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실험체 (6)

 

 

 

 

“생각해보니 헤인킬 님께선 반려를 데려오신 적이 없군요.”


“……반려?”

 

“인생의 짝이란 뜻입니다.”


그 정돈 나도 알거든? 헤인킬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아직 결혼은 안 하셨나보군요?”


“이래 뵈도 난 쫓기는 몸이야. 그리고 암컷한테 낭비할 시간 따윈 없다고.”


“그냥 인기가 없는 거 아니고요?”


“시끄러.”


릴리트는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과연 두 사람은 어떤 대화를 나눌까, 그게 궁금해서 따라온 것이었다.

 

“아무튼 병세는 좀 나아졌나?”


“이전보다 숨 쉬는 게 편해졌어요.”


“그거 다행이군. 뭔 실수라도 했다간 네 충신들이 가만두질 않을 테니까.”


농담처럼 한 말이지만 그건 진담이었다.

 

만약 헤인킬이 조금이라도 나타니엘에게 해를 끼치면, 그들은 당장에라도 

 

그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으려 들 게 분명했다.

 

“너한텐 반려가 있나?”


“아뇨, 있었지만 그는 이미…….”


“미망인인 줄 몰랐는데.”


“혼례를 올리진 않았어요. 다만 서로 마음이 통했을 뿐이죠.”


나타니엘이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희 엘프는 한 번 혼례를 올리면 이혼하거나 재혼하는 게 불가능해요. 그렇기에

 

짝을 고르는 일에 굉장히 신중하죠. 보통 혼례를 올리는데 50년 정도 걸리니까요.”

 

“50년이라니, 듣는 것만으로도 지긋지긋하네.”


그 때, 검은 옷을 뒤집어 쓴 엘프 여종이 차를 가져왔다.

 

“오, 센스 좋네. 릴리트 너 마셔.”

“제가 마셔도 돼요?”


“독을 탔을지도 모르잖아. 넌 마셔도 안 죽으니까.”


너무해……릴리트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차를 홀짝 마셨다.

 

독 같은 건 없었다. 다만 처음 맡아보는 향긋한 냄새가 났다.

 

“쫓기는 몸이라 하셨는데, 정확히 누구한테 쫓기시는 거죠?”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던 나타니엘이 말했다.

 

“신성 성모 교단이란 놈들이지. 알아?”


“아뇨, 이곳의 종교에 대해선 아는 게 없는 터라.”


“흠……좋아, 그 녀석들에 대해선 릴리트한테도 설명을 해야 했지.”


헤인킬이 옷소매를 거둬 자신의 왼팔을 보여주었다.

 

거기엔 커다란 흉터가 있었다. 불에 지진 듯 꽤 흉측했다.

 

“이건……?”


“그 녀석들이 낸 거야. 신성 성모 교단, 여러모로 기세가 대단한 놈들이지.”

 

그들이 처음 나타난 것은 오래 전 용사가 마왕을 죽인 직후였다.

 

그 뒤로 엄청난 속도로 세를 불려, 지금은 인간들의 왕국에서 믿지 않는 나라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사실상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종교라고 봐야 했다.

 

“언젠간 성스러운 어머니가 나타나,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를 낳는다고 믿는 머저리들이다.”


“왜 그 사람들은 당신을 쫓는 거죠?”


“걔네들은 인간 이외의 종족이 구원받는 걸 믿지 않아. 또 자신들이 규정한 도덕과

 

신성함에 어긋난 행위도 용납하지 않고. 내가 불사 연구를 하는 건 너도 알고 있잖아?”

 

아아, 과연. 나타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들 사이에선 그냥 금지된 분야 정도지만, 교단에게 불사 연구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불경한 죄야. 벌써 15번 정도 암살당할 뻔했어.”

 

“용케 살아남으셨군요.”


“그러게요.”


“하! 내가 좀 질기긴 하지.”

 

그래도 돌이켜보면 참 잘도 살아남았단 생각이 들었다.

 

몇 번은 정말 죽기 직전까지 몰렸고, 그 때마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거나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빠져나왔다. 하지만 다음엔? 그 때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죽는 건 두렵지 않다. 그가 두려운 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죽는 것뿐이었다.

