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한 명의 이성 소꿉친구가 있다. 하지만 이 녀석 나를 이성으로 보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물론 나도 이 녀석을 이성으로 볼 생각 따위는 하나도 없다. 서로 어릴 때부터 볼 꼴 못 볼 꼴 다 보면서 20년 가까이 지내온 사이이니 이성으로 보는 게 더 이상하지. 안 그래?


 “오늘 날씨가 미쳤나. 왜 이리 더워.”


 “여름이 안 더우면 언제 덥겠냐.”


 “늦봄이랑 초가을. 열대기후에선 1년 내내.”


 “반박을 위한 반박을 반대합니다.”


 “뭔 헛소리야?”


 “게임 할 때는 말 걸지 말라는 완곡 표현.”


 아 재밌다. 게임 재밌다. 완벽하게 처발리고 있는 중이지만 게임이 무지 재밌다. 게임에 집중을 못해서 내가 거하게 똥을 싸고 있는 것 같지만 무척이나 재밌다. 게임에서 눈을 못 땔 정도다. 게임 때문에 시험까지 조져본 나인데 게임이 재미가 없을 리가 있나. 안 그러냐? 그렇지? 암 그렇고말고.


 “기껏 소꿉친구가 놀러와 줬는데 신경도 안 쓰고 자기 혼자만 게임을 하는 건 어디서 배워먹은 예의야?”


 “전 개인주의자이자 자유지상주의자로서 저 혼자의 시간을 갖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각하.”


 “독재 반대! 민주주의의 기본은 서로의 의사가 다름을 인정하는 다원주의로 시작하는데 너는 어찌하여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만의 생각을 나에게 강요하는가! 나는 네가 사탄 같은 행동을 기탄없이 행하는 것에 절로 감탄이 나올 지경이지만 끝없는 비탄으로 너를 처절하게 규탄하고 손가락이 부러져라 지탄하고 폐가 마르도록 한탄하고 가슴이 부서져라 통탄하는 바이다! 자유민주주의 만세!”


 “얘는 대학교 들어갔더니 헛물만 들이켜서 오네.”


 “그러는 너도 대학교 들어갔더니 겉멋만 들어가지고 왔잖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변호사가 동반되기 전까지는 묵비권을 행사하겠습니다.”


 남매 같은 사이였기에 돌핀팬츠와 탱크탑만 입고 있는 소꿉친구 단 둘이서 한 공간에 있어도, 한 소파에 앉아있어도 나는 이 녀석을 이성으로 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묵묵히 소파에 앉아 게임을 하고 있었다.


 거참 오늘따라 기술이 잘 안 나가네. 내 주캐인데.


 선풍기를 자기 쪽으로 고정시킨 채 탱크탑 가슴 근처를 당겼다 놓는 것으로 부채질을 하던 소꿉친구가 물었다.


 “내 말 듣고 있어?”


 “월. 월. 월. 으르르르르릉. 왈. 왈.”


 “……개소리로 들린다는 말이네.”


 이런. 녀석이 계속 말을 걸어서 필살기를 써서는 안 되는 타이밍인데 필살기를 써서 필살기가 삑사리가 되어버렸다. 누군가가 옆에서 개소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해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나는 허벅지 위에서 무게감이 느껴져서 말했다.


 “족발 치워라.”


 녀석의 발이 내 허벅지 위에 올라왔다. 각질이나 이상하게 깎은 발톱 따위는 없는 작은 발이었다. 지금 두 손을 쓰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녀석의 발을 치울 수가 없었다. 진짜다! 아! 바쁘다! 게임하느라 바쁘다!


 “이렇게 예쁜 족발 봤어?”


 맙소사. 맙소사. 맙소사. 이 녀석 나이를 먹으면서 겉멋만 들어가네. 당당하게 자기가 예쁘다고 말하는 뻔뻔한 녀석이 아니었는데. 여기선 무슨 말을 해도 녀석의 페이스에 말려들 게 뻔하기에 나는 무시하기로 했다.


 “끄응.”


