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엔과 베렌은 J.R.R 톨킨이 쓴 책인 [실마릴리온]에 나오는 커플이야. 실마릴리온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반지의 제왕 세계관의 옛날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됨.


루시엔과 베렌의 이야기는 지금 봐도 굉장히 왕도적이고 감동적인 이야기라서 한 번 소개해주고 싶었어.




루시엔은 톨킨의 소설 세계관을 통틀어서 가장 뛰어난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어. 톨킨은 소설 속의 인물들에게 아름답다는 수식어를 많이 쓰는 편이지만, 루시엔에게는 대놓고 창조주의 자손, 즉 엘프와 인간 전부를 통틀어 가장 아름답다는 설명을 붙일 정도였지.


그녀가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훗날 그녀의 남편이 되는 베렌은 그녀가 사는 도시, 도리아스에 들어설 때까지 갖은 생고생을 해서 백발이 듬성듬성 나고 등이 굽은 몰골이었는데도 루시엔을 보자마자 여태껏 겪어왔던 모든 고통을 잊어버렸고, 사냥개인 후안도 그녀를 보고는 사랑에 빠져 주인을 저버렸으며, 그 주인인 켈레보름도 당연히 그녀에게 반해 흑심을 품고 집요하게 그녀를 노렸지. 게다가 암흑 군주 모르고스조차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녀를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였고, 실마릴리온에서는 이것을 모르고스가 가운데땅으로 넘어온 이후 가장 음흉한 생각이라 일컬을 정도였어.


게다가 혈통도 굉장히 고귀했는데, 엘프들을 다스리는 왕 싱골과 가운데땅의 신격 존재인 마이아 멜리안 사이에서 태어난, 요정 왕족과 신의 피를 동시에 있는 존재였지.




그런 그녀는 요정들의 도시, 도리아스를 둘러싸고 있는 멜리안의 안개 장막을 뚫고 들어온 베렌을 만나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지게 돼. 베렌 또한 숲 속에서 춤추고 있던 그녀를 보고 한 눈에 반해버렸었기에, 두 사람은 한동안 숲속에서 행복하게 살게 되지.


그러나 그런 루시엔과 베렌의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어. 남몰래 루시엔을 짝사랑해 왔던 음유시인 다이론의 밀고로 루시엔의 아버지인 싱골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거든.


싱골은 자신의 소중한 딸을, 그것도 무남독녀 고명딸을 웬 이름모를 남정네가 취했다는 사실을 듣고서 극대노를 하며 루시엔을 불러서 추궁하려 했지.


하지만 루시엔은 오히려 베렌을 그녀의 아버지의 앞으로 데려와 소개시켰어. 자신의 남편이 될 사람이라면서 말이야.


이때 베렌은 싱골에게 정식으로 혼인 요청을 하지만, 당시 가운데땅에서 가장 위대한 엘프 군주 중 하나였던 싱골의 눈에 하찮은 인간 따위가 눈에 찰 리 없었지. 세상 어느 것보다 사랑하고 아끼던 무남독녀 루시엔이 유한한 인간과 결혼하는 것을 차마 허락할 수 없었던 거야.


결국 싱골은 베렌을 루시엔에게서 떼어내기 위해 당시 가운데땅을 위협하고 있던 암흑의 군주 모르고스의 강철 왕관에 박혀 있는 실마릴을 가져오라는 임무를 내려. 아내인 멜리안이 "베렌은 당신에 의해 죽지 않는다."고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야.


싱골의 말에, 베렌은 영웅의 운명을 타고 난 사람답게,  "사랑스런 따님을 고작 손재주로 만들어낸 물건에 넘기려 하시다니, 요정왕께선 따님의 가치를 너무 과소평가하시는군요." 라고 맞받아치며 패기 넘치게 떠나지.


한편 루시엔은 불안함을 느꼈어. 아무리 베렌이 영웅이라지만, 필멸자인 인간에 불과했기에 그런 그가 암흑 군주 모르고스에게 단독으로 향한다는 건 자살행위임을 잘 알고 있었던 그녀였던 거야.


