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라이브

 “우리 그만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


 감정이 격해져 큰 소리가 오고 갈 것이 뻔하기에 조용히 말하고 싶어 인근 유명한 카페가 아닌, 아는 사람만 오는 조용하고 깔끔한 카페에서 이야기하기로 하였다. 귀여운 자수가 그려진 놓인 식탁보, 벽면에 걸린 조그마한 허브를 놓아 안정감을 주고 있는 허브들. 그리고, 가장 구석 자리에 앉아 마주 보고 있는 예쁘장한 커플 한 쌍... 이지만, 깨지기 직전인 우리 두 사람. 물론, 내 일방적인 통보로 시작이 될 것이다. 그래도 전화로 간단히 끝내는 것 보다 얼굴을 보고 말을 해야 확실하게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마구마구 좋아질 정도로 내 눈에 참 예쁜 사람이다. 입어주었으면 좋겠다고 한 옷도 입어주고 종종, ‘마중 나왔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하면서 밖을 나갈 때는 문 앞에서 기다려 준 그녀를 보고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고 좋은 여자친구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이렇게 좋은 장점만 가진, 나를 많이 생각해주는 그녀와 같이 있다가는 피가 말라 죽을 것만 같았다.


 그녀 때문에 내가 죽겠다고.


 “...”


 아무런 말 없이 내 반대편에 있는 내 여자친구, 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제 곧 그만 만날 사람. 마시고 있던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담긴 잔을 탁자에 놓으며 나와 눈을 마주친다.


 “...”

 ”...“


 이름만 말하면 누구나 알아주는 대학교에 입학하였고, 갸름하고 긴 생머리의 표독스러운 눈매. 날카로운 콧날과 커다란 눈동자를 가지고 있어 참 예쁘게 생겼지만, 아무런 말 없이 눈만 마주치고 있으니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다른 남자애들이 예쁜 건 좋은데 너무 사납다고 하며 나보고 잡혀 살 거 같아서 걱정된다고 했던 때가 생각이 난다.

 이런 느낌이었구나. 

 무섭다고 한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고개를 돌리며 창문을 바라보는 너. 

 기다란 목과 팔과는 반대로 자기주장이 강한 몸매. 질투와 선망의 중심에 있는 이기적인 외형과 이지적인 두뇌는, 내가 열심히 꾸미고 노력하여도, 태생적 차이로 인해 그야말로 급이 다른 사람이었다. 나를 많이 좋아해 주고 위해주는 것도 알지만, 나도 모르게 옆에 서게 되면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불안감만 커지고 있었다.

 연애하면서 봐온 행동으로 볼 때, 그녀가 날 먼저 떠날 것 같지는 않지만...

 피곤하기도 하고 불안했다.


 침만 꼴깍 삼키고 둘 다 아무런 말이 없자, 내가 먼저 말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입을 열려는데.


 “그러...”

 “왜.”

  

 한 마디.

 

 위협을 준 것도, 표정을 구긴 것도 아닌데, 심장이 철렁했다. 죄를 지은 것은 아니지만 조금, 양심에 찔리는 것이 몇 가지 있다.

 

 "후우."


 그대로 눈만 깜빡이며 가만히 있었다. 내 눈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지만, 경청할 준비가 된 것 같으니 그대로 말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각자에게 잘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나는 성인이었고, 그녀는 고등학생이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내게 좋아한다고 말을 해주었지만, 내가 극구 반대하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정식으로 주류를 살 수 있게 되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나를 좋아하는 감정이 그대로라면, 그때는 거절하지 않고 받아주겠다고.


 그리하여 오늘날까지 계속 만났고, 많이 사랑하였다.

 하지만, 예쁜 외형과 함께 계속 성장해 나가는 그녀와, 늙었다고 자조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녀에 비해 많은 나이. 그저 연령에 비해 어려 보이는 얼굴 그것 하나 말고는 대단할 것 하나 없는 나였기에, 그녀와 어울리는 동년배를 만나길 바라고 있었다. 


 "흥."


 콧김을 푹 내쉬면서 내 얼굴은 보지 않은 채로, 창문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바라는 것들을 내가 해주기 너무 어렵고, 또 그것 때문에 우리가 마음 상하는 일이 자주 있으니까 이대로 가면 우리 둘 다 상처만 남게되니까..." 


 “왜, 바라면, 안 되는데?”


 창문을 바라보고 있던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며 내 말을 끊어버린다. 가빠지는 호흡과 눈시울이 붉어지며 그렁그렁 해지는 눈망울. 내가 미워서가 아니라 참느라 얼굴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입지 말라는 옷들 안 입어줬잖아. 내가 입고 싶은 것도 참아가면서 네가 원하는대로 다 해줬어."


 맞는 말이다.


 말을 듣다 보니 예전의 일이 조금 전에 일어난 것처럼 생생하게 머릿 속에서 떠오른다.


 그녀는 내 윤리관과 맞지 않게 노출이 심한 옷을 좋아했다. 그렇다고 발가벗고 다니는 그런 수준도 아니고 사람에 따라서 이해할 수 있을 정도지만, 나는 그런 것에 대해 허용 해주고 싶지 않았다. 내 눈에는 보기 좋을지라도 살갗이 너무 보이면 남들 눈치도 보이고, 가뜩이나 반짝반짝 튀는 외형으로 인해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한 번은 왜 그런 옷을 입느냐고 물어보았다.


 '어? 오빠가 부끄러워하는 모습 보면 아주 귀여워!'

 

 라고 말하기도 하였고.


 '남들한테 보여주기 싫어서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안절부절못한 모습 보면 관심받는 것 같아서 좋아!' 


 그렇게 말을 하였다. 그래서 입지 말아 달라고 한 적이 있다. 나도 조심성 많고 사사건건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그런 일은 보통 없지만 나쁜 일에 휘말릴까 두려워서 그런 말을 하였다. 조심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그리고, 그런 진지한 이야기가 나온 후에는 노출이 심한 옷은 피해주었다. 


 “그것뿐이야? 남들 앞에서 툴툴거리는 것도 네가 안 했으면 좋겠다 해서 남들 앞에서는 안하잖아. 내가 큰 거 해달라고 했어? 아니잖아. 너도 나한테 고쳐주었으면 하는 것들,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것들, 더 나아지면 좋겠다고 한 것들 모두 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 다 참으면서 네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내 왔어. 근데 왜, 너는 못해주는건데?”


 “...”


 참아온 감정을 토하듯, 속사포처럼 쉬지 않고 말을 한다. 


 이것도 맞는 말.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는 몰라도, 다른 사람이 없어서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녀의 말 중 어느 하나 틀린 말도 없는지라 그것에 대해 할 말이 없어 입술에 힘을 주고 가만히 있었다. 


 ”아, 정말... 지금 힘들고 피 말리는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라니까?"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촉촉해진 눈을 타고 떨어지는 물방울.


 “훌쩍. 주고받는 거라며... 그게 사랑이라고 했잖아. 크기는 다를 수 있어도 그런 왔다 갔다가 필요하다고. 그리고 그런 말 내가 했어? 내가 말한 것도 아니고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네가 나한테 가르쳐 주었잖아. 근데 왜 남한테 해달라고 하면서 자기는 안 해주는 건데? 도대체 왜? 윽.“


 쉬지 않고 말하느라 목이 아팠는지 말을 멈추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달그락.


 그녀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새하얀 식탁보가 올려진 탁자에 잔을 놓으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후으... 근데 왜 내가 해달라는 것은 안 해 주는 건데? 다른 사람 연애하는 거 봐. 나처럼 하고 싶은 거 다 참아가면서 만나는 사람, 봤어? 못 봤잖아... 다들 양보하면서 살잖아.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남들 다 그렇게 희생하고 양보하면서 산다고... 그렇다고 내가 양보하면서 만나는 거 싫다고 한 적 한 번이라도 있었어?“


 ”없었어.“


 “내가 더 많이 좋아해서, 정말로 많이 사랑해서 우리가 만나는 거잖아? 안 그래? 그러니까, 그냥... 그, 그런 거 있잖아. 나한테 부탁했던 것처럼 너도 조금만 내 요구를 들어주면 되잖아. 바깥에 있는 여자들이랑 멀어지고, 연락하면 바로바로 해주고 그것만 지켜달라고 했잖아." 


 내가 부탁한 것처럼, 내 여자친구도 나에게 부탁했다. 아는 사람도 몇 없지만 여자랑은 멀어지라고, 연락 안 되면 불안하니까 건성으로 답해도 좋으니, 전화가 어려우면 문자라도 해달라고. 


 하지만, 너무나도 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원하는 요구 조건은 내게 너무나 가혹했기 때문에.

 

 “몇 번이고 다시 말해주지만, 직장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 중에 여직원이 있다면 어떠한 말도 하지 말라는 것은 너무 하잖아.”


 “하! 본인 성격 잘 알면서 그래? 오지랖 넓고 남들 눈치는 기막히게 잘 보고 착해 터져서 남들이 조금만 힘든 척하면 본인 몸 망가져도 하나하나 다 도와줄 거 뻔한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랑 일면식도 없는 사람 때문에 신경 쓰면서 기운 빠지는 꼴을 보고 그냥 내버려 두라고?“


 없지 않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선에서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맞는다고 판단하여 살고 있다. 내가 가능한 선에서 조금만 도와주면 100%는 아니라고 하여도 어느 정도는 다른 사람도 내가 힘들 때 도와줄 테니까. 따지고 보면 미래의 나를 위해서 하는 행동이다.


 “힘든 일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런 행동은 나를 위한 행동이기도 해. 그러면 나보고 같이 일하는 사람을 무시하면서 일하라고? 그러면 너무 매정하다고 찍혀서 나중에는 내가 업무를 보다가 도움받지 못하게 될 것이고 정말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땐 다른 사람 손 하나 못 빌리게 되기 때문에 그래.“


 "훌쩍, 말뿐이라도... 어떤 때라도 그런 거에 대해서는 노력해 보겠다는 말은 한 번도 안 하더라?“


 울음을 터뜨리고는 울먹이며 말한다.

 전부터 알고 지내던 카페 사장님 한 분만 계셔서 눈치가 보이긴 했지만, 카페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전화를 드려서 양해를 구했다. 그렇기에 평상시보다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무시하고 말을 할 수 있었다.


 민폐인 것은 뻔히 알지만.


 ”100% 장담할 수 없으니까, 말을 쉽게 못 하는거야. 조금만 어기게 되면 거짓말하는 것이 되잖아.”


 ”아니, 제발... 내가 큰 거 바라는 거 아니잖아.“


 좋은 말로, 부드럽게 끝내고 싶었는데 또 언성을 높이게 되었다. 우리가 싸울 때는 이런 식으로 대화가 맞지 않아 자주 싸우게 된다. 나이 차이가 큰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지금 내게 그건 불가능해. 연락은 짬 내서 해줄 수 있어도, 다른 사람과 교류를 끊는 건 어렵다고.”