 

“이 녀석도 나도 그리 순탄하게 살진 못했어. 사랑받으면서 편히 산 너랑 다르게 말이지.”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후후.”


나타니엘이 웃었다. 그는 그걸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젠장, 이 녀석은 뭐라고 비꼬든 화를 내는 법이 없군.


대단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헤인킬은 그녀가 화내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뭐……아무래도 상관없나. 슬슬 돌아가지.”


“재미있었어요, 다음에 또 얘기 나눠요.”


“아이고, 너 같은 샌님이랑 놀다보면 나까지 그렇게 되는 것 같아.”


“샌……님?”


"화낼 줄도 모르는 바보란 뜻이다."


두 사람을 저택을 떠났다. 그리고 집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릴리튼 내내 말하지 않고 얌전히 있다가- 집에 다다를 즈음에 입을 열었다.

 

“역시 예쁘네요, 그 사람.”


“응? 아, 나타니엘 말이냐?”


“네.”


“상판이 그럴싸하게 생겼다는 건 인정하지.”


고작 그 정도가 아니라는 건 릴리트도 알고 있었다.

 

아름답다. 볼 때마다 느낀다, 초라한 자신과 비교도 못할 만큼 그녀가 아름다운 것을.

 

게다가 그 기품이며 사랑받으며 살아가는 자의 상냥함이란…….

 

릴리트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건 따라잡거나 흉내 낼 수 없었다.

 

“인간의 피부 두께는 평균적으로 2mm 내외다.”

 

“네?”


“고작 2mm다. 아무리 두꺼워봤자 10mm를 넘기지 못하지.”


헤인킬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왜 갑자기 피부 두께 이야기를 꺼낸 걸까?


“피부를 벗기고 나면 근육이 있지. 신기하게도 근육의 색만은 종족에 상관없이

 

붉은색이다.”

 

“그래서…….”


“그래서 그것뿐이란 거다. 외모의 아름다움이란 고작 가죽만 벗겨내면 끝이란 거야.”


그가 손가락으로 얼굴을 긁으며 말했다.

 

“나타니엘이 아무리 예뻐봤- 아야. 뭐야 이거?”


목 뒤가 따끔했다. 손으로 만져보니 웬 침이 있었다.

 

쿵.

 

균형이 무너졌다. 아니, 다리가 굳었다? 

 

헤인킬은 그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다.

 

“릴리트, 도망쳐!”


“네?”


동시에 릴리트도 쓰러졌다. 마비독, 그것도 인간을 즉시 마비시킬 수 있는 독이다.

 

“잡았다.”


“제기랄…….”


나무 뒤에 숨어있던 괴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덩치가 크고 혈색이 좋은 남자, 마르고 흉터가 많은 남자,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안경을 낀 남자가 보였다. 모두 단단히 무장했고, 이런 일에 능숙한 것 같았다.

 

“봤나? 이거면 한 방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제법이잖아. 저번보다 효과가 더 좋아졌는데? 근데 왜 마비독이지?”


“이 멍청아, 반드시 생포하란 말 못 들었어? 죽이면 한 푼도 못 받는다 이거야.”


마법사 사냥꾼……헤인킬은 즉시 대응책을 떠올렸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손가락 하나 꿈틀거리는 것조차 힘들고, 효과는 최소 10분에서

 

길면 하루 이상을 생각해야한다. 뭐가 됐든 그로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오, 이거 뭐냐? 서큐버스 아냐?”


“진짜네. 제법 괜찮게 생겼는데.”


두 남자가 릴리트를 발로 툭툭 차며 말했다.

 

“…….”


“오, 무서워. 눈빛이 제대로인데 이거?”


“먹을까?”


“우선 저 남자를 데려가는 걸 추천한다만…….”


마법사처럼 보이는 남자가 말하자, 거한이 혀를 찼다.

 

“그러니까 네가 아직도 여자랑 못 해본 거 아냐! 옳지, 이것도 기회인데 먹어보지 그래?”


“어차피 이거 못해도 3시간은 간다며? 그럼 충분하잖아.”


이 개자식들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릴리트가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애썼다. 그러나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그럴까? 뭐, 잠깐이면 되니까. 서큐버스라면 나도 흥미가 있었다.”