그래서 루시엔은 베렌을 따라나서지만, 자신에게 흑심을 품은 엘프, 켈레고름에게 속아서 그에게 억류당하고 말아.


하지만 사냥의 신 오로메가 켈레고름에게 선사했던 사냥개, 후안을 만나 그 도움으로 탈출했고, 마침내 미나스 티리스로 가 자신의 걱정대로 중간에 붙잡히고 말았던 베렌을 탈출시키지.


(이때 후안은 그곳을 지키고 있던 모르고스의 수하 하나를 완전히 박살내는데, 그 이름은 바로 사우론이야. 훗날의 이야기인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최종보스지.)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모르고스에게로 향해. 중간에 켈레고름이 다시 등장해 두 사람을 위협하기도 하지만, 무난하게 위기를 넘기지.



이내 루시안과 베렌은 모르고스의 성채 앙그반드까지 도달하게 돼. 앙그반드의 문지기인 모르고스가 직접 기른 최강의 늑대인간, 카르카로스를 어떻게든 재우고 몰래 들어간 두 사람은 루시엔이 모르고스와 앙그반드의 수비병 전부를 마법으로 재운 사이 단검으로 그의 왕관에서 보석 실마릴을 떼어내는 데에 성공해.


(이때 모르고스는 명색이 암흑 군주임에도 루시엔의 외모에 빠져서 그녀가 자신을 재우려는 수작을 부리고 있음을 깨닫지도 못했다고 해.)


그러나 베렌은 욕심을 부리고 말았어. 왕관에 박혀 있던 실마릴을 하나 더 떼어내려고 했던 거야.


하지만 운명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칼은 부러지고 말았어. 그리고 그 파편은 모르고스의 얼굴에 튀어 그를, 그리고 앙그반드의  수비병 전부를 깨우고 말았지.


두 사람은 급히 도망쳤지만, 어느새 앙그반드의 문지기 카르카로스가 두 사람을 가로막았어.


베렌은 실마릴을 내밀어 카르카로스를 위협했으나, 실마릴을 본 카르카로스는 베렌의 오른손과 실마릴을 먹어치워 중상을 입히고 말아. 본래 부정한 존재는 실마릴을 몹시 두려워하며 꺼려야 하지만, 어째서인지 카르카로스는 그러지 않았지. 


결국 베렌과 루시엔은 실마릴은 없지만, 실마릴을 떼어냈었다는 증표인 베렌의 잘린 오른팔을 보여 그 여정을 인정받게 되지.


그러나 그들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어. 삼킨 실마릴이 자신의 내장을 태우는 고통이 미쳐 날뛰는 카르카로스가 도리아스 변경까지 내려왔다는 소식을 듣게 되지. 실마릴은 부정한 존재가 손길을 대면 태워버리는데, 카르카로스는 이를 삼켜 고통과 광기에 사로잡힌 거야. 그리고 실마릴을 지니고 있었기에 부정한 존재를 쫓는 멜리안의 장막도 그를 저지하지 못했지. 


이에 싱골은 베렌을 비롯해 소수 정예 멤버를 모아 사냥을 떠나지만 베렌은 근처에 잠복해 있던 카르카로스로부터 싱골을 구하다 치명상을 입고, 그 독으로 인해 숨을 거두게 돼. 그리고 후안은 카르카로스와 싸워 동귀어진하게 되지.


베렌의 죽음에 크게 절망한 루시엔은 슬픔을 못 이기고 죽어 버렸으며, 루시엔의 죽음으로 크게 상심한 싱골 역시 쓰러지고 말았어.


(왜 죽었다는 부분에 볼드체가 써져 있냐면 가운데땅의 엘프들은 기본적으로 전부 불멸이라 자연사하지 않는데, 루시엔은 베렌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찌나 깊었는지 슬픔에 죽어버리고 만 거야.)


이후 루시엔의 영혼은 요정의 운명대로 아만에 있는 만도스의 전당으로 날아갔고, 루시엔은 죽음의 신 만도스에게 무릎을 꿇고 자신의 슬픔을 노래로써 간절히 탄원했어. 루시엔이 만도스에게 부른 노래는 온 세상을 통틀어 가장 아름답고 슬픈 노래였다고 하며, 저때 루시엔이 흘린 눈물은 바위에 떨어지는 빗물 같았다고 해. 


