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란, 영웅이 첫 장에서 죽는 로맨스와 같다.

 

-어느 잊힌 격언

 

*** 

 

영산靈山 분지에 위치하는 마을 『엘부르즈』

 

‘오늘로 딱 1년이네.’

 

이 마을에 내가 정착한지도 어느새 1년이 다 되었다.

번듯한 집도 있고, 밀빵과 산양 젖도 넉넉히 비축되어있다.

가진 기억을 모조리 잃고 산에서 방황하던 이방인에게 친절을 베풀어준 것은 이 마을 사람들이 딱히 인정이 많아서는 아니다.

 

―내가 의술을 익히고 있었다는 이유. 기억이 나진 않지만, 아마도 난 의사였던 모양이다.

 

특히 이곳 엘부르즈에는 미치광이 그린 드래곤이 은거한다는 헛소문이 돌아 돌팔이 의사들도 얼씬 하지 않는다.

마을 입장에선 자연스럽게 흔치않고 소중한 의사를 이 마을에 잡아두고 싶었겠지. 간단하다.

 

“단델 씨? 기껏 만들어왔는데 식기 전에 드시지 않겠어요. 조갯살과 바질을 넣은 차우더, 맛있게 되었다고 자신할 수 있답니다.”

 

촌장의 자택에서 일하는 하녀 중 하나인 카논.

연두색 머리카락을 뒤로 묶은, 고아한 미인으로 산골 바닥에 메이드나 하고 있을 인물은 아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젊은 여자가 살기엔 얼마 전에나 끝난 전란으로 어지러운 세상보단 이런 한적한 시골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카논, 스프는 고마워. 이제 가도 좋아. 약을 만들어야하거든.”

“질그릇을 멀쩡히 가져가야지 어르신에게 혼나지 않거든요. 아핫-, 제가 깨먹은 것도 여러 개라….”

 

빠릿빠릿해 보이는 인상과는 다르게 그녀는 허술한 점이 정말 많은 편이다. 덜렁이.

 

“설거지까지 해서 내가 갖다 줄 거니까 기다릴 필요 없다만.”

 

카논이 슬쩍 전해준 3일전 신문을 빠르게 훑어본다.

시체술사들이 세운 나라와 동방의 유력가인 당문이 충돌이라…. 

어차피 타역만리의 일이니 별로 신경 쓰이진 않는다.

 

“뭐해. 카논, 가봐.”

“…당신, 제 눈앞에서 다 드실 거죠?”

 

어딘가 섬뜩한 카논의 눈초리, 파충류의 그것을 연상시켜 한순간 손이 멈췄다.

 

“그, 그러지. 마침 배가 고팠고.”

“고마워요, 단델 씨. 아, 맞다. 산 아랫마을은 큰 난리가 났더라고 하던데요. 왜일까요?”

“나 참, 이런 변방의 소국에서도 변방에 무슨 일이….”

 

엘부르즈 마을이 위치하는 시무르그 공국은 약소국 중의 약소국.

다른 나라에 비해 난리라곤 물로 인한 수해 정도다.

 

“아뇨. 정말 큰일일 것 같거든요. 제가 지금 보는 섭리에 따르면요.”

 

조용히 읊조리는 카논의 말이 끝나자마자, 진료소의 문이 벌컥 열린다. 

 

“하아…하아….”

 

뛰어와서 숨이 찼는지 헐떡이는 금발의 숙녀. 

붉은 불꽃을 형상화한 드레스를 입고, 얼굴은 부채로 가리고 있다.

-적어도 이 산골에 사는 사람은 아니다. 마을 사람은 다 누군지 내가 아니까.

 

“어서 오세요.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나요?”

“정말 여기었었구나. 부군, 이런 곳에서 어찌 사셨을까? 밀즈 님, 이제 황국으로 돌아가죠. 이미 준비는 다 끝내놨답니다.”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이며 와락 껴안는 금발의 숙녀.

부군? 

내가 아는 의미라면, 귀족영애들이 자신의 남편을 올려 부르는 격식 있는 말이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쪽 분을 잘….”

“그 얼굴이며 목소리며 밀즈 님이 분명한걸요. 방해물들은 이제 없어요.”

 

금발의 숙녀의 몸에서 미약하게나마 화(火)의 영력이 느껴진다. 

분명 정령술사. 

정령술이라면 최강의 국가 귀족들이 사용하는 상위 마학(魔學). 

 

“…손 치워.”

“어머, 우린 길이 다를 줄 알았는데요? 예의 없으셔라.”

 

조용하면서 격조 없는 목소리가 귀를 때리자, 영애는 부채를 펴면서 볼멘소리를 늘어놓는다.

 

“누가 누구의 부군이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 사림이 내가 찾던 사람이야.”

“안녕하세요. 저를 찾으신다고요? 무슨 일로?”

 

얼음처럼 차가운 벽안과 청려하게 흘러내리는 청은발. 

그리고 두루미를 연상시키는 날개옷.

냉기가 흘러나오는 마법검을 손에 쥐고 있다. 마법검은 웬만한 성에 맞먹을 가격일 텐데.

 

“모르는 척은 그만 두지 않겠니? 일련의 일에 대해선 미안하게 생각해.”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이제 돌아와 줘. 반역자들은 내 손으로 참수했어, 팔코 경.”

 

참수라는 단어를 말하면서 초승달처럼 입꼬리가 올라간다.

 

“우리 부군이 북부 무지렁이라고요? 프읍, 어이가 없네요.”

“남부의 헛깨비들보단 낫다고 생각해.”

 

서로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둘. 

계속 지켜보던 촌장댁 메이드, 카논이 정중하게 권유한다.

 

“이분은 기억을 잃으셨어요. 차분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부군께서 기억을 잃으셨다니….” “어쩐지 나를 보자마자 못 알아본 게 이상했어.”

“여러분들의 이름을 들으면 단델 씨의 기억이 돌아올지도 몰라요!”

 

카논의 말이 설득력 있었는지 티격태격하던 싸움을 멈추고 둘은 신원을 밝힌다.

 

“『레이니스 제국』의 블레이즈 공작령 제2 영애 카르멘·델·블레이즈.”

“북부 왕국 『카사블랑카』의 기사단 소속 ‘빙마’ 세리카·일리드힘.”

 

다 유례없는 강국 출신, 이곳이랑 다 거리가 있는 곳이다!

어안이 벙벙해진다. 

신분으로도, 출신으로도, 내가 알만한 인물들은 결코 아니다.

 

“죄,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두 분은 저를 알고 계신 거죠?”

 

둘에게서 거의 동시에 돌아온 답변은 충격적이었다.

 

“네! 소첩은 부군의 부인이랍니다.”

“넌 내 남편이야.”

 

―나도 알지 못하는 부인이 둘이나 찾아왔다. 지랄 맞게도.



***


씹티알이라 욕먹고 리메한 아내는 일곱명이면 지랄맞다 전격 리메이크

더 씹덕스럽고 가볍게 써봤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