“잘 됐네. 그 동안 우린 이 새끼 가지고 잠깐 놀아볼까?”


거한이 헤인킬의 머리를 콱 짓밟았다. 그 다음 불을 끄듯 짓이겼다.

 

“……!”


“헤헤, 왜 그래? 야, 눈 안 깔아? 그냥 쑤셔버리는 수가 있어.”


“넌 진짜 마법사 싫어하는구나.”


“똑똑한 것 가지고 건방지게 구는 새끼들 가지고 노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데!”

 

이번엔 거한이 헤인킬의 배를 걷어찼다.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고통을 참았다.

 

“……지…….”


“응? 마비된 상태인데도 말을 할 수 있나?”

 

릴리트가 하지 마, 라고 소리치려 했지만 목소리가 더 나오지 않았다.

 

“뭐, 하지 말라고?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퍼억, 퍽- 거한이 더 거세게 헤인킬을 걷어찼다.

 

하지 마.

 

그만두란 말이야.

 

오랜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만두라고 말해도 멈추지 않았던 가증스러운 인간들이 떠올랐다.

 

“어려보이는 것치고 몸이 괜찮군. 뭘, 너는 안 죽일 테니 걱정마라. 마법으로 계약을

 

걸어 노예로 써먹어주지……내가 저 인간보다 더 잘 해줄 수도 있다.”

 

마법사가 릴리트의 옷을 벗긴 후, 가슴을 손으로 주물렀다.

 

참을 수 없는 혐오가 느껴졌다. 분노가,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팠다.

 

“하하! 이 새끼 표정 좀 봐. 혹시 저 괴물이랑 사랑이라도 하시나?!”


“서큐버스한테 반했다는 머저리는 또 처음이네. 저런 더러운 괴물 창녀랑?”


두 남자가 그렇게 말한 뒤 린치를 계속했다. 

 

눈이 마주쳤다. 헤인킬의 눈동자 너머로 그가 무어라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미안하다.’

 

무력함에 대한 미안함.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표정. 절망과 굴욕감.

 

“그……만…….”


애무가 점점 거칠어졌다. 더러운 손가락으로 자신의 음부를, 입을 더럽히는 게 느껴졌다.

 

“뭐야, 조금씩 움직이는데……?”

 

릴리트에게 그는 하나의 신앙이었다.

 

아무도 구해주지 않을 때 손을 내밀어주고, 따뜻한 밥을 주고, 안심하고 잘 수 있는

 

집을 줬다. 이름을 주고, 그림책을 읽어주고, 요리를 가르쳐줬다. 일전에 찢어진 원피스를

 

밤새 꿰매느라 손가락이 상처투성이가 됐을 때도, 그는 한 마디도 불평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마법사가 릴리트의 뺨을 쳤다.

 

하지만 전혀 아프지 않았다.

 

그보다 아픈 일이라면 몇 년이나, 몇 번이고 당했다.

 

“약한……모습, 보이……지, 마요…….”


울지 마.

 

헤인킬은 그녀의 피와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이 잔혹하고 비정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후딱 끝내고 그냥 죽여 버려야겠군.”


마법사가 자신의 바지를 내렸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릴리트의 이성은 거기서 끊겼다.

 

“그 더러운 거 당장 치우지 못해!!”


“어?”


머리가 세 갈래로 찢겨지며 얼굴 가죽이 허공을 갈랐다.

 

이럴 리 없다. 마비는 족히 3시간이나 효과가 지속되는 것인데, 어떻게?

 

“이, 이럴, 이럴 수, 이럴 리가-”


강철처럼 경화된 손톱이 순식간에 마법사의 눈과 미간, 이마를 꿰뚫었다.

 

두 사람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지 못했다. 믿을 수 없었다. 일어날 리 없었다.

 

“어, 어어어……?”


“잠깐, 잠깐만……뭐야? 어떻게 움직이는 거야?”


적응 인자! 헤인킬은 릴리트의 적응 인자가 벌써 독에 저항하는 힘을 키웠다는 걸

 

파악했다. 뿐만 아니라 신체가 변형되는 속도와 파괴력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죽여!”


“으라아아!”


