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마을 어귀 옆 고개 넘어 산자락 동굴에 구미호가 살고 있단다.

작은 몸집에 짧은 꼬리, 연신 쫑긋거리는 뭉툭한 여우 귀를 가진... 그래. 어린 구미호야.


구미호는 늘 혼자였고, 외로웠어.

산속 짐승들과 이리저리 숲속을 뛰놀고, 시원한 개울물에 멱 감으며 물고기들과 장난을 쳐도, 구미호의 마지막 시선은 늘 마을에 가있었단다.

호기심 가득한 붉은 눈망울을 꿈벅대며 늘 마을을 바라보았지. 인간들이 보고 싶었어.


용기를 내어 마을 어귀까지 내려갔지만 엄한 눈초리로 꾸짖는 장승님 덕에 꽁지 빠지듯 내빼었단다.


하지만 구미호는 장승님과도 사이좋게 지내고 싶었어.

매일 가서 배꼽 인사를 드렸지. 숲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도 건네고.

결코 마을 사람들을 해치지 않겠다고 작은 손으로 빌고 빌었어. 


계절이 두 번 바뀔 즈음 장승님은 구미호를 마을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었단다.

그 자리에서 흙먼지가 일도록 방방 뛰며 구미호는 기뻐했어. 평소처럼 배꼽인사를 드리곤 조심스럽게 마을로 들어갔지.


몸과 기척을 숨기고 조심스럽게 들어가서 인간들의 모습을 살펴보았단다


제 나이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들이 조약돌을 가지고 뛰어노는 모습

개울가에서 깔깔대고 재잘대며 빨래하는 아낙네들

당나귀 타고 지나가는 화려한 옷 입은, 향긋한 냄새가 나는 여인과 

곰방대 물고 봄 햇살에 껌뻑껌뻑 조는 노인... 


구미호는 참을 수없이 즐거웠단다.

히죽히죽 멋대로 움직이는 입꼬리 참지 못하고 까르르 웃었어. 


그때 멀리서 장삼을 입은 스님이 보이지 뭐야. 법장을 보아하니 퇴마사가 분명해. 

기척을 들킬까 숨을 텁, 들이쉬고 반대편으로 도망갔어.


마을 입구로 뛰어가는 동안에도 구미호는 아쉬워서 몇 번이고 계속 뒤를 돌아보았단다...




마을에 한 번 다녀온 뒤로 구미호는 숲보다 마을에 더 많이 드나들었어.

장승님께 마을에서 있었던 일도 이야기해 드렸지.


어느 날, 오색빛깔 연등들이 꽈리 열매처럼 마을에 주렁주렁 걸려있었어.

구미호는 처음 보는 마을의 모습에 들떠있었단다.

사람들은 기뻐 보였고, 모두 즐거운 듯 춤을 추었지.

기척을 숨긴 채로 구미호도 마을 사람들 뒤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어. 


하지만 어쩐지 외로움은 가시지 않았지.

아쉬움을 느끼던 찰나, 구미호의 콧등을 간지럽히는 냄새가 느껴졌어.


홀린 듯 냄새를 따라가자 커다란 나무 아래 신비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작은 불상이 보였단다.

그 밑에 달콤한 냄새가 나는 오색의 떡과 다과가 놓여 있었지.


구미호는 군침 도는 냄새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팥고물에 묻힌 떡과 오색 다과를 양손 가득 쥐었어. 

그때 뒤에서 누군가 다가왔단다.

음식에 그만 정신이 팔려 기척 숨기는 것을 잊고 있었던 거야.


인간의 그림자와 시선이 자신을 향했다는 사실에 몹시 놀란 구미호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지.

게다가 하얀 수염을 기른 퇴마사 노승이었어.


큰일 났다. 

구미호는 머릿속이 새하얘졌어.


이대로 꼼짝없이 퇴마 당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스칠 때 구미호의 머리에 다가온 건 예상했던 법장이 아닌 노승의 손바닥이었단다.

어쩐지 따스한 손길에 구미호는 긴장이 풀려 다리에 힘이 빠졌어.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단다.


'모두가 함께 먹을 음식인데 욕심부려야 되겠느냐?'


마을 입구에 계신 장승처럼 엄한 듯, 부드러운 목소리였어.

노승은 구미호에게 선반 가장 위에 놓여있는 커다란 약과를 쥐여주었지.

그리곤 '말썽은 피우지 말거라.' 라는 말을 남기곤 사라져버렸어.


얼이 빠진 구미호는 가만히 앉아있다가, 뒤를 돌아보니 작은 불상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는게 보였어.

구미호는 천천히 일어나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곤 불상을 향해 배꼽 인사를 드렸어. 

그리고 불상은 여전히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였지.


구미호는 약과만 든 채 동굴로 되돌아왔단다.


스님이 준 약과는 아주 맛있었대.

입안에 고소한 단맛이 퍼지자 구미호는 외롭고 서러워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어.

소매로 눈물을 닦고 밖을 보니 어둑해진 밤에 서늘한 빗줄기만 쏟아지고 있었지.


구미호는 꼬리로 제 몸을 감싸고 나뭇잎과 볏짚으로 만든 침대에 몸을 둥글게 말아 누웠단다.

그리고 스르륵 잠이 들었어. 

언젠가 자신도 인간들과 함께 할 날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