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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흐린 구름, 추적추적 내리는 비, 살결에 스치는 바람. 오늘은 그런 날이다. 어쩐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이질감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오늘은 그런 모순적인 하루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모순이 존재한다. 굴러가지 않는 바퀴, 지워지지 않는 지우개, 내용물이 없는 책. 그리고...

 

우울함의 오라를 내뿜으며 학교에 오자마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책상에 엎드려 있는 프란. 

 

두 눈으로 보고 있지만 믿기지 않는다. 프란이 우울함 가득한 오라를 뿜어내며 책상에 엎드려 있다. 

 

프란의 주변 친구들도 이런 모습에 당황스러웠는지 일단 이유도 모른 채 위로를 해보기도, 분위기를 띄우려고 이야기 주제를 던지기도 해 보지만 결국 무용지물이었다. 

 

프란의 친구들은 프란에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조용히 프란의 곁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 프란의 힘이 되어줄 수 있을까. 어떤 일이 있었으면 저렇게 사람의 분위기가 확 달라질까. 쭉 생각했다. 

 

[딩- 동- 댕- 동-, 딩- 동- 댕- 동-] 

 

점심시간 종이 울리지만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다른 아이들은 전부 점심식사를 하러 간 반면, 프란은 계속 엎드려서 움직이지 않는다. 

 

공복은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예민하고, 감정적이게 만드는 별로 좋지만은 않은 느낌이니까. 프란이 그런 느낌을 받지 않았으면 했다. 

 

”.....zz....z....zz..“ 

 

아무래도 지금은 잠든 모양이다. 그렇다고 깨우기엔 조금 그러니... 

 

무슨 생각이었을까, 나는 곧바로 매점으로 달려가 빵 한 봉지, 초콜릿우유, 딸기 맛 사탕 한 봉지를 제 멋대로 사서 프란의 책상에 살며시 올려두었다.

 

다른 아이들이 오기 전에 나도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서둘러 급식실로 달려갔다. 

 

어쩐지 급식실에 사람이 별로 없다. 이 정도로 없었던 적은 없었는데? 설마 싶어서 오늘의 식단표를 확인해보니. 

 

가지 볶음, 콩자반, 도라지무침, 토마토 몇 알. 기타 등등. 

 

... 

 

어쩐지 매점에 사람이 많더라니. 

 

이런 식단에 프란을 깨워서 데려왔다면 분위기가 더욱 암울해졌을지도 모르겠다. 어찌 보면 불행 중 다행이다. 

 

음, 갑자기 프란의 상태가 심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오늘의 점심식사는 불가피한 사정으로 넘길 수밖에 없다. 

 

다시 조용히 반 안으로 들어서니 프란의 자리에 올려둔 간식거리가 사탕을 제외하고 전부 사라져 있다. 그나저나 벌써 다 먹은 거야!? 배가 고프긴 했나 보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말을 걸기에도 너무 애매한 분위기인데... 

 

아마도 오늘은 조용히 넘어가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텅 빈 위로를 하고 싶지는 않다. 가능하다면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지만 저 상태로는 무리다. 

 

그러기에 기다리자, 마음이 수그러들고 이야기를 할 만한 분위기가 된다면 말을 걸어보자. 나도 이럴 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니까. 

 

수업을 듣는 동안에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진정 내가 프란의 곁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피아노 연주밖에 없는 걸까. 

 

[딩- 동- 댕- 동- 딩- 동- 댕- 동] 

 

하교의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아이들은 하나 둘 돌아간다. 혼자 서둘러 가는 이도, 같이 웃으며 친구와 함께 하교하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이제 이 반에는 나와 프란밖에 남지 않았다.

 

...

 

어떡하지?

 

프란은 집에 가지 않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홀로 남겨두기엔 마음이 편하지 않은데!? 그렇다고 이런 분위기에서 말을 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피곤해서 잠든 것 일수도 있잖아? 프란이 먼저 나가면 다음에 나도 뒤따라서 나가자! 

 

...라고 생각한 것이 약 10분 전. 프란 특유의 새근새근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을 보니 잠든 것은 아닌 듯하다. 무언가 해보고 싶어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내가 너무나도 미워질 따름이다. 

 

결국 나는 3년 전과 다름이 없구나. 

 

누구를 위했던 피아노란 말이냐. 그냥, 전부 자기만족 이었던 거야? 역시... 아무런 의미가... 

 

[”내가 가장 힘든 순간에, 나의 밑바닥이 보이는 그 순간에도 내 옆에 있어주었단다. “] 

 

자책의 소용돌이에서 허우적거리는 도중, 아버지가 해주신 말씀이 떠올랐다. 하지만, 하지만 아직은 너무 섣불리 다가가는 게 아닐까? 오히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언제까지 가만히 멈춰 서 있기는 싫다. 그녀가 힘든 상활일 때. 곁에 있어주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이다. 

 

나는 곧장 가방에서 메모지 한 장을 꺼내 떨리는 손으로 샤프를 잡고 한 줄, 글을 써내려 갔다. 

 

(먼저 음악실에 가 있을게요. 오지 않으셔도 괜찮으니까요.) 

 

메모장을 한 손에 쥐고 천천히 프란의 책상에 살포시 올려두었다. 서두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교실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푸하아... “ 

 

너무나도 긴장한 탓인지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 교실 문 옆 벽에 잠시 기대어 앉았다. 너무나도 나답지 못한 짓을 저질러 버렸다.

 

오늘따라 빗소리가 귓속에 맴돈다. 추적추적, 쏴아아. 이런 의성어가 너무나도 어울리는 날씨다. 어두운 잿빛 하늘이 마음을 감성적이게 만드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럴 일은 없지만, 프란이 바로 나올 수도 있으니까 얼른 음악실로 가자. 그러면 많이 애석한 상황이 돼버릴 테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발을 옮긴다. 아무런 생각 없이, 아무런 말도 없이. 교실 앞 복도를 천천히 걷는다. 

 

흰 복도의 검은 창문 사이로 바람이 불어온다. 그저 걸었다. 걷고, 걸었다. 어느새 음악실의 복도에 다다랐다. 

 

음악실의 앞에 도착해 붉고 커다란 문의 손잡이를 잡고 연다. 익숙하지만 낯선 장소가 나를 반긴다. 

 

피아노가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연주를 하지 않을 수는 없지. 나는 곧장 가방을 열어 완성된 악보를 꺼냈다. 혹여나 프란이 이곳에 온다면, 조금이라도 위로를 보태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푹신하면서 단단한 피아노 의자에 앉아, 악보를 악보대에 살며시 놓았다. 이 곡을 완성본으로 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일까? 

 

뭐, 아무래도 좋은가. 

 

[♩ ♪ ♫ ♬] 

 

늘 손가락으로 눌러가는 똑같은 건반. 다른 곡도 충분히 연주할 수 있지만 이 곡이 아니면 피아노를 친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나는 과연 최선을 다한 것일까? 이 정도 했으면 충분한 걸까? 

 

그럴 리가.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조금만 더 용기를 내서 진작 말을 걸었다면, 내가 겁쟁이가 아니었다면... 

 

[끼이익] 

 

고개를 반쯤 숙인 프란이 천천히 음악식의 문을 열고 책상 의자에 조심히 앉는다. 

 

하지만 연주를 멈추지 않는다. 오늘 같은 날은 바이올린 없는 텅 빈 피아노가 어울릴 만큼 울적하니까.

 

음악이 대단원을 지나 어떠한 진동도 공기 중에 울리지 않게 될 때쯤, 프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델피, 오늘은 그냥 웃어주라. “ 

 

”...네?“ 

 

”그냥... 웃어줘. “ 

 

프란이 차분한 표정으로 눈물을 머금은 채 나지막이 말했다. 울먹이는 목소리에 나는 다른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주변 책상 의자를 하나 끌어서 프란 앞에 놓고 바로 앉았다. 

 

나는 프란을 인위적인 미소로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언제쯤 이였을까,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어봤던 날이. 

 

옛날에, 혼자서 피아노 연주를 하며 프란을 생각하다가 우연히 거울을 봤던 기억이 있다. 

 

그곳의 나는 어찌나 서글프고 행복한 미소를 짓던지, 나도 내가 낯설었을 정도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 만큼은 그 미소가 어울린다. 프란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그 미소가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그 어떤 인위적인 행동도 필요 없다. 그래서 그냥 프란을 바라봤다. 내 눈에 프란을 전부 담았다. 

 

프란은 내 표정을 본 건지 서둘러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런, 실수를 해버린 걸까? 조금 마음이 아파왔다. 

 

무언가 이 분위기를 환기시킬 이야기라도 해볼까. 난 예전에 아버지가 해주신 이야기가 떠올랐다. 

 

”프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줄까요? “ 

 

”...응“ 

 

”우리의 DNA의 질소, 치아의 칼슘, 혈액의 철, 심지어, 딸기케이크의 탄소는 붕괴하는 별 내부에서 만들어진 거예요. 즉, 우리는 별들로 만들어진 거죠. “ 

 

”...그치만 사람은 빛나지 않는 걸? “ 

 

”당신은 빛나요. “ 

 

”...응?“ 

 

”누구보다 당신은 빛나요. 언제나, 언제나 당신은 빛나요. 호박같이 주홍색 아름다운 보석이 빛나는 것처럼, 당신은 빛나요. “ 

 

”...거짓말.“ 

 

”이 말이 거짓말이면 제가 피아노도 시작을 안 했을걸요. “ 

 

”...델피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말을 잘하는구나. “ 

 

”프란이 아니라면 이런 말도 안 나오는걸요. “ 

 

프란은 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델피, 내 이야기 들어줄래? “ 

 

”기꺼이 그럴게요. “ 

 

프란이 크게 심호흡을 몇 차례 마친 후, 지금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회 날은 다가오는데, 부모님 압박이 너무 심해져. 어제만 해도 집에 들어올 때 아침 일찍부터 어딜 돌아다니는 것이냐, 언제까지 놀기만 할 것이냐고 꾸중을 들었다? “ 

 

”...부모님이 나를 대하는 무게가 옛날과는 너무나도 달라졌어. 알고 있다고! 다 나를 위해서, 나를 걱정해서 하는 꾸중인 건 안다고! “ 

 

”그래도, 난 아직 머릿속은 어린아이인 걸, 지금 하는 이 행동이 후에는 그냥 아무런 의미 없는 한 때의 추억이더라도 내겐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한걸... “ 

 

”딱 지금이 좋단 말이야. 장래로 바이올린으로 직업을 가지진 않겠지. 그냥 취미로 순전히 즐길 수 있는 순간을 더 지니고 싶단 말이야... “ 

 

”대회가 끝나면 나도 뭐가 남는지 몰라. 해야 할 공부는 쌓여가겠지. 하지만 하고 싶지 않아. “ 

 

”중학교 때는 적당히 해도 성적이 나와서 괜찮은 줄 알았지! 그런데 고등학교는 엄청 달라서 그렇게 놀다가 결국 다른 학생의 발판만 될 뿐이래!“ 

 

”1년 사이에 바뀌는 지위는 이렇게나 다른 거야? 그럼 고등학생과 성인의 차이는 얼마나 큰 거야? “ 

 

”어른이 되는 게 너무 무서워. 평생 학생이고 싶어. “ 

 

”나 진짜 아직도 어린애다. 그렇지? “ 

 

프란이 여태까지 마음속으로만 품어오던 이야기를 물이 끓어올라 넘치듯 전부 토해낸다. 

