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비워진 14년의 세월.


내 반 평생 조금 안되는 시간은, 어느샌가 너를 그리워한 시곗초침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네 유언처럼, 나는 언제나 너를 내 삶에서 비워내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하지만 내 삶에서 너를 비워내면 내겐 더이상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그 공허가 두려워서.


언젠가 너를 기억조차 할 수 없을거라는 그 내일이 너무나도 무서워 너를 비워낼 수 없었다.



너를 놓지 못하는 이 망설임은, 내가 아무것도 갖지 못했기에 나타나는 망념과도 같았다.


너도 알다시피, 미운 열 다섯의 삶은 그 무엇조차 손에 쥐지 못했으니까.










너를 떠나보낸 뒤, 몇 번이고 반복한 손편지.


나는 어디서부터 네게 이야기를 전해줘야할까.


언제나처럼, 네가 떠나간 그 세월에서부터 시작된 내 정처없는 이야기? 아니라면, 가장 최근에 쓴 편지 이후의 이야기?


그 무엇이든, 더이상 보지 못할 네게 편지를 쓰는 일은 언제나 설레고 두근거렸다. 내 삶에 몇 없는 열정의 부산물이기도 했으니.


네게 바치는 헌신. 그 바스라진 감정은 언제나 너로 인해 빛을 발했다. 그런 감정이라 생각했다.




사실은 알고있다.


나는 사실 너에게 손편지를 자아 올린다는 핑계로, 내 마음에 쌓인 토사물들을 게워내고 있다는 것을.


돌맹이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사람이기에. 나는 네게 손편지를 쓴다는 것으로 역겨운 배설을 반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네게 손편지를 쓰기 위함이었다면, 이 자리를 빌어 올릴 필요조차 없었잖는가.


네가 살고 있는 곳은 전뇌공간 속 어딘가가 아닌, 대구의 어느 한 납골당이니까.










너에 대해 떠올려 볼때면, 어느샌가부터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시절이 떠오르곤 한다.


동인천에서 조촐하게 이뤄지던 자그마한 연극 대회.


사투리를 쓰며 내게 길을 묻던 너는, 몇 십 년이 지나도 언제나 아름다웠다.


기억이란 자신이 가장 바라마다 않는 장면으로 그려지는 그림이다.


그렇기에, 나는 언제나 너를 아름답다고 추억 속에 그려내고 있었으리라.




우연처럼 반복된 만남. 운명처럼 비워내었던 우리 둘의 시간.


막연하게 끝날 것만 같던 우리 둘의 인연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어 헛웃음이 지어 나올 땐 너의 당황스러운 웃음에 나도 모르게 픽하고 웃어버렸다.


어떻게 그렇게 연기를 잘할 수 있는지, 배우를 지망하고 있냐는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을 때는, 사실 속으로는 이런 만남이 영 어색해 인연을 흘릴 생각부터 하고 있었다.


너의 그 따스한 상냥함은 내겐 너무나도 어색했으니.



다만 언제나처럼 말하고 싶었다.


내가 연극을 그토록 열성적으로 행할 수 있던 까닭은, 글에 감정을 배설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노라고.









나는 이메일이 흔해진 시대에, 단지 손편지를 잘 쓰던 소년일 뿐이었다.


그렇다할 장기는 없으며, 그저 사람들이 별로 눈여겨보지 못할 것을 조금 더 잘할 뿐인 소년이었다.


너는 그런 내가 그토록 대견했던걸까.


떠올려본다면, 너는 이상할 정도로 세상에 때묻기를 싫어하던 소녀였다.


그렇기에, 그토록 이상했기에 나를 선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네가 그려주었던 내 소설의 첫 삽화 그림은, 애석하게도 보관을 잘못해 많이 오염되어 버렸다.


집을 나오던 순간까지도 그토록 소중하게 여긴 물건이었는데, 내가 너무나도 서투른 탓에 네가 주었던 그 보물을 잘 보존할 수 없었다.


그렇게나 부담스러워했었는데. 원하면 얼마든지 더 그려주겠다고 했었는데.


이제는 더 망가질까 두려워 꺼내보는 것 조차 망설이고 있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나는 내 세계에 점점 더 비집고 들어오는 네가 너무나도 두려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눈에는 언제나 너만이 가득하였 것만, 그와 별개로 네가 알게 될 내 사연들이 너무나도 비루하였기에.


내 사연을 알게 될 너의 모습을 쉬이 상상할 수 없었다. 너도 언제나처럼 다른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반응을 보여주리라 생각했다.



사람들은 언제나 내 기구한 사연에 너무 무겁다며 이해하길 거부했다. 내 삶은 언제나 그렇게 마무리 될 얘기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너는 내 이야기를 알아주질 않길 바랐다.


너에게 미움받는다면, 나는 너무나도 아플 것만 같아서.








너는 영상이 흔해진 시대에 손그림이 특기가 된 소녀였다.