 “그러니까 예전부터 몇십 번 말했잖아! 그게 힘들면 관두고 다른 일을 찾던가, 집에서 쉬어도 된다니까? 그리고, 잠시 일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고 다른 일 찾느라 오래 걸려도 상관없다고.“


 ”그래. 그런 방법도 있겠지. 그런데, 네가 평생 내 옆에 있으란 법은 없...“


 ”내가 왜 떠나는데!“


 ”말 끊지 말고 좀 들어! 후우... 사람이 꼭 헤어진 것으로 인해 떠나는 게 아니라, 사고라든가 그런 어쩔 수 없는 것도 있잖아. 그렇기 때문에 계속 빌붙어서 살 순 없어. 나도 대비하면서 살아야지.”


 “아니, 도대체 뭘 대비하는 건데? 나랑 같이 살면 되잖아? 생활비가 문제면 나랑 같이 살자고 했잖아. 하, 나 진짜 이해가 안 돼...”


 “동거는 안 한다고 지겹도록 말했잖아. 같이 사는 것은 결혼하고 나서 하는 거라고.”


 ”흑흑. 오빠는 왜 이렇게 내 마음을 몰라주는건데... 나 힘들게 하지 말라고 좀...”


 탁자에 손을 올려놓으며 말하는 그녀. 실밥이 하나 삐져나오지 않고 세련되고 맞춤복 마냥 딱 맞는 크기의 원피스. 얼마까지만 해도 몰랐던 브랜드의 장신구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예전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그녀와 같이 있을 때 만난 친구들이 나중에 물어보기를 나보고 '너 통장 괜찮냐? 저거 맞춰주려면 진짜 힘들 텐데?'라고 종종 물었던 적이 있었다. 열심히 저축하면서 살고 있고, 내가 사준 옷이나 장신구도 착용하고 다니고 잘 가지고 있는 것 같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소중히 여겨주는 것에 고마워하면서 살고 있을 뿐. 나를 만날 때마다 내가 사준 것을 쓰지 않는다고 하여 마음이 상한 적은 없다. 사준 이상 받은 사람이 잘 사용해 주기만 한다면 크게 신경쓰지 않았기에. 하지만, 내 친구가 내게 해준 말은 내가 생각하던 것과 조금 달랐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내 직업 특성상 의류에 대해서는 너보다 조금 더 잘 알잖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 있잖아, 네 여자친구분이 입은 옷을 보면 나는 알겠거든... 그게 좀, 값이 나가거든.'  

 

 친구의 말을 듣고 입고 있던 옷들과 장신구에 대해 검색을 해보니, 내 주변에서는 보지도 못할 가격대의 제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 높은 가격대의 옷이 있을 수는 있지. 그게 내 여자친구가 나와 같이 입고 다니면서 공원이나 걷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나. 반대로 차 타고, 다니면서 '아가씨~ 오늘은 어디로 가실까요?'라고, 대접해도 모자랄 것 같았다.  


 그런 차이가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하니, 내 자존감에도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밉다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저, 그녀 옆에 있기엔 내가 너무 작게 느껴져서 그럴 뿐.


 어찌 보면 자신감을 잃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더욱더 일에 매달렸다. 내가 그녀 옆에 있어도 그녀에게 들리는 잡음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길 바라고 있었으니.


 ”이성적인 생각 조금 내려놓고 감정적으로 생각을 해 봐. 내가 왜 그러겠어? 좋아하니까 이렇게 하지. 내가 괜히 이러겠어?”


 “알아. 미워서 그러는 것 아니라는 거.“


 “훌쩍. 아, 알았어... 그럼, 오빠가 밖에서 다, 다른, 사람이랑, 흑흑.

  대화하는 거, 내가 최대한 참아 볼테니까. 그만 만나자는 말은 하지 말자. 응? 내가 더 참아 볼 테니까...”


 “안 돼. 우린 갈라서야 해. 그게 서로를 위한 길이야. 그렇게 참으면 너한테도 좋지 않아. 감정 상하면서 만날 필요 없잖아.”


 군계일학처럼 어딜 가도 이목을 이끄는 외형과 그에 걸맞은 능력을 갖춘 그녀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도 알고, 나를 많이 생각해주는 사람인 것도 안다. 지금도 매우 좋아하지만, 그녀가 바라는 것을 해주기는 너무나 어렵고 정신적으로 피곤하고 힘이 들어 지쳐간다.


 무엇보다 우리 둘은 어울리지 않는다.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았다.


 ”아악! 제-발! 나한테는 오빠가 필요하다고! 으윽, 그런 말 하지 말고 제발... 내가 더 참아볼 테니까 한 번만 다시 생각해 달라니까? 노, 노력할테니까 용서해달라고 말하잖아. 어? 오빠 나 좋아한다며? 응? 제발...”


 커다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잘못한 것 하나 없는 그녀가 나에게 용서를 바라고 있다.

 

 "안 돼."


 가빠진 호흡으로 인해 어린아이처럼 울면서 살며시 팔을 뻗으며 내 손 잡으려고 하는 너.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구슬프게 우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파 전기충격을 당한 듯 찌릿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도로 무를 수는 없다. 해야 한다.

 내가 이 사람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더 좋은 환경, 그녀에게 더 어울리는 사람과 만날 수 있도록 나에게 얽매이지 않고 훨훨 날아다니는 새처럼 자유롭게 보내줘야 한다.


 “미안.”


 살갗이 닿았지만, 그대로 팔에 힘을 주어 내 몸 쪽으로 당겨 붙잡지 못하게 하였다.

 잡고자 했던 것을 잡지 못해서 일까. 휘둥그레지고 허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울상을 짓는다.


 "이렇게, 헤어질 거면 그날 그냥 놔두지 왜 그때 말 걸었냐니까? 내버려 뒀으면 좋아하지도 않고 내가 이렇게까지 안 만났을 거 아냐. 우윽, 흑흑... 싫어. 싫단 말이야.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뜯어고쳤으면 책임을 지란 말이야! 흑흑."

 

 갈 곳을 잃은 두 손은 깍지를 끼면서 오므리고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체, 부르르 온몸을 떨며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그녀.


 “미안해. 나보다 더, 널 위해주는 사람 만나면 좋겠어. 그러면 많이 행복할 거야.“


 그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건네고, 한창 만날 때 나에게 선물해 주었던, 귀여운 오목눈이가 그려진 손수건 하나를 건네주고 혼자 울고 있는 그녀를 두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오늘만, 신세 지겠습니다. 다음에는 이런 일 없게 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카페 사장님께 민폐를 끼쳐 죄송하였기에 고개를 꾸벅 숙이고 카페 바깥으로 나갔다.


 부슬부슬


 카페에서 걸어 나온 지, 열 걸음도 걷지 않았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미리 챙겨둔 우산을 펼쳐 집으로 걸어갔다.


 앞으로 보아도, 내 옆을 보아도 한 쌍의 짝을 이룬 사람들이 우산도 없이 비를 피하고자 가까운 건물로 뛰기 시작한다. 장난치면서 달리는 한 쌍도 있고, 서로의 머리에 옷을 올려 비를 막고 달리는 한 쌍도 있었다.


 소나기였는지, 아니면 비가 내리는 영역이 작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걸을 때마다 우산으로 떨어지는 비의 양이 줄어든 것을 느낀다. 하지만, 떨어지는 빗줄기가 약해져도 내 어깨에 올려둔 우산을 접을 수 없었다. 

 오늘만큼은 비에 젖기 싫어서.

 오늘만큼은 다른 사람들에게 내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남들은 다 짝을 이루고 있는데 나만 혼자다.

 오늘의 선택이 외롭고 쓸쓸하며 허망하고 영원히 후회하면서 살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 이후로 그 누구도 만나지 못해 평생 혼자 살다가 죽을지도 모른다. 그저 첫사랑이자 처음 사귀어 본 사람이라 더욱더 애틋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주고 나를 위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도 많이 포기한 그녀 같은 연인을.

 나는 영원히 만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




 철커덕


 집 안으로 들어와 비에 젖은 우산을 현관문 근처에 내버려 두고, 안방으로 향했다.


 "끝났다."

 

 긴장의 끈을 놓자, 몸에 있던 힘이 싸악 풀려 침대 위에 그대로 엎어졌다. 옷도 갈아입을 힘도 없다. 긴장되어 바짝 말라버린 입이라 수분 보충이 필요하다고 머리가 명령하는데도 몸은 안 따라준다.


 나라고 마음이 편할까. 나라고 편하겠냐고.

 

 지금도, 많이 좋아한다. 좋아하는 마음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밉다."


 좋은 사람 만나서, 멋있고 배울 점 많은 사람 만나서 같이 오순도순 잘 살고 싶었다. 차이가 날 수 있어도 노력해서 나도 차근차근 올라가면 옆에 있어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라고.


 ”싫다.“


 하지만, 생각만큼 내 성장은 아주 더뎠고, 옆 사람과의 기본적인 턱은 너무나도 높았다. 내가 직접 발돋움을 뛰어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발돋움 판을 밟고 뛰어도 헤어진 여자친구의 발가락 근처에도 못 갈 것 같은 차이. 식생활, 의류, 생활방식 등 모든 것들에 대해 차이가 크다. 


 “윽.”


 어떤 사람은 '땡잡았네? 다리 붙잡고 살아!'라고 할 테지만, 난 그런 끌려다니거나 매달리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살았다면 편하게 살겠지. 아무런 걱정 없이 아주 편하게. 하지만, 내가 비록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이라고 하여도, 내 힘으로 일궈낸 것으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걸어 나가고 싶었다. 편한 것보다 내 성취감이 더 중요하니까. 남이 보기에 쥐꼬리만 한 자존감이라고 하여도 나한테는 소중한 자존감이다. 이것마저 버리면 내 삶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 사는 것이 아주 힘들 것 같았다.

 

 "난 왜 이럴까?"


 능력이 있었더라면, 

 당장 회사에서 나와 창업해서 당당하게 그녀가 요구하는 대로 들어주겠지만, 그럴 능력도 없고 밑바탕도 없어서 도전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밑바닥까지 가게 되는 자존감과 자존심으로 인해 내가 먼저 화를 낼 때가 많았다. 돌아가신 부모님께서는 바깥에서 상한 감정을 관계없는 사람에게 화풀이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였지만, 나는 그것으로 지키지 못했다.


 내 눈물로 인해 축축해진 베갯잇에 그대로 얼굴을 처박았다. 지금이 너무 힘들기도 하지만 잘했다는 마음도 있고, 조금만 더 노력했으면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같이 잘살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도, 반대로 급이 맞는 사람끼리 만나야 각자 더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그녀를 위한 미래를 위해 포기를 선택한 이성적인 나에게 칭찬했다.


