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방송과 함께 안전띠 표시등에 불이 들어왔다. 풀었던 안전띠를 다시 매고 펼쳐 놨던 책상을 다시 접었다. 비행기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아름다웠다. 낮은 건물들과 그 건물들 사이를 하얗게 메운 눈. 온 도시가 순백의 도시로 보였다. 

 

비행기는 다시 만날 그 도시를 지나쳐 공항으로 착륙했다. 창가에 앉은 나는 사람들이 충분히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지막에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겼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사람들은 다양했다. 여행 온 커플, 부모와 아이, 비즈니스로 온 사람, 경유하기 위해 잠깐 내린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비행기에서 내렸다. 

 

그리고 나는…

 

한참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입국 심사를 할 수 있었다. 이 나라는 정말 입국 심사 하기 힘든 나라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지만 아직도 이런 불편한 제도를 사용하다니. 

 

부쳐 놓았던 짐을 컨베이어벨트에서 찾고 공항 출구로 나갔다. 배가 고팠지만 밥은 공항 밖 식당에서 먹는 게 좋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은 정말 추웠다. 거리에는 눈이 오고 있었고 꽁꽁 싸매도 칼바람은 겉옷을 찢고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따뜻한 수프라도 한 그릇 사 먹고 싶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이 춥다는 것은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로 추울 줄은 몰랐다. 역시 겨울에 러시아는 가면 안 되는 곳인가.

 

일단 짐을 풀고 장시간 비행으로 피곤했던 몸을 조금 쉬게 해주기 위해 호텔에 가야 했다. 공항 근처에서 택시를 잡고 예약해 두었던 호텔로 갔다. 호텔 로비에 들어가니 내가 방금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던 것이 맞나 의심될 정도로 따뜻한 공기가 로비를 꽉 채우고 있었다. 

 

호텔 로비는 꽤 좋았다.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와 장식들로 가득 차 있었다. 휘황찬란한 호텔 로비를 입을 떡 벌리며 구경하면서 호텔 체크인을 하러 갔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오셨나요?»

 

체크인을 하러 안내데스크에 있는 여직원에게 인사를 하자 여직원이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흑발 흑안의 흰 피부를 가진 전형적인 러시아 여성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예쁜 것도, 못생긴 것도 아니라 호감을 주는 외모였다. 

 

«아, 이 호텔 예약을 했는데요.»

 

나는 가방에서 여권과 핸드폰을 꺼내며 대답했다.

 

카드키를 받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내 방은 제일 높은 층에 있었다. 그래봤자 이 도시의 건물은 낮은 편이어서 꼭대기 층이라고 해 봤자 얼마 되지 않는 높이였다.

 

카드키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방 내부도 고풍스러운 인테리어가 되어 있는 엄청 넓은 방이었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방을 천천히 구경했다. 침실은 2개가 있었고 거실도 엄청나게 넓었다. 화장실도 깨끗했고 침실과 거실에 있는 창가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가 한눈에 보였다 

 

나 혼자 쓰기에는 정말 아까울 만큼 좋은 방이었다.

 

히터를 켜고 겉옷을 정리하고 가방에서 필터를 꺼내 화장실로 갔다. 수도꼭지에 필터를 연결하고 물을 틀어보았다. 다행히 필터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깨끗한 물이 나왔다. 손을 씻고 옷을 벗은 후 샤워부스에서 샤워를 했다. 건물 밖과는 정반대의 따뜻한 물이 몸을 적시자 기분이 좋았다.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은 뒤 침대에 몸을 던졌다 내 몸을 감싸주는 매트리스와 이불의 포근함에 몸을 맡긴 채 고개를 옆으로 돌려 창밖을 보았다.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담은 아름다운 도시에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한참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꽤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침대에 누워있는 중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기내식 말고는 먹은 게 아무것도 없는 데다 호텔에 오느라 먹는 것을 잊고 있어서 배고팠다. 나는 지갑과 여권, 핸드폰을 챙기고 겉옷을 걸치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식당 추천]

 

핸드폰에 미리 즐겨찾기를 해 두었던 블로그를 보고 여기서 처음으로 먹을 음식을 신중하게 골랐다. 하지만 역시 땡기는 건 따뜻한 수프였다 

 

블로그에 올라온 여러 식당들 중 수프를 파는 식당을 골라 지도에 그 식당을 검색했다. 마침 식당도 호텔에서 별로 멀지 않아서 걸어가기로 했다. 

 

 

내가 어리석었다. 이 날씨에 걸어가다니 미친 거지. 대중교통을 이용 해야 했는데 내가 이 도시의 겨울을 너무 우습게 봤다. 하지만 지금 대중교통을 타기에는 너무 멀리 왔고 어차피 식당도 거의 다 왔으니 조금만 참고 더 가기로 했다. 이것만 참으면 따뜻한 음식이 날 기다리니까

 

식당에 거의 다 왔을 무렵 나는 다시 한번 핸드폰으로 지도를 확인했다. 이제 진짜 거의 다 왔다. 나는 소복소복 쌓인 눈을 밟으며 핸드폰에 눈을 떼지 않고 걸어갔다. 

 

 

"으앗!"

 

핸드폰에 눈을 떼지 않고 걸은 탓인지 누군가와 부딪혔다 나는 그대로 눈 위로 철퍼덕 넘어졌다. 

 

"으으...뭐야...

 

나는 몸에 묻은 눈을 털면서 천천히 일어났다. 일어나 보니 어떤 여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일어나자 "죄송해요, 괜찮으세요?"라고 말한 거 보면 이 여자가 나랑 부딪힌 여자가 맞는 것 같았다. 

 

«아, 괜찮아요. 죄송해요, 어디 다치신 곳은 없나요?»

 

«저는 괜찮아요.»

 

그 여자가 말했다. 꽤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한 15살 정도로 보이는 얼굴이었다. 눈처럼 흰 피부와 긴 금발, 파란 눈이 매력적이었다. 마른 체형에 큰 키는 더욱 그녀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아까 만났던 호텔 여직원보다 훨씬 매력적이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눈 위에 떨어진 내 핸드폰을 주워 눈을 털어주더니 나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그 핸드폰을 건네받고 고맙다고 인사했다.

 

«천만에요»

 

그녀가 내 감사 인사에 답례하고 나에게 인사한 후 다시 자기 갈 길을 갔다. 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뒤를 돌아봐 그녀를 한 번 더 쳐다보고 다시 식당으로 걸어갔다. 

 

걸으면서 그녀 생각이 났다 잠깐 마주친 사이였지만 매력적이었다. 친절한 성격도, 매력적인 금발과 눈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나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눈은 펑펑 오고 있었다. 힘겹게 내쉰 한숨은 입김이 되었다.

 

"이제 와서 여자를 만나봤자..."

 

나는 혼잣말을 하며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갔다

 

 


-------------------------------------------------------------------------------------------------------------------------------------------------


아직 프롤로그 입니다. 아, 그리고 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나이는 전부 만 나이에요.


작 중에서 보이는 «» 기호는 산괄호라고 하는 기호에요. 러시아어에서 쓰이는 기호인데 앞으로 러시아어로 말하는 장면에서는 이 산괄호를 사용할 계획이에요. 그 외에 주인공이 한국어로 말하거나 생각,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할 때에는 "" 이 문장 부호를 사용할 거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