 

목소리는 점차 격해지고 분위기는 더더욱 침잠해 간다. 목소리는 점차 커져가고 상처는 점점 벌려진다.

 

”역시, 다 놔버리고 공부에 전념하는 게... “ 

 

”프란. “ 

 

”...응?“ 

 

”듀엣 대회. 꼭 우승해야 하는 거죠? “ 

 

”...우승하고 싶어. 어릴 적부터의 꿈인걸. “ 

 

”그 꿈은 왜 가지시게 된 거예요? “ 

 

”...옛날에 TV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듀엣을 본 적이 있거든. 그곳에서의 연주자들이 너무 아름답고 고귀해 보이는 거야. 아마도 그곳에서부터 시작된 간단한 동기가 아닐까. “ 

 

”제가 왜 피아노를 치는지 말씀드린 적 있나요? “ 

 

”...아니.“ 

 

”알려드릴까요? “ 

 

”...궁금하게 해 놓고? “ 

 

”당신 덕분이라고 하면 믿으실까요? “ 

 

”그게 무슨 소리야? “ 

 

”...말 안 해줄래요. “ 

 

”...나 장난칠 기분 아니야. “ 

 

”대회에서 우승하면 말씀드릴게요. “ 

 

”...델피, 너 진짜! “ 

 

프란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화를 낸다. 주먹을 꽉 쥐고 나를 바라본다. 나는 이런 사람이었나? 저 타오르는 눈빛이 퍽 아름다워만 보인다. 

 

”어때요? 이제 우승해야 할 이유가 생겼죠? “ 

 

프란은 곧 커다랗게 한숨을 푹 내쉬더니 풍선에 바람 빠지듯 의자에 앉았다. 

 

”...델피, 너까지 그러기야? 진짜 너무하네. “ 

 

”누구 옆에 있으니까 성격이 이렇게 변하더라고요. “ 

 

”...그거 내 이야기지. “ 

 

”잘 모르겠네요. “ 

 

”정말이지, 전혀 위로가 안 되잖아! “ 

 

”정말로 위로가 필요한 거예요? 

 

“...아니, 그냥 그렇게 웃어줬으면 좋겠어.” 

 

프란은 손에 꼭 쥐고 있는 사탕 봉지를 뜯고 두 개를 꺼내 하나는 내 앞에 놓았다. 

 

“...먹어.” 

 

사탕을 입에 넣으니 색소향 가득한 딸기맛이 혀 위로 굴러다니며 소리만을 음악실에 남겨 간다. 

 

“사탕, 맛있네요.”

 

“...네가 사 온 거잖아. 모를 줄 알고? 나 딸기 맛 좋아하는 거 너 밖에 몰라.” 

 

“그래도 혼자만 꼭 끌어안지 말고, 가끔은 이렇게 나눠먹는 것도 좋죠? 달든, 쓰든.” 

 

“...그러네.”

 

“당신의 꿈과 다를 게 없네요. 이런 달달한 꿈은 혼자 맛보는 것보다 같이 나누면 행복이 더 커지나 봐요.”

 

“...응.” 

 

“프란, 이번 대회가 마지막 기회라고 하셨죠?” 

 

“...그래, 그러니까 이렇게 부담스러운 거라고.” 

 

“그럼 저에게도 마지막 기회예요.” 

 

“...아까부터 이상한 소리만 한다? 네가 피아노를 치는 이유가 나 때문인 것도 아니면서.” 

 

“하핫. 

 

”...?” 

 

“그나저나 비 오네요. 우산은 잘 챙겨 왔나요?” 

 

“아.” 

 

“일기예보를 보는 건 기본이라고 누가 말했었는데 말이죠?” 

 

“오늘 진짜 운수도 지지리도 없지! 세상이 날 미워하나 봐아...” 

 

“프란, 비 맞는 거 싫어하진 않는다고 하셨죠?” 

 

“...응? 그랬었지...?” 

 

가끔은, 마음을 굳게 먹고 미친 척 하는 것도 좋겠지.

 

나는 즉시 가방에서 휴대용 우산을 꺼내, 창 밖에 던져버렸다. 프란은 그것을 보더니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야! 델피! 뭐 하는 거야!?” 

 

“저도 우산을 두고 와서 그런데, 같이 비 맞으면서 저희 집이나 안 갈래요? 가깝잖아요.” 

 

“...허, 델피. 너 제정신이 아니었구나? 상상 그 이상이야... 처음 만날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누구 옆에 있으니까 성격이...” 

 

“으이! 알겠어! 알겠다고! 후회하지 마? 일부러 천천히 비 맞으면서 갈 거니까!” 

 

“그래요, 가요. 가끔은 이런 일탈도 재밌잖아요?” 

 

“...히히, 맞아! 일탈이 재미있는 거지!” 

 

“그래야 프란답죠. 그렇다고 지금 모습이 프란이 아니라고는 못하지만.” 

 

“그래! 나는 나야! 너도 날 정의하지 못할 거야... 하하!” 

 

“...근데 가방은 두고 가야겠어요. 책까지 전부 젖어버리면 곤란해서...” 

 

“아, 그건 나도 그래.” 

 

나와 프란은 음악실에서 나와, 교실로 돌아와 자신의 가방을 각자의 책상 위에 올려두고 학교 정문으로 나왔다. 

 

날이 그렇게까지 춥지는 않지만, 빗줄기는 굵어 간다. 바람은 세진 않지만, 비에 몸을 적시기엔 충분하다.

 

프란이 먼저 빗속으로 달려간다. 젖는 것이 두렵지 않다는 듯, 오히려 마주하게 되어 반갑다는 듯 쾌활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네가 제안한 건데, 마다하진 않겠지?” 

 

“그럼요! ...사실 조금 후회되지만요.” 

 

나 또한 빗속으로 달려간다. 그대로 프란의 옆에 다다르니 곧 내 손을 잡고 이미 빗물로 젖은 눈으로 나를 주시한다. 

 

“...프란? 그, 갑자기 그렇게 손을 잡으시면...” 

 

“역시, 네 쪽빛 눈은 비 오는 날과 어울린단 말이야.” 

 

“...그런가요?” 

 

“그래서 그 눈, 좋아해. 비 오는 날이 떠오르거든! 하지만 맑아, 그 부분이 좋아.” 

 

순간 ‘좋아해’ 라는 단어에서 심정지가 올 뻔했지만, 빗물이 머리를 식혀줘서 그런 걸까. 다행히 겨우 땅 위에 서 있을 수 있었다. 

 

빗물 젖어든 손들이 서로를 마주 잡으며 묘한 온기를 피부로 나눈다. 미끄러운 만큼 떨어지지 않도록 꽉 붙잡는 손들이 나와 프란 사이에서 흔들린다. 

 

프란은 걷다가 한 바퀴 빙글 돌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며 멀리 달려가 내게 손을 흔들기도 하였다. 

 

옷에 빗물이 스며들어 무겁기도, 조금은 오한이 들기도 했지만 지금 이 배덕감에는 그 어떤 변명도 그저 방해일 뿐이었다. 

 

“근데 프란, 옷은 어떡하죠?” 

 

“음? 뭐가?” 

 

“젖은 옷 그대로 입고 집까지 돌아가실 거예요?” 

 

“아.” 

 

“일단 급한 대로 집에 도착하면 제 옷이라도 빌려드릴 테니까...” 

 

“오오~ 델피의 옷? 이건 귀하네! 우리 집의 가보로...” 

 

“돌려받을 거예요.” 

 

“...칫” 

 

“얼른 가기나 해요. 번개라도 맞으면 어떡해요.” 

 

“나를 죽이지 못할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콰광! 우르릉 쾅!] 

 

“...죽으면 의미가 없지! 얼른 가자!” 

 

“그래요, 얼른가요.” 

 

[찰팍거리는 걸음걸이가 거리에 새겨가고, 서로를 번갈아 돌아보며 상대를 눈동자에 담아 간다. 

 

두 사람은 청록색 비가 내리는 하늘 아래, 앞은 잘 보이지 않지만 마주 잡은 손의 따스함은 너무나도 명확하게만 느껴졌다.

 

이 비가 지나가면 찬란한 해가 모습을 틔울 것이라는 희망 하나 마주 안고, 싱긋 웃었다.]

 

 

7. 

 

 

“으아~ 흠뻑 젖었어~ 물에 젖은 옷이 이렇게나 무거운 거였어?” 

 

“프란, 비 맞는 거 좋아하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당연히 이런 느낌도 익숙하실 줄 알았는데.” 

 

“당연히 이렇게 온몸이 젖을 때까지 비를 맞진 않지! 아무리 내가 생각 없이 살아도 그 정도는 아니야!” 

 

“...알고 있었군요?” 

 

“...델피!” 

 

“농담이에요 농담. 얼른 들어와요. 수건 드릴게요.” 

 

“엥? 비를 맞았는데 닦기만 하는 거야? 나 씻고 싶은데!” 

 

“...남에 집 들어와서 갈아입을 옷도 없이 욕실에서 씻는다고요?” 