 이 이성적인 판단이 올바른 행동이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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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명이요? 절 지명해야 할 이유가 있어요?”


 살면서 이런 일은 또 처음이다.


 “나는 모르지? 근데, 그쪽에서 담당자로 너를 지목했어.”


 인자한 성격 그대로 펑퍼짐한 뱃살이 전매특허인 우리 부장님. 머리를 긁적이시면서 내게 일을 맡기시려고 하는데, 조금 뜻밖의 제안을 듣게 되었다. 


 “저는 이해가 되지 않고 정말 몰라서 여쭙겠습니다. 제가 지명받을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실력 좋고 학벌 좋은 직원 많으니 선후배 사이나 비슷한 클럽에 가입한 사람 위주로 밀어주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저보단 그쪽이 더 적임인 것 같습니다.“


 “나도 말이야. 바쁜 사람에게 이런 말 하면 참 미안한데... 거기가 사업권이 좀... 많이 커. 그쪽 먼저 해주면 좋을 것 같아. 해줄 수 있지?”


 회사 업무를 내 나이 반쪽만큼 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미 맡고 있는 회사들로 일정이 꽉 찬 상태였다.


 “그럼, 제가 맡고 있던 거 내팽개치고 그쪽부터 먼저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런 뜻이 아니지. 내팽개치는 게 아니라 다른 직원에게 맡기고 자네는 여기에 집중해달라는 거지. 나 그런 말 안 했다?“

 

 ”하지만, 제가 맡던 분들이 작은 회사라고 하여도 제가 오랫동안 신경 쓰고 붙잡아서 계속 거래를 해주신 분들이에요. 저를 믿어주시고 신뢰로 이루어진 단골이란 말입니다. 제가 큰 건 잡아야 해서 그분들의 일을 다른 직원에게 맡기면 일은 잘해 줄 수 있어도 세세한 것 하나하나 다 해주진 못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저를 믿고 일거리를 주신 분들께 배신하는 행동이라고요.“


 ”자네, 우리 같은 회사 다니는 거 맞아? 다른 사람, 다른 회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팀원, 우리 회사가 더 중요해. 남은 뒷전이야. 그건 알고 있어야지. 안 그런가?"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그만. 내가 아니라 위에서부터 내려온 명령이야. 그대로 하도록 해.“


 ”죄송합니다. 인수인계를 다 끝마치면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도 미안하네. 자네가 어떤 성격인지 잘 알고 있지만, 지금은 떨쳐내야 해.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우리가 먼저 도태 될 거야.”


 회사 내부에서 절대 해서는 안되는 행동을 해버린 것을 깨닫고 고개를 숙이며 사죄를 올렸다. 

 능력이 좋지 않아 성공한 건수가 그다지 많지 않지만, 내 나름의 노하우로 협업을 한 회사들은 큰 일이 생기지 않는 한 지금까지 계속 나를 통해 우리 회사에 일거리를 주고 계시는 분들이다. 커다란 건수는 아니어도 주기적으로 발주가 나간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회사를 믿고 있는 분들이니까.


 달카닥.


 복잡한 심경을 가진 체로 사무실을 나와 탕비실로 향했다. 목이 좀 말랐기 때문에 물 한 잔이 마시고 싶었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지금도 나를 믿고 계속 일거리를 맡아주신 분들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새로운 건수를 맡으라고? 나보다 더 일 잘하는 사람 많고 고졸이라 연줄도 없는 놈한테 뭐하러... 이런 큰일을 주시는 걸까. 그냥 돌려 말해서 그 지명한 직원은 미덥지 않으니 다른 직원에게 맡겨보시면 안 되냐고 물어보셨으면 안 되는 걸까.


 '말해서 뭐 하리. 내려오기 전부터 이미 결정 났는데.'


 차가운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고민 해 봤자 변하는 것 없고 그저 시키는 일이나 잘하다 보면 답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




 “안녕하세요. 전에 현충일에는 잘 쉬셨나요? 자제분과 같이 하신다고 하셨잖아요?“


 "예. 잘 다녀왔습니다. 화해도 하였고, 저도 모르게 아들과 집사람에게 속상하게 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서 아주 화목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다른 고객분들께는 조금 전에 전화하여 인수인계에 관해 설명을 해드렸고 지금 전화통화를 하고 있는 분이 마지막 고객님이시다. 

 전부터 아들과 사이가 멀어져 어떻게 해야 하나 나에게 푸념하던 중에 내가 약간의 조언을 해드린 것으로 인해 가족 사이가 좋아지셨다고 들었다.

 

 "다행이시네요. 다 진실한 마음으로 답을 주셔서 잘 해결되신 것 같습니다."


 "어우. 감사해요. 그런데, 여자친구분은 참 좋겠네요. 이렇게 자상하고 이성적인 사람이 짝이라니."


 "..."


 '난 오빠가 어른스러워서 좋더라? 자상하기도 하고. 히히.'


 왜 갑자기, 그녀 생각이 나는 걸까. 이제는, 그만 생각할 법도 한데... 


 "하하, 난 매번 감정적으로 해서 대판 싸우고 눈치 없다고 욕먹는데 말이죠."   


 '이성적인 생각 조금 내려놓고 감정적으로 생각을 해 봐. 내가 왜 그러겠어? 좋아하니까 이렇게 하지. 내가 괜히 이러겠어?'

 

 그녀와 헤어지던 날 만나 나에게 해주었던 말이 생각난다. 이성적인 생각은 그만하고 감정적으로 해달라고.

 약간의 아쉬운 감정도...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 예. 죄송합니다. 조금 전에 어떤 말씀 하셨죠?"


 "결혼해도 잘 살 것 같다고 했어요. 미움 안 받을 것 같다고요."


 "아하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동안, 참 고마웠어요. 잊지 못할 거예요. 우리 인연 여기서 끝나는 거 아니죠? 아 맞다. 제가 전부터 우리 대리님 좋다고 소문 많이 냈으니 좋은 소식 있을거에요."


 "예. 혹시나 불편한 사항이 생기시면, 그 새로 담당하게 되는 직원분께 꼭 말씀해 주세요. 제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것들은 인수인계 이외에 메모해서 꼭 전달 해놓을테니 걱정마세요."


 "예. 그래요. 고생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삑.


 "미쳤어. 전화하다가 이게 무슨 짓이야.”


 마지막 고객의 통화까지 전부 끝냈다. 담당 회사들이 전부 다 조그마한 회사라서 커다랗게 주의할 점은 없지만, 대화를 조금이라도 쉽게 하기 위해 여러 이야기를 하다 보니, 고객들의 개인 사정을 조금씩 알게 되어 아주 약간만 챙겨주고 있었다. 계약에 대해 융통성 있게 굴리질 못해 이런 식으로 옆면을 공략하는 방식으로 따면서 살아왔다.


 "후우."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기대어 허리의 힘을 빼고 눈을 감았다. 조금 쉬고 싶어졌다. 이분들 마음에 들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이렇게 금방 멀어질 줄 알았나. 

 공허하고 허망한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 덩그러니 떨어진 것 같았다. 내가 살면서 열심히 일궈놓은 것들이 전부 사라진 느낌. 

 대기업을 우리 회사의 고객으로 유치에 성공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말처럼 쉽지 않고 경쟁사의 압박도 신경 써야 한다.

 세상 쉬운 것 없다지만, 세상이 내게 너무 한 것 아닐까.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와 함께 흔들리는 비닐 소리. 점점 커지던 소리가 내 앞에 가까이에 오더니 멈췄다. 누군가 봉지를 뒤적이는 소리가 났다. 


 ”마셔.“


 눈을 떠보니 나와 같은 나이에 같은 날에 입사한 동기가 내게 음료수를 들이밀었다.

 내가 자주 마시던 에너지 음료. 레몬 향과 오렌지 향이 첨가되어 상큼한 과일 맛이 일품인 탄산음료다.


 칙!


 거품이 강하게 일어나면서, 손가락과 사무실 바닥에 흘리고 말았다.


 "에이, 너 이거 흔들면서 가져왔냐?"


 이러면 내가 치워야 하잖아.


 "킥킥. 미안, 봉투에 넣고 가져올 때 좀 흔들렸나 봐." 


 "하. 진짜..."


 장난에 성공하여 기쁜 어린아이처럼 키득키득 웃고 있는 동기. 어이없는 행동에 헛웃음을 지으며 휴지로 젖은 손과 땅바닥을 닦아내었다. 


 "잘 마실게."


 벌컥벌컥

 목이 마른 참이라 사러 나갈까 고민하였는데, 정확한 때에 가져와주니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건네받은 시원한 탄산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하아. 좋다. 마침 마시고 싶었는데. 네가 딱 잘 사왔..." 


 "너. 괜찮냐?"


 감사의 인사를 하려 했는데, 평상시에는 발랑까진 녀석이 어쩐 일로 굳은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을 한다. 어르신들이 좋아할 법한 짧은 머리에 커다란 키. 운동을 취미로 하고 있어서 우락부락 큰 몸이 일품인 녀석이다. 그러다 보니 같이다니다보면 형이나 선배인 줄 알고 나랑 다른 취급을 당할 때 씩씩거리는 것이 참 귀여운, 친구다.


 "음... 글쎄? 다른 직원들이 잘해주면 좋겠지만, 나보단 잘할 테니까. 그냥, 잘해주길 바라는 것뿐이지."


 "나 그거 말하는 거 아닌데?"


 이게 아니라고?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이 녀석이 뭘 말하는지 모르겠다. 오늘 부장님께 혼난 것 때문에 그런 건가?


 "혼날 수도 있지. 일하다 보면?"


 "그거 아니라고."


 눈을 감고 머리를 긁적이며 한탄하듯 말하고 있다.


 이것도 아니라고?

 다시 한번 깊이 생각을 해보지만, 오늘 과장님께 잔소리 들은 것과 인수인계 건 말고는 최근에 크게 힘든 일은 없었다. 어차피 잠깐잠깐 일이 있는 건 일상다반사니.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이 녀석이 이러는 이유를. 


 "뭘 말하고 싶은 건데?"


 "아니, 내가 네 통화하는 걸 들었는데 말이야. 잘 얘기하다가 걔 얘기 나오니까 바로 표정 굳으면서 아무런 말을 못하더라?"


 "아..."


 "아니, 도대체 몇 번째고, 몇 년이야? 헤어진 지가 몇 년인데 걔 얘기만 나오면 세상 무너진 것처럼 표정이 굳어버리면서 입을 못 여냐? 그 정도로 신경 쓰이면 헤어지지 말고 그냥 붙잡고 살지 왜 그랬냐. 아니면 지금이라도 다시 연락해서 만나 보던가."


