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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타고니스트가 안타고니스트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제가 말해볼게요."


 올곧게 나를 응시하는 그 눈동자는 책을 읽는 그녀의 시선과 유사했다. 한없는 진중함, 과정을 독해하는 이해와 호기심, 결과를 향해 다가가는 설렘, 결말에 다다르기 직전의 초조함, 그 모든 것들이 섞인 그녀의 눈. 이 순간 나는 그녀에게 있어 하나의 서사가 되어 있었다.


"선배가 예전에 해준 말이에요. 고독은 사람에게 해방감과 자유를 선사하지만, 자유가 항상 감당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고독은 자유를 끝없이 주기에 문제라고."


 책은 좋아한다. 형식 속에서 의도를 파헤치고 또 다른 경험과 인생을 알아가는 정제된 문학.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치관 교류를 담아낸 문화. 단순한 재미를 느끼기에는 더 많은 오락 문화가 있기에 더 좋아하는 취미 활동에 선호도가 밀리긴 하지만, 말초적 쾌감 이상의 여지를 남기는 특유의 매력 또한 좋아한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수동성과 불안함이 있는데, 무한한 자유는 혼자 떠맡을 수 없는 문제를 홀로 짊어지게 만든다고. 그렇기에 사람에게는 의존할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고.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수동성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그녀보다 책을 덜 읽는 이유가 아마 그 성향 때문일 것이다. 마음에 안 드는 구절이 있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고, 그저 읽어야만 한다. 독자 홀로 내적 갈등으로 끙끙대면서.


 그녀가 책을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는 그런 수동성의 해소 수단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닐까. 아마 맞겠지. 괜히 미디어에서 독서가 고독함을 상징하는 취미의 스테리오타입으로 나오는 게 아니다. 중2병 감성 가득한 문화를 즐기던 시절이 떠올랐다.


 미연시. 비주얼 노벨. 게임으로 대표되는 약간의 능동성은 남겨둔 문화. 내가 좋아하는 건 그런 것들이었다. 프로이트가 우리를 봤다면 좋게 평가하겠군. 수동성은 여성의 상징이고 능동성은 남성의 특권이니까. 


"재혁 선배가 알려준 거예요."


 그래. 내가 그랬지. 슬금슬금 이어지던 독서 활동에서 라이트노벨 원작 애니메이션이었는지 비주얼 노벨에서 본 거였는지 기억도 안 나는 명대사를 꺼낸 게 한 달쯤 전의 일이었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나. 간신히 그게 웹툰에서 봤던 대사임이 기억났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구름이 해를 가리며 명암을 만들어냈다. 그림자와 빛 사이에서 그녀가 나를 올려보고 있었다. 한없이 올곧으면서도, 미세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다가왔다.


"선배랑 같이 다니면서 저는 변했어요. 혼자가 아니게 되니까 더 하고 싶은 게 많아졌어요. 역설적이죠? 덜 자유로워지니 오히려 하고 싶은 게 많아지다니. 감상을 같이 나누고 싶어지고, 좋은 이야기를 같이 알아보고 싶어지고, 각자의 모르는 것들을 서로 채워주고 싶어지고, 서로에 대해서도 궁금해지고. 혼자서는 못하는 걸 많이 알아버렸어요."


 공유된 경험에 대한 그녀의 평가가 열거법으로 표현되었다. 말을 이어나가기 힘겨운지 말 사이사이로 입술을 자주 소리 없이 뻐끔거렸다. 그녀가 흔들림을 용기로 이겨내고는 말했다.


"재밌더라고요."


 1대1의 일방적 소통을 전제로 만들어진 문화, 수동성과 고독이 기본적으로 동반되는 취미일지라도 함께 즐기는 사람이 생기면 얘기가 달라진다. 같은 경험을 통해 이어져 똘똘 뭉치는 게 바로 머리만 큰 영장류를 수만 년 동안 살아남을 수 있게 만든 생존 방식이니까. 수만 년 동안 결론나지 않은 게 문화의 정의의지만, 같은 경험을 공유하게 만드는 문화의 기능을 부정하는 학자는 없었다.


