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19세기 미술사에 특이한 이야기가 있어.



지금은 이름만 들어도 다들 알지만 생전에는 무명이었던 화가, 쟝-엑토르 아세트의 일화지.


그의 유년기나 청년기가 어땠는지는 알려져있지 않았지만, 가난한 화가였던 아세트는 말년에 그 특유의 생생한 색감과 섬세한 형태를 가진 그림으로 유명해졌어.


하지만 그 전성기가 막 시작되려던 찰나, 아세트는 한겨울에 누군가를 기다리듯 매번 거리에 앉아있다가 폐렴에 걸려서 죽어버렸다지.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법한 초상화나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이 내용이 사실상 그에 대해서 알려진 이야기의 전부야.


여기까지면 그냥 불운했던 예술가의 이야기일 뿐이겠지만, 정말 신기한 건 다음부터야.



아세트가 죽은 뒤, 갑자기 그가 그렸던 그림들의 색이 하루아침에 변해버린 거야.



장엄한 여명의 창세는 색을 바꿔 석양이 되었고, 깊은 새벽의 칠흑같은 어둠은 해가 떠오는 새벽 같이 변했지.


이 기묘한 현상이 불길하게 여겨져서 그렇게 변한 그림 중 많은 수가 소실되어버렸지. 특히나 심하게 색이 변한 그림 중에서는 더 이상 지구의 풍경 같지도 않은, 보랏빛으로 그려진 세상이 보는 사람에게 불길함을 전달하는 그림들도 있었어. 이런 그림은 최근에는 초현실주의적인 매력이 있다고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지.


아세트의 그림 중 최고가로 거래된 그림은 역시 '석양의 창조'였지. 원래는 여명의 창조였으나, 절묘하게 색이 바뀌며 석양처럼 변한 그 그림은 크기도 엄청나게 크고, 그 시대의 작품 중 석양을 배경으로 창세신화를 그린 작품은 그게 유일했거든.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해서 현재는 아세트가 태어난 나라의 미술사 박물관의 대표전시품이야.



그런데 그것보다 훨씬 비싸다고 알려진 그림도 있어.


소재나 주제가 특이한 건 아닌데, 이 그림이 유명한 건 그 화가의 후기 그림인데도 불구하고 색이 변하지 않아서였는데, 수집가가 제발 팔아달라고 엄청난 돈을 제시했었는데도 주인이 안 팔아서 최고가로 거래된 건 아니지만, 그 가치는 최고라고 쳐지는 그림이었지. 심지어 비공개라서 어떤 그림인지도 알려져있지 않아.



소문으로는 그게 보라색 배경에 보라색 메이드가 그려진……










요즘 입시를 준비하는 몬붕이는 부모님 등쌀에 죽을 맛이었다.


자기가 그리려는 그림이랑 다르다고 말하는데도, 자기들도 이해 못하는게 눈에 보이면서도, 자꾸만 '좋은 작품을 봐야 좋은 걸 그린다'면서 억지로 여러 미술관, 특히나 몬붕이가 관심도 없는 현대미술 전시장에 끌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물론 현대미술이 전부 싫은 건 아니다. 방부제 처리해서 커다란 수조 안에 박제된 거대상어, 초록색 네온사인으로 RED라고 써둔 개념미술, 난잡한 페인트칠처럼 보이는데 어느 장소에 서면 그게 딱 합쳐지면서 그림으로 보이는 설치미술, 몬붕이가 보면 절로 '오' 소리를 할 만한 작품들도 있었지만, 문제는 그게 몬붕이가 그리고 싶은 그림과 딱히 관계가 있진 않았다.