 그거까지 다 봤나. 그럼 내가 전화할 때 하는 얘기 다 들었다는 거네.


 "아니야. 그냥 조금, 둘이 안 맞아서 헤어진 거니까. 그리고, 남들 앞에 보여주는 모습이 전부는 아니니까."


 "안 맞긴 개뿔, 둘이 사귈 때 옆에서 다 봤는데? 그렇게 수발 다 들어주는 애가 어디 있어? 너도 걔 공주님처럼 모시려고 노력한 거 내가 모르냐? 야. 지영이 봐라. 어? '그 오빠는 얼굴도 잘나고 눈치도 빨라서 하나하나 다 신경 써주는데, 왜 우리 오빠는 이렇게 눈칫밥 말아 처먹은 인간일까? 친구보고 좀 배워 와라. 이 화상아.'라고 말하면서 맨날 깐다니까? 너 때문에 내가 욕을 먹고 살아요." 


 잘해준 적은 딱히, 없는 것 같은데.


 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굳게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에서 생각한 말을 그대로 전하게 되면, 자각 없이 사람 꼬신다고 욕먹기 일쑤다. 겨우 한 사람만 사귀어 봤는데, 남들 앞에서는 바람둥이 취급을 받곤 한다. 난 그런 적 단 한 번도 없는데, 그런 가벼운 행동은 내가 더 싫어하고.


 "물론, 신세 한탄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 내가 지영이랑 이어지게 도와준 사람이... 너인데, 네가 계속 혼자인 것을 보면 나도 좀 많이, 아프거든. 네 얼굴 좀 봐라. 다 박살 났네."


 그러다가 동기가 내 볼살을 잡고 주욱 당기며 말한다. 


 "이야. 네 머리가 작은 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하고 보니 엄청 작다? 지영이보다 작겠는데?" 


 "아프니까 좀 놔라." 


 동기는 지금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이 내 볼살을 잡고 흔들거리며 웃고 있었다.


 "안경 벗으라니까? 요 봐라. 그 안경 때문에 그 큰 눈도 다 가려지네."


 "하지 마."


 다른 손으로 내 안경을 잡으려고 하길래 한마디 하였다.

 장난이 심한 것 같아, 눈썹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이 내 안경에 손을 대는 것이 너무 싫다. 내가 안경을 쓰든 말든 무슨 상관인지. 아무리 친한 직장 동료라고 해도 선을 넘어도 되는 것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알았어. 안 한다고. 내가 미안해."


 미안해하는 얼굴로 내 볼살을 잡고 있던 손을 떼었다. 


 털썩. 

 오늘 휴가라 빈자리였던 내 옆자리에 앉아 나를 말없이 바라본다.


 "..."


 "왜 또."


 "...진짜 잘생겼네."


 "그렇게 생각한 적 없다니까."


 "야, 세상 모든 사람이 딱 하나의 얼굴만 찾는 게 아니라니까? 너처럼 쌍꺼풀 짙고 눈 큰 사람 좋아하는 사람도 많아."


 잘 하지 않던 외모 칭찬을 오늘따라 심하게 한다. 

 이 인간이 오늘 왜 이럴까.


 얘 오늘 왜 이러지?


 설마,

 혹시?


 "너, 나 좋아하냐?"


 오늘따라 이 인간이 나를 왜 이리 신경 쓸까? 


 "미친 새끼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 지영이가 너 챙겨주래. 내가 해주는 거 아니다?"


 "미쳤어? 야, 다른 사람 여자친구가 나를 왜 챙겨? 만약에, 지영이가 그런 말을 하게 되면 '걔 말고 나 좀 이뻐해 줘요~' 하면서 말을 돌리게 해야지. 이 새끼, 이거 위험한 말 할 새끼네?"


 "야. 쩐다. 그런 게 있구나! 오늘도 배워간다. 아니, 근데 진짜 내가 아니라, 그 고릴라가 진짜 시켰다니까!"


 부우웅


 주머니에 있던 동기의 핸드폰이 진동음을 울리고 있었다.  


 "에이씨, 어떤 새, 오, 와..."


 본인의 스마트폰을 바라보다가 조그마한 눈이 붕어눈처럼 튀어나올 기세였다. 

 도대체 뭘 봤길래 저래?


 "왜, 뭔데?"


 "무슨 염동력이라도 가지고 있나. 조금 욕했다고 바로 문자 오네. 나 바깥에 좀 갔다 올게."


 스마트폰에 온 문자를 내게 보여주며 입을 열었다.


 [오늘 귀가 아주 간지러운데, 나 욕하고 있지? 보면 당장 전화해.]


 지영이는 동기와 나의 직장 후배이다. 지금은 같은 부서는 아니지만, 일을 배울 시기에는 같은 부서여서 많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았고, 몰래몰래 챙겨주며 일을 그만두지 않게 도와주었다. 좋은 사이가 되고자 잘해준 것은 아니고 갑자기 그만두게 되면 일거리도 늘어나고 새로운 후배가 왔을 때 또 가르치기 싫어서 그만두지 않게 도와주었다. 그러다가, 조금 전에 내게 음료수를 준 동기 녀석이 용기를 내서 나보고 도와달라고 하였다. 자기가 많이 좋아하니 도와달라고, 나야 당연히 마음이 없어서 내가 지영이에게 해주던 것을 조금씩 동기에게 떠밀며 사내 연애를 성공하게 도와주었다. 그러다가 지금처럼 사귀게 된 것이고. 


 "고맙다고 전해주고."


 "그래. 지영이인지, 지영이 남자친구인지는 몰라도 고맙다고 할 거 같다." 


 스마트폰을 귀에 붙이고 후다닥 달려 나가는 동기가 보였다.




......




 동기가 나간 이후로, 나 이외에 아무도 없는 사무실 내부.

 기계 소리며 바람 소리 하나 나지 않는 조용한 공간. 오랜 시간 동안 그대로 놔둬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캔과 함께 내 몸도 미적지근하게 되어버렸다.

 지금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고객과 멀어진 것도 있고, 부장님께 조금 깨진 것도 있다고 하여도, 이렇게까지 침울해지지는 않았다. 


  '우으... 흐으... 흑흑. 싫어. 싫다고...'


 헤어질 때의 구슬프고 가냘프게 울던 모습이 생각난다. 

 과거에 있던 일로 인해 언제까지 휘둘려야 할까. 동기의 말 그대로, 헤어진 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녀를 놓친 것을 아쉬워하며 후회하고 있다. 그렇다고, 다시 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사람은 각자 급에 맞는 사람과 맺어지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니.

 하나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저 행복하게 살고 있으면 좋겠다고. 나 아닌 사람 손 잡고 꽃길 걸어도 좋으니 마음 편하게 해주는 사람 만나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그 망할 인간 때문에 괴롭기는 했어도 지금 만나는 사람은 그런 아픔을 주지 않으니 아주 행복하다고.


 그랬으면 좋겠다.


 그런데 또, 막상 다른 사람 손 잡고 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찌릿해졌다. 내가 그 옆에 있고 싶다고.  다른 사람 옆에 있는 너를 보고 싶지 않다고.


 그렇다고 뭘 해줄 수 있는데... 능력도 없는 주제에 뭘 해줄 수 있냐고.


 그저 지난 일이고 이미 끝난 일인데도 나 혼자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나 이것이 그녀의 삶을 바꿔버리고 메몰차게 내던져 버린 것에 대한 죗값이라면,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 맞다. 


 처음부터 도와주지 않았으면 그녀도 나도 둘 다 괴롭지 않았을텐데...


내 책상 위에 올려진 조그마한 흰머리오목눈이 모형에 손을 올리고


 살며시,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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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이 지나고, 열심히 준비한 끝에 운명의 날이 왔다.


 “출장 때문에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 거기서 퇴근하도록 해. 그리고 꼭 성공해라. 그거 진짜 큰 사업이야. 사장님도 기대 많이 하고 있어.”


 “노력해 보겠습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꾸벅 머리를 숙이고 사무실을 나왔다.

 화장실로 곧장 달려가 양치질하며 냄새가 나지는 않는지, 혹시나 입고 있는 의복이 더러워지지는 않았는지 꼼꼼하게 확인하면서 희미해진 향수 냄새가 거슬려 가지고 있던 향수를 다시 뿌렸다.


  남자보단 여자들이 많이 쓸법한 시트러스 향과 꽃향기가 나는 부드러운 향수다. 몇 년째 이 향수만 사용해 오고 있다. 다른 향수를 써보아도 금세 질려 다시 이 향수만 뿌리게 되었다.


 ’꽃향기 진-짜 좋다. 이것만 뿌려라. 응? 나 아빠 냄새 나는 향수 냄새는 싫어. 응? 해줄 거지? 응응?‘


 아니야. 걔가 좋아해서 지금까지 써온 것이 아니야.

 그저 내가 좋아하는 꽃향기라, 감귤류의 향 같은 시트러스 향이 좋아서 쓰는 것뿐이다.

 절대로, 걔 때문이... 아니야.


 "윽."


 어지러움을 동반한 지끈거리는 두통. 안경을 벗고, 오른손의 엄지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른다. 크게 나아지는 것은 없지만, 이래야 마음이 편해서.


 "제발 좀. 벗어나자."


 안경을 벗은 상태로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보았다. 시력이 낮아 어떻게 생기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나라는 사람이 서 있을뿐. 


 '우리 왕눈이! 안경 벗는 건, 남들 안 보는 곳에서만 벗는 거다? 안경 벗은 모습은 나만 봐야 하니까?'


 "굳이 그런 것 때문은 아닌데..."


 흐릿하게 나타나며 내 머릿속을 망가뜨리는 과거의 기억.

 주머니에서 안경 닦이용 수건을 꺼내 쓱쓱 일상생활 하면서 묻어버린 먼지를 꼼꼼하게 닦아내었다.


 화장실에서 모든 준비를 다 끝마치고 나서 마지막으로 손톱에 때는 없는지 말끔히 확인하고 깨끗하게 씻은 다음 바깥으로 나왔다.

 

 이번에 만나는 사람은 나와 같은 대리라는 것 말고는 아는 정보가 없다. 

 그저 위에서 전달해 준 약속 장소로 시간에 맞춰 가야 할 뿐.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보다 훨씬 커다란 대기업이고, 하청을 통해 건너 계약하는 것이 아닌 직접적으로 계약을 하러 가는 것이니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과장님도, 사장님도 많이 기대한다고 하셨으니 꼭 성공해야 한다.

 손을 펼쳐 내 가슴에 올려다 놓았다. 심장이 평상시보다 강하게 두근거린다. 

 어떤 사람일까? 남자라면 승산이 있지만, 여자라면... 자신이 없었다. 최근 여성과 대화 한 적이 없어서 어떤 식으로 대화를 시작해야 할지 고민이 될 정도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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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담당자가 바뀌어요?"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하였다. 