 

“어? 델피? 왜 갑자기 모른 척이지? 네가 네 집으로 오라며! 가깝다고!” 

 

“이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그럼 이대로 물기만 닦고 너의 집 우산 쓰고 집에 돌아가라고?” 

 

“...욕실 옆에 건조기 있어요. 2시간이면 다 마를 거예요. 아까 말했듯이 급한 대로 제 옷이라도 몇 개 욕실에 놔둘게요.” 

 

“앗싸! 고마워~ 델피 집 욕실을 어떻게 생겼을까~” 

 

“그런 거 궁금해하지 마세요! 그러고 보니 프란의 부모님께는 말씀 안 드려도 돼요?” 

 

“우으...! 내가 그래서 더 화났던 거라고! 잔소리로 압박은 다 주고선 자기들끼리 여행 가버리는 게 어디 있어! 그것도 1박 2일로!” 

 

“알겠어요, 씻으면서 머리 좀 식히세요. 나오시면 딸기를 그릇 가득히 준비해둘 테니까요.” 

 

“흥! 내가 그런 걸로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다면, 크나큰...!” 

 

“프란, 입에 침 흘러요.” 

 

“오예~ 지! 얏호!”

 

프란을 욕실로 들어가고 나니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무언가 잘못되었나? 생각한 찰나, 프란이 욕실 문을 약간 열고 그 틈 사이로 얼굴을 살짝 내밀곤 말했다. 

 

“...훔쳐보면 안 돼? 알겠지?” 

 

“프란!!!” 

 

“히히, 나도 농담 한번 해봤어~” 

 

“...한 방 먹었네.” 

 

나는 내 방으로 걸어가 옷장을 열어보았다. 가볍게 입을 수 있을만한 얇은 티셔츠와 평범한 반바지. 아마 이거면 충분할 터이다. 

 

옷을 욕실 앞에 가져다 놓으니 안에서는 샤워기의 소리와 프란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그다지 잘 부르지는 못하지만. 

 

아니, 굳이 따지면 못 부르는... 

 

“델피! 밖에 있는 거 아니지~?” 

 

“...” 

 

“이상하다? 발소리가 들렸는데...” 

 

샤워기의 물소리와 자신의 노랫소리를 뚫고 발소리를 듣는 프란의 청력이 이따금 놀라웠다. 돌아갈 때는 까치발로 조심조심 걸어갔다. 

 

그나저나 듀엣 악보를 다 쓰긴 했는데 본격적으로 연습을 하진 못했다. 한 달,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 대회를 목표로 한다면 필시 짧은 기간이다. 

 

하지만 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부담감은 들지 않는다. 그야, 프란은 흔들리더라도 반드시 해낼 것이라는 믿음이 마음 한구석에 잡혀있으니까.

 

프란이 다 씻을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딸기를 하나씩 씻고, 꼭지를 제거해 접시에 하나하나 쌓아 올린다. 

 

[달콤하고, 새콤한 맛이 일품!] 이라고 쓰여 있는 스티로폼 상자 3박스. 저번에 프란이 한 박스를 다 먹었었지... 넉넉하게 준비해둬야겠다. 

 

냉장고에 남아있는 큰 우유팩을 꺼내 믹서기에 절반쯤 부어주고, 약간의 딸기와 꿀을 두 세 숟갈 넣은 뒤 딸기의 식감이 느껴질 수 있도록 조금만 갈아준다. 

 

서랍에서 어머니가 숨겨둔 크래커와 냉장고에서 아버지가 숨겨둔 슬라이스 치즈를 꺼내, 딸기와 함께 차곡차곡 올려 딸기 치즈 카나페를 만든다. 

 

...부모님도 이해하시겠지. 

 

딸기 총집합 디저트 세트의 완성이다. 쟁반에 올려 전부 거실로 옮기고 프란이 나오길 기다리기만 하면 끝이다! 

 

“히야- 개운하다! 그나저나 이 달콤하고 상큼하며 내 입맛을 돋우는 냄새는...?” 

 

프란은 목에 수건을 두른 채로 달려와 곧장 책상 앞에 앉았다.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이 물방울로 빛나고 묘하게 느슨한 티셔츠에 시선이 갔지만 악으로 버텼다. 

 

“델피! 이게 다 뭐야!? 그 짧은 시간 안에 이걸 다 만든 거야? 델피는 못하는 게 없구나!” 

 

“그야 프란이 1시간 걸렸으니까요.” 

 

“그 정도는 당연하고라고! 30분은 씻는다는 마음을 먹어야 해서 어쩔 수 없는 거야.” 

 

“머리카락이라도 말리고 오시지. 누가 뺏어 먹는 것도 아니니 성급하지 않아도 돼요.” 

 

“이런 진수성찬을 보고도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감정이 있는 사람이 아닐걸? 아무튼, 잘 먹을게! 델피!” 

 

“그나저나 저번엔 죄송해요. 저희 어머니가 장난을 워낙 좋아하시는 분이라 실례를 끼쳤네요.” 

 

“아니야!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는걸! 오히려 좋았어. 나를 그렇게 예뻐해 주시던데,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어?” 

 

“그렇다고 없는 말 안 지어내셔도 괜찮아요. 뒤끝 없이 가벼운 분이라서 다음날이면 전부 잊으시거든요. ...본인이 잘못한 게 있으면 하루 종일 마음을 졸이시지만.”

 

“힛, 난 말 지어낸 적 한 번도 없는데.” 

 

“네? 뭐라고 하셨어요? 잘 못 들었어요.” 

 

“음~?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걸! 히히...” 

 

프란은 간식들을 먹으면서 행복에 겨눈 표정으로 웃고 있다. 우울한 사람이 어디 있었냐는 듯이 표정이 좋아 보인다. 프란이 저런 얼굴을 지을 수 있도록 앞으로 더 노력해야지... 

 

“그나저나 오늘 비가 멈출 생각을 안 하네요.” 

 

“델피, 설마 무서운 거야? 막 천둥을 무서워하는 아기처럼!? 델피도 역시 여린 면이...” 

 

[우르릉! 쾅! 쾅!] 

 

“흐에엑!” 

 

“...프란?” 

 

“...델피! 이 카나페 엄청 맛있어! 너도 먹어봐!” 

 

프란은 내 입에 강제로 카나페를 쑤셔 박으며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막았다. 프란도 여린 면이 있었구나. 비명소리라고 해야 할까? 살짝 이상한 소리가 퍽 귀여웠다. 

 

“그러고 보니 지금 시간이 몇 시죠?” 

 

“음... 6시 다되어가는데?” 

 

“건조기 다 돌아가면 7시 되겠네요.” 

 

“그럼 나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쫓겨나는 거야...? 날 버리지 마 델피~!” 

 

“프란, 그렇다고 저희 집에서 재워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이젠 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알아서 눈치를 채네! 나 재워줘~ 여기가 아득하단 말이야~” 

 

“당신의 따스하고 익숙한 집이 있잖아요.” 

 

“아무도 없는 집에 어여쁜 숙녀 혼자 내버려 둘 셈이야? 심지어 저 어두운 밖에 나 혼자 우산 하나 덩그러니 들고 집에 가라고?”

 

“물론 같이 가드리는데...” 

 

“아 몰라~ 재워줘~ 나 여기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갈 거야!” 

 

“...그럼 옷 다 마를 때까지 비가 멈추지 않으면 소파 자리 정도는 내어 드릴게요.” 

 

“그거면 충분해! ...잠만, 보통 이럴 때는 나를 침대에 재우고 네가 다른 장소에서 자야지!” 

 

“손님 입장치고는 생각보다 당당한데요...? 그렇지만 공간도 넓은 집 안에 굳이 제 방에서 두 명이 전부 잘 필요는 없잖아요.” 

 

“델피는 어떻게 보면 이런 면에서는 정말로 눈치가 없단 말이야! 내가 손님이고, 손님은 왕이야! 내가 왕이니까 내 마음대로 한다! 예~!” 

 

프란은 간식들을 남겨둔 채 저번처럼 내 방으로 달려가 침대에 엎어 누웠다. 절대로 일어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다소 보였다. 

 

“우우움... 안 일어날 거야. 이 침대는 이제 내 거야!” 

 

“알겠어요, 알겠어요. 제가 소파에서 잘 테니까...” 

 

“뭐어~? 나 혼자 이 방에 방치하겠다고~? 침대 아래 괴물이 나를 잡아먹으면 어떡해~!” 

 

“그건 또 무슨...” 

 

“어 잠만, 침대 밑?” 

 

“아.” 

 

프란은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와 같이 침대 아래를 쓱 둘러보더니 눈을 반짝이며 무언가를 잽싸게 꺼내기 시작했다. 

 

“찾! 았! 다! 빨! 간! 책!” 

 

[우당탕당 동물 백과사전 100종!] 

 

“...델피, 너 진짜 재미없다. 아니, 그나저나 이게 왜 침대 아래에 있는 거야? 아니면 너 혹시 이런 취향...?”

 

“아니 그건 또 무슨...” 

 

“농담이야~ 에이, 재미있는 구경이라도 할 수 있을 줄...” 

 

“저를 도대체 뭐로 보신 거예요...” 

 

“아 맞다! 다 친구 집 오면 그거 해보고 싶었어! 앨범 보기!” 

 

“그거 저의 어머니가 개인 보관함에 그 누구도 훔쳐가서는 안된다며 자물쇠로 잠가 두셨어요.” 

 

“헐, 널 정말로 사랑하시나 보다. 참 여러모로 말이지.” 

 

“참 이상한 쪽으로 말이에요.” 

 

프란은 풀이 죽은 표정으로 침대에서 뒹굴 거리고 있었다. 재미있는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처럼 쭈글쭈글 웅크려 있다.

 

“중학교 졸업 앨범이라도 같이 볼래요? 그건 있는데.” 

 

“너 나랑 같은 중학교 나온 건 알고 있지?” 

 

“그래도 같이 보다 보면 이런저런 이야기라도 있지 않겠어요?” 

 

“너무나도 바보 같은 소리야... 당장 보자!” 

 

신난 듯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프란을 뒤로하고 책장에 꽂혀있던 중학교 졸업 앨범을 꺼내 침대 위에 펼쳤다. 