현대미술 회화로 가면 점입가경이었다. 얀디 몬티홀로 대표되는 연 팝아트 시대 이후로 몬붕이가 보기에 현대미술 회화는…… 진짜 인터넷 말대로 탈세수단인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뭐?! 이게 그 가격이라고?!' 싶은 게 많았다. 한 수천만원까지는 그렇다고 치겠는데, 50억짜리 그림이 프린트로 뽑아낸 몬카콜라 캔이라면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설치미술이라고 다 정상도 아닌게, 별모양 비키니를 입은 커다란 가슴에다 대고 물대포를 쏘게 만들어둔 것에 대체 무슨 예술성이 있다는 건지 몬붕이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몬붕아. 우리 미술관 오니까 너무 좋다. 그치?"



하지만 오늘도 몬붕이는 부모님과 함께 미술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주말 점심 즈음, 부지런한 사람들은 이미 눈을 떴고, 게으른 사람들은 눈을 슬슬 뜰 시간이라 도로는 한산했다. 몬붕이네 가족이 탄 승용차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큰 강을 건너는 교각의 위를 달리고 있었다.



"와 너 무 좋 아 신 나 요."



몬붕이는 뒷좌석에서 영혼없이 답하고는, 유리창 너머로 지나가는 풍경을 내다봤다.



몬붕이는 어렸을 때부터 관찰력이 뛰어났는데, 특히나 색감을 보는 능력이 뛰어났다.


어렸을 때는 '아아니 소방차 빨간색 말고 딸기 빨간색! 딸기 빨간색 차 탈 거야!!' 같이 어른들이 이해 못할 투정으로 부모님, 친척, 보육원 선생님까지도 당황시켰지만, 그림을 그리거나 오목조목 따지는 모습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어른들도 있었다.



이게 얼마나 능력이 뛰어났냐면 처음에는 이상이 있는 줄 알고 찾아간 국내 최고의 색각이상 전문가인 리치 교수님이 진행한 일반 검사는 전부 통과했고, 아예 몬붕이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알아보려고 따로 검사를 개발해왔을 정도였는데, 처음에는 몬붕이가 검사를 통과 못해서 몬붕이가 그냥 남들보다 조금 인지능력이 좋다고 결론지었지만, 한참 나중에 알고 보니 프린트기가 검사문항을 제대로 인지 못해서 같은 색으로 출력해서 검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거였다.


결국 나중에 재검사도 했고, 그걸로 방송도 타고 했다는데, 너무 어릴적이라 몬붕이는 기억나지 않았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에 우쫄해질 법도 하지만, 몬붕이는 자기가 특별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뭘 잘했다고 칭찬을 받으면 모르겠는데, 그냥 눈이 좋다고 칭찬을 받는 건 고맙기는 하지만 기쁘지는 않은, 성취감이 없는 느낌이었다.



'왜 다들 이걸 못 볼까?'



그보다 몬붕이가 가장 자주하는 생각은 답답함이었다. 몬붕이 눈에는 멀쩡히 보이는 차이를 남들이 이해 못하는 상황은 어릴 때부터 숱하게 겪어왔고, 몬붕이가 머릿속에 떠오른 색을 설명해보려 해도 그 색을 칭하는 용어가 딱히 없어서 매번 비유를 해서 설명해야하는 것도 피곤했다. 거기다 그렇게 설명해준다고 해서 남들이 알아듣는 것도 아니었다.


잘못하면 나르시스트나 관심종자로 컸을 법한 상황이었지만, 일상에서의 답답함이 몬붕이를 자기가 특별하다는 착각에 빠지지 않게 키워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몬붕아 다 왔다~ 일어나야지."


"나 안 잤어!"



아무튼, 오늘도 몬붕이는 미술관에 도착했다.


국립예술관, 국가에서 운영하는 미술관으로, 3개층 규모의 상설전시관에다가 2개층 규모의 기획전시관이 딸려있는 초거대 미술관이었다.


몬붕이는 어렸을 때부터 이 미술관에 자주 오곤 했다. 그 탓에 상설전시관의 전시품은 거의 다 외울 지경이었고, 보통 몬붕이가 이곳에 온다고 하면 기획전시를 보러 오는 경우였다.



야외주차장에 차를 대고, 미술관으로 걸어가면서 몬붕이는 과거에 보았던 전시들을 떠올렸다.