 오늘 만나기로 약속된 담당자가 만날 수 없다고 하였다. 그것도 당일에, 만나기 30분 전에 통보한다고?


 "그러면 다음에 뵙도록 할까요?"


 "아니요. 제가 급한 일이 생겨서 못 가게 되었는데, 저희 팀장님이 대신 미팅 해주신다고 하셨어요. 죄송합니다. 너무 늦게 알려드려서..."


 카랑카랑하고 맑은 목소리. 목소리만 들어보면 나보다 어릴 것 같았다. 

 고객만 아니면 장난하는 거냐고 쏘아 붙고 싶었지만, 내가 위치한 곳이 을이기에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건 그렇고, 담당자가 갑자기 바뀌는 일이 있을 수 있나?


 "제가 어디로 가면 될까요?"



 

 ...



 

 이전 담당자가 알려준 내용대로, 커다란 빌딩 내부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거기서 미팅 약속으로 인해 내방했다고 하니, 친절하게 다른 직원분께서 안내를 해주었다. 


 그리고 지금은, 소파에 앉아 직급이 팀장인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중앙에는 돌같이 단단함을 가진 검은 탁자. 자주 닦고 관리를 하는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소파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지만, 푹신한 게 마음에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여기서 자고 일하러 가도 크게 피곤할 것 같지는 않았다.


 "좋네."


 수납장에는 여러 서류와 책들이 꽂혀있었다. 두꺼운 서류철에는 무언가를 표시하기 위한 포스트잇이 여기저기 잘 붙여 있었다.


 혼자 쓰기엔 많이 큰 사무실 내부는 인테리어를 예쁘게 하여 모든 물건이 알맞은 자리에 있어 보기 좋았다. 탁자의 색이나 바닥재의 색상 등 어느 것 하나 튀는 것이 없고 깔끔하게 조합을 이루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바라본 책상. 흔히 드라마에서 보던 대로 약간의 서류철과 만년필, 소도구들이 깔끔하게 자기 자리에 고스란히 있었다. 

 이게 높은 사람의 자리구나. 실제로 보는 것도 처음이다.


 하지만, 조금 특이하게 느끼고 있는 것은 직급과 성명이 나와 있어야 할 명패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여긴 빈 사무실인가? 라고 생각하고 싶어도 책장에 꽂혀 있는 수많은 문서를 보면 전혀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명패 옆에 흰머리 오목눈이 모형도 있었다. 귀엽고 조그맣게 생긴 귀여운 새.

 

 '어? 선물? 고마워~'

 

 그녀가 그렇게나 좋아하던 새.



 끼익.

 그런 식으로 잡생각을 20분 정도 더 한 끝에, 내 뒤쪽에 있던 문에서 소리가 났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왔어? 히히. 잘 왔어.'

 

 문이 열리자마자 들린 목소리는, 내가 좋아하던 사람의 목소리와 비슷한 음성이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궁금하여 고개를 돌렸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갑작스럽게 만나게 된다고? 드라마도 아니고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두근거리며 온갖 상상을 하는 머리와 가슴의 열기를 죽이기 위해 노력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내가 많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

 나 좋다고 오랫동안 따라다니면서 내 곁에 있어 주었던 딱 한 사람.

 내 첫사랑이 내 눈앞에 서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전보다 성숙해지고,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어깨에 걸쳐 내려온 웨이브 머리칼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로 바뀌었다.

 팔랑팔랑하고 귀여운 소녀 같은 드레스를 입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새까만 정장 차림에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전문직 여성이 되어 있었다.

 헤어진 이후에도 계속 성장 하였는지, 그녀의 몸매는 그때보다 더 아름다웠다. 


 어떻게 살아왔을까? 좋은 사람 만났을까?

 이렇게 좋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되다니, 정말 열심히 살았구나.

 부모님은 잘 계시는지, 그녀의 아버지께서 자주 체하셨는데, 그것은 좀 나아지셨는지

 물어보고 싶었고, 궁금한 얘기가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예뻐진 그녀의 모습을 본 뒤로는 심장의 두근거림이 줄어들 기색이 없이 계속 쿵쾅거렸다. 가뜩이나 계약 건으로 인해 뒤숭숭하고, 긴장되어 바짝 마르던 입 안이 가뭄으로 인해 망가진 땅처럼 쩍쩍 갈라지고 있었다.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계속 서 계시던데."


 하지만, 얼굴을 보고 들은 목소리에서는 따뜻한 것만 떠오른 내 생각과 내 마음과 달리 한없이 차가운 음색뿐.

 나와 반대로, 놀라는 기색 하나 없이, 평범하게 사람을 만나듯 아무런 감정을 담지 않고 말을 한다.


 "아, 안녕하세요. 아직 자리에 오지 않으셔서, 계속 서 있었습니다."


 "크게 신경 쓰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오늘 미팅 때문에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착석하시면 곧바로 시작하도록 하죠."


 나와 달리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준비한 서류들을 확인하며 과거의 이야기 또는, 그날 이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 그저 일에 대한 이야기만 계속 나누었다.




...





 "그렇기에, 이렇게 제안해 드리고 싶습니다."


 톡톡


 그녀의 몸매만큼이나 가느다란 펜을 포스트잇에 떼었다 놓았다 하면서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이상은 안돼요."


 펜으로 쓱 그으며, 현재 기업에서 제시하는 조건을 표시하였다. 

 낮아도 너무나도 낮다.

 대기업이라 성공적으로 마무리가 된다면 단가를 후려친 계약이라고 하여도 우리에게도 큰 이득을 될 테지만, 지금 제시해 준 견적서를 보면... 낮아도 너무나도 낮다. 이대로 하게 될 경우에는 그대로 진행하여도 우리 회사에 손해를 입게 된다.


 조금이라도 더 올려야 한다.

 곰곰이 생각하면서 어떤 식으로 진행할지 고민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까. 다른 제안을 하면서 올려 쳐 볼까. 아니면...

 

 "나한테 뭘 해줄 수 있는데요?"


 꼿꼿이 폈던 허리를 소파에 기대며 아랫것들을 보는 마나님처럼 말한다. 


 "좋은 품질의 제품을 공급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공장에서 수시로 확인하면서 불량률을 최소한으로 하여 보내드릴 수 있도록..."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 회사 말고 제게, 뭘, 해주실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뭘 해줄 수 있냐고 묻는 팀장님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청탁은 내가 할 수 없다. 직급도 낮고 따로 회사 자금을 사용해도 된다는 결재를 받지 못하여 함부로 약속할 수도 없다.

 무엇을 할 수 있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크게 없는데...


 내가 생각하느라 조용해진 사무실의 침묵은 팀장님 입밖으로 나온 말을 시작으로, 깨지기 시작했다.

 

 "접대 한번 해볼래요?"


 "예?"


 왜, 쟤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오는 걸까. 접대라니...


 "못 들었어요? 내가 뭐가 아쉬워서 이런, 작은 회사랑 계약을 해야 하는데? 크게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니야. 불량률 줄어드는 것은 신경 쓸 것이 줄어드니 좋지만, 샘플들 확인해 보니 품질이 다른 곳에 비해서 월등하게 좋은 것도 아니야. 그럼, 최소한 나한테라도 뭔가 이득이라고 할만한 성의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아, 예... 하지만, 제가 술은 잘 못해서..."


 "장난해? 그쪽 잘 마시고 못 마시고를 물은 게 아니잖아? 할 거냐고 물었는데?"


 부드럽지 않고 날카로운 목소리. 내가 다른 사람에게 부드럽게 하라고 할 때 당시의 음색이다. 특히, 나와 단 둘이 데이트할 때, 갑작스러운 업무 전화로 인해 시간을 빼앗은 적이 있던 직원을 실제로 만났을 때 톡 쏘며 말하듯 하던 그대로.


 "저, 그,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갑작스럽게 쏘아붙여 놀라버린 나머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해 입만 뻥끗하며 말을 더듬고 있었다.


 "아, 나가요. 말 안 통해서 답답하니까. 계약할 회사가 하나도 아니고."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소파에서 일어나 커다란 책상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대로 물러나게 되면 나에게 기대를 해주고 계신 사장님과 과장님의 기대를 저버리는 행동이 될 것이다. 

 해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따내야 한다.


 '사장님도 기대 많이 하고 있어.'


 "하겠습니다. 성심성의껏, 노력해서 모시겠습니다." 


 용기를 내어 자리로 돌아가려는 팀장님께 말했다. 하겠다고.


 또각또각


 책상 앞으로 가려던 발걸음이 멈추며 하이힐 소리가 잠시 끊어졌다.


 내게 S자 몸매가 확연히 보이는 팀장님은 나를 보지 않은 체 책상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방금 한 말. 다시 해봐요."


 내가 했던 말을 재차 확인하는 것 같았다. 


 꼴깍.

 바짝 마르는 입 안을 침으로 한 번 적시고 조금 전에 한 말을 차분하게 했다.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그 뒤, 책상으로 걸어가 수납장을 열고 무언가를 챙기기 시작하셨다. 


 "일어나요. 지금 가야 하니까."


 소파에 앉아 있던 나에게 시큰둥하게 할 말만 하고 그대로 문밖으로 나갔다. 하기로 했으면 끝장을 보는 것이 맞겠다 싶어, 나도 뒤따라 나갔다.

 조금은 기대했는데... 오랜만에 만나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나와 달리 그녀에겐 내가 미운털인 것 같았다.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회사 내부에 직원은 하나도 없었다.

 구경 말고 이곳에서 일하면 더 좋겠지만, 내가 다닐 리 없는 곳. 많은 것들이 신기했다.

 그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복도가 넓어서 이동하거나 문서를 옮길 때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여기서 일하면 재미는 있겠네.

 

 "뭘 그렇게 둘러봐요?"


 "아, 아닙니다. 가겠습니다."


  


......




 "운전해요."


 "예? 제가요?" 


 "하실 거예요? 말 거예요?"


 "하겠습니다."


 차 열쇠를 이용해 잠금을 풀어버리고 내 손바닥에 올려주면서 조수석의 문을 열고 그대로 탑승해 버렸다.


 자동차에 크게 관심이 없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동물 그림이 그려진 차는 근처에도 가지 말고 피하라고 들었다. 

 피하라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내가 직접 몰게 될 줄은 몰랐다.  


 조수석에 탄 팀장님을 모시고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다.

 자동차 내부에 설치된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찍어주셨고, 난 그쪽으로 잘 가도록 안전하게 운전하였다.

 내가 타고 다니는 것보다 확실히, 좋네. 승차감도 좋고, 흔들림도 잘 안 느껴지고, 커브 길에서 차를 틀어도 내 몸이 한쪽으로 쏠리는 느낌도 전혀 없다. 나무랄 게 없네. 이래서 좋은 차를 타는 건가.