 

“어디 보자! 내 귀여운 1학년 때 사진! 나 이때 엄청 작았구나!”

 

“지금 보면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은데 말이죠. 헤어스타일이나 옷 같은 경우도 보통 같은 걸 돌려 입는 듯 보였으니까요.” 

 

“사실 맞아! 여러 가지 옷을 골라 입는 것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옷을 계속 입고 싶거든!” 

 

“바람막이는 늘 허리춤에 묶고 다니시던데 소중한 거예요?”

 

“응! 무척이나! 내 생일 때 어머니는 바이올린을, 아버지는 바람막이를 사주셨거든! 나는 어릴 때 키가 이미 다 커버려서 바람막이는 지금 입어도 잘 맞아!” 

 

“나름 확고한 옷에 대한 철학이 있으시나 봐요. 입학식 날에도 사복에 바람막이 차림 이었잖아요.” 

 

“델피는 나를 생각보다 유심히 봐주고 있었구나! 이거 기쁜 걸? 히히...” 

 

“그만큼이나 눈부신데 어떻게 시선이 가지 않을 수 있을까요. 프란은 누구에게 고백받아본 적 없어요?” 

 

“응! 없는데? 나도 이해가 안 돼! 나만큼 멋진 여자가 어디 있다고! 아, 델피 너는 여자 친구 사귀어 본 적 있어?” 

 

“...놀리는 거죠?” 

 

“흐음...? 없구나. 그렇구나...” 

 

프란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웃기 시작했다. 저러면 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걸까. 적어도 프란은 타인을 비웃는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기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델피는 이상형 있어?” 

 

“...갑자기요?” 

 

“그렇게 갑작스러운 이야기도 아니지! 각자 마음속의 유니콘 이야기야. 그러니까 이상형 아니겠어?” 

 

“...말하기 좀 부끄러운데요.” 

 

“에이~ 친구 사이에 왜 그래~ 지금 막 파자마 파티 같은 느낌이라 되게 좋은데!” 

 

“내면의 약함을 이겨내려는 사람일까요. 뭐, 그런 사람들이 저에게는 빛나 보이거든요.” 

 

“...델피는 빛나는 사람을 좋아해?” 

 

“굳이 따지면 그렇죠?” 

 

“그, 그치만 델피. 아까 나한테도...” 

 

“프란은 이상형이 뭔데요? 아, 죄송해요. 뭔가 말하려고 하셨어요?” 

 

“아, 아니야. 음... 나는 역시 힘들 때 내 곁에 있어주는 사람일까? 따뜻하잖아. 그치...?” 

 

“아, 저희 아버지랑 같은 말을 하시네요.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가장 힘들 때 곁에 있어주라고 하셨거든요.”

 

“네 아버지는 뭘 아는 사람이네. 그럼... 넌 좋아하는 사람 있어?” 

 

“말 안 할 거예요.” 

 

“재미없어!” 

 

“당신도 제가 물어보면 답 안 해줄 거잖아요!” 

 

“역시, 델피는 날 잘 안다니까. 헤헤...” 

 

프란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비는 얇아져만 가며 어느새 고요한 밤만이 이 순간을 감쌌다. 구름은 바람에 전부 날려 찬란한 별들과 높게 뜬 초승달이 밤하늘을 장식했다. 

 

프란은 하품을 하며 침대 위를 뒹굴뒹굴 굴렀다. 핸드폰은 있지만 하기는 싫은 모양이다. 

 

시간도 많이 늦었으니, 나는 아까 먹은 간식을 치우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마쳤다. 

 

“...그래서 델피, 어디에서 잘 건데?” 

 

“방바닥에서 자려고요. 다른 장소에서 자면 당신이 또 삐질 거 아니에요?” 

 

“그렇지만, 모처럼 처음으로 친구 집에서 자보는 건데! 이런 거 해보고 싶었단 말이야!” 

 

“알겠어요. 내일 7시 30분 알람 맞춰놓을 건데요 괜찮아요?” 

 

“뭐야, 너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 

 

“학교 가야죠...?” 

 

“내일 개교기념일인데?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거잖아? 내가 내일 학교 가는 날 이었으면 이렇게 무례하게 자고 가진 않지?” 

 

“...무례인 것은 알고 계셨군요?” 

 

“그럼 델피~ 잘 자~” 

 

“...그래요, 불 끌게요?” 

 

“응! 히히...”

 

[딸깍]

 

평소와는 익숙지 않은 딱딱한 방바닥이지만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다. 오히려 딱딱하고도 시원한 바닥이 기분 좋았다. 

 

“델피.” 

 

“네?‘ 

 

”오늘 고마워. 많이 우울했거든. “ 

 

”굳이 감사인사는 하지 않으셔도 돼요.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쁜걸요. “ 

 

”델피. “ 

 

”또 왜 불러요. “ 

 

”나, 할 말 있어. “ 

 

”뭔데요? “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면 말할래.” 

 

“그런가요? 궁금하게 해 놓고 거기서 끊으시면 너무한데요.” 

 

“너도 피아노 치는 이유 알려주지 않았잖아. 똑같은 거야.” 

 

“우리 각자 우승을 위해 열심히 해야겠네요.” 

 

“그치? 나름의 동기부여라고~” 

 

검고 어두운 방 안에 프란의 인기척이 느껴지며 목소리만 귀에 들려온다. 평소에 혼자 잠을 자는 내게는 너무나도 낯선 상황이지만, 모호한 편안함이 머릿속을 매웠다. 

 

“델피.” 

 

“이러면 잠 못 자요.” 

 

“알아, 그래도 말이야, 우움... 그게...” 

 

“천천히 말하세요. 시간도 많고, 독촉하는 사람도 없으니까요.” 

 

“내일... 밖에서 같이 놀지 않을래? 이 근처에 재밌는 거 많이 알고 있거든!” 

 

“저야 영광이죠. 저번처럼 일찍 나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늦게까지 잠이나 잘 까요?” 

 

“좋아! 기대된다! 아, 나 이러면 잠 못 자는데.” 

 

“그럼 제가 다른 방으로 가면 조용하게 잠들 수 있지 않을까요?” 

 

“쿨..... 쿨.....” 

 

프란은 입으로 쿨쿨 소리를 내면서 열심히 자는 척을 하고 있다. 사람 다루기는 참 쉽단 말이지. 

 

오늘만큼은 다른 잡념이 들지 않고 잠이 솔솔 오기 시작한다. 프란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이따금 편안해졌다. 

 

하지만, 이런 날도 얼마 남지 않았겠지. 전부 끝나버리면, 나는 프란 곁에 서 있을 가치가 있는 걸까? 

 

하지만 이 순간을 우울함으로 채우긴 싫기 때문에 생각을 멈추고 잠에 드는 것에 집중했다. 

 

아득하고 아득한 안식 속으로 빠져들며. 

 

 

8. 

 

...피. 

 

...델피! 

 

”델피 일어나!!! “ 

 

”으어어윽 뭐, 뭐야! “ 

 

”델피! 벌써 9시라구! 일어나! 해가 중천에 떴어! 밥 먹어야지! “ 

 

”아...? 아, 네. 금방 준비해드릴게요... “ 

 

”무슨 소리야! 내가 다 차려 놨거든~ 가끔 내가 밥도 해 먹거든~“ 

 

프란이 해준 밥... 프란이 해준 밥? 아니, 잠만 뭐라고? 

 

”프란이 식사 준비를 했다고요? “ 

 

”그럼! 내가 이런 거라도 준비해야지! 아무것도 안 하고 얻어먹기만 하는 건 염치가 없잖아! “ 

 

”염치없는 건 알고 계셨...“ 

 

”아아! 알겠으니까! 너 자꾸 그러면 나 혼자 다 먹을 거야~“ 

 

”장난이에요. 얼른 가서 먹어요. 궁금하네요. 프란이 만든 식사라니. “ 

 

”헤헤... 기대하시라! “ 

 

부엌에 점차 가까워지니 꽤나 맛있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고소하면서도, 약간의 기름 향이 내 코를 간지럽혔다. 식욕이 돋우는 향에 침이 조금씩 고여 간다. 

 

요리를 보기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다. 

 

”와 프란, 이게 뭐예요? “

 

”볶음밥이지! 엄청 맛있어 보이지 않아? 이야~ 내가 봐도 침이 줄줄 흐르는 걸? “ 

 

”볶음밥이 원래 이렇게 진한 갈색 이었나요? 춘장이라도 볶은 게 아닌지... “ 

 

”보통 이런 거 만들면 거짓말으로라도 맛있어 보인다고 해줘야 매너 아니야? 흥! 델피 너무해! 먹지 마! 나 혼자 다 먹을 거니까... “ 

 

풀이 죽은 얼굴을 하며 홀로 쓸쓸히 식탁 위에 앉아 수저를 들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나도 눈치가 없었나? 하지만 의외로 맛은 있을 수도... 

 

”퉷! 부엑! 으이! 이게 무슨 맛이야! 더럽게 맛없어! “ 

 

”... “ 

 

”아. “ 

 

눈이 마주쳤다. 풀이 죽은 표정엔 이젠 약간의 서운함과 억울함이 서린 강화된 표정이 되어있다. 프란, 요리 못하는구나. 