'몬무스의 전통문화전'은 평소에는 보기 힘든 다양한 종족의 몬무스 모델들이 다양한 의상을 입고 나타났는데, 문제는 그게 신체구조까지 같이 보여준다면서 반쪽은 알몸, 반쪽만 전통복장을 입은 이상한 전시회였다. 어린아이였던 몬붕이가 가족이 아닌 사람의 알몸을 본 것도 그 날이 처음이라 굉장히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났다.


그 외에는 인어 사진작가가 연 '심해의 사진전'이 있었는데, 특수제작한 수중용 필름카메라로 담아낸 바다 아래의 다양한 풍경과 색감은 몬붕이가 그림이 아닌 예술 중에서는 최고로 치는 전시회였다.



미술관 밖에 걸려있는 오늘의 메인 기획전시는 '해외의 명작전', 미술관이 몇 달에 한 번씩 인물 기획을 바꿔가며 개최하는 정기적인 전시였다.


이건 몬붕이도 꽤 좋아했는데, 현대미술보다는 보통 고전적인 과거의 화풍을 가진 작가를 위주로 작품들을 가져오기 때문에 섬세한 붓터치의 기법 차이나, 물감의 질감, 미묘하게 다른 색감의 차이 같은 것을 자세하게 즐기면서 볼 수 있었다.



이번 해외의 명작전의 주제는, 쟝-엑토르 아세트였다.


막 뜰려던 찰나에 폐렴에 걸려 죽은 걸로 유명한 화가인데, 자화상 하나 남아있지 않아 어떻게 생겼는지, 살아있을 때 친구도 없어서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자세히는 알 수 없다는 미스테리한 화가인데, 그가 그린 초창기 그림들은 감각적이면서도 극사실적인 색채로 유명했고, 후기 그림은 그가 죽은 뒤에 기묘하게 색을 바꾼 것으로 유명했다.


당시 소문으로는 피를 물감에 섞어서 나중에 색이 변한 거라는 설이 있었지만, 검사결과 그건 아니었다고 한다.


아무튼 '감각적이면서도 극사실적인 색채'가 주로 몬붕이가 기대되는 부분이었다. 몬붕이는 기분좋게 미술관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아빠랑 먼저 다음 전시관으로 갈게. 천천히 보고 와~."


"아니다, 몬붕아. 보기 싫으면 빨리 보고 나와도 돼. 나오고 나서는 엄마랑 아빠한테 전화 꼭 하고……."


"빨리 가요 여보~."



왠지 모르게 들뜬 느낌으로 부모님이 다른 기획전시인 '성의 해방과 자유전'을 향해서 간 뒤, 몬붕이는 차분하게 아세트의 그림이 전시된 전시관으로 들어갔다.



시간대 순서대로 이어지게 의도된 기획전은 아세트의 일생(이래봤자 알려진 게 없다는게 거의 주된 내용이지만)에 대해서 한 번 소개한 뒤, 그가 무명이었던 시절의 그림부터 시작하여 후기 그림으로 나아갔다.


전시된 그림 중에서는 몬붕이가 보기만 해도 제목을 알 법한 그림도 있었던 반면, 처음 보는 생소한 그림이나 노트 같은데서 뜯어낸듯한 연필스케치들도 있었다.



"아……."



그리고 몬붕이는 그가 채색한 첫 그림을 본 순간부터 깨달았다.


자신같이 색을 보는 사람이 이미 있었다는 것을.




그가 그린 그림이 일반인들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몬붕이는 알 수 있었다. 이건 단순한 감각적인 색채가 아니다. 이건,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세상을 표현하려 한 사실주의 기법의 정점에 다른 작품이었다.



일반적인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곤 하지만, 질감이란 색의 일종이다. 유리의 표면이 울퉁불퉁하면 불투명해지고, 매끄러우면 투명해지듯이, 비슷해보이는 색이더라도 다른 재질이나 두께, 형태에 따라서 다양하게 변할 수 있다.