 

 "..."

 

 조용히 창문만 바라보시는 팀장님. 

 아무런 말 없이 운전만 하였다. 내가 입을 열기도 어려웠고, 상대방도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처음 문을 열어 눈을 마주쳤을 때는 아주 반가웠다. 아니, 매우 기뻤다. 약간의 대화도 나누고 싶었다.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인지, 그 사람이 잘해줘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등등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처럼 친근감 없는 대화를 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고.


 아니지. 내가 한 행동을 생각하면, 화를 안 내는 것이 더 이상할 것 같았다. 바꿀 기회조차 주지 않고 매몰차게 이별을 선택한 사람인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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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면서 이곳을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술에 취해 정신 나간 사람처럼 휘청거리며 소리 지르는 사람들이 많은 곳.

 지금은 방 하나를 빌려 단둘이 있게 되었고, 방음이 잘 되는지 그렇게나 시끄러웠던 소리가 문을 닫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영화에서 볼 때는 여기를 '룸'이라고 부르는 것 같았는데...


 그리고 팀장님과 나는, 푹신한 가죽 의자에 앉아있었다.

 생각과 다른 점이라면, 팀장님이 상석에 계실 줄 알았는데, 내 옆에 앉아계시다는 것.


 “처음이에요?”


 “예? 예. 처음, 입니다.”


 “접대 한 번도 안 해봤어요?”


 “제가 술을 잘 못한다고 양해를 구하고, 다른 방식으로 진행하였습니다." 


 “이야, 진짜 대단한 사람이네. 배짱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좋아요. 못 마신다고 계속 강조하는데, 오늘은 나 혼자 마실게요."


 "예.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팀장님께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있잖아요. 대리님."


 "예. 팀장님."


 "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직접 듣고 답해주실래요?"


 팀장님께서 궁금한 것이 있다고 하셨다. 궁금한 것이 뭘까. 내가 답이 가능할까? 그렇다고 '전 잘 모르겠으니까 다른 사람에게 해주십시요.'라고 할 순 없으니... 들어보겠다고 해야지.


 "어떤 것인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사라락, 퐁! 쪼르륵.


 나와 대화하면서 통에 담긴 얼음을 꺼내 유리잔에 담아두고, 코르크 따개를 이용해 양주병을 열고 있었다. 자주 해본 듯 양주병을 자연스럽게 열고 유리잔에 졸졸 따르며 입을 열었다.


 “절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님보다 더 아끼고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어요. 뭐, 첫사랑이라 그런 것도 있고, 제가 보기에도 잘난 사람이라 두근두근했거든요. 짧게 얘기하자면, 사랑은 일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주고받기가 되야 제대로 된 사랑이라고 했어요. 뭐, 이걸 알았다고 바로 해결한 것은 아니지만, 부모님과 저의 멀어진 사이를 아주 많이 붙여준 사람이거든요? 제 삶의 의욕도 많이 올려준 사람이라, 참 고마운 사람이에요. 그 사람 안 만났으면, 부모님이 나를 매우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면서 살았을 테니.“


 달그락달그락


 얼음과 술이 담긴 유리잔을 흔들고 있었다. 진자운동 실험을 하듯 잔이 양옆으로 흔들리지만, 술과 얼음이 넘치지 않을 정도로 안전하게 물결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고마운 사람이, 나한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내 인생과 머릿속을 자기 마음대로 꾸며놓고, 나를 내버려 두고 저 멀리 가더군요?”


 톡톡톡


 검지손가락 하나만 펼쳐 탁자를 리듬에 맞게 두들기고 있었다.

 

 아마 조금 전에 말한 그 사람은 나를 말하는 것 같았다. 첫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확실하다.

 언제부터 이렇게 마신 걸까. 다른 사람과 자주 마셨던 것일까.

 궁금하기에 한 번 물어보기로 하였다.


 “술, 자주 드셨나 보군요.”


 “마시고 싶은 욕구가 컸죠. 궁금하기도 했고. 그리고, 예전에 그 사람이 절대 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 하나 있었어요. 다른 사람 앞에서 술 마시는 것은 괜찮은데, 혼자 먹지 말래요. 우울해져서 위험한 생각을 할 확률이 높다고 하면서요. 아니, 그렇게 걱정되면 자기랑 같이 먹자고 하면 되는데. 왜 그 말만은 안했을까요? 부모님이랑 그 인간 앞 아니면 마실 생각도 없는데."


 꿀꺽꿀꺽


 액체가 기다란 목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얼음이 담겼다고 하여도 내 눈에는 상당히 많은 양이었는데 전부 다 마시고는 얼음만 담긴 잔을 살살 흔들고 있었다.   


 달그락


 "후. 근데, 그 인간이 내 옆에 없으니까 혼자 먹는 때가 많아졌어요. 막, 그런 거 있잖아요? 드라마나 소설 보면 힘들 때 술 팍팍 들어간다고. 제가 그때 나이가 어려서, 그런 거에 잘 휘둘리더라고요. 근데 말이죠.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제가 왜 술을 못 끊는지 아세요? 이게 제가 대리님께 내는 첫 번째 문제에요. 곰곰이 생각하고 맞춰봐요."


 '모르는데 어떻게 가요.'라고 하소연을 하던 개그맨처럼 말하고 싶었으나, 헤어지고 나서 나를 잊기 위해 자주 마셨다고 생각된다.


 "그 사람을 잊고 싶어서가 아닐까요?" 


 "땡. 대리님은 잘 모르시네."


 피식


 쪼르륵

 

 살며시 웃으며 양주병을 집고 술잔을 따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잔을 내 앞에 놓으며 입을 열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려요. 처음엔 조금도 생각하기 싫어서 마셨는데, 한동안 마시다 보니까 보이더라고. 술에 완전히 취하면, 그 순간만큼은 내 옆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보이더라고."


 심장이 따끔했다.

 내가 술을 먹는 사람이 아니라서 잘 모르지만, 생각이 나는 것을 잊고 싶어서 먹는 것은 들어봤어도... 이런 식으로 마시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위험할 정도로 먹고 있었다. 내가 걱정한 것 그대로 우울증 환자들의 마지막을 나타내듯 위험한 상황. 


 "그래서 혼자 술을 먹을 때마다, 잔을 두 개 놓고 미친 X처럼 퍼마시면 딱, 머리가 몽롱~해질 때 보여요. 보이기 시작하면 '나 왜 버렸어? 내가 미워서 그랬어? 아니면 내가 못나서 그랬어? 날 차고 떠나니까 기분 좋냐?' 라고 미친 X마냥 혼자 말하게 되더라고. 뭐,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그 인간은 모를 거에요. 나를 죽은 사람 취급하듯 신경 하나도 안 쓰니까."

 

 상관없다는 듯이 손목을 절레절레 흔드는 팀장님.

 팀장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그녀에 대해 신경을 전혀 안 쓴 것은 아니다.

 문자 보낼 용기가 없어서, 목소리를 들으면 그녀의 한이 나를 덮칠 것 같아 무서워서 하지 못하였다.

 좋은 사람 만나라고 보냈는데, 혹시나 내가 먼저 흔들릴까 봐 연락하지 못했다.

 무시하면서 살았던 것이 아니란 말이다.


 "아 맞아. 나 있잖아요. 그 사람이랑 헤어질 때 당시에 그 사람이 제게 마지막으로 한 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거든요. 자, 그럼 여기서 두 번째 문제. 그 사람이 나하고 헤어지던 날에 마지막으로 한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요?"


 헤어질 때 했던 말이 정확히 어떤 말인지는 기억하지 못하여도, 그때 당시의 마음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잘되라고. 너 더 좋은 사람 만나라고 그렇게 말하였다.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하였을 것 같아요. 자기처럼 못난 사람 말고 좋은 사람 만나라고."


 "오! 이건 맞추네? 하지만, 토씨 하나까지 다 맞추지 못하셨네요. 정답은, '미안해. 나보다 더, 널 위해주는 사람 만나면 좋겠어. 그러면 많이 행복할 거야.'라고 하더라고요?"


 "예. 제 생각에도 거짓말은 아닐 거로 생각합니다. 같은 남자로서 생각하면 그렇게 느껴집니다."


 "쯧..."


 혀를 차며 비위가 상한 듯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내가 그래서, 이게 그냥 내가 싫어서, 헤어지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이나 하는 줄 알았어요. 내가 너무 질척이고 귀찮게 해서 나에게 정떨어진 것이 분명한데, 그저 입 밖으로 나쁜 말을 못 하는 사람이라 그렇게 돌려 말하는 줄 알았거든요."


 벌컥벌컥


 얼음이 담긴 유리잔에 담긴 독한 술을 한 번에 들이키고 한숨을 푹 내쉬고 있었다.


 "푸하. 그래서 한 번 알아봤어요. 이 인간이 나랑 멀어지고 도대체 뭘 하고 사나? 하하, 그런데, 진-짜 재미있는 게 뭔지 알아요?"


 "무엇인가요?"


 "처음에는 이 인간이 나랑 멀어지고 다른 사람이랑 잘해보려고 헤어진 줄 알았어요. 내 마음을 훔쳐 간 사람이니까 당연히 인기 있겠지. 내가 못난 사람을 좋아했겠어? 차라리 이 사람이 나랑 멀어지고 나서 다른 사람 만났으면, 나도 거지 같은 인간 하나 만나서 시간 버렸고, 그 인간이 내 삶 하나하나에 얼룩지게 한 것들 다 기분 나쁘니까 다른 사람 만날 생각 했어요. 이 사람이 다른 사람 만나고 있다면 나도 깨끗하게 잊고 정리할 거라고."


 쪼르륵

 벌컥벌컥


 순식간에 채운 잔을 금세 비우고 고개를 푹 숙인다.


 자신의 소중한 연인을 죽인 철천지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무사와 같은 모습을 띄며, 유리잔을 잡고 있던 손의 검지를 뻗어 나를 가리키면서 입을 열었다.


 빠드득


 "그 새끼가."


 그 순간 입을 다물고 치아와 치아가 부딪히며 이가는 소리가 난다.


 "나보다, 더, 힘들어하더라고? 나는 술이라도 마시면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는데, 그 사람은 술도 안 먹거든. 어떻게 버티고 살았는지 모르겠어. 나는 그 꼴 보기 전까진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힘든 줄 알았거든? 그 새끼는 나 같은 X 속사정은 아무것도 모르고 아주 잘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지. 하.“

 

 주먹을 쥔 체 부르르 떨며 원망의 눈초리를 띄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새끼를 어떻게하면 잊을 수 있을까? 다른 사람 만나면 이 지옥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은 나 하나만 생각하면서 살고 있더라고. 주인을 잃어버린 개새끼처럼... 그 주인이 너무나도 그리워서, 자신이 변해있으면 그 주인이 나를 봐도 그냥 지나칠까봐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계속 있더라고.”