"그럼 이제 제가 물어볼게요."


 독서는 유익한 문화다. 문화 본연의 의미에 충실하다. 경험과 감정을 대리 체험할 수 있게 만드니까.


"선배도 그러신가요?"


"당연하지."


두 달 넘도록 지속된 우리의 독서 활동이 작은 결실을 맺었다.









 이건 또 뭐가 어떻게 꼬여버린 일이람.










 이제 와서 새삼스레 떠올리기도 뭣하지만, 내 삶은 별로 평범하지 않다.


 러브하지도 않고 그다지 코미디가 있지도 않다. 성장이니 청춘이니 떠들 여지도 없다. 2차 성징도 끝날 나이다. 내적 성장이고 외적 성장이고 이미 될 만큼은 된 성년을 2년 가량 남긴 청소년이다. 진한 사랑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랑받는 사람도 아니다. 사랑을 주지도, 받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적당히 맛 간 구석들을 모아둔 집합체가 바로 나다.


 이제 와서 새 갈등을 찾을 이유가 없단 말이다.


 새로운 갈등의 장이 열린 까닭부터 다시 짚어보기 위해 나는 잠깐 눈을 붙였다. 숨소리가 참 크게도 들려왔다.


 맥아리 없이 흘러간 사흘간의 기승전결, 그녀와 비슷한 신념을 가진 낯선 후배의 출현으로 시작된 소설 같은 일이 다시 펼쳐졌다.






*




  


"나더러 도와달라고?"


"네. 모임에 끼고 싶습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선배님?"


 이미 차고 넘치도록 요란한 사건이 가득한 인생에 이런 경험까지 쌓이게 될 줄은 몰랐다. 살다 살다 내가 여자 소개를 해주는 날이 오다니. 내 입에서 떨어진 말이 내 귀로 들리자 이질감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대걸레에서 빠져나간 물기가 탁했다. 중간고사 직후의 돌발적인 인맥 형성 이후로 잔잔하게만 흘러가던 고교생활이 드디어 전환점을 맞이했다. 





 인물은 이러하다.


 동아리 시간이 끝나고 늘 그랬듯이 청소를 시작한 나, 그리고 그런 나를 찾아온 1학년의 남학생. 그리고 청소될 교실에 남아 있는 1학년의 여학생.


 배경은 이러하다.


 시험 기간을 2주 앞둔 동아리 시간. 대부분의 동아리는 사실상 자습 동아리로 활동을 전환했고, 평소에도 자습 위주로 미적지근한 활동만 이루어지던 독서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동아리 담당 교사는 염세적이면서도 현실주의적인 관점으로 독후감 제출을 자유로 명시해버렸고, 흔히 현실적 타협의 산물로 인해 생겨나는 책임자의 태만함 때문에 을의 위치인 동아리 부장은 독후감 제출 명단을 따로 작성하는 번거로움을 즐겨야만 했다. 청소 활동이 방과후 여가 생활로 느껴질 지경이 된 2학년 노예에게 낯선 1학년 남학생이 찾아와 청소될 교실에 남아 있는 1학년 여학생에 관한 관심을 표현했다.


 사건은 이러하다.


 나와 그녀와는 다르게 그는 이렇다 할 갈등 없이 진행되는 일상의 종지부를 찍고 싶어 했다. 외적 갈등이 없어서 내적 갈등이 일어나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사랑의 본질을 정확히 통찰해버린 그의 내적 갈등이 기어코 사건을 만들어냈다. 자기 자신의 내적 갈등이 큰 외적 갈등 없이 원만하게 해소되길 원한 그는 나를 찾아와 갈등의 해결책을 물은 것이었다.