'비내리는 항구'라는 그림에서 회색 구름의 회색을 여섯 가지 색으로 역동적으로 표현하려 한 점이나, 비오는 거리, 창문을 등진 여인의 등 뒤 창문에 반사된 풍경에 비치는 풍경의 색은 단순히 원래 사물의 색을 전체적으로 톤다운한 것이 아닌, 유리에 더 잘 반사되는 색은 살짝 더 선명하게, 잘 반사되지 않는 색은 흐리게 표현하는 디테일까지도 몬붕이는 숨쉬듯 캐치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전시작품을 차지한 연습장 스케치들은 채색이 안 되어있으니 색감을 느낄 일은 없었지만, 기획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연습장의 스케치를 따라서 걷다보면 완벽하게 전시된 완성작이 딱 나타나는 기획전의 연출은 몬붕이가 감탄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마치 아세트가 직접 옆에서 그림을 기획하고 완성해나가는 과정을 함께 하는 기분이었다.



'이런 사람이 오래 살아서 작품을 뽑아냈어야 하는 건데…….'



젊은 나이에 단명했다는 그 역사를 떠올리면 얼굴도 모르는데 아쉬운 마음이 들 정도로, 몬붕이는 이 날의 기획전을 만끽할 수 있었다.


몬붕이는 매료된듯 전시관을 세 번이나 돌고는, 맨 마지막의 '아세트처럼 칠해요! 아동용 색칠놀이 체험코스' 앞 의자에 앉아서 여운을 즐겼다.



아쉽게도 그 유명한 색을 바꿨다던 후기 그림들은 없었지만, 후기 그림 중에서는 국보로 지정된 것도 있을 정도라니 없어도 어쩔 수는 없었다. 그 정도 그림이면 보기 위해서 직접 해외로 가야지, 이런 곳에서 마주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전시를 다 돌면 연락하라던 아빠의 당부가 생각났지만, 엄마나 아빠야 뭐 전시관 다 돌고 나오면 알아서들 올 거고, 몬붕이는 벌써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몬붕이는 지금 떠오른 영감을 스케치해서 기억하고 싶은 마음이 만땅이었다.



몬붕이는 늘 메고 다니던 슬링백에서 작은 화판과 연습장을 꺼내고, 오래 써서 길이가 제각각으로 변해버리거나, 같은 색이어도 다른 브랜드의 것까지 섞여있는 색연필통을 꺼내서 스케치를 시작했다.


지금 그릴 것은 방금 본 작품의 영감과, 오면서 보았던 철교 위에서 바라본 강의 풍경화였다.



멀리 보이는 도시, 푸른 하늘, 보는 각도가 달라지며 그 색을 달리하는 강의 깊은 색과, 푸른 하늘이나 철교를 반사하며 다른 빛으로 일렁거리는 물결, 그리고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과 강에 반사된 다양한 빛을 받으며, 처음 보는 검붉은색으로 우뚝 선 철교를 몬붕이가 열심히 색으로 칠하였다.



스케치 없이 바로 색부터 깔면서 형태를 잡는 방식은 몬붕이가 색연필을 손에 쥐었을 때부터 선호하던 방식이었다. 몬붕이에게는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색이 곧 형태이자 질감이었기에, 둘은 큰 차이가 없었다.


이 버릇이 입시미술에서는 안 좋을 수 있다고 해서 스케치도 배우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몬붕이는 미대에 큰 미련이 없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취미처럼 크로키를 배우고 있었다.



"어머, 너도 색칠놀이 하니?"



그림에 열중하고 있던 몬붕이의 앞에,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몬붕이가 화판에 쳐박고 있던 시선을 올리자, 뭔가 정장을 입고 있긴 한데, 실제 정장은 아닌듯한 질감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눈앞에 서있는 건 미술관 관계자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는 쇼거스였다. 메이드복으로 주로 알려진 외형과 다르게 정장으로 외형을 의태한 모습은 어엿한 직장인 느낌이었다.



