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라이브

"크크큭 아직은 마음이 꺾이지 않았나 보군."


어두컴컴한 지하감옥, 한 무리의 마족들이 연약한(?) 여기사를 둘러싸고 고문을 가하고 있었다.

정보를 알아내기 위한 고문이 아니라 방식은 꽤나 조심스러웠다.

고통은 가하되 원한을 품지 말아야 하고, 쾌락을 가하되 그것에 의존하면 아니되었다.

마왕은 온전항 상품을 원할 뿐이지, 다 망가진 인형을 원하지 않았다.


"고생이 많네? 어쩐지 여기사 혈색이 점점 좋아지는 것 같은데..."


"당연한 소리를 하는 군. 건강한 몸이 오래 고문을 견딜 것 아닌가. 신진대사를 좀 올려주었지."


"흐음. 저 잘생긴 마족은 왜..."


"사람의 정신은 유연해서 다른 종류의 기쁨으로도 고통을 중화할 수 있지. 돌려막기라고 보면 되네."


"아니아니아니. 그럴 거면 세뇌하는 이유가 없잖아. 그냥 잘 대해주면 되는 거 아니야?"


세뇌부서의 간부는 짜게 식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 엄밀히 말해 눈알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애송이를 보는 눈빛이었다.

그렇게 노려보고 싶으면 설명이라도 해주란 말이야. 꼭 저 혼자 아는 걸로 자부심 느끼네.


"멍청하긴. 효율을 따질 것 같으면 세뇌를 할 이유가 없지 않나?"


"뭐?"


"아니 그렇지 않은가. 그냥 돈 많이 들이고 장비 좋은 것 들려주면 훌륭한 오크 기사가 나올 텐데. 왜 저런 인간을 수집하겠느냔 말이야."


듣고 보니 맞는 소리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세뇌당한 자들은 하나같이 개성이 넘치고 강력한 영웅들이었다.

그냥 그 성능을 중시할 것 같은면 신체 일부를 보존하거나, 건강을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마왕의 진열장에 담긴 고급 구두 같은 녀석들이지.


"아니. 그래도. 그럼 회유는?"


"그건 온전히 마계의 사람이 아니잖나. 얼마 전에 무슨 협력자도 간이고 쓸개고 다 줄 것 처럼 굴다가 자기 목적 달성하니 바로 손절을 때리더군. 마왕님이 상심이 크셔."


"다 맞는 말인데 세뇌 부서 한테 정론을 들으니까 기분이 이상하네. 홍차에 마약이라도 탔나?"


"흥! 자기 논리가 빈약한 걸 마법 탓으로 돌리지 말라고. 우린 섬세한 작업을 수행중이란 말일세."


얼굴 위에 덮힌 가면을 찡그리며 그 해골바가지는 성질을 내었다.

아직 퇴근도 하지 않았는데 찾아와서 그런지 정신이 날카로운 모양이었다.

한 몇시간만 기다리면 좋은 친구 모드로 머리를 갈아끼고 올테니, 서운하지는 않았다.


"아 이건 그냥 개인적인 호기심인데, 유독 인간에게만 공들여서 작업하는 이유가 있나? 엘프는 그냥 성적인 유혹으로 처리하지 않았나."


"인간에겐 세뇌가 먹히지 않으니까."


"앵. 잘만 먹히던데?"


우뚝. 작업실을 향해 걸어가던 해골바가지가 자리에 굳었다.

그는 머리를 180도 돌리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가면 아래로 푸르스름한 안광이 빛났다.


"어떤 실험체에게 시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부 헛지거리일세. 한 한달만 지나도 그건 세뇌에서 풀려나겠지."


"정신력으로? 인간이 그렇게 강력한 영혼을 지녔다고 들은 적은 없네만."


"그 반대지. 모든 것을 수용하는 인간은 세뇌조차 수용해 버린다네."


그는 작업실 문을 열려다가 말고 앞으로 이어진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꼭 잠시 걸으면서 이야기하자는 신호 같았다.

작업 모드의 이친구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불필요한 말을 줄였으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나는 해골 머리에 붙은 푸른 불꽃을 뒤따랐다.


"꿈에 대해 들어보았나?"


"대충은."


"인간은 매일 밤 꿈을 꾸지. 꿈에는 맥락도 개연성도 없어. 그 가상공간을 통해서 인간의 두뇌는 무한한 변수를 창조해 낸다네."


"하지만 금제는 남아있지 않나. 그릇 안에서 회오리를 만든다고 그릇이 깨지는 것도 아니지."


"그래서 더 문제인 걸세. 틀은 그대론인데 내용은 항상 바뀌지. 그 과정에서 지성체는 어떤 결론을 내리는지 아는가?"


그는 복도 한켠에 걸려있던 커튼에 달린 끈을 잡아당겼다.

누르스름한 융단이 흘러내리며 어떤 인물의 초상이 드러났다.

검은 머리, 창백한 안색, 인간적인 표정. 인간의 몸으로 마계 공작의 자리에 오른 마도공이었다.


"그 세뇌가 자신의 사상이라고 착각하지. 이윽고 그 사상의 종주가 되고 싶어하네. 마침내... 인간은 모든 비슷한 사상의 주인이 되려고 하네."

"내가 여기사에게 마왕 전하의 심복이 되라고 저주를 걸었다면... 글쎄. 언젠가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려고 하겠지. 모든 사천왕을 죽여서라도 말이야."


해골 친구는 내게 무언가 더 말하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내게 말하는 그의 충고를 끝까지 경청하지 못했다.

나의 다리는 이미 용암 다리를 건너, 강변을 지나 안락한 집으로 향하고 있었으니까.


"메이드! 어디있나! 어서 답해라!"


저택의 불은 모두 꺼져 있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거실의 공기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건 전부 누군가의 섬세한 손길과 관리로 조명이 제어된 결과였다.


"앗. 오셨어요 주인님."


"메이드! 아니, 리사. 내 눈을 봐라! 지금부터 네게 걸린 저주ㄹ..."


말이 나오다 말고 성대에서 굳어버렸다.

언어 결석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러할까, 생각은 소리로 화하는 걸 거부당했다.

마치 자격을 박탈당한 것처럼.


"으음. 죄 죄송해요. 하지만 주인님께서는 제게 이 모든 저택을 맡기셨어요. 그 제가 오래 생각해 봤거든요? 음... 주인님은 이 저택의 주인, 아니 본질 같은 분이시잖아요... 그래서... 저택의 일부가 아니실까 하고. 헤헤."


그것은 붉은 안광을 빛내며 내게로 한걸음씩 다가왔다.

저벅 저벅. 소리가 나야할 판판한 대리석 바닥은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하찮고 비루한 바닥 장식 따위가 소리를 내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그래서. 혹시 주인님이 다치거나... 음...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우리 집은 의미를 잃을 것 같더라고요."


그녀는 내게 의자에 앉으라고 명령했다.

아름다운 향기가 감도는 홍차 한잔이 알아서 바람을 타고 허공을 날아다녔다.

딱 알맞은 온도로 가열된 케이크 한조각에 부드러운 버터 한 조각이 스스로의 몸을 불태워 녹아내렸다.


"저랑 여기서 영원히 살아요. 하나도 부족한 것 없게 해드릴게요. 사랑해요 주인님."


"그... 아..."


"어쩜. 그런 낯간지러운 칭찬을 다 하시고."


존경은 사랑이 아니야! 난 네게 존경을 바랐을 뿐이야! 난... 난...

난 메이드를 사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