 이게 바로 학교 4층 남자화장실에서 장소와 분위기가 영 맞지 않는 연애 상담이 전개된 이야기의 개요다.





 불쏘시개 같은 내 인생이 질리지도 않고 또 타오르는구나. 1인칭 주인공 시점에 억지로 끼워 맞춰진 반동인물이 되어버린 나는 대걸레의 물기를 쥐어짰다.





  시험 기간이란 애시당초에 글러서, 학문적 성과를 입증해야 할 5일간이 닥치려면 아직 멀었건만(내 기준으로는.) 학생들이 학문을 제외한 모든 요소에 대해 왕성히 호기심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 파급력은 나와 그녀의 취미 활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괜찮고 자시고, 그냥 네 마음대로 해. 내가 뭐라 사람 가릴 입장도 아닌데."


  당돌한 남학생 후배의 짝사랑 상담을 듣게 된 독서부 부장이 그 예이다. 


 비일상의 영역에 가까운 내 방과후 취미 활동은 비일상적 탐구를 통해 시작되는 호기심의 사전적 정의를 불러일으키기 딱 좋은 화젯거리긴 했다. 소문이야 이미 퍼지긴 했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시험 기간이 자극하는 인간의 호기심을 마주하니 인생의 무상함만이 느껴졌다. 인류를 발전시켜낸 가장 큰 원동력이 나에게로 쏟아지자 나는 나 자신이 가장 발전된 인류라고 생각하던 시절의 나르시시즘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동심이 이래서 무섭다. 다른 사람의 동심도 자극해 버리니까. 


 반동인물의 바람직하지 못한 동심이 새록새록 떠오르게 된 경위는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필연적인 일이었다. 남녀 한 쌍이 방과후에 단둘만 남아 붙어 지내는데 학교라는 좁은 사회 안에서 어떻게 유명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문의 영향력이 고작 이 정도인 게 오히려 신기했다. 남 쪽은 몰라도 녀 쪽은 주목하는 사람이 많은 유명인이니 말이다. 동심에서 비롯된 현실성 적은 망상이 버릇이 돼버린 걸까.


  장밋빛 미래를 꿈꾸게 만드는 풋풋한 봄 향기가 유난히 심했던 올해 상반기가 문제였다. 희망에 너무 심하게 취한 남학생들 때문에 올해 초 그녀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외모와 학력 말고는 특별히 튀는 구석이 없고 특별히 사교적인 구석도 없는지라 시간이 흘러 시험 기간의 영향이 퍼져 학생들의 현실 감각을 살려내자 유행에 가까웠던 인기는 금방 거품이 빠졌다. 하지만 그녀의 인기는 유행이라 할지라도 유명세 자체는 확실했다. 외모와 학력이 있는데 안 튈 리가 있나.


 그러니 튀는 그녀와 친해진 나는 주동 인물의 적극적인 행동에 휘말리는 위치에 놓여져 버린 것이다.


"넵! 감사합니다!"


"나보고 허락 맡을 게 아니라니까..."


 그가 방실 웃었다. 그가 나를 고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었다. 혈연관계를 제외하면 그녀와 가장 밀접한 사람이 바로 나였으므로.


 당사자인 나도 도대체 어떻게 언제 왜 친해졌는지 잘 짐작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인맥인데 나더러 어쩌라는 건지 원. 두 독서부원의 독특한 사회성이 엮여 발휘된 신비한 관계가 나를 미지의 영역으로 내던져 버렸다. 당사자보다는 관찰자가 더 신기해할 관계이니 뭐라 억울함을 느낄 수도 없었다.


 그런 인간관계에 끼어들겠다고 후배를 어떻게 여겨야 할지 난감했다.


