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라는 꿈을 취미로만 가지고 쓴 소설이라 부족한 점이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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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花樣年華) 

 

 

0.

 

또각, 또각.

 

두 사람의 구두소리가 어두운 무대의 위에 오른다.

 

차분한 분위기를 주는 쪽빛 정장을 입은 나는 조심스럽게 검은 피아노 앞에 앉고, 흰 드레스 위에 붉은 바람막이를 걸친 그녀는 바이올린에 자신의 어깨와 턱을 내어주며 서로 악기를 연주할 준비를 마친다.

 

아무래도 긴장이 되었던 것인지 그녀는 숨을 천천히 깊게 몰아쉬고 뒤를 돌아 나를 슬쩍 바라보았다.

 

내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니, 그녀의 얼굴은 곧 밝은 미소로 가득 차오르며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더 이상은 긴장이 아닌 기대로 가득한 저 모습은 아름답게 꽃 피울 봉우리를 연상시킨다.

 

스포트라이트가 켜지고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비춰내며 모든 관중과 평가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천천히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뒤 살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나는 그녀와 함께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울 이 순간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1.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하늘은 구름 없이 맑고 푸른 나뭇잎이 한 아름 바람에 휘날리는 14살의 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중학교에 처음 입학한 나는 막상 반에 처음 들어갈 때 너무나도 긴장해서 어색한 분위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중간 쪽 아무 자리에 앉았다. 

 

옛날부터 또래 남자애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소심한 성격이었기에 부모님이 걱정하시는 모습을 봤던 적도 적지 않았다. 중학교에서는 달라져 보자고 마음을 먹었었지만, 시작부터 망친 셈이었다. 

 

그나저나 이 반에는 같은 학교 출신이 없는 걸까? 반에 학생이 하나, 둘 들어와 꽤나 자리가 찼는데도 이 불편한 고요함은 사라지지 않아서 너무나도 불안하기만 했다. 

 

그저 선생님이 들어오시길 기다리고 있었을 그때, 어느 한 여자아이가 들어오더니 그 냉랭하던 분위기는 깨져버렸다. 

 

“1-B... 아! 여기네? 우와... 애들 진짜 많다! 안녕? 얘들아!”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은 어색했던 반 안을 화사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으며 나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첫 만남이기도 하였다. 

 

갈색에서 보이는 금빛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왔으며, 늘 웃고 있는 눈이 돋보이는 첫날부터 교복을 입고 오지 않은 이상한 아이였다.

 

그런 그녀는 금세 반 아이들과 친해졌으며 소심하여 낯을 가리는 내가 보기엔 너무나도 대단했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엔 충분했다. 

 

조금이라도 그녀와 대화하고 싶었고 조금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비난할 때쯤,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던 약간의 희망이 나를 앞으로 이끌었다. 

 

때는 음악시간. 음악 선생님이 바쁘셔 자습을 시키고 나섰지만 아이들에겐 그저 신나는 자유시간일 뿐이었다. 

 

그녀는 그 소란 속에서 음악실에 구비된 바이올린을 집더니 아이들의 시선이 전부 그녀에게 집중되었으며 그녀는 능숙하게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 ♪ ♫ ♬]

 

방금까지 시끌벅적했던 소리는 온데간데없고, 어디선가 들어봤지만 이름까지는 모르는 잔잔한 클래식이 음악실 안을 채워가며 아이들은 그저 조용히 그녀의 작은 무대를 감상하고 있었다. 

 

연주가 대단원에 다다르고 곧 소리의 잔향이 퍼져나갈 때, 잠시의 정적 속에서 나는 그저 홀린 듯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반쯤 살며시 감은 눈에서는 동공을 조금씩 숨기며 밤을 몰고, 색을 감춘 눈동자는 내 모든 관심을 쏟아내도 시선을 돌리기엔 턱 없이 부족할 것 이라며 말하는 듯했다. 웃는 방법만 알던 입술은 무표정에 가까운, 아니, 고고함에 알맞은 연분홍빛 아름다움을 발산했다.

 

활을 움직이면서 같이 휘날리는 머리카락은 찬란한 금으로 된 실이 뻗어나가는 듯이 손짓하며 조금씩 흔들리는 옷자락을 보고는 꽃의 춤이라는 표현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난생처음 느끼는 감정과 자극의 파도가 온몸을 휩쓸었으며 글로만 접했던 ‘반하다’를 몸소 경험했다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의 연주가 끝나니, 아이들은 박수의 갈채를 보내고 감탄과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그녀의 덕에 음악실 안은 다시 한 번 더 활기찬 분위기로 가득 찼다. 

 

나도 그 무리에 섞여 그녀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었지만, 용기를 내지 못해 홀로 멀리서 쓸쓸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늘이 나를 완전히 버리진 아니하였는지 기회는 다시 찾아왔다. 

 

그날, 선생님의 종례 후, 어둡지는 않지만 해는 이미 산 뒤에 숨어 녹아내리는 주홍빛만을 발산할 때쯤, 아이들이 벌써 무리를 갖추곤 하나 둘 돌아가며 그녀에게도 같이 하교하자는 아이들이 많았다. 

 

나는 그저 씁쓸한 아쉬움을 남겨두고 자책하며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아이들의 요청을 정중하다면 정중하게, 가볍다면 가볍게 거절하고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말을 걸어보겠다는 마음가짐 반, 그녀가 어디로 향하는지 호기심 반으로 몰래 그녀를 따라가 보니 꽤나 익숙한 장소에 도착했다.

 

그녀는 어째서 다시 음악실로 돌아온 걸까? 뭐라도 두고 온 걸까? 여러 가지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곧 들려오는 맑은 피아노의 소리에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숨어버리고 말았다. 

 

자세히 들어보니 분명히 피아노의 소리는 들려오지만 음악이라고 하기 에는 많이 어설픈 연주가 들려왔다. 

 

마치 피아노를 처음 쳐보는 열정 가득한 사람이 곡을 꼭 연주해 내겠다며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연상되는 연주였다. 

 

“...역시 피아노는 어렵네, 꼭 피아노와 듀엣 해보고 싶었는데.” 

 

“그래도... 바이올린을 더욱 열심히 연주하면 언젠가는 피아노에게 내 연주가 닿겠지? 그래, 열심히 하자!” 

 

피아노에게 연주가 닿는다? 처음에는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머지 않아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확하게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듀엣을 위해서 자신과 같이 연주해 줄 사람에게 자신의 소리가 퍼져나가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는 꼭 대회도 나가서 우승할 거야... 반드시... 반드시!” 

 

그녀는 살짝 고양감과 감정이 섞인 목소리로 스스로 다짐을 상기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내게는 그저 고난과 역경에 무릅쓰고 반드시 이겨내겠다는 너무나도 강하고 의지적인 한 사람으로 보였으며 어째선지 이런 생각만이 내 머릿속에 가득했다. 

 

피아노를 배우자, 피아노를 연주하자. 

 

그녀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그녀가 가장 빛나고, 아름다울 순간을 위해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이, 지글지글 익어가는 생각이 천천히 차갑게 식어가고 내게는 한 가지 문장만이 내 속 깊이 자리 잡았다. 

 

‘그녀의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내 손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나는 온 힘을 다해 그녀를 뒷받침하겠다.’ 

 

내가 피아노를 치는 이유는 단지 그뿐이다. 

 

그녀의 꿈이 피아노를 필요로 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 자리에 서있을 수 있도록 나를 가꾸고, 만들어 나갈 것이다. 

 

그런 그녀의 자그마한 독백만으로, 나는 움직일 수 있었다.

 

 

2.

 

그녀의 이름은 사프란, 나는 끝내 물어보지 못하고 선생님이 그녀를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고 나서야 이름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피아노에 몰두했었기 때문일까? 시간이 지나도 그녀와 나의 사이는 그저 반 친구에 지나지 않았다. 

 

이조차도 실감한 것은 중학교 졸업식 때, 너무나도 빠르게 3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음을 실감하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일부로 몰래 들은 것은 아니지만, 어떨 결에 그녀와 내가 가는 고등학교는 우연히, 그리고 다행이게도 같았다는 사실에 속으론 기쁨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아직, 그녀의 옆에 남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생각 때문 이었을까? 아니면 최근 3년간의 결실이 조금이라도 꽃 틔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일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래도 남녀 공학이라니! 그다지 좋은 평가는 없지만, 나쁜 평가도 없는 학교였다. 사실, 중학교와 크게 다를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3년간, 학교가 끝나면 하루도 빠짐없이 음악실에서 피아노 연주를 연습했다. 

 

음악 선생님의 지도 덕에 빠른 실력 향상이 가능했으며 나 또한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즐거움을 느껴 적어도 지금은 누구에게 꿇리진 않을 정도로 곡을 휘어잡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방화 후 수업이 끝나는 늦은 시간에 주로 연습했기에 다행히도 일찍 집에 가버리는 프란을 음악실에서 마주치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많이 부끄러웠기도 했기에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님도 내가 피아노 연주를 갑작스럽게 시작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셨지만, 성적은 나름대로 유지하고 있었기도 했고 부모님이 나의 행동에 크게 관여하지 않는 분들 이였기에 마찰은 없었으며, 오히려 좋아해 주셨기에 놀랐다.

 

지금이라면 그녀에게 닿을 수 있을까? 내 연주가 그녀의 바이올린에 닿을 수 있을까? 조금은 자신에 대한 불안과 불신이 머릿속에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져 머리를 탁하게 만들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내가 그녀에게 말을 걸 수 나 있을까?‘ 이런 생각만 마음에 묻고 지내다 보니 어느새 고등학교의 입학식 날이 다가와 있었다. 

 

중학교 교복과 별 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셔츠와 바지, 거울 앞에만 서면 잘생김과 자신감이+1 되는 기분을 느끼고 나서 나름 힘차게 학교의 입학식에 참석했다. 

 

커다란 강당에서 진행되는 입학식 중. 그다지 할 것도 없이 심심했기에 옛날의 추억을 조금씩 가다듬어보았다. 

 

1학년 때 그녀와 만나고, 2학년... 3학년... 음... 어... 

 

...사실상 그녀와의 접점이 하나도 없었네? 그녀를 뒷받침한답시고 피아노만 쳐왔지 딱히 대화를 해본 것은 아니다. 

 

부끄러워서 다가가지 못한 것도 있고, 나 따위가 그녀의 곁에 다가설 자격이 그때는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오히려 그녀와 거리를 둔 것 같다. 

 

그렇다고 지금은 말을 걸 수 있을 만큼 성장했나? 또 그것은 아니기에 내심 우울 한 글자를 후회에 새겼다. 

 

그녀에게 대해 더욱 알고 싶지만, 그래도 뭔가 뒤를 캐내거나, 정보를 얻기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등의 행위는 절대 하고 싶지 않다. 그녀가 알았을 때 불쾌해할 만한 일은 절대 사절이다. 

 

사실, 이런 마음가짐으로는 앞으로 잘 해내간다는 보장은 할 수 없다. 나조차도 나를 모르는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아무튼,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교장 선생님의 마지막 말씀(약 1시간가량의)이 끝나고, 강당 입구에 붙여져 있던 배치표에 따라 내가 1년 동안 지낼 반으로 천천히 걸었다. 

 

아무래도 행운의 여신은 나의 편이었는지 반배치를 공지하는 종이에서 그녀와 같은 반에 이름이 적힌 것을 보곤 심장이 두근거리며 정말이지 살아있길 잘했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이럴 때만 신에게 감사하는 내가 조금 웃기기도 했다. 

 

도착한 반의 분위기는 어찌 중학교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이질감이 느껴졌다. 

 

어색한 분위기라고 하기 엔 너무나도 차가웠으며 멋쩍은 고요함이라고 하기 엔 각자 할 일을 조용히 하고 있는 모습이 반드시 나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묘한 압박감도 온몸을 짓눌렀다. 

 

고등학교는 이렇게 갑갑한 공간이었나? 적어도 중학교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역시 예비 수험생은 다르다는 건가? 

 

주변은 찬찬히 둘러보니, 중학교에서 보던 얼굴들이 꽤나 있었다. 하지만 서로의 모호한 눈치만 오고 갈 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도 잠시,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힘찬 구두의 또각또각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며 나는 그것에 귀를 기울였다. 

