다.




근데 쪼끔 다시 생각해보니까 안 이상한 오빠 같다.


왜냐면 나는 아까부터 이 오빠를 잘 못 쳐다보겠으니까.









콩 닥 콩 닥.





내가 콩, 하고 걸으면 오빠가 닥. 하고 걷는다.


걷기만 하는데, 왜 눈물이 나지.


이 오빠도 내가 울면 싫어할텐데...




한참을 오빠 손을 잡고 걸었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바보도 아니고.



나는 괜히 심술이 나서 오빠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오빠가 외상을 다 갚았다면서 내 이름을 물어봤다.





정얀순.




김얀붕.




얀붕이 오빠.





오빠 얼굴을 제대로 못 보겠어서 괜히 오빠 옷에 코를 풀었다.




오빠는 그래도 웃었다.


나도 웃었다.





김얀붕.




콩닥콩닥.

콩닥콩닥.



이번에는 심장이 뛰는 소리가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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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는 반짝반짝하다.


내가 맨날 쳐다봐도 화도 안내고, 한참을 마주 보다가 웃어준다.





오빠는 박사처럼 아는 것도 많다.


오빠가 말하면, 문제가 하나씩 해결된다.




오빠가 공공? 서비스라는 걸 부를 때면, 아줌마들이 나와서 할머니를 도와준다.





오빠가 면사무소에 가서 화를 내니깐, 돈도 엄청 많이 생겼다.


백만원도 넘어서 조금 무서워지는 돈이다.




'진짜 촌동네 시발, 법이 무섭지가 않은가? 노인네 연금을 떼먹어?'




'촉법 뭔지 알아요?'





오빠는 변호사 아들이라고 했다.


오빠의 아빠는 대단한 사람이라는데, 오빠보다 대단하냐고 물어보면 대답을 안 해준다.










오빠는 아는 게 많은데도, 쉬운 거는 잘 못한다.


시금치랑 근대를 잘 구별 못해서, 그런 거는 내가 해준다.




오빠랑 나는 부부 같아. 히히.









오빠랑 물가에 놀러 갔는데, 오빠가 깜짝 놀라면서 얼굴을 가렸다.


남자 앞에서는 옷을 다 벗으면 안된다고 했다.




소중한 사람 앞에서만 벗어야 된다면서 나를 혼냈다.




오빠한테 처음으로 혼났다.


그게 너무 슬퍼서 울어버렸다.




나는 오빠가 너무 소중한데, 오빠는 내가 소중하지 않은게 싫었다.


오빠도 내가 소중하면 좋겠다고, 오빠도 벗으면 안되냐고 했다.




그러니깐 오빠도 내가 너무 소중하다고 하면서 주춤주춤 옷을 벗었다.






처음에는 내가 소중하다고 해서 좋았는데.


같이 놀면서 오빠 몸을 볼 때마다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몸이 간질간질.








오빠랑 재밌게 놀았다.



첨벙첨벙.


기분이 둥실둥실.

몸은 간질간질.





오빠랑 있으면 늘 심장이 콩닥콩닥 뛰고, 행복하다.





아, 헤어질 때만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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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랑 헤어지면 너무 슬프다.


숨도 쪼금씩 막히고, 맨날 울어버린다.




밤은 어두우니깐 무섭다고 오빠한테 말해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대신 많이많이 찾아온다고, 할머니랑 있으면 편해진다고 했다.








오빠는 거짓말쟁이.





할머니보다 오빠가 더 좋다.


오빠랑 있으면 가슴도 따뜻해지고, 나도 모르게 몸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오빠가 안아주면 다리가 배배 꼬이고,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기분이 좋은데.


할머니랑 있을 때는 안 그런다.





오빠가 없으니깐 오빠 냄새가 나는 곳을 찾아가서 잤다.



우리 집에 할머니 대신 오빠가 살면 좋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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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오빠가 왔다.



지금도 오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오빠도 딱 맞춰서 나를 찾아왔다.


나는 1초마다 오빠 생각을 했는데. 오빠도 그럴까?




오빠가 너무 좋으니깐 어지럽다.


추운데 몸이 뜨거워.







정신을 차리니까 오빠한테 업혀있다.



'괜찮아... 괜찮아...'






오빠 목덜미에서 땀이 난다.


그러면 안되는데, 오빠 목을 깨물었다.





오빠가 비를 맞으면서 뛰고 있다.


비가 오고 있었구나.




오빠를 깨문게 미안해서 다시 오빠의 목을 쪼끔 핥았다.


또 기분이 둥실둥실하다.






날아가버릴 것 같다.


날아가면 안되니까 오빠한테 더 꽉 매달려야지.




사랑하는 오빠.



너무너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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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없다.




아무 말도 안하고 없어졌다.