몬붕이는 기분이 팍 상해서 대꾸했다.



"저한테 색칠은 놀이가 아닌데요."



몬붕이가 엄청 어렸을 때, 몬붕이가 이 색이랑 이 색이 어떻게 같냐고, 아무리 봐도 확연히 다른 보라색 크레파스 때문에 다른 크레파스 세트를 사달라고 했을 때도 부모님은 '몬붕아. 색칠놀이할 때는 그냥 이런 색으로 칠해도 돼.'라면서 얼버무린 이후로, 몬붕이는 색칠놀이라는 말을 싫어했다.


심지어는 그 말을 일반인도 아니라 미술관 직원이 하다니! 몬붕이는 분명 이 쇼거스가 미술에 대한 존중따윈 없이 대충 아동코너 관리나 맡은 알바생일 거라고 생각했다.



몬붕이의 머릿속에서 자신이 어떤 모욕을 당하고 있는지 모르는 쇼거스는 몬붕이의 날이 선 대답이 귀엽다는듯이 웃더니, 몬붕이에게 눈높이를 맞춰주며 말했다.



"불편하게 거기 앉아서 그리지 말고, 책상 쓸래? 애기들 책상 말고 네가 앉을 수 있는 책상도 있어."



쇼거스가 가르킨 쪽에는 직원들이 앞에 앉아서 쉬거나 하는 용도인지 과자랑 물, 그리고 팸플릿이 놓인 책상이 있었다.


어디 으슥한 곳도 아니고, 딱 봐도 책상에 앉아서 그리는게 더 편하겠다 생각한 몬붕이는 쇼거스의 제의를 받아들여, 책상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몬붕이는 화판을 내려놓으며 사무용 의자에 앉고, 비슷한 색의 색연필이 비정상적으로 꽉꽉 들어찬 색연필통을 옆에 펼쳐둔 채, 화판 위의 그림을 차근차근 완성시켜갔다. 비록 지금 하는 건 단순한 메모 같은 것이고, 나중에 커다란 종이를 써서 제대로 그릴 예정이긴 했지만, 대충 그림을 그리기는 싫었던 몬붕이는 집중하여 연습장 속의 풍경을 칠해나갔다.



그림에 정신을 집중한 몬붕이의 모습을 쇼거스는 옆에서 지켜보더니, 자신도 그 맞은편 의자에 앉고, 원래부터 그 앞에 펼쳐져있던 작은 연습장에 대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몬붕이는 자신의 연필이 아닌 다른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쇼거스의 앞에 연습장이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누나도 그림 그리시나봐요?"


"응. 좋아하는 사람이 그렸거든."



연습장에서 눈을 떼지 않고, 연필을 세밀하게 움직이며 한 말이 몬붕이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아니 미술한다는 사람이 남의 그림을 색칠놀이라고 불러?'






몬붕이는 평소에 현대회화를 합법적 탈세에 가까운 무언가가 개입된게 분명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당연하게도 사실 어쩌면 그게 진짜 부자들의 취향일 수도 있고, 그걸 만드는데 정말로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들어갔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의 그림을 보고는 색칠놀이라고 대놓고 말했던 쇼거스의 평판은 몬붕이의 안에서 또 한 단계 추락했다. 미술에는 관심도 없고 대충 애들 돌보는 직원에서, 지 그림만 독특하고 최고인줄 아는 힙스터 예술충으로.



그런데, 쇼거스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어쩐지 보기 좋았다.


자세가 좋기 때문일까? 그림을 내려다보면서 살짝 깔린 눈과, 턱을 당기며 살짝 미소짓는듯 보이는 입술, 연필을 세밀하게 움직이는 가느다란 손가락과, 하얀 연습장 위에 압력에 따라 다르게 뭉개지며 연한 회색에서 진한 회색까지, 넓은 선에서 얇은 선까지 연필 한 자루로 다양한 선을 그려내는 쇼거스의 그림은 지켜보고 있으면 뭔가 차분해지는 느낌을 줬다.