 

누군가가 얇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무언가 크게 달그락 거리는 물체를 짊어지고 걸어오더니, 끝내 내가 있는 반의 문 앞에 섰으며, 즉시 힘차게 문이 열렸다. 

 

“1-B! 여기다! 아니, 고등학교 길은 왜 이렇게 복잡한 거야! 잔뜩 헤맸잖아! 이야~ 고등학교는 역시 뭔가 다르다니까? 안녕 얘들아!”

 

흰 블라우스를 입고 붉은 바람막이를 허리춤에 묶었으며, 허리까지 닿는 긴 장발의 곱슬머리, 웃는 눈 사이로 보이는 노을을 보석으로 만든 것 같은 주홍 눈동자, 아마도 바이올린으로 보이는 등에 맨 가방. 

 

역시나 내 감각으로 느껴지는 것은, 조금 거창하게 말하자면 내가 사랑했고, 사랑하며, 사랑할 여인이다. 

 

...일방적이지만. 

 

반의 몇몇 아이들은 눈치를 보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으며 다행히도 한눈에 그녀를 알아본 아이들은 웃으면서 그녀를 반기고 있었다.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달라진 점을 이야기해 보거나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그런 입학식다운 분위기가 슬며시 싹을 틔웠다. 

 

...하지만 역시, 이상하게도 난 저 분위기엔 가질 못하겠단 말이지. 애당초 나를 알아볼지도 의문이다. 그저 그녀를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지금은 만족하자. 

 

입학식 날은 별 일 없이 지나갔다. 딱히 무슨 사건이 있던 것도, 잘못된 일이 있던 것도 아니다. 아, 조금 신기한 일이 있다면 음악선생님이 우리 반 담당 선생님이라는 것 정도일까? 

 

오늘도 어김없이 피아노를 연주하기 위해 음악실로 발을 옮겼다. 음악실의 사용 허락을 구할 때 음악 선생님은 “네 마음대로 하렴~”이라며 별로 신경을 안 쓰시는 듯했고 오히려 혼자서 연주하는 것이 더 편하니 잘된 일이었다. 

 

음악실의 거대한 붉은 문을 열어보니, 커튼이 반쯤 쳐진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옅은 햇볕에 피아노는 검게 빛나며, 어쩐지 가장 커다란 그 모습은 이 장소에서 가장 외로워 보였다. 

 

하지만 불이 켜지지 않은 이 넓고 어두운 음악실이 내게는 너무나도 편안한 안식처라고 느껴지며 이름 모를 안도감이 나를 차분히 가라앉혔다. 

 

나름 푹신하다면 푹신하고, 딱딱하다면 딱딱할 의자에 앉았고, 검은 피아노에 비치는 나의 투박한 손은 마치 누군가 반대편에서 나와 마주 보고 연주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눈을 감고 깊은 심호흡과 함께 그날의 연주를 떠올려본다. 음률이 어땠는지, 음색은 어땠는지, 생생한 그녀의 모습을 기억 앞 현실 안에 상기시킨다.

 

[♩ ♪ ♫ ♬]

 

그녀의 연주를 떠올리며, 반주를 연주한다. 관객들이 음악에 몰입하기 쉽도록, 홀로 먼 길을 걷듯 외로이 건반을 누른다. 

 

흰 복도의 검은 창문의 조화가, 홀로 휘날리는 바람소리가 복도를 적시며 소리를 새긴다. 

 

반주가 어느 정도 끝나 갈 때, 그녀가 더욱 돋보일 수 있도록 피아노의 소리를 죽여 간다. 본래 같다면 다음은 바이올린의 소리가 섞여 들어와야 할 터이다. 

 

가상의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바이올린에게 건네니, 우측에선 이목의 집중을 받아내어 활로 현을 울려간다. 

 

...어? 소리가 들렸다고? 

 

분명 허상 이었을 그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에 놀라서 소리가 나는 방향을 황급히 바라보았다. 

 

그림자만이 어둡게 드리웠을 고요한 음악실 안에서 흐린 하늘에도 불과하고 창문을 통해 방 안으로 따스한 빛이 스며들며 그녀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을 비추고 있었다. 

 

서로의 당황한 눈을 마주 보고 연주를 이어나간다. 게다가 연주의 화합이 너무나도 잘 맞는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이 듀엣이 끝날 때까지 연주에 신경을 쏟았다. 

 

그녀의 바이올린은 처음 들었을 때보다 더욱더 소리는 부드러웠으며, 나의 마음에 예사롭게 세어 들어왔다. 분명히 수많은 연습을 몸에 익혀왔다는 것이 실력으로 입증되었다. 

 

연주를 하는 와중에도,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볍게 흔들리는 노을이 빛을 발산하여 마음의 어둠을 밝히듯 한 눈동자가 내게 너무나도 아름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끝내 연주의 대단원이 끝나 소리의 잔향이 두 사람 사이로 진동한다. 약간의 긴장을 숨을 크게 내뱉으며 풀어낸다. 완전히 고요해지기 직전,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제, 제 연주는 바이올린에게 닿을 수 있었던 건가요?”

 

순간 아차, 싶었다. 갑자기 알아듣지 못할 이상한 소리를 입에 담아 봤자 그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게 뻔... 

 

“...응! 델피니움!” 

 

“...아? 제 이름을 아시네요...?” 

 

그녀가 내 이름을 알고 있다고? 믿을 수가 없어 한 번 더 물었다. 

 

“그야 당연하지! 같은 중학교도 다녔잖아! 그리고 네 옅은 쪽빛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지!” 

 

“어... 그... 사프란...?” 

 

“가볍게 프란이라고 불러!” 

 

“아, 저도 델피라고 불러주세요.” 

 

“그나저나 델피, 피아노 칠 줄 알았어? 게다가 되게 잘 치잖아!” 

 

“조금 배웠어요. 하지만 저는 프란 바이올린 실력도 되게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아잇! 내가 그런 속 빈 칭찬으로 기분 좋아할까 봐?” 

 

“입고리가 귀에 걸치겠어요.” 

 

어쩜 사람이 저리 드러나는 행동이 정직할까. 뿌듯해하는 사프란의 모습이 퍽 귀여웠다. 

 

“흠흠... 그런데 델피! 우린 나이도 같은데 왜 넌 나에게 존댓말을 쓰는 거야?” 

 

“아, 이편이 더욱 편해서요. 혹시 불편하신가요?” 

 

“음... 나는 안 불편한데! 그래도 친구잖아! 존댓말은 너무 거리감이 있다고.” 

 

“알겠어...요 프란.” 

 

“그래! 천천히 그렇게 발전해 나가는 거지!” 

 

그녀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눴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건 꿈인가? 저곳에 서있는 사람은 사프란이 맞을까? 단지 나의 허황된 환각이 아닐까? 그럴 일 없지만 혹여나 싶은 생각에 머리가 어지러워만 갔다. 

 

“델피? 왜 그래? 멍~ 하니 허공만 바라보잖아!” 

 

“...아, 아아! 너무나도 당황스러워서요. 아무도 음악실에는 오지 않을 줄 알았거든요.” 

 

“나도 깜짝 놀랐다니까? 근처에서 피아노 소리가 나서 후다닥 달려왔지! 그러고 보니 우리 연주 생각보다 되게 잘 맞네? 혹시 피아노는 어디서 배운 거야?” 

 

“독학으로 중학교 음악실에서...” 

 

말을 이어서 하려는 와중 프란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했다.

 

“독학!? 중학교 음악실!? 진짜? 학원이나 그런 곳 다닌 거 아니야? 델피! 너 진짜 피아노에 재능이 있나 보다!” 

 

재능이라, 재능이 만약 신께서 부여한 능력이라면, 내게 프란은 신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너무나도 창피하고 부끄럽다. 

 

“아마도 연주를 시작한 지 꽤나 시간이 지나서 그럴 걸지도...” 

 

3년이라는 기간은 마냥 짧지만은 않은 기간이니까. 

 

“그래? 얼마나 됐는데? 어려서부터 친 거야? 아니지! 중학교 때부터니까... 3년? 우와... 진짜 대단하다!” 

 

“하하...” 

 

“나, 나는 꽤나 오랫동안 바이올린을 연주해 왔거든! 언제까지나 취미고 재밌어서 하는 거지만... 호, 혹시 대화는 나가본 적 있어? 그 정도로 잘 치는데! 아, 너무 신나서 말도 제대로 안 나온다!” 

 

방긋 웃는 프란의 얼굴은 정말로 순수한 어린 아기의 웃는 얼굴을 표현하기라도 한 것 같아 어쩐지 긴장을 풀어주고 이목을 이끄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회는 나가본 적 없어요. 저도 어디까지나 취미라서 그렇게 거창한 것은 못해요.” 

 

“혹시, 혹시! 대회에 나갈 생각은 있는 거야? 싫은 건 아니잖아. 그렇지? 그렇지?” 

 

“물론이죠. 저도 언젠가 대회나 공연 같은 건 해 보고 싶어요.” 

 

정확히는 무대나 공연장에 선 프란이 보고 싶다. 바로 옆에서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은 어떨까? 상상만 해도 즐거워진다. 

 

신이 난 그녀는 맑은 눈동자를 부담스러울 정도로 빛내며 내게 계속 질문을 하였다. 어쩐지 내가 과대평가된 것 같다만... 사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뭐가 어찌 되든 상관이 없었다. 가장 중요한 건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는 것이니까. 

 

“그럼 있잖아! 나랑 같이 듀엣으로 대회에 나가보지 않을래? 아까 보니까 우리 연주도 되게 잘 맞던데!” 

 

“그렇게 해주신다면 영광일 텐데 말이죠... 잠만, 뭐라고요?”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잘 못 들은 걸까? 정말로 나 따위와 듀엣 같은 걸... 아니, 물론 이러고 싶어서 피아노를 연습한 것은 맞는데 말이지... 머리가 조금 어지럽다. 

 

“대...회요? 어... 제가...요?” 

 

“분명 우승할 수 있다니까? 내 말을 믿어봐! 내 감은 틀릴 때 빼곤 다 맞으니깐!” 무언가 당연한 말을 자연스럽게 하는 것 같은데. 

 

“자, 잠시만요. 그러면 대회가 언제죠?” 

 

“아. 그으게 말이지~? 그러니까...” 

 

대회에 나가고 싶다는 마음만이 출중했는지 막상 어디에 어떤 대회가 있는지는 모르는 걸까? 어쩐지 우스꽝스러웠다. 

 

“...선생님께 물어보는 편이 좋겠죠?” 

 

“...오! 그러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델피 똑똑해~” 

 

프란이 장난 끼 가득한 말투로 나를 칭찬했다. 물론 농담이겠지만 확실히 기분은 좋다. 

 

“그런 빈말로 칭찬해도 안 기쁘거든요.” 

 

“입고리가 천장에 닿겠다!” 

 

“이런.” 

 

“델피, 너 은근히 재밌다! 혹시 그럼 다음에도 같이 듀엣 해볼래? 나름의 대회 연습이지!” 

 

어쩌다가 대회에 나간다는 것 전제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하지만 나도 바라던 일이었기에 그저 기쁘다. 어쩐지 지난 3년이 보답받은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성취감을 느꼈다. 

 

“저야 좋죠. 오히려 영광이에요. 바이올린을 잘 연주하는 사람은 드물거든요.”

 

“그렇지!? 그렇다고~ 나름 나는 소수 정예란 말이지!” 

 

소수 정예라는 말을 저 때 사용하는 게 맞는지 살짝 의문이 들었지만 저 위풍당당한 태도에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시간이 늦지 않았나요? 이곳에서 계속 있어도 괜찮으세요?” 

 

“아차, 너무 신나게 떠들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어! 그럼 내일 학교에서 보자 델피! 안녕~”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프란.” 

 

프란은 재빠르게 자신의 바이올린 가방을 메고 눈 깜박할 사이에 음악실 밖으로 나갔다. 아직도 그녀와 이렇게 많은 대화를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일도 이런 하루를 만끽할 수 있는 걸까? 내일도 프란과 대화할 수 있는 건가? 그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같이 대회에 나가자고 권고까지 받았는데 이런 기회를 발로 차버릴 순 없지. 

 

홀로 음악실의 문단속을 마치고 책가방을 들어 매고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니 꽤나 차가운 바람이 살결을 스친다. 한 발자국씩 발을 앞으로 내디뎌 집까지 가는 동안 아까의 연주를 떠올리기 위해 눈을 감았다. 