의사 선생님. 간호사 선생님.


오빠는 어디 갔어요?






오빠.오빠.오빠.오빠.오빠.








오빠가 없으면 싫다.


다 싫어. 꿈도 아니야. 눈 감았다가 떴는데도 없어.






눈 앞이 새카맣다.






콩닥콩닥 소리도 안 들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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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얼른 와서 안아줬다. 기분이 좋아.




방금까지는 아팠는데, 이제 안 아프다.








너무 좋은 오빠 냄새.




나랑 같이 있었는데, 어디 갔다 온 거야.




나랑 있었는데, 같이 있었는데. 세상에 둘만 있었는데.




오빠랑 나만 있었는데.





아. 오빠는 어른이니까 어른들한테 갔다 온 게 아닐까.


나도 어른이 되면 오빠가 더 많이 안아줄까?




몸을 오빠한테 더 가까이 갖다 댔다.


요만큼도 떨어지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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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의 아빠가 왔다.




나는 오빠랑 결혼할 거니까, 오빠의 아빠는 아버님이다.


아버님은 오빠랑 똑같이 생겼는데, 오빠보다 무섭게 생겼다.





근데, 좀 이상하다.


오빠 얼굴을 맨날맨날 봐서 알 수 있다.





아버님은 나를 싫어하는 것 같다.


아버님이 나를 볼 때 표정이, 오빠가 싫어할 때 짓는 표정이랑 똑같다.





왜? 왜? 왜?

내가 안 예뻐서? 목소리가 안 커서?





안돼. 안돼.


오빠가 나만 두고 차에 탄다.





아버님이, 오빠를 뺏어가.





오빠한테 손을 열심히 흔들었다.


그러면 오빠가 나한테 와 줄 것 같아서.



그대로 가버리진 않을까, 눈 앞이 까매졌는데도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그러니까 조금 이따 오빠가 다시 차에서 내렸다.


다시 나한테 와 줬다.








역시 오빠는 아버님보다 나를 훨씬 더 좋아한다.



표정으로 알 수 있다.

목소리로 알 수 있다.

심장 소리로 알 수 있다.









나도 오빠가 너무너무 좋아.


세상에서 제일 좋아.





사랑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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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그쳤다.




차로 20분 정도 달렸을 뿐인데, 소도시를 벗어나자 마자 거짓말처럼 비는 오지 않았다.


데리고 왔어야 했나.



만일 아내가 알았다면 미쳤다고 하지 않을까.


내 앞에서는 결코 험한 말을 쓰지 않는 아내였지만, 아들과 관련된 일이라면 달라졌을 것이다.




다른 여자의 앞에서는 표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아내였지만,


아내는 가정의 존속에 있어서는 달인이나 다름 없었다.




완벽한 내조. 완벽한 엄마. 완벽한 아내.




모두를 문제 없이 해내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마 신이 정해준 천직이 그러했을 것이다. 



아들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아들과 잘 지낼지 걱정이 앞섰는데,

막상 태어나고 보니 아내는 이전과 동일 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훌륭하게 육아를 해냈다.




그랬기에 더욱 아내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너라면 어떻게 했을까."




지금이라도 쉬어버린 내 목소리에 네가 현명하게 답해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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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오빠. 배고프지? 우리, 장 봐둔 거 있잖아.

내가 밥 해줄 테니까 먹고 가."




비 내리는 시골길의 우산 아래에서, 얀순이는 얀붕이에게 들릴 만큼 소리를 높여 말했다.




"할머니가 걱정하셔. 비도 많이 오는데."




얀붕이가 쓰게 웃으며 답했다.




아무리 함께 있는 것이 즐겁고 재밌다고 해도, 서로의 보호자에게 안부를 전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 그럼 내가 오빠네 가면 되겠다! 오빠 할머님한테 인사도 드리구...

밥, 밥은 안 줘도 돼! 나 배고픈 거 잘 참는다?"




"얀순아."




"근데, 이불은 있으려나? 말 없이 가면 역시 싫어하실까?

그래두, 난 오빠 이불에서 같이 자면 되는데-"




"얀순아."




조용한 어조로, 얀붕이가 얀순이의 말을 끊었다.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얀순이의 표정에 얀붕이의 얼굴에도 잠깐 망설임이 스쳤지만,


이내 얀붕이가 얀순이를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응? 오빠."




"너희 할머니도 걱정하시잖아. 얀순이도 할머니 보고 싶지 않아?"






번쩍-





돌연 어딘가에 내려친 번개가 늦저녁의 우산 밑을 비추었다.





- 쿠웅




뒤늦게 들려오는 천둥에 한 차례 지축이 약하게 울렸다.






"아니?"





얀순이는 웃고 있었다.