루시엔 때문에 처음으로 연민을 느낀 만도스는 루시엔이 베렌을 만나게 해 주었어. 그러나 베렌은 유한한 존재라 그 영혼은 아르다 밖으로 떠나야 했지. 즉, 루시엔과 영원한 이별을 해야만 했던 거야.


결국 만도스는 그런 루시엔의 상황을 가엾게 어겨 다른 신들과 논의한 끝에 루시엔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주었어. 하나는 이대로 아만에 남아 세상 끝날까지 편히 사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베렌과 함께 가운데땅으로 돌아가되 그 수명과 행복에 있어서는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었어. 루시엔은 베렌에 대한 사랑 때문에 후자를 택하여 베렌을 살려 도리아스로 돌아왔고, 쓰러진 싱골을 회복시켰어. 


그리고 마침내 베렌과의 사랑을 인정받고 최초로 인간 남성과 맺어진 요정 여성이 되었지.


그 후 그녀는 베렌과 함께 도리아스를 미련 없이 떠나 다른 곳에 정착하여 은둔하였고, 그곳에서 3년 뒤에 외동아들인 디오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고 해.


...그리고 먼 훗날, 어느 가을날에 루시엔은 남편 베렌과 함께 세상을 떠났어. 베렌을 부활시키는 대신 요정으로서 누리는 영생을 포기했기에 그녀는 요정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처럼 진정한 죽음을 맞아 그 영혼이 중간계를 영원히 떠나 알 수 없는 곳으로 가고 말았지. 그리고 이로 인해 그녀의 가족들은 본인들이 신이나 요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처럼 그녀와 다신 볼 수 없는 이별을 한 셈이 되었기에 그들의 슬픔은 매우 컸다고 하는데, 특히 그녀의 어머니 멜리안의 슬픔이 컸다고 해. 


그리고 이들의 아들 디오르의 핏줄은 계속 후대로 이어지는데, 그녀의 미모도 자손들에게도 대대로 유전됐는지 그녀의 외동아들인 디오르는 물론 손녀인 엘윙, 증손자인 엘론드, 고손녀인 아르웬까지 다들 외모가 아름다웠다고 해. 특히 아르웬은 루시엔을 많이 닮아, 당대의 요정들 중 가장 아름다웠다고 해.


익숙한 이름이지? 맞아.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아라고른의 연인, 아르웬은 루시엔의 자손이야.


아르웬의 사랑은 유전의 영향도 있던 모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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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달달한 이야기의 배경은 톨킨이 현실에서 찍은 순애와 관련이 있어.


왜냐하면 루시엔의 모델은 톨킨의 아내 이디스 톨킨이며, 루시안과 베렌의 러브스토리 또한 두 사람의 연애사에서 착안한 내용이거든.


톨킨은 16세 때 3살 연상이었던 이디스와 한동안 사귀었지만, '개신교 여인과 부도덕한 연애를 한다'는 후견인 프랜시스 신부의 반대로 성인이 될 때까지 그녀와 일절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 그리고 톨킨은 21살이 되던 생일날, 그녀와 약속한 구름다리 밑에서 재회했지. 그리고 몇 년 뒤, 두 사람은 결혼에 골인하게 돼.


결혼 직후에 톨킨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지라 전쟁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 이디스가 그를 위해 발랄하게 춤을 추었는데,  이를 본 톨킨은 실마릴리온의 전반적인 스토리와 이 작품의 여주인공 요정 루시엔을 구상했다고 해.


그리고 두 사람의 사후, 두 사람은 한 무덤에 안장되었는데 묘비를 보면 이 이야기에 쐐기를 박는 이름이 있지.



이디스의 이름 아래에는 '루시엔'의 이름이, 톨킨의 이름 밑에는 '베렌'의 이름이 적혀 있으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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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적인 만남, 왕도적인 전개, 해피엔딩이지만 살짝 아련함이 남는 결말까지.


내가 아는 한 가장 완벽한 순애 이야기 중 하나라서 순붕이들에게 꼭 소개해주고 싶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