 

독주와 듀엣은 다르다. 바이올린의 소리를 메인으로, 피아노의 반주를 배경으로 삼아 공연을 마치고 싶다. 언제까지나 돋보여야 하는 건 바이올린이자, 프란의 모습이니까.

 

나의 머릿속은 연주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버렸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집에 도착해 있었다. ‘너무나도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혹여나 프란 앞에서 실수하면 어떡하지?’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히며 두통을 유발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오늘은 평소보다 머리를 많이 써서 그런지, 아니면 감정의 소모가 꽤나 커서 그런지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그래서 나는 책가방을 내방 아무런 장소에다가 던져두고 침대에 즉시 누웠다. 

 

지금도 눈앞에서 프란의 웃는 얼굴이 아른거린다. 나도 어지간히 프란을 좋아하는 걸까? 조금은 나 자신이 우스워졌다. 

 

이런 실없는 생각을 늘여놓으며, 나는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3. 

 

잠에서 깨니 눈을 뜨고 보인 것은 늘 보는 익숙한 천장. 늘 같은 일상이 오늘 하루 시작된다. 하지만 그런 지루한 일상 속 한 사람이 들어온 것만으로 어쩜 이리 등굣길마저 즐거울까. 

 

평소엔 하지 않을 교복의 옷매무새를 다듬고 머리도 한 번 더 다듬어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꽤나 지나있다. 조금 더 자려했는데, 조금 아쉬웠다. 

 

그러고 보니 우리 학교는 교복에 관해서는 그다지 규칙이 빡빡하진 않은 것 같다. 그야 그렇게 눈에 띄는 프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입학식 날에는 교복을 입고 와야 맞는 것이 아닐까? 뭐, 상관없지 않나, 덕분에 내가 알던 그 프란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방문을 열어보지만 부모님은 역시 두 분 다 돌아오시진 않았다. 냉장고 안에 있던 접시 위에는 바삭해 보이는 계란 토스트가 노릇노릇하게 구워져 있었다. 역시나, 꽤나 차갑지만 맛있다. 

 

토스트 옆에는 쿠키 한 봉지가 예쁘게 포장되어 있다. 부모님은 자꾸 이런 거 안 사 와도 되는데. 등교 때 챙겨가야지. 

 

옛날부터 부모님과는 가깝지만 너무나도 멀게 살아왔다. 부모님도 항상 같이 있어주지 못해 미안해하시며 챙겨주려고 최선을 다하시는 좋은 분들이다. 

 

하지만 역시 일 때문에 토요일 이외에 집에 계시지 않는 것은 조금 외롭기도 한 사실이다. 

 

성격이 성격인지라 친구가 없어서 걱정이셨는지 내가 피아노를 곁에 두어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할 때, 부모님은 나름 안심하셨다고 한다. 좋으신 분들이니 별로 걱정 끼치고 싶진 않다. 

 

계란 토스트를 전부 먹고 난 후, 내가 먹은 접시정도만 설거지한 후 슬슬 학교로 발을 옮길 준비를 한다. 물론, 이미 준비는 끝났지만 말이지.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고 돌려 열어보니, 따스한 바람이 전신에 스쳐왔다. 기분 좋은 다정한 바람이 등굣길을 더욱이 기쁘게 만들어 주어 오늘 하루는 어쩐지 좋은 예감이 들었다. 

 

오늘 하루는 한번 열심히 살아보자! 

 

...[쏴아아]... 

 

...라고 생각한 것이 학교에 도착하기 전, 내가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기막히게 힘찬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어쩐지 오늘 시작부터 운수가 좋더라니, 이 세상은 나를 미워하는 걸까? 

 

그래도, 이 정도 빗줄기면 소나기겠지? 분명 금방 그칠 것이 분명... 

 

“야, 오늘 하루 종일 비 엄청 내린다는데?”

 

“나도 일기예보에서 봤어! 당연히 나도 우산을 들고 왔지!” 

 

“그러게, 근데 아침에 일기예보도 안 보는 사람이 있을까?” 

 

“에이, 설마 그럴 리가!” 

 

... 

 

젠장. 

 

가끔씩은 이런 불행도 찾아와야 다음에 행운이 오겠지... 근데 그게 하필 왜 오늘이냐고! 오늘 집에 들어갈 수나 있을까? 정말이지 하늘이 밉다. 

 

“야호! 비 온다! 히히, 비 온다고!” 

 

프란은 저 멀리 복도에서 달려오더니 비가 오는 것이 너무나도 기쁜지 얼굴엔 붉은 고양감이 담겨 있었다. 프란이 비를 좋아하는지는 몰랐는데, 좋은 정보를 하나 알았다. 

 

“아! 델피도 안녕~” 프란이 내게 손을 흔든다. 예상치 못한 프란의 인사는 나를 당황시키기에는 충분했지만, 이상하게 보이기 싫다는 마음이 더 컸는지 나는 겨우 가벼운 손 인사를 다시 건넬 수 있었다. 

 

오늘 수업도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평소 같아도 이 마음은 변하지 않겠지만 오늘은 조금 다르니까. 얼른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프란을 보고 싶다. 

 

하지만 수업 내용을 빼먹지 않고 필기할 수 있다면 전부 해둔다. 일단, 학생이니까. 학교라는 감옥에서, 교복이라는 죄수복 어쩌고 저쩌고. 아예 공부가 싫은 것도 아니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다. 

 

그런데 교복을 입은 프란은 어떤 모습일까? 단정한 모습에 오히려 다른 분위기를 띌 터이다. 부디 언제 한번 교복을 입고 와주었으면... 

 

[딩-동-댕-동- 딩-동-댕-동-]

 

여러 가지 잡념을 하는 동안 벌써 하교시간이 다가왔다. 아마도 음악실로 가는 게 맞겠지? 진정을 위해 잠시 심호흡 몇 번만... 

 

“델피! 델피! 오늘 안 잊었지? 얼른 음악실로 가자구! 선생님한테는 내가 미리 말해놨어! 선생님이 분명...‘너네 맘대로 하렴~’ 이랬다니까? ...델피?” 

 

프란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바닥에 풀썩 앉아버렸다. 그야 갑자기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옆에서 불쑥 튀어나오면 누구든지 놀라지 않을까? 

 

“아! 내가 놀라게 한 거야? 미안~ 너무나도 신나서 말이야. 자, 손잡아.” 프란은 그리 말하더니 네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잡아도 될까? 정말로? 프란의 손을? 내가? 진짜? 에이, 아니야. 아직 훨씬 이르다고.

 

...뭐가 이르단 거지? 일단 일어나기부터 하자. 

 

“아아, 괜찮아요. 잠시 다른 생각 하고 있었어요. 손은 괜...” 말이 끝나기도 전에 프란의 손은 내 오른손을 잡아끌었다. 

 

“괜찮기는! 그나저나, 아직도 존댓말 쓰기야? 친구끼리 뭘 그래~” 

 

프란의 손은 자그마했지만 따스했고 갑작스러운 충격에 손이 저릿저릿했다. 잠시 오른손을 쳐다보고 굳게 생각했다. ‘앞으로 오른손 안 씻어야지.’ 

 

“노력해 볼게...요 아직은 좀 낯설어서...요 미안해요, 프란.” 

 

“넌 자꾸 잘못한 것도 없는데 사과를 한단 말이야, 만약 그리 미안하다면 오늘 최고의 연주를 해 달라구~” 

 

프란이 내 등을 콕콕 찌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다. 저걸 웃는 얼굴이라고 생각한 걸까? 아무리 봐도 무언가 꾸미고 있는 얼굴인데. 

 

“일단 갈까요? 오늘도 시간이 그리 많진 않을 텐데.” 

 

“아니야! 오늘은 시간 충분해! 잔뜩 놀 수 있다구~”

 

“...놀 수 있다고요?” 

 

“쉿, 연주를 ‘즐기는’ 거지. 즐길 수 있으면 다 노는 거지!” 

 

어쩐지 그냥 놀고 싶은가 보다. 하긴, 노는 걸 싫어하는 사람을 없겠지. 

 

“다른 친구들이랑 노는 건 힘들다구~ 밖에서 여기저기 다니는 건 힘들어~ 가끔은 음악을 들으면서 홀로 즐길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해~” 

 

친구가 많다고 다 좋은 건 아닌 듯하다. 역시 각자 나름의 힘듦은 각자 하나씩 가지고 있구나. 이해와 동경은 가장 먼 감정이라더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럼 같이 연주라도 하면서 심신의 안정을 취할까요?” 

 

“물-론이지! 심신의 안정! 단어 참 멋진데.” 

 

어느새 음악실 앞까지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역시나 어제 왔던 그 풍경 그대로 음악실은 고요하고, 편안했다. 

 

“자! 나와라 내 파트너 바이올렛!” 

 

프란은 자신의 바이올린을 꺼내더니 내 앞으로 치켜들었다. 푸른빛이 도는 보라색 별 모양 스티커가 돋보이는 바이올린이다. 바이올린의 이름이 바이올렛인 걸까.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참 오랜만에 본다. 

 

“이름은 왜 바이올렛이라고 붙였어요? 그 스티커 색깔 때문인가요?” 

 

“응? 바이올린이니까 바이올렛! 스티커는 그냥 예뻐서 붙인 거야! 예쁘지? 예쁘지?” 

 

“네, 정말로 프란에게 어울리는 예쁜 별 스티커라고 생각해요.” 

 

“암! 그렇고말고! 델피, 너 뭘 좀 아는 녀석이구나!” 

 

사람이 이리 쉬워도 되는 걸까. 나중에 어디 가서 이상한 보험 몇 개는 들까 봐 걱정이다. 

 

“그나저나 어떤 곡부터 시작하실 건가요? 생각해 두신 곡 있어요?”

 

“물-론이지! 심지어 작곡도 내가 했다구! 너도 들어 봤을 걸? 어제도 연주했잖아! 어라? 델피, 내가 너한테 악보를 보여준 적이 있었나? 그렇지만, 어제 듀엣은 정말로 잘 맞았는걸!” 

 

“그...게 말이죠? 우연이네요! 무의식에서 나오는 리듬감? 이라고 해야 하나...?” 

 

퍽 믿을만한 변명이다. 하지만, 죽어도 ‘당신의 연주를 생각하면서 3년 동안 어울리는 반주를 생각하며 쳐왔어요.’ 라고는 말 못 한다. 지금이라도 다른 변명을... 

 

“무의식? 와 멋있다! 그런 것도 가능한 거야? 사람은 생각보다 미지의 힘을 가지고 있구나! 몰랐어!” 

 

이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아니면 걱정된다고 생각해야 할까. 프란이 이상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잘 지켜봐야겠다. 응. 

 

“네, 가끔 그럴 때도 있더라고요. 악보 있으면 주시겠어요? 저도 궁금하네요. 분명 좋은 음악일 거예요.” 

 

“그으게 말이지...? 사실 피아노 파트는 아직 못 만들었어... 그야, 난 피아노는 못 친단 말이야...” 

 

“그럼 피아노 파트는 저에게 맡겨주실 수 있으실까요? 생각해 둔 음이 있어서 말이죠.” 

 

“진짜? 델피, 너 진짜 최고다! 그 사이에 음을 생각해 두다니, 천재임이 틀림없어!” 

 

하하, ‘그 사이’라는 기간이 3년일 줄은 나도 몰랐다.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도 프란의 빛나는 눈동자를 본다면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프란, 바이올린 한번 켜보시겠어요? 맞춰서 한번 연주해 볼게요. 녹음기도 켜둘게요?” 

 

다시 한번 연주를 머릿속에 상기하자. 어울리는 음을 생각해 내는 거야. 

 

“알았어! 한번 해보자고!” 프란은 잠시 몇 번 심호흡을 하더니 차갑다면 차갑고, 부드럽다면 부드러울 미소를 희미하게 지은 채 바이올린의 활을 현에 그어내기 시작했다, 

 

평소에 하던 것처럼 연주를 해본다. 바이올린 파트의 악보를 보고 하니 감회가 새롭다. 이 부분은 이랬구나, 이 부분은 깊이 듣지 못해서 음이 두리뭉실했었는데, 등등 프란의 연주를 악보로써 볼 수 있어 너무나도 기쁘다. 