 

”일단 그래도 맛은 봐야겠죠? “ 

 

”아, 아! 델피 잠만! 먹지 말아 줘! “ 

 

곧장 프란의 정성이 아마도 가득 들었을 볶음밥을 크게 한술 떠서 입 안에 넣었다. 왜인지 모를 바삭함과 혀로 느껴지는 고소함과 짭짤함이 어우러져 꽤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우으... 델피... 미안... 멋대로 너희 집 식재료를 음식물 쓰레기로 만들어 버려서... “ 

 

”나쁘지 않은데요? “ 

 

”그치? 맛없지... 잠만, 뭐? “ 

 

”굳이 따지면 맛있는 편이에요. 확실히 보기엔 별로일 수 있어도 볶음밥으로써는 합격점이에요. 계란이랑 이거 저거 넣으시길 잘하셨네요. “ 

 

”아니, 그거 맛 엄청 없던데... 이거 나 놀리는 거지! 고도의 돌려차기 맞지!? “ 

 

”진짜로 맛있다니까요. 이거 혹시 더 있어요? 제 입맛은 그다지 까다롭지가 않아서 말이죠. 괜찮다면 한 그릇 더 주세요. “ 

 

”델피... “ 

 

맛있게 볶음밥을 먹던 중, 프란이 갑작스럽게 달려와 내 등을 안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놀라 사례가 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컥! 콜록! 프란! 갑자기 그렇게 놀라게 하시면...! “

 

”델피는 진짜 너무너무 사람이 착하단 말이야! 이 고마움을 어찌 표현할지 모르겠으니 순순히 내 포옹을 받아! “ 

 

”아, 아니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어, 얼른 떨어지세요! “ 

 

”...델피는 내가 싫은 거야? “ 

 

”아니, 아니, 그런 말이 아닌 건 프란이 더 잘 알잖아요! 정말이지 너무 짓궂어요! “ 

 

”네가 다 먹을 때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아이고, 이 사람을 어찌해야 하나. “ 

 

”맞다! 우리 오늘 같이 놀기로 했잖아! 내가 재미있는 거 잔뜩 알고 있다고~ 델피는 친구랑 가고 싶은 장소 있어? “ 

 

”...친구 없는 저에게 그런 걸 물어봐도 해드릴 수 있는 답이 없는데요. “ 

 

”흠... 뭐, 일단 나가보면 답이야 나오겠지! “ 

 

”우리 한 달 뒤가 듀엣 대회인 건 알죠? “ 

 

”...힝“ 

 

”알겠어요. 이왕, 오늘 신나게 놀고 다음부터 듀엣 대회에 집중하는 게 어때요? 그냥 제대로 놀아버리면 오히려 더 도움이 될 수도 있죠. “ 

 

”아주 좋은 생각이야. 그래야 나의 델피지! “ 

 

등으로 느껴지는 프란의 체온에 정신을 꽉 붙잡고 있었지만, ‘나의 델피’ 라는 단어 앞에서 이성적인 사고판단 능력을 잃어버렸다. 

 

”... “ 

 

”음? 델피! 정신 차려! 먼 산이라도 보고 있는 거야? 아잇 참... “ 

 

”... “ 

 

”아, 맞다! 어제 건조기에 돌린 내 옷! 다 구겨졌겠다! 크게는 상관없지만... 그럼 나는 옷 갈아입고 올게! “ 

 

프란이 나를 놔준 후에야 정신이 가까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상당이 위험하다. 프란에게는 자각이 없는 걸까? 아무리 그래도 신체 접촉은 아직 어렵다고... 

 

나 또한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외출 준비를 하기 위해서 내 방으로 걸어갔다. 그냥 저번처럼 입어도 딱히 문제없겠지? 음, 아마도 그럴 거다. 

 

”델-피! 아직 멀었어? 난 벌써 준비 마쳤는데~“ 

 

”네??? 정말로 옷만 갈아입으시게요? 씻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 

 

”응? 뭐 세수정도만 깨끗이 하면 됐지! 그야 난 화장을 안 해도 예쁘니까! 아, 혹시 양치도 하고 싶은데 여분 칫솔 있어? “ 

 

”...욕실 맨 아래쪽 선반이요. “

 

”고마웡~“ 

 

프란은 그리 말하곤 손에 파우치를 든 채로 욕실로 달려갔다. 그리 말해도 꾸미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는 욕망인가 보다. 얼른 나도 준비해야지. 

 

... 

 

... 

 

... 

 

프란과 내가 각자의 외출 준비를 마치니 시계는 오전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확실히 늦게 일어나서 그런지 하루가 되게 빨리 지나가는 느낌이다. 

 

”자, 델피! 그럼 가 보자고! 내가 특별히 에스코트해줄 테니! “ 

 

”그것 참 기쁜걸요? 그럼 처음은 어디부터 가나요? “ 

 

”카페. “ 

 

”... 카페? “ 

 

”모닝커피 몰라? 아침은 커피로 시작하는 거지! “ 

 

”지금 아침이 아니라 낮인... “ 

 

”가자~“ 

 

프란은 나의 손을 잡더니 앞으로 끄는 듯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해도 프란은 참 말릴 수 없는 매력이 존재한다. 사실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일 뿐이겠지만. 

 

저번에 갔던 카페를 들러 저번과 같은 커피를 시켰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이번엔 테이크아웃으로 들고 나왔다는 점일까? 어쩐지 점원분이 나와 프란을 보고 흐뭇해하는 표정을 지은 것 같다만... 역시 이번에도 기분 탓일 것이다. 

 

”저기 프란. 혹시 이제 저희 어디로 가는지 물어봐도 되나요? “ 

 

”아아, 델피. 모르는 건가. 우리는 놀이공원으로 간다. “ 

 

”...네!?“

 

”당연히 할 거 많은 재미있는 장소는 놀이공원밖에 없지! 심지어 어제는 비가 왔고, 오늘은 평일이야. 완벽하지 않아? “ 

 

”저 놀이공원 가본 적 없는데요. “ 

 

”...어? 정말? “ 

 

프란은 놀랐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주시했다. 어려서부터 밖에 나가는 건 그다지 선호하지 않아서 부모님과 함께 외출한 적은 많지가 않다. 놀이공원 같은 경우는 더더욱. 

 

”그래도, 프란이라면 잘 안내해주실 거라고 믿어요. 그 누구도 아니고 프란이잖아요? “ 

 

”오? 음! 어... 그렇지! 나만 믿으라구 델피! “ 

 

”아, 혹시 몰라서 돈은 두둑하게 챙겨 오긴 했는데... “ 

 

”어? 그래? 내가 감사인사 겸 입장권이나 먹을거리는 내가 사주려고 했지! 부디 내가 사게 해 줘! “ 

 

”그, 그건 제가 더 부담스러워요! 그냥 서로 자연스럽게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알아서 쓰는 게 좋겠죠? “ 

 

”그러네. 역시 델피. 중제의 장인... 어? 저 버스? 델피! 달려! 우리 저 버스 타야 해! “ 

 

”으아악 팔 그리 잡지 않아도 알아서 달려간다고요! “ 

 

아슬아슬하게 버스에 올라타니 안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이 없었기에 마음이 놓였다. 각자 1인석에 앉을 수 있겠... 

 

”델피? 뭐래! 얼른 여기 앉아! “ 

 

프란이 2인석 창가에 먼저 앉아 내게 손짓을 하고 있다. 이제 와서 옆에 앉는 것 가지고 무엇이 문제이냐 할 수 있겠다만 그래도 오랜 시간을 딱 붙어서 가야 한다니! 쉽지 않다. 

 

”아, 알겠어요. 근데요 프란. 놀이공원은 보통 언제쯤 문을 닫아요? “ 

 

”오늘이 평일이니까... 오후 7시 정도면 전부 닫아! 시간 넉넉하니까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 

 

”그러네요. 아마 도착하면 12시 정도 이려나요? 프란의 부모님은 언제쯤 돌아오세요? 시간 맞춰서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 

 

”걱정 마. 친구랑 같이 공부하고 왔다고 말하면 돼. 혹여나 확인 전화가 오면 네가 잘 변호해줘야 한다구! 애당초 우리 부모님은 그리 삭막하신 분들은 아니셔. 혼내는 건 심해도, 전부 날 생각해서 나오는 말이거든. “ 

 

”그러면 다행이네요. 저 그럼 도착하기 전까지만 눈 좀 붙일게요. 평소에 잠이 부족해서요. “ 

 

”그래! 나만 믿고 편하게 자고 있어! 깨워줄 테니까! “ 

 

”그럼 사양하지 않을게요. “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살며시 눈을 감았다. 잠이라도 자지 않으면 계속 의식할 것만 같아 내린 최선의 방법이다. 

 

놀이공원, 놀이공원. 나는 갈 일이 없는 장소라고만 생각했다. 나를 이렇게 이리저리 끌고 다녀주는 프란이 있기에 여러 경험을 해볼 수 있는 것이구나. 

 

그렇게 고맙기도, 미안하기도 한 마음을 품고 살며시 잠에 들었다. 

 

... 

 

... 

 

... 

 

”데, 델피~ 일어나. 우, 우리 슬슬 내릴 준비 해야 해~“ 

 

”음... 아... 네... 벌써 도착해 가는군요. “ 

 

조심히 눈을 떠보니 내 볼에 무언가 부드럽고도 따스한 무언가가 닿는 것을 느꼈다. 잠결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먼저 손부터 나가 무엇인지 만져보았다. 

 

”...데, 델피! 얼른 일어나라구...!“ 

 

큰 목소리에 정신이 확 들었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내가 프란의 어깨에 기대에 있었다. 

 

”아, 이, 이건 실수예요! 고의로 그런 게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 

 

”괘, 괜찮아! 그다지 무겁지도, 불편하지도 않았는걸! 정말로 상관없어! “

 

프란의 볼은 살며시 붉은색으로 물들며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 화가 나버린 걸까. 너무 마음을 놓고 긴장을 풀었나 보다. 놀이공원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 어색한 분위기는 계속 되었다. 

 

버스에서 내리고, 조금 걸으니 놀이공원의 입구가 보였다. 자유 이용권 두 장을 각자 구매 후, 안으로 들어서니 영상이나 사진으로만 봐왔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화려함보다 거대한 규모에 더욱 놀랐으며 어느 곳을 둘러봐도 웅장한 구조물들이 자신을 뽐내고 있었다. 

 

”놀이공원! 정말 오랜만인걸? 델피, 델피! 어때? 엄청 멋지지 않아? “ 

 

”오... 와... 이야... “ 

 

”히히, 그 정도로 놀랐어? 그럼 시간도 시간이니 얼른 점심부터 먹으러 갈까? 놀이공원에서 먹는 식사는 또 느낌이 다르거든! 도시락 같은 건 못 챙겼지만 말이야... “ 

 

”그럼 우리 뭐부터 먹나요? 특별한 그런 게 있는 거예요? “ 

 

”뭐, 식사다운 식사도 많고! 츄러스나 아이스크림 같은 디저트도 있고! 길거리 음식 같은 것도 많지! “ 

 

”혹시 그... 파르페 같은 것도 있는 거예요? “ 

 

”당연하지! 먹어보고 싶어? “ 

 

”네! 그거 꼭 먹어보고 싶었거든요! 생크림에, 딸기잼에, 초콜릿에, 과자! 과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파르페의 과일은 얼마나 맛있어 보이던지! “ 

 

”이런 부분은 되게 어린아이 같다~ 내심에 순수한 시절의 델피가 잠들어 있었구나! “ 

 

”아, 근데 식사대용으로 파르페를 먼저 먹는 건 조금 그렇지 않을까요... “ 

 

”그럼 전부 다 사서 먹으면 되지! 각자 음식을 사 와서 다시 이곳 벤치에서 모이는 게 어때?“ 

 

”좋네요. 그럼 조금 있다가 보죠. “ 

 

먹을거리를 사기 위해 프란과 떨어져 주변을 돌아다니며 푸드 트럭들을 하나 둘 둘러보았다. 