 보라 내가 무시하니 자뻑에 민망해서 몸부림치는 나의 소꿉친구를. 


 “멍. 멍. 멍. 끄으으으응. 멍. 멍.”


 내가 무시하자 소꿉친구가 외로움을 타는 강아지 같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녀석의 말이 개소리로 들린다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강아지 흉내를 내고 있었다. 녀석에게 강아지 귀와 꼬리가 달려 있었다면 축 늘어질 태도였다.


 “냉장고에 아이스크림 있다.”


 “그런 건 진작 말했어야지!”


 녀석은 즉시 내 허벅지 위의 발을 치우고 냉장고로 달려갔다. 역시 강아지를 길들이는 데에는 먹이만한 게 없다. 


 소꿉친구는 샌드위치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바로 내 옆에 앉으며 물었다.


 “넌 그런데 왜 맨날 저 캐릭터만 골라? 네 취향이야?”


 내 주캐는 여캐다. 


 “그냥 제일 잘 쓰는 캐릭터가 저거라서 고르는 거지.”


 사실 시작은 취향 때문에 고른 거지만. 취향 때문에 맨날 저것만 고르다보니 제일 잘 쓰게 된 캐릭터도 저거고.


 내 주캐가 내 소꿉친구와 약간 닮은 건 정말로 우연이다. 진짜다.


 소꿉친구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동안은 말없이 내가 게임을 하는 것만 지켜보고 있었다. 


 녀석이 아이스크림을 절반 즘 먹을 즘에 게임이 끝났다. 결과는 게임오버. 방해꾼이 있어서 이런거다. 소꿉친구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못하네.”


 뭔 욕을 들어도 코웃음치며 웃어넘기는 나다. 고작 저런 말을 들었다고 화를 내지는 않는다. 


 “내 아이스크림!”


 단지 난 녀석이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크게 베어 먹는 것으로 복수……윽! 차가운 것을 급하게 먹었더니 머리가 찡해진다.


 “으으. 게임을 못하면 인성이라도 좋아야지.”


 나는 합장을 하며 말했다.


 “하하. 남의 집에 놀러 와서 아이스크림을 얻어먹는 주제에 남의 험담을 하시는 분의 말씀에 경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그 뻔뻔함에 경의를 표합니다.”


 소꿉친구는 나와 자신의 손에 있는 한 입도 남지 않은 아이스크림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내가 한 말이 틀리지는 않았으니 녀석도 할 말이 없겠지. 녀석은 남은 아이스크림을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쭈뼛거리며 먹어치운 후에 소파에 드러누워버렸다. 딱 보니 다시 내 허벅지 위에 발을 올릴 기세라 나는 소파 밑에 내려가 앉았다. 


 나는 다시 게임을 시작했다. 소꿉친구는 소파에 누워서 내가 게임을 하는 것을 지켜봤……


 “야! 야! 머리 치지마!”


 “네 머리가 큰 걸 왜 나한테 따져?”


 “무릎 안 치우냐! 야! 야! 뭐하냐! 야!”


 소꿉친구는 내 목에 다리를 둘렀다. 보들보들하고 말랑말랑한 허벅지와 종아리 살이 느껴졌다. 이런 제기랄 이 녀석은 수치심을 모르는 거냐! 나를 이성으로 안 보는 거냐! 야이 망할!


 “또 죽었어!”


 “하하하하하하하하핫!”


 또 내가 게임에서 지자 소꿉친구는 허벅지로 내 양 볼을 누르며 깔깔거렸다.


 오냐! 네가 이성으로 안 보면 나도 너를 이성으로 안 보고 마구 대해주마!


 나는 게임 패드를 놓고 소꿉친구의 옆구리를 부여잡았다.


 “자, 잠깐 뭘 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나는 게임패드를 다루느라 발달한 손가락으로 녀석의 옆구리를 간질이기 시작했다.


 “그, 그만, 하하하하하핫!”