 

다른 소리에 피아노를 곁들이듯 가능한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연주를 해본다. 확실히 평소에 내가 연주하던 곡에서 고쳐야 할 점이 뚜렷하게 보인다. 

 

이 정도의 수확이라면 오늘 안에 내 파트 악보는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다. 수정된 부분도 그렇게 낯설지 않아 앞으로의 큰 어려움은 없을 듯하다. 

 

이 곡이 다시 한번 끝나갈 때쯤, 프란이 있는 방향을 보았다. 전과의 모습에서 하나도 달라지지 않고 바이올린에 집중하며 계속해서 아름다운 소리를 퍼트리고 있었다. 아쉽게도, 그 곡은 얼마 가지 않고 막을 내려버렸지만. 

 

“나쁘지 않지 않았나요?” 

 

“델피... 다시 생각해 봐도 너는 진짜 대단한 사람이야! 어쩜 이리 멋질 수 있어?” 

 

“과찬이세요. 악보는 내일까지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오, 잠만, 내일? 아니야! 그렇게 성급하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적기만 하면 돼요. 이번 프란의 연주 덕에 오늘 안에 가능할 것 같아서요.”

 

“델피, 나 지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감격스러워. 그리고 그렇게 겸손할 필요 없다구! 자랑할 건 확실하게! 나 이 정도 해낼 수 있다! 응?” 

 

“그렇지만 정말로 프란의 연주 덕 인걸 어떡해요.” 

 

“...음! 너 나중에 사회생활 잘하겠다! 하지만 나는 그 정도에 굴복하지 않을 거야!” 

 

프란이 어깨를 들썩이며 팔짱을 끼고 말했다. 참... 역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게 사실이구나. 

 

“그래요, 아 참, 혹시 프란 쿠키 좋아하세요?” 

 

“완전.” 

 

“이거, 얼마 전에 부모님이 사 오신 건데 맛이 좋더라고요. 혹시 괜찮으시면...” 

 

“델피, 넌 정말 나를 항상 놀라게 만드는구나!” 

 

프란은 쿠키 한 봉지를 받더니 즉시 포장을 풀고 하나씩 꺼내먹기 시작했다. 마치 햄스터같이 오물오물 거리며 행복에 겨눈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긍에 애 이어케 나하테 자 해주는 고야?” 

 

“일단 다 드시고 천천히 이야기해 주세요.” 

 

“근데 왜 이렇게 나한테 잘해주는 거야?” 

 

“아...” 

 

어쩌면 내가 너무 오지랖을 부렸는지도 모른다. 제대로 대화를 나눈 것도 어제가 처음이었는데,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게... 말이죠...?” 

 

프란의 노란빛 섞인 주홍 눈동자 둘이 나를 주시한다. 어찌 모를 당혹감과 부담스러움이 느껴진다. 둘러댈 만한 게 없나...? 

 

“아! 알겠다!” 

 

갑자기 프란이 자리에서 박수를 크게 한번 치며 벌떡 일어나더니 내게 한 발자국 다가오며 말했다.

 

“내가 너무 예쁘고 성격 좋아서 그러는 거지? 아잇 참, 이미 알고 있어~ 이 학교에 나만한 미녀가 어디 있겠어?” 

 

프란은 눈을 반쯤 감고 아마도 모델 포즈를 취하며 자신을 뽐내고 있다. 저런 당당함 또한 멋있기도, 귀엽기도 해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하하! 그게 뭐야.” 

 

“오? 드디어 존댓말 안 하네! 드디어 친구다운 느낌이 드네!” 

 

프란은 그렇게 약 2초 동안 우쭐해 있더니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으며 내게 화냈다. 

 

“...잠만, 근데 왜 웃는 거야!” 

 

충격을 받은 모습이 마치 먹고 있는 아몬드를 뺏긴 햄스터를 보는 것 같았다. 애써 화내는 모습조차 귀여울 뿐 위협은 전혀 되지 않았다. 

 

“비웃은 건 아니에요. 왠지 오랜만에 사람과 이야기해본 것이 즐거워 웃음이 나올 뿐이에요.” 

 

“그런 거야? 앞으로 자주 이야기 하자구~ 잔-뜩 실없는 소리 떠들면서 살자구~ 가끔은 삶의 여백의 미를 챙겨야 하지 않겠어? 나도 이런 이야기하는 게 처음인데! 역시 즐겁네~”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고맙네요.” 

 

“은근슬쩍 존댓말 또 쓴다! 아~! 델피가 나 싫어하나 보다~” 프란이 딱 봐도 과장된 연기로 오열하며 말했다. 분명 연기임은 알고 있지만 몸은 그리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럴 리가.” 

 

내가 프란을 싫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야 그녀의 행복을 위해 이렇게나... 

 

“응? 델피? 뭐라고?” 

 

“아,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아니야! 분명 뭐라고 말했어! 들었는데...” 

 

“...아 참! 학교 앞에 카페가 새로 생겼던데 한번 들리지 않을래요?”

 

“엥? 그거 생긴 지 2주는 됐는데? 거기 케이크 맛있더라!”

 

나는 모를 수밖에! 나는 혼자 카페에 가서 커피를 주문할 정도로 외향적인 사람이 아니다. 애초에 내향적인 사람이라도 커피는 시킬 수 있는 건데, 나는 못한다. 젠장.

 

“아, 그런가요. 그럼 없는 이야기로...”

 

갑자기 프란의 눈이 번쩍 빛나더니 자신의 검지로 내 입을 막으며 말했다.

 

“쉿, ...초코케이크?”

 

“...네?”

 

“초코케이크?”

 

“...초코케이크?”

 

“협상 성공! 가자!”

 

어째선지 무언가 일어났다. 지금 이 행동을 이해하는 건 머리 아프기에 그냥 순순히 따라가기로 했다.

 

“근데 아까 쿠키 드시지...”

 

“델피, 그건 맛있게 먹었으니 칼로리에 포함하지 않아.”

 

“...네.”

 

“아! 그나저나 쿠키 엄청 맛있더라! 정말 고마워!”

 

“맛있게 드셨다면 다행이네요.”

 

갑자기 프란이 나를 지긋이 쳐다본다. 무언가 말실수라도 한 걸까?

 

“프란? 왜요? 얼굴에 뭐 묻었나요?”

 

“[지긋이...]”

 

“...프란? 대답이라도 해주세요, 그거 뭔가 무서워요!”

 

“[지긋이...]”

 

“혹시... 음... 얼른 가자, 케이크 먹으러 가야지...?”

 

“음! 그래야지!”

 

앞으로 존댓말을 쓸 때마다 저럴 생각인가? 프란이 나를 지긋이 본다는 건 기분 나쁘지 않다만 뭔가 너무 부담스러워서 식은땀이 다 난다. 앞으로는 조심하자.

 

“근데 지금 밖에 비 오는데.”

 

“응? 델피 우산 안 챙겼어? 일기예보에 오늘 하루 종일 비 온다고 했잖아!”

 

“...하하.”

 

“어쩔 수 없지! 이 위대한 사프란님께서 네게 우산 아래 반쪽 공간을 하사하겠다!”

 

“응... 정말로 고마워.”

 

“알면 됐어!”

 

프란은 장난스럽게 웃더니 우산을 피고 나를 기다려 주었다. 같이 우산을 쓰는 영광을 내가 직접 받게 되다니! 역시 일기예보를 보지 않은 내 선택은 옳다. 반드시 그렇다.

 

“우산은 내가 들게, 빌리는 건데 적어도 내가 들어야지.”

 

“아, 그래줄래? 고마워!”

 

비가 와서 그런 걸까? 유독 오늘따라 저기압이라서 일까? 걷기가 힘든 것은 아닌데 어깨가 무거워지며 호흡이 조금 거칠어지고 심장도 꽤나 빨리 뛰기 시작한다. 좀만 걸어도 지치는 온실 속 화초 취급을 받고 싶진 않다!

 

“오늘따라 날씨가 심히 안 좋네.”

 

“델피는 비 오는 거 싫어해?”

 

“축축하고... 눅눅함이... 좋다고는 못하지...?”

 

“나도 축축하고 눅눅한 건 싫거든. 비 오는 소리만큼은 좋은데! 이걸 백색소음이라고 하나? 창가에 앉아서 조용히 빗소리를 듣는 거야, 완전 여유 넘치지!”

 

프란은 자신의 손바닥을 우산 밖으로 뻗어 비가 얼마나 오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빗물로 흠뻑 젖은 손을 바라보며 이어 말했다.

 

“사실 비 맞는 것도 싫어하진 않아. 물론, 시원한 날씨에만. 여름엔 습하고 더워서 짜증 가득이거든.”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시원한 비는 좋지. 빗방울이 가늘다면 더욱 좋고. 피부에 스며드는 시원함이란 정말 기분이 좋아.” 

 

“뭘 좀 아는데 델피~ 어... 그나저나 우산 그렇게 들어도 괜찮은 거야?” 

 

“응? 뭐가?” 

 

“네 어깨 다 젖었어. 흠뻑.” 

 

아까부터 어쩐지 어깨가 무겁다 싶었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어깨는 빗물로 전부 젖어있었다. 프란에게 우산을 씌어준다고 생각하니 미처 내 공간은 마련하지 못했나 보다. 

 

“괜찮아. 집 가서 말리면 돼. 카페 근처라서 걱정할 필요 없어.” 

 

“역시 내가 우산을 드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애초에 내가 우산을 빌리는 입장인 걸? 정말로 괜찮아. 아, 카페 다 왔다.” 

 

어느새 카페에 도착했다. 내부는 깔끔하며 조명이 아늑하고 따스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노란빛으로 빛나고 나무로 만들어진 테이블과 의자는 마냥 거칠어 보이지 않았고, 창문에는 몇 개의 화분과 곰 인형이 보였다. 이 정도 인테리어는 해야 카페를 여는구나 싶었다. 

 

“어서 오세요~” 

 

“음... 나는 뭐 시키지?” 

 

프란이 주문을 무엇으로 할지 고민 중이다. 과연 어떤 걸 시킬까? 막 샷 추가에 뭐 올리고 뭐는 넣지 말고 뭐는 반은 통으로, 반은 갈아 넣어달라는 말 등등... 그럼 엄청 긴 주문을... 

 

“따뜻한 아메리카노랑 초코케이크요!” 

 

...하진 않는 것 같다. 

 

“그럼... 나는...”

 

뭘 시켜야 좋게 보일까? 아메리카노랑 에스프레소는 써서 싫은데! 가능하면 달달한 라떼로 할까? 애들 입맛이라고 무시당하면 어떡하지? ...프란은 그런 건 신경 안 쓰는 사람이니까 상관없으려나? 

 

“따뜻한 녹차 라떼랑 딸기케이크요.” 

 

“주문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녹차라떼, 초코케이크랑 딸기케이크 맞으세요?” 

 

“네! 맞아요!” 

 

“네, 주문받았습니다.” 

 

프란과 나는 계산을 마치고 분위기가 좋아 보이는 자리를 골라 앉았다. 꽃병의 꽃이 유독 예뻐 보였다. 

 

...아, 조화네. 

 

흠흠, 그나저나 카페 점원은 꽤나 피곤해 보인다. 누가 봐도 일하기 싫어하는 몸짓이지만, 표정관리와 일만큼은 능숙하게 해내는 것을 보고 조금 대단하다고 느꼈다. 

 

“델피는 라떼 좋아해?” 

 

“네... 아, 응. 난 쓴 것보다 달달한 걸 더 좋아해서.” 

 

“이왕이면 달달한 게 입이 즐겁기도 하지! 난 커피 향이 좋아서 마시거든!” 

 

“뭔가 이유가 되게 멋있네, 고고한 도시 여자 느낌인 걸까?” 

 

“물론, 고고하지도 않고, 도시 여자도 아니지만 말이지. 그리고 아메리카노가 가장 싸다구!” 

 

“그럼 케이크를 안 시키면...” 

 

“그런 경우는 존재하지 않아.” 

 

“...응?” 

 

“그 런 경 우 는 존 재 하 지 안 아.”

 

“...알겠어, 프란.” 

 

“빠른 수긍, 보기 좋네!” 

 

이래저래 떠들다 보니 음료와 케이크가 나왔다. 달콤한 라떼의 향기와 고풍스러운 커피의 향기가 입맛을 돋우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자연스럽게 케이크를 시켜버렸다. 