 

평소에도 익숙한 음식들은 더욱더 고급스럽게 꾸며지고, 볼 수 없던 음식들도 잔뜩 보였다. 놀이공원이면 기구가 중심일 줄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상상 그 이상이었다. 

 

얼른 가서 잔뜩 사 와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그 순간, 한 가지 잊고 있었던 사실이 뇌리에 스쳤다. 

 

주문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평소에 프란에게서 나오는 묘한 긍정파워 덕분에 인식조차 못할 정도로 평범한 사람이 되어있었다만, 역시 아무래도 혼자서는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언제까지나 바보같이 혼자서 아무것도 못하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이런 멍청이가 프란 옆에 서 있을 수 있는 자격이 있을 리가 없잖아! 

 

”저, 저기요. 생과일 파르페 하나 주세요. “ 

 

”네~ 주문받았습니다~ 알레르기나 못 드시는 과일이 있는지 앞에서 확인해 주세요~“ 

 

”아, 넵. “ 

 

키위, 바나나, 망고, 용과...? 다양한 과일들이 메뉴판에 적혀있다. 대부분 당도가 높고 말랑한 과일들 뿐이었다. 파르페는 원래 그런 걸까? 아, 딸기도 있구나. 

 

”주문하신 생과일 파르페 하나 나왔습니다~“ 

 

이렇게만 순조롭다면 다른 먹을거리도 잔뜩 살 수 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다음엔 저거랑. 저거! 그리고 저것도! 

 

... 

 

”그래서, 그렇게 양손 가득 사 온 거야...? 돈 부족하지 않았어...? “ 

 

”뭐, 그리됐습니다. 하하. “ 

 

”델피... 은근 진짜 어린아이 같은 구석이 잔뜩 있었네. 그래도 데려오기를 잘한 것 같아! 그만큼 너도 즐겁다는 것 아니겠어? 그럼 얼른 먹자고! “ 

 

프란은 대부분 식사대용의 길거리 음식을 사 왔지만 내가 사 온 것들은 온통 달달한 디저트뿐이다. 너무 들뜬 것이 아닌가?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럼 내가 사 온 거 먼저 나눠먹자! 핫도그랑 타코야끼! 너무 맛있어 보여서 사버렸지! 아! 그거 알아? 이건 사실 핫도그가 아니라 콘도그야. 진짜 핫도그는 빵 사이에 소시지 끼워먹는 그거! “

 

핫도그에는 설탕이 듬뿍 묻어있고 케첩과 허니 머스터드가 서로교차하며 이중 나선 구도를 이루고 있었다. 고소하다면 고소하고, 달콤하다면 달콤한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타코야끼도 만만하지 않았다. 노릇노릇 구워진 베이스 위에 데리야끼 소스와 마요네즈, 가쓰오부시의 조합은 한 입에 쏙 넣어버리고 싶을 만큼 눈이 갔다. 

 

”자! 한입 줄게! 크게 먹어도 괜찮으니까 사양 말고 먹어! “ 

 

”그러면 사양하지 않고... “ 

 

핫도그를 한입 베어 무니 바삭거리는 소리가 입을 통해 귀까지 전해졌다. 그런 소리 안에는 탱글한 소시지가 씹히며 소스와의 조화가... 

 

맛의 표현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맛있음을 그저 맛있음이라고 표현하면 무엇이 덧날까! 맛있다! 엄청 무지막지하게 맛있다! 

 

”어때? 맛있지? 표정에서부터 행복함이 드러나네! “ 

 

”무지막지하게 맛있어요! 저, 그 타코야끼도... “ 

 

”그래, 그래. 근데 진짜 맛있긴 하다. 이래야 장사를 하는구나! “ 

 

프란은 핫도그를 오물오물 씹으며 나무꼬치로 타코야끼 한 알을 찌르더니 곧장 들어 내 입 앞에 가져다 댔다. 

 

”아~“ 

 

”...아?“ 

 

분명 의문의 ‘아’ 였지만 어느새 내 입에는 따뜻한 타코야끼 한 알이 구르고 있었다. 상당히 뜨거웠지만 그럼에도 불과하고 한번 씹어보았다. 

 

더욱 뜨거운 열기와 함께 뜨겁고 쫄깃한 문어가 자태를 드러낸다. 반죽의 베이스만으로도 맛이 괜찮았지만 소스들이 이를 더욱 특별히 만들어 주고 있었다. 

 

”역시 비싼 만큼이나 맛있음이 보장된단 말이지~ 아~ 맛있었다. “ 

 

”아, 그럼 제가 사 온 것들 먹어볼까요? 뭐가 있는지 모르고 막 사 오긴 했는데... “ 

 

”이건 마카롱, 이건 츄러스, 이건 컵케이크. 네가 아까 먹고 싶다던 파르페도 사 왔구나! 잘 사 왔네! 온통 맛있어 보이는 것들 뿐이야! 전부 포장 때문에 많아 보였던 거구나. 실상 그리 많지는 않네! “

 

”그런가요? 얼른 같이 먹어요! 맛이 엄청 궁금하네요. “ 

 

프란과 마카롱, 츄러스와 컵케이크를 하나씩 나눠먹었다. 달콤한 것은 익숙해서 그런 걸까? 그렇다 할 표현은 못하겠지만 엄청 맛있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어때요? 맛있나요? “ 

 

”이야~ 근데 용케도 서로 겹치지 않게 사 왔네~ 역시 디저트는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네! “ 

 

”그럼 이제 화룡점정의 파르페를... “ 

 

영롱한 과일들 위에 뿌려진 소스들이 빛나며 생크림이 폭식하게 안을 메우고 있었다. 가장 비 싸기고, 맛있어 보이기도 한 파르페! 벌써 군침이 돈다. 

 

그런 와중, 맨 위에 놓인 딸기가 눈에 띄었다. 

 

”프란, 딸기 좋아하셨죠? 크게 베어 무세요. 엄청 맛있어 보여요. “ 

 

”그래도 괜찮겠어? 그래도 네가 그렇게 먹어보고 싶었던 거잖아. 나한테 양보해도 괜찮아? 그럼 미안한데... “ 

 

”미안함보다는 고마움이 더 좋은 걸요? 프란이 없었으면 이런 것도 못 먹어봤을걸요. 이 소중한 순간은 당신이 선물해주신 거니까요. 사양 말고 드세요. “ 

 

”그, 그리 말한다면야. 고마워 델피! “ 

 

프란이 파르페를 크게 한입 물었다. 곧 이어서 나도 한입 먹어보니 혀끝에서부터 단맛이 확 올라왔다. 

 

과일의 달콤함과 새콤함, 잼이나 초콜릿의 풍미. 이 모든 것이 한 곳에 섞이니 감히 최고의 디저트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고개를 돌려 프란을 바라보니 눈을 반쯤 감고 신나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주먹을 꽉 쥐고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그렇게나 맛있나요? “ 

 

”음~ 내가 왜 이걸 진작 먼저 사지 않았을까! 파르페는 100점 만점 중 90점! 딸기 가산점 100점! 총합 190점! “

 

”...딸기, 가산점이 꽤나 크군요? “ 

 

”워낙 잘 어울려서 말이지! 아~ 맛있었다. “ 

 

”그럼 이제 슬슬 놀이기구 타러 가는 건가요? “ 

 

”그래야지! 자! 그럼 슬슬 가보자구! 먼저 바이킹부터! “ 

 

”...네? 잠만요? 프란? 아니 이거 잠시만 놔봐요. 잠만, 프란! 프란!!! “ 

 

 

9.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앞뒤로 내 혼을 빼놓는 바이킹, 위아래로 내 심장을 흔드는 자이로드롭, 360도로 내 생명줄을 뒤섞는 롤러코스터. 기억나는 것은 이뿐이다. 

 

”델피... 정신 좀 차려봐... 아직 타야 할게 많다구...“ 

 

”으어어... “ 

 

”일어나~ 이제 강도 약한 것밖에 없으니까~“ 

 

”아까 먹은 것들 다 올라올 것 같아요... 프란은 저게 재밌나요...? “ 

 

”응! 흥미진진! 두근두근! 왔다 갔다! 재밌는 걸~“ 

 

”저, 저런 건 다시는 못 타요. 왜 사람들은 스스로 원심분리기에 타려고 하는 건가요... “ 

 

”에이~ 다음엔 회전목마나 관람차 같은 것 밖에 없으니까~ 응? 어서 가자! “ 

 

”한 번만 더 믿어주는 거예요... 알겠으니 어서 가죠. “ 

 

”아 맞다! 우리 사진 하나도 안 찍었어! “ 

 

”그럼 저는 조금 쉴 테니까 프란 혼자서 회전목마 타세요. 제가 찍어드릴게요. “ 

 

”오? 그래주면 고맙지! 고마워, 델피! “ 

 

회전목마의 줄을 기다린 후, 차례가 다가와 프란은 신나 하며 갈색 조랑말로 보이는 말 위에 앉았다. 

 

”이랴~ 달려라 델피~“ 

 

”잠만,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 

 

”아차, 실수! 히히... “

 

회전목마가 작동되며 다양한 색의 빛을 내뿜었다. 묘하게 신나면서도 차분해지는 음악소리가 내내 울려 퍼지며 자신이 놀이공원의 대표 기구 중 하나임을 각인시키는 듯했다. 

 

아이같이 순수한 표정을 짓는 프란을 보니 마음이 따뜻해져 왔다. 전국의 부모님들이 자신의 아이들의 사진을 많이 남겨두는 이유를 알겠다.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데 남기지 않는 것은 너무 아까운 것이다. 