거한이 도끼를 뽑아 휘둘렀다. 릴리트가 뒤로 물러서며 그걸 피했다

 

“그 사람한테 떨어져. 괴롭히지 마, 그만해. 그만, 그만하라고!!”


칼날처럼 변한 손톱을 휘두르자, 쇠로 된 도끼가 종이 잘리듯 잘려나가 떨어졌다.

 

“히익!”


“다 싫어. 다 싫어, 너희 다 싫어. 싫어, 싫어! 싫어!!”


휘두를 때마다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뼈와 살점이 튀었다.

 

선 채로 해체 당한다- 마지막 남은 괴한이 그 모습을 보고 겁에 질려 넘어졌다.

 

“어, 어으! 어으으으! 으어, 히이이익……!”


“왜 괴롭혀? 왜 아프게 해? 왜? 왜 자꾸 싫게 만드는 거야. 미워, 미워. 너희 다 미워.

 

아픈 거 싫어. 아프게 하지 마, 그 사람을 아프게 하지 마……!”

 

“으아악, 히아아아악!”


괴한이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다. 그러나 릴리트가 놓치지 않고 꼬리를 전갈처럼

 

변형시켜 날렸다. 꼬리의 침에 맞은 괴한은 몇 발자국을 더 갔다.

 

“끄어……으어어어……?”


맹독이 발을 녹였다. 그 다음 다리를 녹였고, 차례로 몸이 고름이 차듯 흐물흐물

 

녹아내리다 마침내 형체조차 남기지 않고 무너져 내렸다.

 

이겼다.

 

지켰다.

 

그저 웅크리며 맞아주는 대신, 되갚아줬다.

 

“히, 이히히히……아하하하하……녹았어, 녹아버렸어- 꺄하하하……!”


처음으로 느껴본 승리의 쾌감.

 

압도적인 힘으로 상대방을 벌레처럼 죽여 버린 기쁨.

 

더 이상 무력하게 보고만 있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릴리트가 웃었다. 웃고, 또 웃었다. 눈물이 나올 때까지 웃었다.

 

“벌레처럼 녹아버렸네- 꺄하하하하, 아하핫……보셨어요? 보셨죠? 제가 했어요.

 

제 힘으로 한 거예요. 네? 칭찬해주세요. 얼른 칭찬해주세요. 선생님. 선생님?”

 

“…….”


경멸.

 

헤인킬의 눈빛을 보자마자 릴리트가 방금 전까지 느꼈던 감정은 환상처럼 사라졌다.

 

그가 보는 눈앞에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 나는……저……저는……?”


손에 묻은 피를 보자, 드디어 실감했다. 깨달았다. 파악했다.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자신한테 어떤 힘이 있는지.

 

그리고 그 자신의 본성이란 얼마나 추악한 것인지.

 

“아냐, 아니야……나, 난 그저 지켜주려고……지키려고 한 건데……그, 그게…….”


릴리트는 앞뒤도 맞지 않는 말로 자신을 변호했다.

 

어쩔 수 없었다, 이건 정당방위다. 그저 실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헤인킬이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아아.

 

결국 너도 똑같구나.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아, 하아, 아냐……아니야, 아니야……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었다고요!

 

선생님을, 지켜주려고 한 건데……그냥, 그거뿐인데…….”

 

발밑의 물웅덩이가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엔 피로 얼룩진 괴물이 있었다.

 

얼굴 가죽 밑에 있는 것이 모두 똑같은 근육일지라도.

 

그 근육 밑에 있는 것은, 괴물에 불과했다.

 

“아니야!! 이건, 내가 아니야!!”

 

릴리트가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 사라졌다.

 

홀로 남은 헤인킬도 물웅덩이를 보았다.

 

그 너머엔, 어쩔 도리 없을 정도로 한심한 남자가 있었다.

 

 

 

 

 

 

 

 

 

 

여신급으로 예쁘고 상냥하고 다정하며 온 사람들한테 사랑받은 엘프 공주 vs 마을에서 

따돌림 당하고 말도 제대로 못하던 괴물 서큐버스.

내가 썼지만 경쟁 상대가 너무 세다

사실 얀갤에 올라오는 추천 100짜리 소설과 내가 쓴 소설 같은 거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