'하지만 저런 연필이면 다 번지겠지…….'



연필과 저런 스프링 노트형 연습장이 만들어내는 끔찍한 조화가 있었는데, 바로 세밀하게 그려둔 그림이 노트를 닫은 사이에 이리저리 앞장과 비벼지면서 번져버리는 사태였다. 몬붕이도 그림을 그릴때 고통받던 부분 중 하나로, 기껏 세밀하게 색을 잘 깔아두고, 형태도 잘 잡은 그림을 나중에 다시 보려고 펼쳤더니 엉망이 되어있을 때는 정말 눈물이 난다.


몬붕이는 쇼거스가 그린 그림도 그렇게 사라질 거라 생각하니 살짝 아쉬웠다.


쇼거스가 그리는 그림은 누군지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골똘히 들여다보는 것 같은 남자의 인물화였는데, 이 주변에서 비슷한 사람은 없으니 아마 쇼거스도 자신이 영감을 받은 무언가를 가지고 그려내고 있는 것일 거라고 몬붕이는 생각했다.



"왜? 뭐 궁금한 거라도 있니?"



갑자기 쇼거스가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어왔다.


몬붕이는 깜짝 놀랐지만, 그녀의 머리카락에 장식처럼 달려있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있는 것을 깨달자 쇼거스가 어떤 종족인지 기억해낼 수 있었다. 사람처럼 보이긴 해도 사람도 아니고, 눈도 한 쌍만 있으라는 법은 없지.



"아, 아니요. 그냥 잘 그린다 싶어서요."



몬붕이가 놀랐다는 부끄러움을 숨기려 갑자기 그림에 열중하는 척을 하며 답하자, 쇼거스는 가볍게 웃었다.



"사실 오랜만에 그려보는 거야. 네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니까 떠오른 게 있어서."


"엥? 그럼 그거 설마 제가 모델이에요?"



몬붕이는 그림 속의 고집불통에 괴팍해보이는 인상의 외국인이 자길 보고 그린 그림이었다면 좀 상처를 받을 것 같았다.



"영감을 얻은 건 네 모습이었지만, 그리는 건 다른 사람이야. 처음에 말 했었지? 좋아하는 사람이 그림을 그려서 그림을 시작했었다고. 그 사람이야."


'와 존나 오글거린다.'

"와 그거 엄청 로맨틱하네요."



아까 그냥 지나가듯 말할 때는 그런 생각 안 들었는데, 쇼거스가 사랑에 빠진 소녀마냥 수줍게 말하자 몬붕이는 살짝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다 큰 어른이 저런 말을 하다니, 역시 예술한다는 사람들은 감성이 좀 이상하다.



그 때, 갑자기 쇼거스는 연필을 멈추더니 자신의 얼굴에 달린 인간과 같은 두 눈으로 몬붕이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몬붕이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혹시 멋대로 소재로 삼아서 싫었니?"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하자마자, 묘하게 어른스러운 느낌이 드는 풍으로 물어왔다. 몬붕이는 쇼거스가 생각이라도 읽었나 놀랄 정도였나.


몬붕이는 조심스레 쇼거스와 눈을 마주하고 말했다.



"제가 영감이 돼서 좋은 그림이 됐다면 됐어요."



으, 몬붕이는 자신까지 이런 유치한 말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옆에 있다보니 몬붕이까지 물들어버린 기분이었다.



몬붕이의 대답에 쇼거스는 싱긋 웃고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몬붕이도 다시 자신의 스케치에 집중하여, 철교 바로 아래의 강에 반사된 철교의 어두운 부분이 직접 철교의 그림자 속에 들어가있는, 그 미묘한 질감과 입체감을 가진 회색을 표현하기 위해서 고심했다. 몬붕이는 연필을 쥐고 연습장 구석에 다양한 압력으로, 방향으로, 심지어는 다양한 경도와 브랜드로 바꿔가며 선을 그어보았다.