 그녀와 붙어 다닐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해 오던 일이었지만, 막상 닥치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이번이 완전히 처음은 아니기에 놀랍지는 않았다. 청춘물에나 나올 호들갑을 떨 여유는 없었다. 둘이 사귀냐 같은 물음에는 이게 사귀는 걸로 보이냐고 적당히 너스레를 떨면 그럭저럭 알아서 물러났고, 그녀에게 다가서는 사내들은 원서를 꺼내 취미 활동에 끼어 같이 읽어보겠냐고 먼저 권유해 버리면 적당히 도망갔기에 그럭저럭 비밀스러운 취미 활동이 무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당돌한 후배는 직설적으로 그녀와 친해지게 도와달라고 말해 청춘물에나 나올 법한 시츄에이션을 만들어버렸다. 필연적인 자업자득이다. 적당히 친하게 지내는 선후배 관계로 인식되는 건 내가 바란 것이었고, 그는 내가 바란 대로 나를 평가한 뒤 상담을 온 것이었으니.


 어색할 터임에도 직접 가까운 선배를 찾아가 공손하게 부탁하는 대담함과 그녀 본인에게는 직접적으로 접근하지 않는 신중함. 많이 고심한 끝에 실천에 옮긴 행동임이 분명했다. 내가 함부로 평가할만한 마음가짐은 아니었다.


"책 좋아하는 사람 둘이서 하는 작은 모임이야 그냥. 걔랑 친해지고 싶으면 나 말고 걔한테 얘기해야지. 넌 도서부원이니 책 얘기하면서 자연스럽게 낄 수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복합적인 마음가짐을 볼 수 있었다. 살짝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존칭, 괜한 의식을 자주 하며 쭈뼜거리는 행동에서 긴장감 섞인 소심함을 엿볼 수 있었다. 준비해온 듯한 말을 함에도 긴장이 묻어나올 정도면 분명 혼자 오랫동안 고민하고 망설였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눈을 마주치고 뚜렷하게 말을 이어나가는 걸 통해 강한 행동력과 단단한 결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소심하면서도 결심이 확고하다니, 모순적인 광기를 부추기는 시험 기간의 영향력이 십분 발휘되는 중인가 보다. 


"걔가 주로 무슨 책 읽는진 알지?"


"해외 로맨스 맞죠?"


 대부분의 다른 도서관과 마찬가지로 우리 학교의 도서관 또한 원서를 특별히 분류해 놓지 않았다. 000부터 900까지로 분류된 서가와 동떨어진 책장 하나에 원서는 몰려 꽂혀있었다. 평소에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책장이었지만, 두 독서부원이 도서관에 출몰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도서부원인 그 역시 북트럭을 정리하면서 그 책장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용객이 적다거나 분류해 봐야 다른 서가에 같이 꽂아두기 애매하다는 이유와는 다름을. 우리 학교의 원서 모음은 애초에 분류할 필요가 없음을 말이다. 그 책장의 95%는 800번대에 속할 로맨스 장르이기에.


"응. 적당히 로맨스 얘기하면 말 끊길 일은 없을 거야."


"넵."


 긴장과 용기가 섞여 나온 듯한 말투가 인상 깊었다. 나는 그가 품은 용기의 근원을 확인해 보았다.


 "걔랑 사귀고 싶은 거지?"


"네."


 긴장을 품은 목소리로 그가 말해나갔다. 그도 나에게 근원을 확실히 밝히고 싶은 모양이었다.


"반했습니다. 예은이를 볼 때마다... 두근거려요..."


 아아, 젠장. 내 사랑들이여. 너희들도 사랑 때문에 저딴 멘트를 들으면서 손발이 오그라드는 걸 참아야 했겠지. 미안하다. 진심으로 사과한다. 


"예은이... 그래. 걔랑 평소에는 어떻게 지냈는데?"


"평범합니다. 아직은. 같은 반 친구 정도?"


"딱 그 정도?"


"말 걸으면 예은이가 받아주기는 해요."


"걔가 먼저 말 건 적은 있어?"


"있...나?"


 그는 기억을 쥐어 짜내는 모양새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없었어요."


"일방적인 연심이라는 거네."