 

”프란! 이쪽 바라보세요! “ 

 

”예이~ 달려라~“ 

 

[찰칵! 찰칵!] 

 

이런 사진을 남겨둘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한다. 나 같은 건 저 옆은 어울리지 않겠지? 아, 자꾸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회전목마가 끝났는지 프란이 내게 총총걸음으로 달려왔다. 

 

”어때? 어때? 잘 나왔어? 와! 잘 나왔잖아! 델피 너 사진도 잘 찍고... 못하는 게 없구나! “ 

 

”아,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혹시, 그 사진 저한테도 보내줄 수 있나요? “ 

 

”응! 물론이지. 그나저나 지금 시간이... 으엑, 벌써 한 시간밖에 안 남았잖아! 그럼 뭘 타야 할까... 어, 델피! 저거 봐봐! “ 

 

프란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바라보니 피아노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뭐지? 뭔가 공연이라도 할 것 같이 놓인 피아노는? 

 

”델피, 저거 연주해 봐. “ 

 

”...네!? 무리예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어떻게 연주를 해요! “ 

 

”이잉... 한 번만... 안될까...? “ 

 

프란이 부담스럽게 반짝이는 눈으로 내 눈동자를 바라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것만큼은 진짜 무리... 

 

”델피, 부탁해? “ 

 

...가 아니었다. 내가 지금 피아노 의자에 앉아서 무엇을 하는 걸까. 

 

그나저나 어떤 연주를 해야 할까. 어색함을 감추려고 외출용으로 메고 왔던 가방 안을 뒤져보니 프란과의 듀엣 악보가 한 구석에 놓여있었다. 

 

이거면 되려나.

 

곧장 악보를 악보대에 놓고 심호흡을 크게 한다. 주변을 보지 말자. 실수를 해서 쪽팔림을 당하는 것은 더더욱 싫으니까. 

 

”델피~ 파이팅~“ 

 

프란의 목소리에 사람들의 이목이 더욱 집중된다. 왜 하필 이렇게 긴장했을 때... 

 

하지만 여기서 연주조차 하지 못한다면 실전에서 아무것도 못한 채 후회만 할 것이다. 그래, 한번 해보자. 

 

[♩ ♪ ♫ ♬]

 

악보의 음표만을 바라보며, 손가락 끝에 만져지는 건반만을 느끼며 연주를 시작한다. 

 

”어? 델피, 이 곡은... “ 

 

아주 좋은 곡이다. 그야 프란이 작곡했으니까. 좋지 않을 수가 없지. 

 

그래서 그런지 피아노뿐인 이 곡은 어쩐지 허무하다. 

 

아아, 바이올린의 소리가 듣고 싶다. 프란이 활로 바이올린 줄을 긁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아무 말도 없이, 머릿속은 그런 생각만이 오고 가며 연주가 진행된다. 

 

내 연주에 단 한 번도 만족한 적은 없었다. 실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피아노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프란과 나의 연주의 차이. 그것은 언제쯤 눈치챘었던 걸까. 

 

고등학교 입학? 중학교 졸업? 처음으로 피아노를 연주했을 때? 아니면 프란의 연주를 처음 들었을 때? 

 

언제나 이 느낌을 떨쳐내지 못했다. 

 

나뿐인 피아노는 전혀 빛나지 않는걸. 

 

연주는 대단원으로 치닫고 피날레로 공허한 연주의 막이 내린다. 

 

주변 사람들은 박수를 치지만, 어째선지 기분이 전혀 좋지 않았다. 내가 피아노를 치는 이유는 단지 열등감이 아닌데.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의자에서 내려와 프란에게 걸어갔다.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곤, 입을 꾹 다문채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아아, 허락 없이 연주하면 안 되는 곡이었을까. 또다시 실수해버린 걸까. 

 

”델피...! 완전 최고였어...! 그게 바꾸었던 악보야? 최고야! 최고야! 그야 저번에 들었을 때는 전부 듣지 못했다구!“ 

 

”그런가요. “

 

”...? 델피...? 표정이 안 좋은데...? 어디 아픈 거야? 아니면 내가 너무 무리를 시킨 걸까...? “ 

 

”전혀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우리 다음 기구 타러 갈까요? 아무래도 마지막 기구가 될 듯하네요. “ 

 

”그, 그러네. 그럼 관람차 타자. 저녁이라 풍경이 아름답게 보일 거야! 그리고 여기 관람차는 엄청 천천히 돌아간데! 마지막으로 어울리지 않겠어? “ 

 

”그래요. 좋아요. “ 

 

”... “ 

 

프란과 관람차에 올랐다. 문이 닫히고 천천히 올라가는 느낌이 영 나쁘지 않았다. 오늘, 즐거웠지. 

 

잠시의 정적 후에, 프란이 먼저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델피. 오늘 재미없었어? 내가 너무 끌고 다닌 거지? 미안해. “ 

 

”아뇨. 그럴 리가요! 즐거웠어요. 엄청. “ 

 

”근데 표정이 너무 좋지 않은걸. 피아노 치는 거 엄청 멋있었어. 우리 듀엣 곡을 쳐준 것도 너무 기뻤어. 그런데 네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은걸. “ 

 

”...그래 보였나요? “ 

 

”혹시 곡이 별로 맘에 들지 않았어? 그런 거지? “ 

 

”그럴 리가요. 악보도, 피아노도 완벽했고 실수도 없었는걸요. “ 

 

”근데 표정이 왜 그런 거야?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응? “ 

 

”그냥,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요. “ 

 

”그게 무슨 소리야? 이해 못 하겠어! “ 

 

”제가 언제 한번 말했었죠? 당신은 빛난다고. “ 

 

”그 말, 엄청 기뻤는걸. 어떻게 잊어버리겠어. “ 

 

”저는 혼자서 아무것도 못하고, 빛나지도 못한 칙칙한 색만 뿜어내는 것 같아서요. “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야! 한눈에 반할 정도로 엄청 멋있었다니까!... 아! “ 

 

”그렇게 억지로 기분 띄어주시지 않아도 좋아요. 내 수준은 내가 잘 아니까요. “ 

 

”델피, 넌 델피를 잘 몰라. “

 

”하지만 듀엣이 끝나면 당신과 인연도 끝일 터인데, 그 후엔 뭐가 남아 있을까요. 거 봐요. 지금도 마무리를 이렇게 망치고 있잖아요. 난 이 정도라고요. 당신 덕분에 많은 것들을 해 왔지만 결국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 “ 

 

”델피니움!!! “ 

 

프란의 고함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프란이 삐진 적은 봤어도 저렇게 까지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은 없는데. ‘아, 또 실수했구나.’ 라고 생각이 들 때쯤 프란이 다시 입을 열었다. 

 

”델피니움! 난 네가 없었으면 내 꿈을 시도조차 못했을 거야! 다 너 덕분이라고! 그뿐인 줄 알아? 내가 거짓 없이 가볍게 말해도 너는 전부 들어주고 같이 어울려줬어! “ 

 

”하지만 그건... “ 

 

”내가 힘들 때 혼자 있을 시간도 주었고, 나 굶지 말라고 먹을 것도 아무 말 없이 사 왔어! 그냥, 아무것도 묻지 않고 웃어주었단 말이야! 내 어리광을 전부 들어주고, 같이 비도 맞아주고! 이렇게 나랑 놀아주잖아... “ 

 

프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저것은 무슨 감정일까. 슬픔? 분노? 억울함? 잘 모르겠다. 프란을 멀리서 가장 오래 지켜봐 왔을 나 일터인데, 저 표정만큼은 잘 모르겠다. 

 

”내가 평소에 얼마나 널 생각하는지 넌 모를 거야! 넌 눈치는 엄청 없단 말이야! 꼭 말로 해야만 알아듣는 거냐고! “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이대로 넋두리를 전부 받아 드려야만 하는 걸까. 무언가, 그래도 대화는 해봐야지. 늘 그랬듯, 거짓 없이. 

 

”프란이 그랬잖아요. 말로 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잘 모르겠어요. “ 

 

”...델피는 진짜 바보야! “ 

 

”그럴 지도요. “ 

 

”방금 내가 한 게 무슨 말인지 아직도 눈치 못 챈 네가 미워! “ 

 

”... “ 

 

”사질 전혀 밉지 않아. 반대라고... “ 

 

”우리 서로 많은 걸 말하지 못한 것 같네요. 이번 듀엣. 우승하면 전부 말하기 어때요? 거짓 없이 전부 털어놓기로. “ 

 

”그러자. 응. 그러자. “ 

 

”아, 밖에 봐요. 불꽃놀이 한다. “ 

 

”일부로 말 안 하고 있었단 말이야. 여기서 딱 내가 할 말이 있었다구...“

 

”미안해요. 하지만, 이렇게 하면 듀엣 대회에 조금 더 열중할 수 있겠죠? 당신의 꿈이면서, 내 꿈도 그 사이에 섞여있으니까. “ 

 

”...진짜 델피도 못 말려. “ 

 

”누구 옆에 있는 덕에요. “ 

 

”..히힛“ 

 

형형색색의 불꽃놀이가 동공에 비친다. 

 

이 관람차는 참 인기가 많겠다. 이렇게 오랫동안, 오랫동안 하늘 위에 머물 수 있다니. 

 

불꽃놀이에 눈이 너무나도 부셨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프란의 얼굴만을 바라본다. 빛을 머금은 주황 눈동자, 광이 나는 갈색 머릿결, 선홍빛 뺨, 주홍색 입술. 

 

내 옆에는 저 불꽃보다 더욱 멋지고, 화려하고, 찬란한 불꽃이 살아 숨 쉬고 있으니까. 

 

관람차가 느린 건지, 아니면 시간이 멈추어 버린 것인지 모르겠다. 그저 이 순간을 사진 속에 담고 싶은 마음뿐이다. 

 

아, 한순간만이라도 좋으니, 그녀가 가장 아름다울 순간을 담아내고 싶다. 

 

오랜만에 이 감정이 떠올랐다. 

 

불꽃놀이가 끝나니 프란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얼굴에 홍조를 틔우며 시선을 애써 외면한다. 