 

“프란, 이 케이크 너 먹지 않을래? 나 그다지 케이크를 좋아하진 않아서. 다행히도 다른 맛이라 질리진 않겠다.” 

 

“그러기엔 내가 너무 미안한데! 네 케이크를 먹는다니! 그런 만행을 저지를 수는 없어!” 

 

“프란, 포크를 쥔 손이 떨려.” 

 

“아.” 

 

“...그럼 반씩 나눠먹을래?” 

 

“그래! 좋은 생각이야! 델피는 중재의 달인이네!” 

 

나는 프란에게 딸기케이크의 딸기가 올라가 있는 부분을 잘라내어 프란의 접시에 옮겼다. 아니 그나저나 딸기만 올라가 있으면 다 딸기케이크야? 생크림케이크와 별 다를 게 없는데? 이 무슨 장난인가. 다음부터 딸기케이크 시키나 봐라. 

 

“델피, 이거 지금 나한테 고백하는 거야?” 

 

“푸훕! 콜록...! 콜록...!” 

 

나는 갑자기 들려오는 충격적인 소리에 사례가 들고 말았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 인가? 설마 프란을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무의식적으로 내 입이 저절로 움직인... 

 

“딸기케이크의 딸기를 준다고? 이건 고백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어! 어떻게 딸기를 양보할 수가 있는 거지!?” 

 

엉뚱한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프란의 얼굴을 보니 꽤나 진지하게 충격을 받은 듯하다. 이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나도 모르게 이마를 쓸어내렸다. 

 

“아니... 그냥... 먹으라고... 준 건데...?” 

 

“그런 행동을 내가 할 수 있을 리가!” 

 

“...프란, 포크를 든 손이 떨려서 테이블까지 흔들려.”

 

“아... 흠흠... 야호! 델피는 분명 하늘에서 내려준 천사가 분명해!” 

 

프란은 어린아이가 상을 받은 것 마냥 좋아하며 딸기를 즉시 입 안에 넣었다. 곧 몇 번 오물오물거리더니 행복에 겨눈 표정으로 헤벌레 웃고 있다. 과일 하나로 저리 좋아할 수 있다니, 어찌 보면 행운일까? 

 

“혹시 딸기를 먹어본 적이 없는 거야...?” 

 

“이런, 내가 설명을 해줘야겠네! 봐봐. 내가 방금 먹은 딸기는 말이지? ‘딸기케이크 위에 올라간 딸기’ 라고. 그냥 딸기와는 전-혀 다른 거야!” 

 

카운터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점원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니 그 정도로 다른 거야!? 나는 도통 이해할 수 없다만... 뭐, 케이크 하나로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으니 좋은 게 좋은 거 아닐까? 

 

“그래요, ‘딸기케이크 위에 올라간 딸기’ 는 특별한 딸기라는 이야기지?” 

 

“그래! 이제야 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사실 나 딸기 엄-청 좋아하거든! 잠만, 그게 어느 정도로 중요하냐면...” 

 

“프, 프란! 혹시 대회 날짜는 선생님께 물어봤어?” 

 

나는 성급히 대화의 화제를 바꾸기 위해 대회의 이야기를 꺼냈다. 어차피 언젠가는 할 이야기였고 꼭 해야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음, 정말로 다행이다. 

 

“아 그거! ...아마도 한 달 후...?” 

 

“푸흡! 콜록, 콜록!” 

 

나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에 대한 불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을 기침 덕분에 겨우 막았다. 아무리 그래도 한 달 후는 너무나도 이른 것 아닐까? 

 

“프란? 한 달? 네 달도, 두 달도 아닌 한 달? 에이 설마. 잘못 알고 있는 걸 거야. 제발 그래야만 하는데...?” 

 

프란은 소스라치게 놀라는 나의 모습을 보더니 가슴을 피고 어깨를 올리며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교수님 같은 말투로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에헴! 델피 군! 우리는 할 수 있다네. 나는 우리의 첫 듀엣 때 가능성을 보았네! 자네의 피아노와 나의 바이올린으로 헤쳐나가지 못할 역경은 존재하지 않는다네!”

 

“...이거 놓치면 다음은 대회는 언제인데?” 

 

“사실... 그게... 내년...?” 

 

“그럼 그때까지 연습을 하고 나가 보는 게...” 

 

“그, 그건 안 돼!” 

 

프란이 갑자기 자리를 벅차고 일어나더니 흔들리는 눈빛을 내게 보내며 자신의 양 주먹을 꽉 쥐면서 말했다. 

 

“시간이 없단 말이야... 이번이 내게는 마지막 연주가 될 수도 있다고!” 

 

“네...? 내년에 멀리 이사라도 가는 거야? 그래도 나중에 다시 만나는 건 가능...”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을 거야. 지금도 충분히 눈치를 받고 있다고. 아마도... 이번에 대회를 나가는 것도 부모님께 사정사정 부탁해서 약속한 거란 말이야. 이번 대회에서 아무런 실적을 못 내면 학업에 열중하기로!” 

 

아마도 내가 본 프란의 모습 중 가장 불안해 보이는 모습이다. 다음 기회는 없다니, 마음에 부담감이 크게 몰려온다. 마지막, 나는 내가 피아노를 치는 목적을 마주할 날이 한 달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내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 프란의 가장 아름다운 한 순간을 만들어 내겠다고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하던 내가 아닌가. 

 

“이, 일단 진정하고 커피라도 다 마시고 이야기하자.” 

 

“아, 미안해. 내가 너무 감정적 이였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너를 믿어! 우리라면 할 수 있다구!” 

 

프란의 분위기가 다시 밝게 바뀌더니 불안해하는 나를 격려해 준다. 아마 프란 또한 한 달이라는 시간이 매우 부족한 시간인 것은 알고 있을 테니까. 

 

“나도 조금 놀라서 그랬어. 근데 말이지, 내가 생각하기에는 믿고 안 믿고의 차이가 아니야. 이건 될 거야, 프란.” 

 

하지만, 내가 3년 동안 꾸준히 해오던 연주가 무엇인가? 프란의 연주를 생각하며 어울리는 반주를 만들어 내고, 외운 것이 오래전이다. 프란은 프란의 연주를, 나는 내가 하던 연주를 한다면 그것이 듀엣일 테니까. 

 

“그래 델피! 자신감을 가지는 거야!” 

 

“뭐, 어떻게든 되겠지.” 

 

프란과 나는 서로를 마주 보고 살며시 미소 지었다. 프란은 늘 밝은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어디에나 있는 고민 많은 한 여학생 이였구나, 하지만 난 그런 프란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만이 커져갔다. 반드시 프란을 무대 위에서 가장 아름답게 만들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내 나름의 사랑을 전하는 방법이겠지. 

 

“앗! 벌써 시간이 이렇게 돼버렸잖아! 델피! 그럼 다음 주에 보자! 안녕~” 

 

“아, 아! 프란! 혹시 전화번호라도!” 

 

내가 감히 전화번호를 물어봐도 되는 걸까? 프란이 불쾌하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역시 말을 취소하는 편이... 

 

“오, 핸드폰으로 연락하면 되는구나! 내가 왜 그 방법을 몰랐지? 역시 델피 엄청 똑똑해~” 

 

프란은 내 핸드폰을 가져가더니 자신의 번호를 입력하고 다시 내게 돌려주었다. 곧이어, 프란이 내 옆구리를 팔뚝으로 톡톡 치며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놀리는 투로 말했다. 

 

“여자 번호를 그렇게 따가도 되는 거야~? 델피~? 의외로 대담하잖아~?” 

 

프란의 갑작스러운 기습 공격에 나는 버티지 못했으며 이상 정신을 잃어 헛소리를 해버리기 전에 도망가기로 결심했다. 

 

“다음 주에 봐요 프란!!!” 

 

“히히. 그래! 다음에 보자!” 

 

프란의 전화번호, 전화번호? 내가 프란의 전화번호를 받아냈어? 정말로? 이것이 꿈이라면 부디 깨어나지 않기를! 프란의 전화번호! 야호! 

 

...하지만 연락을 먼저 할 용기는 아직 없다. 젠장. 그림의 떡도 아닌데! 떡이 눈앞에 있는데! 먹지를 못하는 내가 다시 한번 미웠다. 

 

잠만, 근데 내가 뭔가 잊은 듯한... 

 

“델피!!! 너 우산 없잖아!!!”

 

아차. 

 

프란과 나를 지켜보던 점원이 달려와 어째선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부드러운 말투로 내게 우산을 건네주며 말했다. 

 

“이거, 손님들이 하도 놓고 가셔서 남는 거 엄청 많아요. 하나 가져가세요.” 

 

“아, 감사합니...” 

 

“...그리고, 여러모로 힘내요? ...하하!” 

 

나는 즉시 우산을 받아 들고 펼침과 동시에 밖으로 달려가며 외쳤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꼭 또 올게요!!!” 

 

“이런, 안 오는 게 도와주는 건데...” 

 

어쩐지 점원분이 이상한 소리를 한 것 같지만... 뭐, 기분 탓이겠지! 

 

그나저나 비가 엄청 세차게 온다. 정말로 우산이 없었다면 쫄딱 젖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름 모를 점원이란 탈을 쓴 천사 분에게 진심 가득한 감사를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상기했다. 

 

천천히 집까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걸어보니 신발에서 빗물의 찰팍찰팍하는 소리와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의 소리가 주변에 묻어간다. 지금만큼은 프란이 비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 듯하다. 

 

집 앞까지 도착하여 현관문고리를 잡아 열어보니 신발장에 부모님의 신발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내일 주말이구나! 부모님은 평소에 일 때문에 바쁘시지만 토요일만큼은 꼭 쉬신다. 

 

“아, 오셨어요?” 

 

“아, 델피. 오늘도 수고 많았단다.” 

 

“제가 무슨 수고를 하겠어요? 아버지야 말로 수고 많으셨어요.” 

 

“고맙구나. 얼른 들어가서 쉬렴. 피곤하겠다.” 

 

오래간만에 부모님에게 인사를 하고, 내 방에 들어가 오늘 하루를 정리하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프란의 전화번호... 연락을 먼저 해봐야 하나? 내가? 에이, 할 수 있을 리가. 하지만! 연락처를 받은 이상... 

 

[지이이잉] 

 

갑작스러운 핸드폰의 진동음에 깜짝 놀라 핸드폰을 침대에 던져버렸다. 아, 고민하던 사이에 프란이 먼저 연락을 보내왔다. 

 

(“야호! 델피! 집에는 잘 들어갔어? 우산도 없이 뛰쳐나가서 놀랐잖아!”) 

 

프란의 성격이라면 뭔가 이모티콘 대 난발을 할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보내온 메시지가 생각보다 멀쩡해서 놀랐다. 

 

(“방금 집에 막 도착한 참이에요. 프란은 집에 잘 들어갔나요?”) 

 

평소의 버릇으로 존댓말을 사용하니 프란이 갑자기 묘하게 째려보는 표정의 병아리 이모티콘을 보내온다. 

 

(“알겠어, 실수야 실수. 다시는 안 할게!”) 

 

(“나는~ 전-혀 신경 안 쓴다구? 정말 이라구?”) 

 

(“그래, 그래. 그럼 쉬어. 오늘 뭔가 많이 돌아다녔으니까 피곤하겠다.”) 

 

(“엥? 우리 카페밖에 가지 않았는데?”) 

 

(“...그럼 난 악보 완성하러 가야겠다. 다음 주에 보자! 프란!”) 

 

(“어? 어? 그래! 안녕! 델피!”) 

 

급하게 대화를 회피하고 침대에 대자로 편하게 누우니 잠이 솔솔 왔다. 나답지 않게 너무 밖을 돌아다녀서 그런 걸까? 역시 내 방의 침대만 한 안식처가 없다. 

 

처음 프란과 대화하던 순간부터 뭔가 많은 일들이 생기고 있다. 지치지 아니하고 힘들지 아니한 재미 가득한 일상이 무색무취한 내 삶 속 갑자기 찾아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가방에서 녹음기와 악보를 꺼내서 프란의 작곡을 이어받는다. 내가 들어도 꽤나 만족스러운 듀엣이다. 어느새 나도 이따금 연주할 수 있게 되었구나. 어쩐지 아련한 마음에 가슴이 저려왔다.