제 결정에 티끌 만큼의 의심도 없다는, 티 없이 맑은 미소.





"할머니랑 있는 것보다 오빠랑 있는 게 더 좋은데?"






쏴아아-





한 차례 천둥 번개가 치고 난 이후였기 때문일까.

제 생각과는 다른 답변이었기 때문일까.




빗소리가 아까보다 더 크게 들리는 듯했다.





얀순이는 얀붕이를 똑바로 바라보다가, 갑자기 제 입을 손바닥으로 가리는 시늉을 하더니




"그래도 오빠가 말하는 거니깐 들을게. 집까지는 데려다 줄 거지?"




라며 말을 바꾸었다.





"어, 어. 데려다 줘야지.

얼른 가자, 할머니 걱정하시겠다."





그제서야 다시금 얀붕이와 얀순이의 발걸음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얀붕이가 반 보 앞서서 걸으면, 얀순이가 반 보 늦게 쫓아왔다.






질퍽하게 젖은 비포장 도로에는 정적만이 감돌게 되었다.





얀붕이는 왠지 모르게 얀순이의 표정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에게 혼날 때 들던 감각과 비슷했다.





얀순이와 걷는 길이 처음으로 어색해진 것 같았다.








"...자기 전에 꼭 약 챙겨 먹고, 할머니한테 죄송하다고 전해 드리고..."





얀순이네 집 앞에서, 얀붕이는 얀순이에게 병원에서 들은 주의사항이나 안부 따위의 것들을 전했다.





"응."




어딘가 다른 곳에 정신이 쏠린 것처럼, 얀순이가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멍을 때리는 것 같기도 하고, 말 그대로 표정이 없다고 느껴졌다.




"오빠 가 볼게."




작별인사를 끝으로 뒤돌아선 얀붕이는


얀순이에게도 이런 날이 있겠지 싶다가도, 마음 한 구석에서 이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비단 오늘 하루만의 이별일지라도, 이렇게 헤어지긴 싫었다.




얀붕이는 다시 돌아서서 우산을 내팽개치고는, 처마 밑의 얀순이에게 다가가서 얀순이를 끌어 안았다.





"내일 또 올게."




얀순이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얀붕이가 말했다.




항상 얀순이가 먼저 자신을 껴안아 주었고, 제가 먼저 안아준 적은 없었는데


직접 안아주려니 여간 부끄러운게 아니었다.




그리고는 얀순이의 얼굴을 마주 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떨어진 우산을 대충 주워 쓰고 제 집으로 뛰어 돌아갔다.






얀순이의 시야에서 안 보이게 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얀붕이는 원래의 속도로 돌아와 걸었다.





"아."





얀붕이는 문득 기억해냈다.




엄마에게 혼나고 나면, 엄마는 항상 이런 식으로 자신을 안아주곤 했다.




비록 제가 얀순이를 혼낸 것은 아니라지만,


얀순이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렸기를 바라며 얀붕이는 이전보다 한층 가벼워진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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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붕이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된 이후로도


얀순이는 그 자리에 멍하게 서 있었다.





"오빠."





한참을 서 있고 나서야, 얀순이의 입에서 한 마디가 새어 나왔다.





"오빠.오빠.오빠."




얀순이는 잠깐 헉-하고 숨을 들이 마시고 나서, 비틀비틀 현관에 주저 앉았다.




아직도 이 품에 오빠의 온기가 남아있다.




얀순이는 그것이 무언가 소중한 선물이라도 되는 양, 양 손으로 제 팔꿈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이내 무엇인가 떠오른 듯 피가 몰려 벌개진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향하더니


약 봉지에서 약을 한 봉지 꺼내 제 입에 털어 넣었다.




"사랑하는 오빠... 오빠가 준 약... 오빠랑 한 약속..."




그것이 무슨 성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 알 한 알을 입에서 굴리며 음미했다.


분명히 약은 쓰고 맛없다고 했는데,

얀순이는 꼭 그렇지도 않다고 느꼈다.




모든 알약이 혀 위에서 녹아 사라졌을 때 쯤.


얀순이는 다시 얀붕이가 앉았던 대청마루로 비척비척 걸어가 쓰러지듯 제 몸을 뉘였다.





"으히."




"으헤헤..."







제 할머니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양 팔꿈치를 끌어안고 잠에 든 얀순이는

다음날 아침까지 자세를 풀지 않았다.





달빛이 얀순이가 누운 대청마루를 비추었지만, 얀순이의 할머니가 누운 자리까지는 닿지 못했다.


불과 1m 남짓한 거리가 오히려 두 사람의 분위기를 극명하게 갈랐다.





얀순이의 할머니에게서 들려오는 미약한 숨소리만이

아직 이 집에 두 명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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