 윽! 녀석의 허벅지가 내 볼을 누르는 힘이 강해졌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내 머리는 힘을 덜 받는 방향으로 밀려났다. 어……그러니까……녀석의 다리 사이로.


 나는 목에 힘을 주고 팔을 밀어 더 이상 머리가 움직이지 않게 노력하며 녀석의 옆구리를 더 적극적으로 간질였다.


 “그만! 그만! 그마아앙!”


 내 머리가 풀려났다. 하지만 난 그만두지 않았다. 이 녀석아 게이머의 원한은 무시무시하다.


 나는 손바닥으로 녀석의 갈비뼈를 눌러 도망가지 못하게 고정시키고 손가락을 움직여 녀석의 옆구리에 진동을 줬다.


 “시, 싫어. 그만. 하지마. 미안해에.”


 하지만 나는 그만두지 않았다.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어째 묘한 기분이. 복수심 외의 감정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솟아올랐다.


 가학심인가? 이게 바로 사디스트의 마음인가? 그런 거지? 그런 거겠지?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나는 계속 녀석을 간질였다.


 “그. 그. 그마아아앙. 읏! 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응!”


 소꿉친구는 발작을 하듯 몸을 부들부들떨기 시작했다. 나는 깜짝 놀라 녀석에게서 손을 뗐다. 소꿉친구는 몸을 웅크리고 한참을 떨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내가 뭘 잘못했나? 어딜 잘못 건드렸나? 내가 알기론 얘 무슨 병 같은 것은 없었는데?


 다행히 오래지 않아 소꿉친구는 경련을 멈췄다.


 “하아. 하아. 하아. 하아.”


 소꿉친구는 얼굴을 붉히고 땀을 잔뜩 흘리며 숨을 골랐다. 그 모습이 어째 좀. 음. 난 이 녀석을 이성으로 안 봅니다. 안 본다니까! 탱크탑이 땀에 젖어 조금 에로 했지만 결코 나는 이 녀석을 이성으로 보지 않는다. 이 녀석이 나를 이성으로 보지 않는데 내가 왜 이 녀석을 이성으로 보겠는가. 응? 안 그래? 그리고 20년 동안 알고 지낸 소꿉친구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지겠냐? 안 그래? 


 소꿉친구는 벌떡 일어나 다리를 오므려 앉았다. 그리고.


 “으으으으으으으!”


 눈물 맺힌 눈으로 나를 노려보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래.”


 “어?”


 내가 붙잡기도 전에, 내가 사과하기도 전에 녀석은 성큼성큼 현관으로 가더니 신발을 신고 집에서 나가버렸다. 쾅! 하고 문이 닫혔다. 그리고 곧장 다시 쾅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렸다. 바로 옆집이라 가능한 짧은 텀이다.


 졸지에 나는 집에 혼자 있게 되었다.


 어쩌지. 지금이라도 따라가서 사과 할까?


 ……아니다. 저 녀석이 삐지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 언제나처럼 얼마 안가서 다시 놀자고 밥 먹자고 우리 집에 쳐들어오겠지. 동성친구보다 더 친하게 지내는 사이. 거의 남매나 마찬가지인 사이다.


 그러니 저 녀석도 나를 이성으로 안 보고 아까 전 그런 장난을 쳤겠지.


 암. 그렇고말고.


 그러니 신경쓰고 게임이나 마저하자.


 나는 다시 게임패드를 들고 게임을 시작했다. 그러나 아까 전보다 재미는 없었다. 젠장 오늘 게임은 다 했다.


 ……성인들을 위한 시청각 자료나 감상해야겠다.



 * * * 

 

 제목 : 언니들. 소꿉친구가 날 이성으로 안 보는 거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해?

 


 나 전에 소꿉친구가 좋아졌다고 올린 앤데.


 언니들 충고대로 옷 야하게 입고 스킨십 했는데 소꿉친구는 어릴 때처럼 장난으로 받아들이고 나한테도 장난치더라.


 이제 진짜 어떡해? 얘 진짜로 나 이성으로 안 보는 거 같은데? 뭔가 더 좋은 방법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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