 

샤프의 사각사각 소리와 녹음기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가 묘한 향수를 풍겨왔다. 노력이라고는 해본 적 없었는데, 나 삶 속 노력이라고 부를만한 자랑거리를 하나 만들었다. 

 

난 이 연주가 끝나면, 무엇을 해야 할까? 학업에 온 집중을 쏟고 좋은 성적을 얻어야 하는 걸까? 사람들은 전부 그렇게 살아가는 걸까? 목표 끝에 목표를 만들면서 질리지 않도록 하는 살아가는 걸까? 

 

사각사각, 사각사각, 잡념은 소리에 묻어가며 달은 떠오르고, 밤은 밝아져만 갔다.


4. 

 

[똑똑] 

 

“델피, 아침 먹어! 웬일로 늦잠을 잔대?” 

 

어머니의 노크소리에 눈을 떴다. 이런, 악보를 쓰다가 깜빡하고 책상에서 잠든 모양이다. 그래도 완성은 되었으니 상관없지 않을까? 

 

“네~ 갈게요~” 

 

내 방에서 나와 화장실에서 세수를 한 후 식탁에 앉으니 먼저 토스트를 드시던 아버지가 먼저 입을 여셨다. 

 

“고등학교는 어떠니? 지낼 만하니?” 

 

“네, 정말이지 하루하루가 즐거워요.”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듣더니 깜짝 놀라시며 말했다. 

 

“학교가 즐겁다는 건 네 입에서 처음 듣는구나! 어떤 일이 있었는데?” 

 

“마침내 피아노를 치는 목적을 이룰 수 있게 되었거든요. 아, 그리고 저 아마도 다음 달에 듀엣 대회 나갈 것 같아요.” 

 

“대회까지 말이니? 우리 델피가 그 정도의 실력자인 줄은 몰랐구나! 허허, 꼭 보러 가야겠어!” 

 

“하지만 토요일 이외엔 많이 바쁘시잖아요. 너무 부담 안 받으셨으면 좋겠어요.” 

 

“델피야, 배려는 고맙지만 나는 내 아들이 성숙한 모습을 보기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는데?”

 

“성숙하지 않아요. 아직 어린애인걸요.” 

 

“그러니까 하는 말이란다. 물론 아들이 성숙하게 크면 좋겠지. 하지만 어려서부터 성숙한 모습을 갖춘 너를 보면 마음이 편치 않구나.” 

 

아버지의 말을 듣던 어머니는 더 이상은 못 들어주겠다는 듯이 아버지의 등을 손바닥으로 때리며 말했다. 

 

“아주 못하는 소리가 없어! 델피, 네 아빠 말은 아직은 어리광 부려도 된다는 뜻이야. 넌 아직 어른도 아니잖니? 청춘을 즐기란 말이야~ 연애도 좀 하고!” 

 

“연, 연애라뇨! 저, 저는 그런 거...” 

 

“그래도 반에서 좋아하는 여자애 한 명 정도는 있을 거 아니니? 확! 질러버려~” 

 

“아니... 그게...” 

 

어머니는 나의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셨다. 

 

“뭐야. 진짜 있어? 뭐야 델피~ 역시 청춘의 남자애는 다르다니까~ 나도 저렇게 풋풋한 사랑을 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 말을 듣던 아버지는 헛기침을 하시며 불편함을 보이셨다. 

 

“걱정 마~ 당신이 내 첫사랑이니까.” 

 

“...아이 앞에서 무슨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델피, 글쎄 네 아빠가 엄마한테 어떻게 청혼했는지 알아? 눈 오는 날 겨울이었는데...” 

 

“아잇! 이 사람이 또 뭔 소리를! 델피 들을 필요 없어!” 

 

“들어봐, 들어봐! 눈 오는 겨울날에 청혼을 하면서 장미꽃다발을 주는 거야! 겨울에 장미를 어디서 구했냐고 물어보니까 직접 집에서 온도, 습기 다 맞춰서 직접 길렀다는 거 있지! 어우! 노력이 가상해서 내가 받아 줬다는 말씀!” 

 

아버지는 얼굴을 붉히며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말했다. 

 

“네 엄마가 아빠에게 고백을 어떻게 했는지 아니? 네 엄마 생일 때...”

 

“야! 그 이야기는 하지 말기로 했잖아!” 

 

“네 엄마 생일 때, 늦은 밤에 자기 생일이라고, 친구들 다 바쁘다고, 나보고 어울려 달라는 거야. 그렇게 만나서 하는 말이 뭔지 아니? 글쎄 자기 생일 선물로 나를 달라는 거 있지!” 

 

“야!!!” 

 

“아 왜! 네가 먼저 했잖아!” 

 

아버지와 어머니는 오늘도 사이가 참 좋으시다. 내가 이러면 안 되지만 어쩐지 보는 내가 다 부끄럽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꽤나 옛날부터 알아온 소꿉친구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서로 눈치를 안 보고 서슴없이 말하신다. 오랫동안 서로를 봐왔기에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서로를 배려... 

 

“야! 야! 머리채 잡는 건 너무하잖아! 안 그래도 요즘 머리카락 많이 빠지는데!” 

 

“어차피 빠질 머리 미리 뽑아 준다는 게 뭐 어때서! 대머리로 만들어주마!” 

 

... 사이가 좋으신 거라고 해두자. 

 

저래 보여도 나름 사이가 좋으신 잉꼬부부인 것이 웃기다. 가끔은 눈에서 꿀이 떨어질 정도로 서로를 바라보면서 포옹을 나누시는 것을 많이 봤다. 

 

아버지도 자상하시고, 어머니도 활기가 넘치신다. 평소에도 나를 많이 아껴주시는 고마우신 분들이다. 

 

[쫙!] 

 

“끄아아아아!!! 아파!!!” 

 

“앗.” 

 

부모님들 쪽을 바라보니 아버지는 머리를 감싸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어머니는 자신의 손에 들린 한 움큼의 머리카락을 보며 식은땀을 흘리고 계셨다. 음, 일 났다. 

 

“...어? 내 정수리가 왜 허전하지? 내가 소중하게 관리하던 소중한 내 머리카락들이 어디 간 거지...?” 

 

“아... 그... 음... 미안?”

 

아버지가 오열하신다. 그야 당연하지, 탈모만큼은 싫어 하셔서 어떻게든 관리를 철저히 하시는데, 그게 지금 어머니의 손에 무자비하게 사라졌으니. 

 

“...아이, 왜 그래~ 내가 나중에 맛있는 거 사줄게~” 

 

아버지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아마도 단단히 삐지신 모양이다. 

 

“...델피.” 

 

“...네?” 

 

“네가 가서 네 아빠 좀 달래 봐.” 

 

“에? 제가요?” 

 

“너에게도 싸움을 말리지 않은 방관 죄가 있잖아.” 

 

아니 그게 무슨 소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일단 급한 불은 꺼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도 고래 싸움을 달래기 위해 새우가 나선다. 

 

[똑, 똑, 똑.] 

 

“...들어오렴.” 

 

“저인 줄 어떻게 아셨어요?” 

 

“네 엄마가 날 달래러 오겠니?” 

 

“하하, 그건 그래요.” 

 

아버지는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내게 쓰는 말투와 어머니께 쓰는 말투가 다르다. 내게 말하실 때 조금 더 자상한 말투를 사용하시기에 듣기엔 나긋나긋 마음이 편해진다. 

 

“내가 이런 걸로 삐질 사람이 아닌 건 알지?” 

 

“암요.” 

 

아버지는 알게 모르게 어머니 앞에서는 허당끼 있는 모습을 많이 보이시지만, 대부분은 어머니의 분위기에 맞추어 주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깨닫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래도 이번엔 꽤나 슬프지만 말이야.”

 

“평소에 관리 많이 하시니까요.” 

 

“네 엄마 상태는 어떠냐?” 

 

“손톱 물어뜯으면서 조마조마하고 계셔요.” 

 

“예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군.” 

 

“그런가요?” 

 

“네 엄마는 생각 없어 보여도 남 눈치를 되게 많이 보는 사람이란다. 그만큼 배려심 깊고 남을 생각할 줄 알지.” 

 

“어머니가 좋은 분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 

 

아버지는 숨을 깊게 내뱉으시더니, 애잔한 눈으로 말하셨다. 

 

“이 아빠가 예전에는 되게 한심한 사람 이었단다. 남을 밀어내기만 하고 늘 의심에 빠져 살았거든. 그런 나를 바꿔준 것이 네 엄마다.” 

 

“사람이 거짓 없이 투명하고, 혹여나 말실수했나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나도 마음이 편해졌지.” 

 

“내가 네 엄마에게 청혼한 이유가 뭔지 아니? “ 

 

”내가 가장 힘든 순간에, 나의 밑바닥이 보이는 그 순간에도 내 옆에 있어주었단다. “ 

 

”너무나도 미안하고 창피했지만, 내가 느낀 건 죄책감이 들 틈도 없이 느껴지는 감정은 고마움 이었단다. 그래서 어떻게든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마음먹었지. 그런 사람이 내 아내라면, 옆에서 늘 챙겨줄 수 있으니까. “ 

 

”너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지? 넌 그 사람을 사랑하니? 어떤 모습을 네 앞에서 보여주어도? “ 

 

아버지가 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신다. 저런 눈빛을 보고도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당연하죠, 그 사람을 위해서 몇 년 동안 피아노만 쳐왔는걸요. “ 

 

”음? 피아노를 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니? “

 

”아, 그게 말이죠... “ 

 

의식에 몸을 맡기니 쓸모없는 말이 튀어나와 버려 당황스러웠다. 피아노를 치는 이유가 단지 짝사랑 때문이란 것을 알면 아버지가 한심하게 보실까 조마조마하던 찰나. 

 

”델피, 넌 정말로 멋진 사람이구나. 많이 놀랐어. “ 

 

”네? “ 

 

”사랑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 말이다. 나는 받기만 했기에 그런 걸 전혀 못했거든. 이 아빠가 보기에는 정말 멋진 사람이란다. 난 정말로 우리 아들이 자랑스럽구나. “ 

 

아버지의 뜻밖에 반응에 나는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그런 나의 모습을 보시더니 이어 말하셨다. 

 

”네가 평소에 보다 많이 웃는 건 그 사람 덕이었나 보구나. 아까 이야기했던 대회도 그 사람이랑 같이 나가는 거지?” 

 

”아버지는 눈치가 너무 빨라요. “ 

 

”네가 너무 쉬운 거란다. “ 

 

아버지가 갑자기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부끄러워서 떨쳐내고 싶었지만 묘한 따스함에 가만히 그 순간을 즐겼다. 

 

”감사해요. “ 

 

”반드시 보러 가마. 네 엄마까지 데려가서 말이지. “ 

 

”그건 너무 부담스러운데요. “ 

 

”기대라고 말해주면 고맙겠구나. 뭐, 기대는 늘 부담스러운 법이지. 네가 잘하든 못하든, 이 아빠는 웃어주마. “ 

 

”비웃음만 아니면 좋겠네요. “ 

 

나와 아버지는 서로의 얼굴을 보고 웃었다. 따스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다정한 미소다. 

 

”슬슬 나가 볼까? 네 엄마가 마음을 졸이고 있을 걸 생각하니까 꽤나 불쌍하거든, 오늘은 이걸 빌미로 맛있는 거나 사달라고 하자꾸나. “

 

”아버지가 이렇게 진지한 이야기를 해 주셔도, 정수리를 보면 진지함이 하나도 묻어나질 않네요. “ 

 

”다시 생각해 보니 화나는군, 딱 초밥만큼 화나는구나. “ 

 

”회전 없는 초밥이요? “ 

 

”물론, 회전 없는 초밥이지. 배 터지게 먹고 오자꾸나. “ 

 

아버지와 나는 서로 낄낄거리며 방 문 밖으로 나섰다. 아버지의 예상대로 우물쭈물한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며, 아버지를 보더니 깜짝 놀라며 곧장 품에 안겼다. 

 

”...내가 미안해. “ 

 

”아니야, 나도 많이 잘못했는걸 “ 

 

”아니야. 내가 미안해.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 

 

”초밥. “ 

 

”... 뭐? “ 

 

”초밥. “ 

 

어머니는 심히 당황한 얼굴로 나를 보며 말하셨다. 