손이 모자란 부모에 의해, 어린 나이부터 동생 둘을 업어 키워야했던 가녀린 아헤였으며, 그 세상 속에서도 마음을 지켜낸 성녀와도 같았다.


이토록 망가진 세계에서 순수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이는 흔하지 않았다.


자신한다. 내가 그 망가진 세계에서 살아가던 이였으니.



너는, 그렇기에 너와 그토록 닮아있던 내게 시선을 땔 수 없던 거겠지.








너의 생일 선물로, 내가 쓰던 소설을 보여달란 말을 했을 땐 너무나도 두려웠다.


그 글은 내 평생동안 담아온 삶을 녹여낸 이야기요, 내가 무참히도 망가지길 바랐던 비뚤어진 애정의 결실이었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삶. 행복을 점칠 수 없는 미래.


그렇기에 나는 누구보다 나를 혐오하였으며, 언젠가부터 내가 망가지는 모습을 즐기고 있었다.


그 소설은 그러한 마음을 녹여낸 글이었다. 그렇기에 결코 네가 봐주지 않았으면 했다.








나는 내 글을 보고 울던 너의 모습에서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누구에게도 기대해선 안된다는 감정을, 나는 어느새부턴가 너의 볕에 쬐어 키워내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그 것은 길바닥에서 피어나는 들화와도 같은지라, 내가 염원한다 해서 생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메일이 흔해진 시대에 손편지가 장기가 된 소년.


그러니, 그 누구도 돌아봐주지 않으리라 단념하고 있었다.


네가 흘리던 눈물을 보기 전까진.








내가 처음 꾸던 꿈은, 네가 내 손을 나지막히 잡아주면서 시작되었다.


언제나 충동적으로 자기 파괴적 생각을 일삼던 내 글은, 너와 인연을 엮어가며 점점 궤도를 달리하고 있었다.


내일을 모르던 소년과 소녀는 둘이 숨을 섞으뫼 꿈을 꾸는 법을 배웠다.


같은 삶을 걷던 둘은 서로를 마주보고 나서야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탁한 강물에 비춰진 자신만이 온전한 자신이라 바라왔다.


투명한 거울 같은 것은 우리 생에 바랄 수 없는지라, 그렇게 비춰진 꾀죄죄한 모습이 진정한 우리네 세월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그 투명한 눈동자 속에 비춰진 둘의 세상은 너무나도 따스해서, 그렇게 바라게 되어버린다.



나는.


너와 함께 기대할 수 있는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다.







내 글은 그렇게, 조아라에서 다시금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300편이 넘는 이야기는, 너로 인해 단 한번의 주저함도 없이 쓰레기통에 처박을 수 있었다.


주인공의 고통이 예견된 이야기를 바꿀 수 있다면, 그 모든 것을 다시 쓰는 것은 너무나도 값싼 댓가에 불가했다.


나는 너와 함께해간 세월에서, 너와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이야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내 글의 히로인은, 언제나 너와 같은 헌신을 품에 배고 있었다.


첫 말을 흐리는 그 버릇부터, 소심함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 속 심지는 결코 꺾이지 않는 모습이 너를 무척이나 닮아있었다.



설정은 몇 번이고 그려냈다 지웠지만, 히로인의 모습만큼은 지워낼 수가 없었다.


그게, 내 평생동안 간직해왔던 에고였다.








네가 잘 아는대로, 기적처럼 그 소설은 잘 풀려나갔다.


캐릭터의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던 건지, 그 수라장에서도 내 소설은 순위권에 들었고, 그렇게 조금만 더 나아가면 그토록 바라던 작가도 될 수 있으리라 짐작했다.


그렇게.



조금만 더 가면 작가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14년. 너는 그 곳에서 잘 지내고 있나 궁금해지는 밤이다.


나는 생각보다 그리 잘 지내지는 못한다. 너 없이는 한 쪽 다리가 짧았던 의자였기 때문일까.




근황을... 어디서부터 얘기해야할까.



작가는 되지 못했다. 만 14세 미만은 법적 대리인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하더라.


근데 알잖아. 나 부모 없던거. 믿을만한 어른도 없었고.


네가 살아 있었다면, 너희 부모님께 손벌려볼만 하기도 했을 것 같은데, 너무 억지였으려나.


가정은 가정일 뿐이겠지. 이젠 부질없는 이야기니까.




그 뒤로는... 어떻게 살았는지 흐릿흐릿하다.


사람이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으면 기억이 희꺼뭇해진다는 얘기가 있던데, 그 탓일까 싶기도 하고. 괜히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한동안은 네가 내게 해주었던 것 처럼, 나처럼 상처받은 사람들한테 이런저런 위로를 많이 해줬던 것 같아.


그러다가 계속해서 실망하게되고, 데여버리게 되고. 그 후로 언젠가부터 사람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게 되어버렸어.


네가 있었다면 모를 이야기였지. 네가 있을때 나는 언제나 열심히 포기않고 살았었잖아. 네가 있었으니까.