 “...”


 탁 슥

얼음이 담긴 유리잔을 내려놓고 유리잔의 머리 부분을 검지로 선을 따라 그리듯 원형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 사람은... 나와 헤어진 이후에도 나를 사랑하고 있는데, 나는 그 사람을 잊으려고 노력하다니. 그때 화장실로 뛰쳐 들어가서 속을 게우느라 오랫동안 나오지 못했어요. 내가 나 자신이 치사하고 원망스럽고 더러워서. 그 사람의 사랑을 의심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려고 했던 내가 역겹고 징그러워서!“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고 말았다.


 "깔깔깔! 뭘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날 보고 그래요? 예전 이야기에요. 예전 이야기."


 조금전까지 불같이 화를 내던 모습은 사라지고, 술기운으로 인해 정신이 혼미한지 웃긴 장면을 본 아이들처럼 신나게 웃기 시작했다.


 쿵


 일부러 유리잔을 깨뜨리려고 하였는지는 몰라도 잔을 들고 있던 손에 힘을 주어 탁자에 내리꽂는다. 깨졌으면 크게 다쳤을 것이 뻔한데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지금까지 그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혼자 살더라니까? 원래도 마른 몸매였는데, 지금은 더 말랐더라고."


 "그렇, 군요."


 “그리고 여기서 세 번째 문제. 나와 헤어지고 나서 아무도 안 만난 이유가 뭘까요?”

 

 빤히 내 얼굴을 쳐다보며 부릅뜬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유. 내가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아무도 못 만난 이유.

 마음에 드는 사람 못 만났고, 약간이라도 관심이 생겨야 상대를 알아보려고 할 테고, 데이트도 하고 할 텐데 업무 상대가 아니면 모든 관심이 뚝 떨어지곤 하였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어서 일 겁니다. 그랬을 거라고 봐요.”


 “웅. 그런가? 뭐, 그럴 수도 있겠네. 헤어지고 나서 연애하지 않았다고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이 나보다 더 힘들게 살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거든요. 제 자랑 좀 하자면, 보시다시피 어디 꿀리지 않잖아요? 이쁘지? 어리지? 잘났지? 그래서 생각했죠. '아, 이 인간이 나를 만나서 눈이 너무 올라가 버려서 다른 사람을 못 만나는 거구나. 꼴좋다.'라고 말이죠?" 


 손가락을 피고 자기 얼굴과 상체, 하체를 지목하며 의기양양한 태도로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본인이 본인 잘난 것은 잘 알테니까. 모르면 그게 더 이상하지.


 "그래, 차라리 그런 시덥잖은 이유였으면 나도 이렇게 화 안 났다고." 


 곧바로 저기압이 되면서 웃음기 죽은 얼굴로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을 한다.

 오뉴월에 한이 서린 여인처럼. 

 

 "그 새끼. 내가 그렇게나 해달라고 한 거, 연애할 때 내가 제발 해달라고 부탁했던 그거, 그거 못 지키겠다고 나랑 헤어졌던 그 새끼가! 내가 부탁한 것 그대로 하면서 살고 있더라고? 내가 아끼고 예뻐하고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사랑한 우리 왕눈이. 다른 여자들에게 보이면... 그 커다랗고 어여쁘게 생긴 눈 보이면 다른 X들 눈 돌아가서 관심 가질 게 뻔하니까 단둘이 있을 때만 보고 싶다고 했었는데, 지금까지도 안경만 쓰고 다니고 밖에서 벗는 모습을 전혀 안 보여주더라고? 심지어 안경이 더러워져서 닦을 때도 남들 안 보는 곳에서 닦고 있더라고? 주변에서 렌즈 끼면 더 멋있고 엄청 인기 많았을 거라고 바람 불어 넣어도 절대 안 했단 말이지. 꺄하하." 


 통쾌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그런 행동이 우습게 느껴져서인지. 팀장님은 크게 웃었다.


 “그리고.”


 쓱.


 갑자기 팔을 뻗어 내 넥타이를 잡고 입술이 닿을 만한 거리까지 당겼다.


 “윽.”


 갑작스러운 목에 충격이 들어와 외마디의 신음을 냈다.


 “내가, 그렇게나 좋다고 했던 그 향수를 계속 쓰고 있네?”


 원수를 본 듯, 한이 서린 목소리로 내게 말하고 있었다.

 독하지 않고 향기로운 장미 향기.

 학교 졸업했으니 기념 선물이라도 하나 달라고 귀엽게 애교 부리던 때에 같이 가서 선물해 준 그 향수.

 피차일반인 것 같네.

 하지만, 묻는 말에는 대답을 해줘야겠지.


 ”윽. 별다른 이유는 아닐 겁니다. 단지, 취향이 비슷해서 그런 것일 거예요.“


 스르륵


 넥타이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고 털썩 등을 기대었고 흐트러진 생머리를 본인의 손가락을 빗으로 삼아 정돈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리가 다 끝나고 말끔한 머리카락이 되었을 때에는, 소파에서 등을 떼며 탁자 앞으로 붙었다.


 "하, 취향. 그래. 비슷할 수 있겠네. 둘 다 귤도 좋아하고 귤 냄새도 많이 좋아했으니까. 아무튼. 이해가 안 간다고. 이 잘난 머리로 이해가 안 간다니까요? 나 살면서 이렇게 막힌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말이죠?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생각했어요. 무엇 때문에 헤어진 것일까? 무엇이 우리를 막았지? 무엇이 그 사람을, 나한테서 도망치게 했을까? 하고 말이죠. 혹시 몰라서 저희 부모님께도 여쭤봤는데, 저랑 사귀기 전에 딱 한 번 만난 것 말고는 없다고 하더라고요. 거짓말은 아닐 거예요. 저를 많이 사랑하셔서 거짓말은 안 하셨거든요. 흑."


 조금씩 눈시울이 붉어지며, 말을 조금씩 더듬기 시작했다.

 

 "내가, 조금 전에 얘기했죠? 나보다 더 힘들어하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고?"


 ”예. 말씀하신 것 잘 들었습니다.“

 

 "그래요. 그걸 알게 되니까. 갑자기, 머릿속에서 반짝! 하고 깨달았어요. 나는 그 쉬운 것을 그토록 모르다가 드디어 깨달았어요. 내가 이 사람을 멋있고 어른스러운 사람으로 보았던 그 장점이, 정 반대로 우리 둘을 깨뜨린 가장 큰 장벽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단 말이죠.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뭐일 것 같아요?"


 말을 끝마치고 미약하게 떨리는 흔들림. 

 

 ”우... 윽.“


 고르지 못한 숨소리를 내며, 울먹이는 모습이 보였다. 

 헤어질 때 그 모습 그대로, 구슬피우는 그 때 시절의 모습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눈물까지 뚝뚝 흘리면서.


 "그래... 매번 이성적인 판단만 하려고 하는 저 대가리가, 우리 사이를, 가른 제일 큰 장벽이라고. 나는 머리보다 가슴으로, 내 마음속에서 터져 나오는 이 감정을 더 우선시해서 움직였는데, 그 사람도 분명 감정만 가지고 행동하고 싶었을 때가 분명히 있었을 텐데. 남의 눈치나 보고, 언제나 올바른 것만 해야한다고 명령하는 그 이성이, 어느 것 하나 통과하지 못하게 했다고. 그래서 자기 하고 싶은 것 다 참으면서 머리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곧이곧대로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정말로 사랑해서 참았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람이 자기감정대로 행동하다보면..."


 "상대방 인생 망가뜨릴 거라고?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겠네. 하긴, 내가 그 사람의 어른스러움에 반했으니까... 평범했으면 반했겠어? 사귀기 전에는, 목소리 한 번 듣는 날은 자기 전까지 홍당무가 되어버렸고 얼굴 본 날은 밤잠을 설치면서 두근거리는 내 마음 잠재우느라 다음 날 피곤해 죽겠는데도... 엄청나게 행복한 거 있지?"


 조그맣게 입꼬리를 올리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그때는, 밤잠 설치는 때가 참 많았다. 사진만 봐도 좋아서, 콩닥콩닥 두근거림을 참지 못해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소리 지른 적이 몇 번이나 있었다.


 한숨을 푹 쉬고 훌쩍이면서 다시 입을 열기 시작한다.


 "훌쩍. 나를 상대할 때만큼은! 그게 허물어지길 바라고 있었다고! 이성보다 감정적으로 움직이는 그런 모습을. 제일 보고 싶었다고. 매번 참아서 끙끙 앓는 그 불쌍한 면상이 아니라!!"  


 "..."


 "그럼 여기서, 내가 마지막으로 낼 문제를, 대리님이 직접 말해봐요. 그게 문제니까."


 "..."


 팔랑팔랑


 재킷 안쪽에 손을 넣어 문서 하나를 내 앞에 꺼내면서 말했다.


 “맞추면, 지금 여기서 끝내고, 보내줄게.“


 계약서.

 내가 이 자리까지 오게 만든 문서. 가지고 싶었다. 성공적으로 계약을 완수하고 이 자리를 빨리 뜨고 싶었다. 그녀를 계속 보다가는 내 마음이 변할 것 같아서.

 하지만, 어떤 말도 하지 못해 입을 다물고 있었다. 화해하자고 할 수도 없었고, 그만 울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 어떤 말을 하여도 전부다 오답일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답을 찾지 못하였다.


 "진짜 말재주 없네. 우리 대리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재미없다는 말 자주 듣죠? 그렇죠? 딱 한 사람 빼고는 다 그렇게 말했을 것 같은데."


 "네. 자주 들었습니다. 대화하는 맛이 없다고..."

 

 "아니지. 그게 아니잖아? 전에 만나던 여자가 다른 인간들이 관심가지지 못하게 말 짧게 해달라고 해서 지금까지 지키면서 살아온 거잖아? 헤어지고 나서도 잘 지키면서 살고 있다고 말해야지? 왜 또 거짓말이지?"


 "..."


 노려보며 말하는 그녀의 한이 무서워 눈과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춥게 느껴졌던 에어컨 바람이 더 시원했으면 좋을 정도로 몸의 열기가 상승하여 땀이 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오늘은 말이죠."


 촤라락.


 얼음이 담겨있던 잔을 반대로 뒤집어 내용물을 전부 다 쏟는다. 잔에 남겨 있던 술과 얼음이 튀어 탁자와 바닥을 차갑게 적시고 있었다.


 "그 이성을."


 휙!


 쨍그랑!


 "오늘, 허물어 볼까 하는데?" 


 그녀가 벽을 향해 던진 유리잔이 깨지면서 튀는 파편으로 인해 얼굴을 다칠까봐, 내 몸을 기울여 막았다. 얼굴은 손바닥과 팔로 가려서 막고, 몸으로 튀는 파편은 등으로 막았다.