 

”델피! 잘 달래고 온 거 아니었어!? “ 

 

그 모습을 본 나는 측은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그리 됐습니다. “ 

 

”델피... 너마저? 믿었는데! “ 

 

”연어 초밥이 그리 맛있거든요. “ 

 

옆에서 아버지가 한수 더 뜨시며 말했다. 

 

”아, 나는 참치. 잔뜩 먹을 수 있겠다~ 우와~ 신난다. “

 

어머니는 이마를 탁 치시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말하셨다. 

 

”에이씨...! 그래, 뭐 기분이다. 까짓 거 배 터지게 먹으러 가자! “ 

 

”역시 내 아내야. 통 크고 멋져. “ 

 

”그러게요. 어머니만큼 멋진 사람이 또 있을까요. “ 

 

그 말을 듣던 어머니는 어깨가 으쓱 올라가더니 콧대를 높이며 좋아하셨다, 

 

... 기억의 한편에서 누군가 떠오르지만, 뭐, 아무래도 좋지 아니한가? 

 

평소에 같이 있지 못하는 만큼, 또 다음 주말이 기대되는 유독 웃음 많은 날이었다. 

 

 

5. 

 

[지이이잉] 

 

꽤나 이른 일요일 아침, 핸드폰의 진동소리에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지이잉] 

 

[지이이이잉] 

 

[지잉지잉] 

 

...꽤나 부자연스럽게 눈이 떠짐 당했다. 

 

눈을 비비며 핸드폰을 켜보니 프란에게서 약 20개의 메시지가 와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아침 7시인데, 프란... 꽤나 일찍 일어나는구나. 

 

[델피! 오늘 시간 있어? 같이 놀] 

 

[악보 혹시 다 적었으면 같이 확인해 보자고 연락했지!] 

 

같이 놀자고 연락했구나. 프란은 왜 굳이 나와 놀고 싶은 걸까? 다른 아이들이 훨씬 재미있고 분위기도 활기 찰 텐데. 

 

[물론 시간 있어요.]

 

[...] 

 

[물론 시간 있어.] 

 

[그래? 잘됐다! 그럼 저번에 만났던 카페에 가서 노가리...같이 속 편히 진중한 토론을 나눠보자고.] 

 

[언제 만날까요?] 

 

[지금.] 

 

[...에?] 

 

[30분 준다. 튀어나와라 델피~!] 

 

[으아악 이게 뭐야.] 

 

정말로 이게 무슨 일일까 외출 준비를 위해 성급히 침대에서 뛰쳐나와 옷장을 열어 보았다. 

 

입을 옷이 하나도 없다! 젠장! 교복을 입고 갈 수는 없는데! 아, 옷 먼저 고를 때가 아니지. 먼저 밥부터... 아니 밥 먹을 시간이 있긴 한가!? 

 

우선 욕실로 달려가 남자의 목욕(약 5분)을 마치고 머리카락 또한 온 힘을 다해 수건으로 비비며 말린다. 

 

성급히 빵 몇 조각을 오물오물 씹으면서 깔끔해 보이는 흰 티셔츠와 언제 사둔건지 모르겠는 긴바지를 꺼내 들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시계를 보니 놀랍게도 아직 10분 남았다. 아니 근데 이게 맞나? 왜 내가 이렇게 성급히 집 밖을 나갈 준비를 해야 하는 거지? 제멋대로인 프란의 행동에 의문이 들 때쯤. 

 

[지이잉] 

 

프란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하니. 

 

[델피! 어때? 이거 옷 어울려?] 

 

프란의 사복 사진이라는 자극에 나는 정신 줄을 잠시 놓고 잠시 넋을 잃고 바라봤다. 마치 내 혼을 전부 가져가 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평소의 밝은 옷과는 대비되는 검은 티셔츠, 살짝 찢어진 듯 보이는 청바지, 또한 늘 그렇듯이 붉은 바람막이를 늘 허리춤에 묶고 벤치에 앉아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평소에 프란은 학교에서도 사복을 입는데? 그러면 평소와 별 차이 없는 거 아닌가? 

 

...뭐, 상관없나!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어쩐지 온몸에 힘이 났다. 얼른 나가서 실물을 보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성급히 준비를 마치고 집 밖으로 나와, 카페로 땀이 나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빠르게 걷고 달려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얼마 뒤 프란이 벤치에서 내게 손을 흔들었다. 

 

”여~ 델피~ 진짜로 빨리 나왔네? 헤헤... 좀 미안해지는데...? “ 

 

”...당연히 미안해야지! 이렇게 사람을 갑자기 불러내고! “ 

 

”에이~ 그러지 말고~ 오늘은 내가 커피는 살 테니까. 응? “ 

 

프란이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이번만 봐달라는 듯이 나를 바라본다. 그런다고 내가 화를 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그래, 얼른 카페로 들어가자. 밖이 많이 춥네. “ 

 

...가끔은 계산을 틀릴 수도 있는 것 아니겠나? 이 정도 실수는 가볍게 넘어가도 좋을 수준이니까! 

 

”...근데 프란. 보통 이렇게 이른 시간에도 카페가 문을 열어? “ 

 

”아. “ 

 

역시나 다를까. 카페에 도착하니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10시부터 문을 연다니, 약 2시간이나 일찍 와버렸다. 

 

”...프란?“ 

 

”...헤헤.“ 

 

”그래서 이제 뭐 해...? “ 

 

”...아! 델피, 아직도 모르는 건가! ...그게! ...그러니까! ...헤헤.“ 

 

아무래도 진짜로 아무 생각 없이, 계획 없이 나를 불러낸 것 같다. 뭐, 그만큼 나랑 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던 것이겠지...? 좋게 생각하자.

 

”...프란, 실례가 아니라면 우리 집에 잠시 쉬었다가 갈래? 아니면 여기서 일찍 해산을... “ 

 

프란이 해산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눈을 빛내며 내 손을 잡고는 말했다. 

 

”가자, 네 집! “ 

 

”어? 어. 그, 그래. “ 

 

”그럼 뭐 먹을 거라도 사가자! 너희 부모님 보러 가는데 빈손으로 가면 좀 그렇잖아~“ 

 

”에이... 신경 쓰시는 분들도 아니고 오히려 친구 대려 왔다고 놀라실걸? 애초에 오늘은 부모님이 집에 안 계셔. “ 

 

”...델피, 그럼 너는 나와 ‘단 둘’이 아무도 없는 네 집으로 데려가려고 했던 거야? “ 

 

”...아?“ 

 

아차. 뭔가 대단한 말실수를 해버렸다는 것을 몸이 직감했는지 소름 돋듯 온 옴에 차가운 한기가 돌았다. 

 

무언가 떠올랐다는 표정을 한 프란은 눈을 반쯤 감고 씨익 웃더니 느린 걸음으로 능글스럽게 내게 다가왔다. 

 

”델피~ 대담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그런 소리가 아니잖아! “ 

 

”나랑 단 둘이 뭐 하려고~? 응~? “ 

 

”뭐 하긴! 아무것도 안 해! “ 

 

”그럼 왜 네 집으로 데려가려고 하는 건데~? 이상한 꿍꿍이 있는 거 아냐~? “ 

 

”...그래! 악보! 악보를 집에 두고 왔네! 그거 같이 보러 가자는 거지. 그런 거야! “ 

 

”음~? 응~? “ 

 

”...오늘은 여기까지! 해산! “ 

 

나는 서둘러 뒤돌아 내 집 방향으로 걸어가니, 프란이 내 팔을 잡고 당황함 섞인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아악! 델피이~ 미안해~ 장난이잖아~ 자, 자! 얼른 가자구!“ 

 

”...하아.“ 

 

어쩐지 오늘따라 프란에게 많이 휘둘리는 하루다. 아침부터 에너지를 다 써버려서 지친다. 집에 가서 편히 누워버리고 싶지만 내가 갈 그 안식처엔 프란이 있을 테니... 

 

...집에 가니 프란이 있다고? 좋은 것 아닌가? 

 

”델피? 무슨 생각해? 아니면 엄청 화난 거야? 미안해... 이제 장난 안 칠 테니까. 응? “ 

 

”아, 그런 거 아니야. 잠시 뭐 좀 생각하느라. “ 

 

”그런 거지? 그나저나 너희 부모님은 어떤 분이셔? 아, 이런 거 물어보면 실례인가? “ 

 

”아니, 괜찮아. 그냥 좋으신 분들이야. 친절하고 자상하셔. 그런데 일 때문에 대부분 집에 못 들어오시거든. “ 

 

”델피는 부모님이 편해? “ 

 

”응, 그런데? “ 

 

”그렇구나. “ 

 

프란이 조금은 어두워진 목소리를 듣고 평소와의 다른 이질감을 느껴 그쪽을 바라봤다. 

 

분명히 웃고 있을 프란이지만, 왜일까? 빛나는 노을을 담아둔 눈이 오늘따라 쓸쓸해 보였다. 

 

”얼른 가서 뭐라도 달달한 걸 먹을까? 집에 딸기가 있을 텐데. “ 

 

”딸기? 좋아! 역시 델피는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아는구나! 조금 감동인데~? “ 

 

”그런 얼굴을 보면 뭐라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버리는걸. “ 

 

”앞으로 더 많이 많이 받아먹어야지~! “ 

 

”...커피 사준다는 건 기억해둘 거야. “ 

 

”그런 건 좀 잊어버려도 되는데...... “

 

이야기를 하면서 걸으니 어느새 집 앞까지 도착했다. 익숙한 장소이지만 지금 만큼은 꽤나 특별한 장소가 될 터이다. 

 

”델피 단독주택에 사는구나! 난 아파트 사는데! 단독 주택은 어때? “ 

 

”응, 난 꽤나 만족해. 나름 로망 있다고 생각하거든. “ 

 

”그치! 나도 나중엔 단독주택에 살고 싶다... 그냥 여기서 살아버릴까~“ 

 

”부모님은 허락하실걸? 네 성격이면 자기 딸 삼고 싶다고 어머니가 엄청 좋아하셨을 거야. “ 

 

”음~ 그렇구나. “ 

 

”얼른 들어와. 거실 소파에 잠시 앉아있어. 악보랑 먹을 것 좀 들고 갈게. “ 

 

”알겠어~“ 

 

프란은 집 안에 들어오자마자 집을 쓱 둘러보더니, 갑자기 내 이름이 적힌 문패를 보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이건 못 참지! “ 

 

”아니 거실에 앉아있으라고!!! “ 

 

나도 성급히 내 방으로 달려가니 이미 프란은 내 방 안 침대에 마치 자신의 방인 것처럼 누워있었다. 

 

”흐에헤 침대다아~“ 

 

”...프란?“ 

 

”근데 델피, 네 옷장 아래 너무 옷이 널브러져 있잖아! 좀 치우고 살아! “ 

 

”아니! 네가 갑자기 나오라며! 입을만한 옷 찾으려고 그런 거라고! 굳이 따지면 네 탓이지! “ 

 

”어머나! 그렇게 정성 들여 꾸미고 나온 거였어? 고마운 걸~“ 

 

”... “ 

 

나는 내 방구석에서 왜인지 모르겠다만 옛날에 사두었던 뿅망치를 양손으로 강하게 쥐었다.

 

”엣, 델피...? 어째서...? “ 

 

”...네놈의 죄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 

 

”끼야악! 뿅망치 살인마다! 프란, 반격! “ 

 

프란은 손에 이불을 돌돌 말더니 커다란 공처럼 만들고 있는 힘껏 내게 던졌다. 

 

[슈욱, 퍽.] 

 

”... “ 

 

”...네가 완성한 악보 볼까? 그 뿅망치 내려 두고, 응...? 델피...? 다, 다가오지 마아! “ 

 

[뿅! 뿅! 뿅! 삑! 삑! 뽁!] 

 

”끄아아! 살려줘! 죄 없는 가녀린 여자를 때리네! 누군가 도와줘요!!! “ 

 

[삑! 삑! 빡!] 

 

”구엑... “ 

 

...잠시 소란이 있었다. 프란은 내 침대에 쓰러져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저러는 동안 내 방 정리나 해야겠다. 

 

대충 옷들도 옷걸이에 걸어 옷장에 넣어두고, 던져진 이불을 펴서 반듯하게 개어 침대 위에 쓰러진 프란 등에 올려뒀다. 