사람이라는건, 그렇게 좋은게 아니었나봐. 그저 우리가 좀 특이했을 뿐이었던 것 같아.


그걸 떠올려본다면, 임상심리사가 못된게 다행인 것 같기도 해. 못 볼 꼴을 안보게 됐을지도 모르니.



공부도 열심히 해봤는데, 너처럼은 안되더라.


맨날 물어보는거지만, 너는 어떻게 동생 둘을 돌보면서 학원하나 안다니고 전교 2등을 했냐. 아무리 생각해도 너는 정상이 아니다.



나도 없는 살림에 진짜 노력하고 했는데, 전교 3등이 한계였다. 그것도 이런저런 꼼수 다 써가면서까지.


조금은 너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된 것 같냐. 이렇게 말하면 맨날 그랬던 것 처럼 한 대 때리겠지?



근데 노력은 많이 했는데, 얻은게 별로 없네.


대학은 없는 살림에 가보려고 이런저런 방법을 알아보니까, 되려 헛점이 잡혀서 사기나 당해버렸고.


대인 기피증을 어떻게 해결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군대를 가니까, 사람이 너무나도 망가져버렸고.



좋은 사람들, 좋은 경험으로 덧칠하며 나를 일으켜야 했는데, 무너진 상태에서 너무 노력만 한 것 같아.


망가진 기계를 억지로 돌린 꼴이지. 덕분에 이렇게 무너진 채다.


내가 너를 그토록 그리워 하는 이유는, 내 삶에 그토록 헌신적이며 호의적인 사람이 너밖에 없었던 탓일지도.


내가 너를 지독히도 동경했던 탓일지도.



어떻게 그래도, 필사적으로 사니까 남는게 아주 조금은 있더라.


명색이 대기업인 곳은 들어갔다. 연봉은 뭐, 중소랑 그렇게 큰 차이는 없더라.


근데 말만 대기업이지, 실상은 중소나 다른 곳과 다를게 없는 것 같아. 해외 기업이라서 사람들한테 말해도 잘 모르고.


이럴거면 굳이 대기업을 가야했나... 싶은 생각도 들고 그래.



근데 그거 말고는 이제 이뤄낸게 없어. 한거에 비해 남은게 없어서 좀 창피하다.


자격증 딴거도 다 쓸모 없어졌고.. 전기 에어컨도 만들어보고, 신문에도 실려보고, 온갖 기행은 다벌인거 같은데, 면접가고 취업할땐 하나도 쓸모 없더라.


노력이라는게 참, 그래. 어른들이 약아 빠졌다는 생각밖에 안든다.


그래서 20대 들어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 중 하나가 노력이 되어버렸어. 노력은 절대로 배신하는 법 이더라.





아, 가장 궁금해 했을거.


그 뒤로 작가는 못됐어. 이런 저런 일들이 많아서.


내가 못난 탓이지. 조금 더 재능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니라면 내가 좀 많이 밝은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될 수 있을까? 묻는다면 아마 어렵지 않을까.








적고 싶은건 많은데, 적을 수 있는게 그리 많지가 않네.


사실 늘상 적던 것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양이기도 했고.


너한테 편지를 쓸 때면 언제나 반나절은 꼬박 채웠었는데.








있잖아. 난 잘 모르겠다. 모든게 다.


역시 하고싶은 말은 많은데. 적을 수가 없어.



그냥 네가 좀 많이 보고싶다. 내 삶에서 유일하게 헌신적으로 상냥했던 네가.


너한테 떳떳한 사람이 되어봤으면 좋겠는데.


네가 있었을적에 그토록 짊어졌던 열등감을 이제 좀 내려놓고 싶은데. 이만하면 너한테 어울릴만한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한데.


왜 그토록 노력했는데. 너한테 어울릴만한 사람은 될 수 없는걸까.



그토록 바라왔는데, 노력해왔는데, 너같은 사람들과는 만날 수가 없는걸까.


언제나 손뻗으면 사라질 뿐이고, 내 곁에 남는 사람은 없더라.






답답하네.


내가 가진 생각 모든걸 적지 못한다는건.





아직도 바라. 내가 바라던 글이 한 편의 이야기에 써내려져가는걸.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네가 없는 내 이야기를 좋아해주지 않을거라는게 두렵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내 이야기를 좋아해줄 사람이 없는건 당연한 얘기겠지.



유일한 애독자였던 네가.


유일하게 열정적인 헌신을 나누어주던 네가.


아무도 좋아해주지 않던 나를 좋아해주던 네가.



오늘은 좀 많이 그립다.




들이킨 술처럼 휘발될 상념이겠지. 자고 일어나면 이제 또 애써 생각해보지 않으려 하겠지.



그냥.


음.



오늘은 네가 많이 보고싶다.



네가 없는 삶의 답을 적는건, 너무 어려워서.




이만 줄인다.


생각나면, 언젠가 어디로든지 또 쓸게.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럼.




--- 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