 "봐. 이렇게 감정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면서, 왜 제일 중요할 때는 이성적으로 변하는 걸까? 이해 못 하겠다고."


 "다칠까 봐 그랬어요. 이성이나 감정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거짓말만 하는 입 다물어.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런 게 아니야."


 그 날 그 때처럼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술을 마셔서 호흡이 흐트러진 것이 아닌, 나에게 분노하여 격해진 감정으로 인해 흔들리는 날숨을 내뱉고 있었다.

 

 씨익


 처음으로 내 앞에서 나와 연인시절에 행복하게 웃던 그 때의 웃음을 보이며 눈물은 고여있지만, 따뜻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리곤 고개를 돌리며 가지고 온 숄더백에서 손수건 하나를 꺼내서 눈물을 닦는다. 

 귀여운 오목눈이가 그려진 새하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있었다.

 

 헤어지던 날, 눈물 닦으라고 주고 갔던 손수건. 오목눈이 자수가 그려진 그 손수건.

 시간이 오래되었고, 쓰다 보면 헤지기 때문에 버렸을 거로 생각했는데, 아직도 가지고 있었구나.

 신품처럼 깨끗한 상태로.   


 "하. 정말... 또 마음 약해지려고 하네. 나 오늘 엄청나게 철저히 준비해왔는데, 진짜... 마음 약해진다. 후후."


 쨍그랑! 쨍그랑!


 말이 끝나자마자 탁자에 올려진 수많은 잔을 하나씩 벽과 바닥에 마구잡이로 던지며 깨뜨리고 있었다. 한 곳에만 던진 것도 아니고 모든 방향에 골고루 던져 깨뜨리고 있었다.


 "그만해. 이러다가 너 다친다니까."


 다칠까 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몸으로 최대한 파편이 튀지 않도록 막으려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던져 나갔다.


 쨍그랑! 쨍그랑! 


 "그만해 제발. 잘못하다가 머리카락에 유리 조각 붙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너무 위험하니까 그만하자. 이렇게 부탁할게. 화가 나면 나한테 풀어야지. 물건에 화풀이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


 내가 부탁을 하여도 멈추지 않고 남은 잔을 계속 던지기 시작했다. 


 모든 유리잔을 다 깨뜨린 탁자 위에는 술병과 군것질거리만 남아 있었다. 바닥이며 탁자며, 둘이 앉고 있던 자리를 제외한 모든 자리에 유리 파편이 튀어 있었다.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조그마한 파편들에 찔려 상처가 날 것만 같았다. 조심히 살갗이 닿지 않는 선에서 손을 뻗어 그녀 옆에 떨어진 유리 조각들을 소매로 손을 보호하여 살살 쓸어서 땅에 떨어뜨렸다.


 "하아. 그렇네. 나를 화나게 한 사람한테 풀어야지 애꿎은 물건에 화풀이하면 안 되지. 근데, 누가 반말해도 된다고 했죠? 나는 허락 안 했던 것 같은데? 예의가 없으시네?"


 "저는, 다치시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그 사람도 이 모습을 보면 많이 힘들어하리라 생각 해서요."


 내 호의를 무시하듯, 조금 전에 한 말에 화가 난 듯이 표정을 구기고 입을 여시는 팀장님이셨다.

 나도 실수했다. 아무리 감정이 격해져도 반말은 조금 선을 넘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아, 그런가. 하하. 우리 예쁜 왕눈이가 슬퍼하려나. 미안해요. 내가 상관도 없는 사람한테 말이 심했네요. 자~ 그러면 우리는 더 마셔볼까요? 화해하는 셈 치고. 응?"


 술을 따르기 위해 술병 끄트머리를 쥐고 탁자를 두리번두리번하며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어? 잔이 없네. 이거 어떻게 하지? 난 더 마시고 싶은데?"


 "제가 밖에 나가서 구해올게요. 잠시만..."


 곤란해하는 표정을 보자 지금 당장 바깥으로 나가서 유리잔을 구해오는 것이 좋아 보였다. 아니지, 유리잔은 또 던질지 모르니까 다른 것이 없나 부탁하러 가려고 다리에 힘을 주니.


 "나가기만 해. 계약 없는 거로 할 거니까."


 낮게 깔린 저음으로 그녀의 선전포고에, 일으키려던 몸에 힘을 풀어 소파에 다시 앉았다. 


 "아, 그리고, 내가 여기 들어오기 전에 미리 말해놨어요. 사람 죽는소리가 난다고 하더라도 문 열지 말라고. 우리가 먼저 문 열고 나가는 때 아니면 절대 바깥에서 먼저 열지 말라고."


 “그게 무슨...”


 어떻게 하라는 거지? 술을 채울만한 유리잔은 하나도 없고, 군것질거리도 그릇에 유리 조각이 들어갔을 것이 뻔해 비운 다음 마시게 하여도 문제가 될 것이 뻔하다.


 "거기. 딱 하나밖에 없는 좋은 잔 있잖아요? 응?" 


 내 얼굴을 그윽이 바라보며 어깨에 손을 툭 올린다.

 어깨에 올린 손에 살며시 힘을 주고 있었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던 내 어깨를 안으로 당겨 놓았다.

 하지만,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손으로 받아서 주는 것은 너무 비위생적이고 다 흐를게 뻔해서 잔이라고 하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하아... 내가 한 말을, 귓등으로 처 들은 걸까. 아니면 잘 아는데 입 밖으로 튀어나와야 알아채는 걸까?"


 정말 알지 못하여서 알려달라고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 미안해요. 눈물까지 고이면서 날 쳐다볼 줄은 몰랐지~ 진짜 몰라서 그렇구나~ 미안해요. 내가 취해서 조금 사리 판별이 모자랐어요. 그러니까, 딱, 한 번만 내가 보여줄 테니까. 잘 보고 배워요. 알았죠?"


 "예. 그렇게 하겠습..."


 '하겠습니다'라고 말을 끝마치려는 그 때에, 술병 하나를 들어 입에 머금고 마시고 있었다.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양주를 들이마시며 입 안에 가득 머금었다.

 그리고는. 


 "웁!"


 츕. 츄룹. 츄웁.


 내 뒤통수를 붙잡고 가까이 끌어당기며 두 입술이 만나게 되었다. 입 안에 있던 내용물을 내 목구멍 안으로 넘기며 혀와 혀가 만나 뱀처럼 얽히고설키고 있었다.


 주르륵


 진작에 술은 입과 입 사이로 건너가지 못하고 대부분은 바닥으로 쏟아졌다. 

 애초에 술을 상대편에게 넘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하는 수단일 뿐.

 가만히 있던 다른 한 손도 내 뒤통수와 목을 잡고 놔주질 않고 있었다. 잡을 곳도, 따로 놓을 곳도 없었던 내 양팔은 그저 들어 올려진 체 가만히 있었다. 

 

 "읏. 흐읍. 흣."


 뚝 뚝


 내가 입고 온 의류와 바짓단에 대부분 흘러내렸고, 그중 소파에 떨어진 물줄기는 울퉁불퉁한 가죽 선을 타고 복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푸하. 잘 배웠죠?"


 "콜록. 콜록. 케엑. 우엑."


 갑작스러운 행동과 함께, 목구멍에 액체가 들어가면서 사레가 들렸다.

 오랜만에 첫사랑의 얼굴을 가까이 봐서 그런지, 아니면 갑작스러운 입맞춤과 도수가 높은 독한 술이 입 안으로 들어와서 그런지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하며 체온이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어머, 어떻게 하지? 사레들려서 그래요? 아니면 술 못 마셔요?"


 미안해하는 어투로 나를 걱정하듯 말한다. 

 거짓말. 내가 예전부터 몇 번이고 말했는데... 술 먹는 거 싫어한다고. 제대로 된 생각도 못 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만 주게 되는 술주정이 너무나도 싫어서 안 마신다고 그렇게나 말했는데...


 "아, 아니... 아닙니다."


 그녀의 입술을 타고 내려온 술이 입술과 턱을 통하여, 새하얀 블라우스까지 젖게 하였고, 그녀의 속살이 비치며 투명해진 블라우스를 통하여 그녀의 까맣고 화려한 문양의 속옷도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러다, 이성으로 막아오던 꾹 참아오던 내 본능도 조금씩 일깨워지려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깜깜한 밤에 단둘이 있을 때 하던 행동들이 생각이 나며 온갖 바깥에서는 차마 말하지 못할 짐승이나 할 법한 행동들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한다.

 안 돼. 

 내 몸이 내 마음대로 제어가 되지 않는 것이 싫어서 가능하면 마시지 않았던 것인데...

 

 "그래요? 그런데, 세상에나! 제게 잔을 주시려면 눈을 뜨고 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잘 마시고 있나 확인해야 하잖아요? 그러니, 눈 감거나 피하지 말고? 알았죠?”


 쓱

 

 손바닥에 힘을 주어 유리조각 사이로 뚜껑이 열린 양주병을 밀어내 앞에 가져다 놓는다. 


 "사무실에서 말씀하셨잖아요?"


 술기운으로 상기된 얼굴로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본다. 가지고 싶은 장난감을 선물 받은 아이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웃기 시작했다.


 착


 "성심."


 착


 "성의껏."


 착


 "노력하며 모신다고, 네 입으로, 직접 말했잖아? 사람이 뱉어낸 말은 지켜야 한다며? 안 그런가?"


 시커멓게 음영이 드리운 얼굴로, 무안을 주려는 듯 내 볼을 손바닥으로 밀어내며 말하고 있었다. 내가 분명 그런 말은 했지만, 이런... 상황을 생각하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은 이러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것이 많다고 하여도 내가 싫다고 표현하면 곧바로 그만두었다. 


 "훌쩍... 도대체 왜..."


 차라리 내가 미우면 욕을 할 것이지. 왜 이렇게 괴롭히는 것일까.

 나에게 한이 맺혔을 그녀이기에 감내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서러웠다. 오랜만에 만난 첫사랑이고, 나한테만큼은 부드럽게 해주던 사람이 너무나 독하게 행동해서. 


 "이런, 미지근한 게 마음에 안 드는데? 얼음이 먹고 싶네?"


 잔을 뒤집어 쏟아낸 얼음을 집어 물기를 털고 천장 등에 비추며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뒤에는, 내 허벅지 위로 올라와 육감적인 몸매를 내 가슴에 비비며 몸을 최대한 밀착하였다. 


 "내가 말했잖아."


 장미 향이 나는 향수 냄새와, 독한 알코올 냄새를 풍기며 손에 쥐고 있던 얼음 한 조각을 내 입에 가까이 놓으며 말했다.

 



























 


 "우리를 막아버린 그 이성. 내가 부숴버릴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