 

”계속 그렇게 있을 거야? “ 

 

”폭력반대! 싫어! 아무 데도 안가! 나 삐졌어! 때릴 것까진 없잖아! “ 

 

”그래, 그래. 딸기 씻어올 테니 거실에서 기다려. 홍차? 커피? “ 

 

”...커피.“ 

 

”아, 커피는 없는데? “ 

 

”아니 그럼 왜 물어본 거야!!! “ 

 

”예의지 예의. “

 

”델피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어흐윽... 폭력적인 남자는 인기 없는데. “ 

 

”...그럼 어떤 남자가 인기 있는데? “ 

 

”예술적이고! 배려심 넘치고! 나를 사랑해 주는 남자! 크~ 멋있어. “ 

 

”...얼른 와서 딸기나 먹어. “ 

 

”네~! “ 

 

프란은 거실로 호다닥 달려 나오더니 딸기를 양쪽 볼에 가득 넣고 오물오물 먹기 시작했다. 

 

집인데 지친다. 아니, 애당초 나 이런 성격이었나? 점점 프란에게 무언가 잠식돼 가는 기분이 든다. 주섬주섬 악보 여러 장을 들고 프란 앞에 놓았다. 

 

”저번에 연주 들어보면서 써 봤는데 잘만 하면 한 달도 무리는 아니야. 무엇보다 프란이 바이올린을 워낙 잘 연주하니까 가능한 이야기겠지. “ 

 

[오물오물] 

 

”크게 고친 부분은 없어. 고쳐도 내 피아노 파트나 동시에 연주하는 부분만 살짝 바꿨어. 다음에 같이 이 악보로 연주해 보자? “ 

 

[오물오물] 

 

”우리 집에 피아노가 없어서 다음엔 연주해 보고 상의 후 바로 고쳐보자. 가능하면 멋진 연주가 되었으면 좋겠어. “ 

 

[오물오물] 

 

나는 딸기가 쌓인 접시는 내 쪽으로 당겨 프란의 손에 닿지 않도록 하였다. 

 

”프란. “ 

 

”다 듣고 있다구! 그냥 딸기가 너무 맛있어서 신경을 조금 덜 못 쓴 것처럼 보이는 거지! 그나저나 집에 피아노도 없은데 악보는 어떻게 고쳤데? 델피 진짜 상상 이상으로 천재구나... “ 

 

”큼, 큼. 그럼 내일 방과 후에 바로 해보자? “ 

 

”그래! 애당초 너에게 이런 부탁을 한 것은 나인걸? 이래 봐도 엄청 고마워하고 있다구! ...고마운 만큼, 간절하기도 한걸. “

 

프란은 기가 죽은 듯이 온몸을 축 늘여 트리고 분위기가 살짝 암울해졌다. 웃음으로 자신이 느끼는 부담을 덮어 둔 것일까. 어쩐지 마음이 좋지 않았다. 

 

곧장 프란의 입에 딸기 하나를 넣어 주었다. 

 

”...음?“ 

 

”단거라도 먹으면서 마음을 추리자. 단 거 좋아하지? “ 

 

”엄청 좋아하지. 먹여놓고 물어보는 건 또 뭐야! 헤헤... “ 

 

”그래, 우리 열심히 해보자. “ 

 

”물론이지! 최선을 다해 1등을 목표로 해야지! “ 

 

[삑, 삑, 삑, 삑, 띠리링] 

 

갑자기 현관에서 도어록을 입력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만, 오늘? 이 시간에? 누구지? 

 

”델-피! 엄마 왔다! 우리 아들 깜짝 놀래려고 일부러 말 안 했지! 안타깝게도 네 아버지는 아직 일과 데이트 중이지롱~“ 

 

”음? 못 보던 신발이... “ 

 

뭐야? 어머니가 오신 거였잖아? 난 또 무슨 큰일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뒤를 돌아 프란의 쪽을 바라본다. 

 

...어? 

 

큰일 났다. 

 

프란이 나를 불안한 눈동자로 바라본다. 아니 날 그리 봐도 나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인데!? 

 

”우리 사랑하는 아들! 거실에서 뭐 하... “ 

 

”... “ 

 

”... “ 

 

”...하던 거 계속하렴! “ 

 

”아아아! 그런 거 아니에요! “

 

”엄마는 우리 아들 사랑 응원해! “ 

 

”아니 그런 게 아니라요! “ 

 

”그나저나 예쁜 여자친구네~“ 

 

”아, 감사합니다, 어머님~“ 

 

”아니 프란 너는 갑자기 왜 그래! “ 

 

... 

 

... 

 

... 

 

잠시, 꽤나, 조금, 많이 소란이 있었다. 나는 성급히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드렸다. 프란은 옆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한다. 이럴 때 같이 변명이나 해주지. 너무하다. 

 

”저번에 델피가 이야기한 듀엣을 연주할 친구가 너였구나! 사프란, 이름도 엄청 예쁘네! “ 

 

”프란이라고 불러주세요! “ 

 

”프란, 프란! 너는 어떤 악기 연주하는데? 델피가 이런 건 이야기 안 해줘서 말이지~“ 

 

”바이올린 연주해요! 엄청 잘하거든요! 바이올린만 있다면 바로 연주할 수 있는데! “ 

 

”어머! 나도 옛날에 잠시 바이올린 배워본 적 있거든~ 물론 한계는 반짝반짝 작은 별이었어. 꽤나 슬픈 이야기지. “ 

 

둘이서 나만 소외시키고 둘이서만 대화한다. 뭐랄까. 무안하기도, 민망하기도, 어색하기도 하다. 무엇보다 나도 대화에 끼고 싶단 말이지... 

 

”그래서, 그래서? 어쩌다가 우리 델피가 이렇게 어여쁜 친구를 사귈 수 있었던 걸까? 이야기 좀 해줘~“ 

 

”음악실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서 가보니까 델피가 피아노를 치고 있었어요! 그게 가까워지게 된 한 걸음 이었죠! 아, 그리고 델피 피아노 엄청 잘 쳐요! “ 

 

”어머? 그러니? 나에게는 영 들려주지 않는단 말이지... 델피! 서운해! “ 

 

어머니가 딱 봐도 삐진 눈으로 나를 지긋이 바라본다. 아니 그렇게 바라봐도 곤란한 게...

 

”어머니, 우리 집에 피아노도 없고 분명 토요일 밖에 집에 안 들어오시죠...? “ 

 

”...큼, 큼. 그나저나 프란, 우리 델피가 평소에 잘 지내니? 평소에 말주변이 없는 아이라서... “ 

 

”어머니, 뭘 또 그런 이야기를... “ 

 

”무척이 나요. “ 

 

”...에?“ 

 

갑작스러운 프란의 단오하고도 부드러운 말투에 놀라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도 같은 눈치였다. 

 

”델피랑 같이 있으면 엄청 마음도 편하고 즐거운 걸요! 다른 친구랑은 모르겠지만... 저랑은 엄청 잘 지내요! “ 

 

어머니는 잠시 당황하여 멍하니 프란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셨다. 나도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야, 델피가 없었으면 듀엣 대회 참가도 못하고 끝났을 거예요. 전부 다 델피 덕분이에요! “ 

 

어머니가 잠시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나지도 않을 눈물을 훔치며 흐느끼는 말투로 말했다. 

 

”우리 델피가 벌써 장가를 갈 때가 되었나 보구나... 이 엄마는 너무 기쁘다... “ 

 

”어머니!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 

 

”어디에 사는 어떤 침울한 아들과는 다르게! 마음씨고 곱고! 성격도 쿨하고! 외모도 단정하고! 너 앞으로 내 딸 해라! “ 

 

”아잇... 그 정도는 아닌데... 헤헤... “ 

 

”프란 같은 아이를 딸로 둔 네 부모님은 정말이지 큰 축복을 받으셨구나! 어쩔 수 없네, 이렇게 된 이상 강제로 납치를! “

 

프란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얼굴을 붉히며 서둘러 현관으로 달려갔다. 

 

”저, 저! 시간이 많이 지났네요! 이 이상 있으면 실례겠죠! 가, 감사했습니다! “ 

 

이럴 줄 알았다. 어머니는 장난을 너무 서슴없이 쳐서 문제란 말이지! 이대로는 오해의 소지를 가지고 헤어지게 된다. 그것만큼은 막기 위해 서둘러 프란을 따라 현관으로 달려갔다. 

 

”아, 프란! 잠시만! “ 

 

”으, 응? 왜, 왜 불러? “ 

 

”그게... 그러니까... 음... 잘...가?“ 

 

”...응! 내일 보자! “ 

 

프란은 살짝 붉어진 얼굴로 활짝 웃으며 내 눈을 마주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 눈빛은 과실에 꿀을 바른 듯이 아름답게 빛났다. 

 

프란이 현관 밖으로 나선 후, 어머니가 내게 천천히 다가오더니 팔꿈치로 내 허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응원한다구~ 여자 친구 합격이라구~“ 

 

”...그러게 왜 이상한 농담을 해서 애를 쫓아내요! “ 

 

”그렇지만... 아들이 처음으로 집에 데려온 친구가 저리 아리따운 숙녀인데 어떡해~“ 

 

”다음부터는 그래도 그러지 마세요... “ 

 

”알겠어, 그래도 엄마는 안심이야. 우리 아들이 잘 지내는 것 같아서. “ 

 

”...고마워요.“ 

 

시계를 보니 아직 10시다. 아, 이제 막 카페 열었을 텐데. 같이 가지 못 한 것이 아쉬웠다. 

 

”그나저나 델피, 프란이 딸기 좋아하니? “ 

 

”네, 엄청 좋아하던데요? 접시 위에 쌓여있는 딸기, 프란이 다 먹은 거예요. “ 

 

나는 거의 빈 접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나저나 오물오물 먹는 모습이 참 햄스터 같았었지. 꽤나 좋은 구경을 했었다. 

 

”안 그래도 주변에서 딸기를 계속 나눠 줘서 말이지... 처치 곤란이라고. 우리 집에는 과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잖아? 그럼 프란에게 나눠주고 오는 게 어때? “ 

 

”어디에 사는 어떤 침울한 아들은 그런 심부름 못해줄 것 같네요. 새로 딸 하나 두십시오. “ 

 

”아이~ 델피~ 왜 그래~ 내가 진심으로 그런 소리를 하겠어? “ 

 

”네. “ 

 

”이래서 눈치 빠른 꼬맹이는 싫다니깐... “

 

나는 곧장 아무 말 없이 내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난 결코 삐진 게 아니다. 잠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뿐. 

 

”아악! 델피! 미안해! 엄마 심심하단 말이야! 혼자 두지 말아 줘! “ 

 

이상하다. 분명히 오늘은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고, 이제 10시인데 온몸에 피로가 가득하다. 이게 맞나 싶다. 

 

그대로 침대에 힘없이 털썩 누웠다. 어쩐지 베개에서 묘하게 다른 냄새가 난다. 프란의 샴푸 향이라도 되는 걸까? 달짝지근한 복숭아 향이 코끝을 스쳐온다. 

 

침대에만 누우면 온갖 생각이 다 든단 말이지. 그나저나 새 하루 생활 패턴도 크게 바뀌었구나. 심지어 어제오늘은 매일 하루 루틴으로 있던 피아노 연주도 하지 않았다. 

 

내 성격도 원래 이랬었나? 기상, 학교, 피아노, 집. 이 순서가 나의 하루의 전부였다. 이런 무미건조한 삶에 요즘은 자극이 더해졌다. 

 

프란을 위해 피아노를 친다는 생각을 처음 한 날이 떠오른다.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프란에 대하여 몰랐던 사실도, 새롭게 안 사실도 수두룩하다. 

 

몰랐던 프란의 모습에 실망했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지만 망설임 없이 마음속에서는 답을 내렸다. 

 

실망할리가. 아직 짧은 시간이었지만, 기억에 깊이 남을 정도로 즐거움과 보람참이 있었다. 

 

프란의 연주가 듣고 싶다. 바이 올린 뿐인 울림을 듣고 싶다. 어째선지 그 연주 앞에서는 가끔 내가 불순물 같다고 생각이 든다.

 

이런 나날이, 계속되기를 마음속 깊이 바랐다. 

 

모든 것이 끝난 뒤에 뭘 할지도 생각하지 않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