하지만 어떤 색도 몬붕이가 원하는 색과는 달랐다. 그 미묘한 회색의 톤에 맞추자니 존재감이 없어서 구름이 반사된 것 같고, 그렇다고 철교의 존재감에 맞추자니 햇빛이 물 속을 따라 근처에서 비춰주며 느껴지는 그 미묘한 밝은 느낌이 없이 딱딱하고 검은 고체가 수면 아래에 있는 것처럼 표현되었다.



몬붕이가 머리를 싸매며 고민하는 사이에, 쇼거스는 세밀하게 압력을 달리 하며 색의 형태로 선을 부각시키는 기술로 남자의 눈동자와 눈매의 선, 눈꺼풀의 그림자가 미세하게 다르게 만든 흰자와 같은 것을 표현하고는, 연필을 내려놓았다.




쇼거스는 자신의 손 끝을 칼날의 형태로 만들더니, 연습장에서 자신이 방금 막 그린 그림을 마치 제단기로 자른 것처럼 잘라내고는, 몬붕이를 바라봤다.




"왜 그래요?"


"선물."



시선을 의식한 몬붕이가 고개를 들자, 쇼거스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몬붕이에게 건네주었다.


연습장에서 뜯어낸 것이라고는 언뜻 믿기 어려운, 마치 그림엽서처럼 깔끔하게 잘려진 그림을 받자 몬붕이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사실 되게 오랜만에 그려본 거야. 그 좋아하는 사람이 미완성작을 너무 많이 남겨두고 떠나버려서 내가 마저 그려서 세상에 알려주겠다면서 시작했는데……."


"……누나."


"응?"


"여기 이 회색. 눈동자에서 흰자랑 눈꺼풀 경계선 같은 회색으로 여기 좀 대신 그려줄 수 있어요? 아, 바로 그림에 그리진 말고 여기 테두리에다 칠해보세요."



갑자기 진지한 눈빛으로 자기가 건네준 그림과, 화판 위에 놓은 그림을 가리키며 몬붕이가 한 말에 쇼거스는 당황하면서도, 일단 몬붕이가 시킨대로 자신이 그린 회색을 따라서 그려봤다.




"아니 이건 너무 연하잖아요! 이렇게 안개같은 회색 아니잖아요!"


"어, 어? 그럼 이렇게?"


"아니 압력을 주는 게 아니라 색을 진하게 하라고요! 눈동자가 쇠에요? 돌이에요? 이 뭉근한 회색! 석상인지 사람인지 알기 어려운 이 회색이 안 보여요?"


"아, 알았어. 이렇게?"


"아니 그렇다고 소재의 질감만 살리면 어떡해요…… 이건 너무 어둡잖아요."


"자, 잠깐만, 색 있는 그림은 오랜만이라서 그래. 그러니까 이렇게 맞지? 나 감 잡았어."


"아니 아까까지 잡아둔 거 어따 날려먹고 이건 뭔데요! 미세먼지 솜사탕 색이에요?!"



몬붕이가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쇼거스는 당황했어. 아까까지만 해도 얌전한 애 아니었나? 요즘 애들 사춘기가 무섭다더니 이런 건가?


근데 왜 뭔가 익숙한 기분이 들지?




"아 답답해서 안 되겠다! 누나 따라와봐요!"


"어, 어어 어? 자, 잠깐만, 있잖아, 나 기획전 후원자라 여기 있어야……."


"아 그게 중요해요 지금? 다행히 아직 하늘 색 크게 안 변했을 시간이니까 지금 옥상 올라가면 다리 보이거든요? 이건 말로 표현 못 하니까 보는게 더 빨라요!"





쇼거스는 성이 잔뜩 난 몬붕이가 자신의 손을 잡아끌며 층계를 올라가자, 당황하면서도 그 손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쇼거스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누군가가 이름을 붙이지 않더라도 색은 그곳에 있다.


세상은 여전히 이름없는 색으로 가득 차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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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작품에 나온 예술인에 대한 편견은 작가의 의견과는 다를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