 

나는 행복해서 아무런 행동을 할 수가 없어서, 그저 살며시 눈을 감았다. 

 

”우리, 열심히 해요. “ 

 

”당연하지. 반드시 우승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어. “ 

 

”저도 마찬가지에요. 그럼 이제 슬슬 가볼까요? “ 

 

”그래! “ 

 

그날은, 불꽃을 머금은 노을빛의 반짝임이 아름다웠다. 

 

 

10. 

 

한 달.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 그런 날이 벌써 지나버렸다.

 

놀이공원에 간 후로 각자 더욱 집중하고, 열중할 수 있었다. 실제로 만나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연습은 완벽했다. 

 

”데, 델피. 나, 나 너무 떠, 떨려. “ 

 

”심호흡하세요. 우리가 우승 못할 리가 없잖아요? 반드시 할 수 있다고요. “ 

 

프란은 품에 드레스가 들어있는 종이가방을 꽉 안고 긴장하고 있었다. 프란의 부모님도 기대하셨는지 저런 옷까지 준비해두시다니. 알게 모르게 프란에 대한 사랑이 느껴졌다. 

 

물론, 내 평생 태어나서 정장을 입게 되는 날이 벌써 올 줄은 나도 몰랐으니까. 어찌나 좋아하시던지 사축이신 부모님들이 지금 이렇게 차로 손수 대려다 주시고 계시니까. 

 

”어머, 어머 어떡해! 우리 델피가 무대 위에 오른다고! 어떡해? 어떡해? “ 

 

”네가 더 긴장하면 안 되지... 델피야, 너무 긴장하지 마려무나. 오랫동안 연습하지 않았니? “ 

 

이렇게 시간까지 내어주신 부모님에게 감사할 뿐이다. 그나저나 두 분 다 엄청 떨고 계신다. 

 

”아버지, 손 엄청 떨고 계세요. 안전운전 부탁드려요. “ 

 

”무, 물론이지. 하하. 벌써 다 왔구나. “ 

 

차에서 조심히 내린다. 오른발, 왼발을 번갈아 앞으로 걷는다. 아니, 왼발 다음에 오른발인가? 

 

대기실까지 천천히 걸어가서, 옷을 갈아입는다. 정장을 입는 방법은 아직 몰랐기에 아버지가 도와주셨다. 프란의 쪽은 어머니가 도우러 가셨다. 

 

”델피야, 준비는 됐니? “ 

 

”물론이죠. 연습은 완벽해요. “ 

 

”그것 말고. 네 마음에 대해서 말이다. “ 

 

”우승하면 전부 말할 거예요. 어찌 되든 전부 거짓 없이 말할 거예요. 그러니 반드시 우승할 거예요. “ 

 

”그래야 내 아들 답지. 자, 다 됐단다. 이제 대기실로 가려무나. “ 

 

”감사해요. 아버지. “

 

”내가 더 고맙구나. “ 

 

대기실로 천천히 걸어가니,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프란이 눈에 비췄다. 때 타지 않은 흰색은 몹시 고풍스럽고, 고귀했으며, 아름다웠다. 

 

”델피, 너 정장 잘 어울려. 히히. “ 

 

”프란도 지금 엄청 아름다워요. “ 

 

”나 너무 떨려. 어떡하지? “ 

 

”프란의 바이올린, 잘 챙겼죠? “ 

 

”물론! 몇 번이고 확인을 했는데! “ 

 

”바람막이, 허리춤에 묶고 가죠? 프란스러움은 그곳에서부터 나오니까. “ 

 

”델피, 넌 진짜 천재야! “ 

 

프란은 서둘러 탈의실로 달려가더니 바람막이를 가져와 내게 가져왔다. 

 

”...네가 묶어줘. “ 

 

”기꺼이. “ 

 

프란의 붉은 바람막이를 길게 늘여 프란의 허리를 감싼다. 머리카락의 향이 코앞에서 느껴졌다. 달콤한 복숭아 향. 왜인지 우리 집 샴푸랑 같은 냄새다. 

 

”다 됐어요. “ 

 

”델피. 나, 할 수 있을까? “ 

 

”우리는, 할 수 있어요. 그렇죠? “ 

 

”...응!“ 

 

그 말을 끝으로, 어느새 우리의 차례가 다가왔나 보다. 대기실에 있는 TV로 다음 순번이 우리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럼, 갈까요? “

 

”물론! “ 

 

... 

 

... 

 

... 

 

또각, 또각. 

 

두 사람의 구두소리가 어두운 무대의 위에 오른다. 

 

차분한 분위기를 주는 쪽빛 정장을 입은 나는 조심스럽게 검은 피아노 앞에 앉고, 흰 드레스 위에 붉은 바람막이를 걸친 그녀는 바이올린에 자신의 어깨와 턱을 내어주며 서로 악기를 연주할 준비를 마친다. 

 

아무래도 긴장이 되었던 것인지 그녀는 숨을 천천히 깊게 몰아쉬고 뒤를 돌아 나를 슬쩍 바라보았다. 

 

내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니, 그녀의 얼굴은 곧 밝은 미소로 가득 차오르며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은 긴장이 아닌 기대로 가득한 저 모습은 아름답게 꽃 피울 봉우리를 연상시켰다. 

 

스포트라이트가 켜지고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비춰내며 모든 관중과 평가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천천히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뒤 살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나는 그녀와 함께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울 이 순간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 ♪ ♫ ♬] 

 

나의 피아노 소리가 공연장 안을 울려간다. 아직 반주이기에 심심한 이 연주는 곧 개화할 준비를 마치는 과정에 불과하다. 

 

내 삶은 이렇게나 무미건조했다. 나쁘진 않지만, 관심을 가질 만큼은 좋지 못했던 인생. 그런 삶 속에 갑자기 찾아온 사람이 이 반주를 멋진 곡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 ♪ ♫ ♬]

 

그녀의 바이올린 소리가 마음 깊은 곳을 저리게 만든다. 악보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연주는 내 손이 알아서 해줄 뿐, 머릿속에는 이 순간을 조금이라도 놓치기 싫다는 듯이 소리로써 담아간다. 

 

어느새 스포트라이트는 나까지 비춰간다. 내 손에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내가 지금 눈물이라도 흘리는 것일까. 이상하다. 프란의 모습을 보지 않아도, 그저 이 연주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뿐인데도 행복이 눈물로써 넘쳐흐른다. 

 

그녀의 모습이 점점 떠오른다. 중학생 시절, 고등학생 시절, 관람차 안. 그리고, 그리고 지금 고개를 살짝 돌리면 있을 그녀가. 

 

더 이상은 기억이 아니다. 추억이 아니다. 그녀의 드레스가 개화한다. 그녀의 활시위가 춤을 춘다. 

 

한 가닥, 끊어진 활 실이 허공에 살랑인다. 한 움큼, 그녀의 머리카락이 휘날린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돌리니 눈과 눈이 마주 췄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주홍색 노을이, 과실이 나를 바라보며 울며, 웃는다. 

 

서로 눈물뿐인 이 연주에는 행복에 겨눈 미소만이 남아 간다. 사진을 이어 붙인 것 마냥 이 순간이 한 장, 한 장 남아 간다. 

 

‘아, 이 순간이 영원히 반복될 수 있다면.’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하고 싶은 말을 알 수 있었다. 

 

서로의 진동이 거세져만 간다. 서로의 몸짓이 격해져만 간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빨리 그 순간을 보고 싶다. 느리게 그 순간이 흘렀으면 한다. 

 

[대단원, 대단원 후에 보았던 그 몇 초는 

 

 

누가 봐도, 누가 들어도, 누가 담아도 똑같이 생각했을 

 

 

두 꽃의 가장 아름다울 순간이었다.] 

 

 

꽃의 잔향이 공연장의 남는다.

 

다시는 맛보지 못할 달콤한 향기가 이 공간은 매워간다. 

 

모든 것이 고요해질 때쯤, 그녀와 나는 앞을 바라보았다. 자신들을, 피워냈다. 

 

 

Ep. 

 

“선생님! 어떻게 해야 선생님처럼 피아노를 잘 칠 수 있어요?” 

 

한 아이가 호기심에 가득한 눈빛을 보내며 물어보았다. 

 

“오랜 시간, 꾸준히 연습하라는 이야기는 너무 식상하죠?” 

 

“네~” 

 

“음악을, 연주를 사랑할 목적을 만들면 됩니다. 각자 악기를 다루는 목표가 있죠? 그것을 늘 상기하는 겁니다.” 

 

“하지만 하루만 지나도 그런 마음은 팍 식는걸요!” 

 

“사랑은 그러지 않습니다. 하루 만에 식어버릴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지요.” 

 

“어려워요~” 

 

“하하, 그럼 선생님이 옛날이야기라도 해줄까요? 선생님이 연주를 사랑하게 된 계기를?” 

 

몇몇 아이들은 또 저 이야기를 시작한다며 한숨을 쉬고, 몇몇 아이들은 눈을 빛내며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연주를 사랑하진 않았어요. 사랑을 하기 위해 연주를 했죠. 그래서 말이죠...” 

 

갑자기 학원의 원장실에서 문이 강하게 열리더니 어느 한 사람이 나와 소리쳤다. 

 

“델피! 너 또 그 이야기하지! 이제 그만할 때도 됐잖아!”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언제 해도 질리지가 않는걸요? 프란.” 

 

“그리고 그 바보 같은 존댓말은 언제까지 하는 거야! 델피, 너 이리로 와!” 

 

“아악! 얘들아! 선생님 좀 도와주세요!”

 

두 선생님이 저러시는 것을 한두 번 봐온 게 아닌 듯, 아이들은 그저 웃기만 했다. 

 

“선생님들은 결혼 어떻게 한 거야? 맨날 저렇게 싸우시잖아!” 

 

“저게 싸우는 걸로 보여?” 

 

“싸우는 거 아니야?” 

 

“얼굴을 봐봐. 둘이 서로 웃고 계시잖아.” 

 

“아, 정말이네. 그럼 사이 엄청 좋으신가 보다!” 

 

“그럴 수밖에.” 

 

음악 학원에서는 오늘도 두 사람 덕분에 활기차고, 시끌벅적하다. 

 

행복하고, 웃음만이 가득할 두 꽃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