 생각을 입 밖으로 떠벌릴지 고민하다가 그냥 내뱉었다.


"포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연심을 일방적으로 끝내고 싶지는 않아요."


 그는 고민도 없이 깔끔하게 내뱉었다.


"홀딱 반했네."


"넵!"


 쑥스러움과 깍듯함 사이의 자세로 그가 말했다. 배짱도 느껴졌다.


"곧 시험이니까 도서관에서 공부한다는 핑계로 같이 남으면 되겠네. 그러다 나랑 걔가 말할 때 적당히 끼어들면 되겠고. 그럼 되겠지?"


"...네! 그거 좋겠네요! 도와주셔서 진짜 감사합니다!"


"별로 도와준 것도 아니야. 감사할 필요 없어."


 별로 연애 상담가의 역할을 맡고 싶지는 않다. 내가 도와주거나 응원해줄 만한 고민거리도 아니고. 


 단지 철없이 구는 사람을 싫어하는 동아리 후배가 또 놀라지 않도록 적당히 조언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청춘물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감사함 가득한 눈빛을 실어서 나를 바라보지 말라고. 열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사고 칠지도 몰랐을 하나를 줄였다는 점이 뿌듯하기야 한데 내가 느껴 마땅할 뿌듯함을 굳이 남에게서 전달받고 싶지는 않다. 나는 분위기를 돌릴 겸 약하게 한숨을 쉬고 그에게 물었다. 합의하고 얻어낸 남의 연심에 참견할 권리를 소소하게 즐기면서.


"걔를 좋아하는 이유는 있어? 연심이 일방적이라면 설득력이라도 있어야 걔도 이해를 해 줄 거 아니야."


 연애에 빠진 후배는 갸륵하게도 선배의 기대에 부응해 주었다. 


"과묵하면서 성실한 점이 좋고, 매사에 뛰어나고 최선을 다하면서도 자랑하지 않는 겸손한 모습이 좋아요. 차분한 면이 좋아요. 섬세하게 지내는 모습이 좋아요. 책 읽는 모습, 운동하는 모습, 공부하는 모습 하나하나 다 동경하게 돼요. 그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요. 그런 예은이의 모습을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요."


 그거 고백 멘트로 준비한 거구나? 많이 연습했네. 열거법이 좋긴 하지. 작위적일 정도로 풋풋한 모습에 나는 실소에 가까운 웃음을 지었다. 


"...진심이구나."


 청춘 그 자체인 듯한 그의 모습을 감상하며 나는 화장실 벽에 등을 기댔다. 습기가 있으면서도 젖지 않은 벽의 질감은 내 머릿속을 구현한 듯한 감촉이었다.


 본인도 자기가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연심을 가졌음을 자각하고 있다. 최소한의 배려심은 있고, 자세한 성격은 그녀가 더 잘 알겠지. 말릴 이유가 없고 말릴 마음도 들지 않았다. 단편적으로 알 수 있었던 그의 모습을 단순히 묘사하자면 호감형이었다. 싹싹하고, 긍정적인 사람. 외모는 남자 얼굴을 굳이 묘사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의 태도로 품평해 보자면 적어도 그 자신은 나름 자신감을 느끼는 수준으로 짐작되었다. 근거가 없지는 않은 자기 긍정이었다.


"내가 도와줄 만한 건 이 정도고, 나머지는 잘 해봐라."


 자신에게 사랑을 느끼는 사람 한정으로 맹렬한 증오를 발산하는 그녀에 대해 생각하며 말했다. 어차피 판단은 그녀가 할 테니 내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비슷한 삶을 살아본 소년으로서 최소한의 응원을 던졌다.


"걔한테 미리 말해 둘까? 같이 책 보고 싶어 하는 친구가 있다고."


"네? ...아뇨. 괜히 더 어색해질 수도 있겠죠. 제가 자연스럽게 한번 말 걸어 볼게요."


 이성에게 접근하는 명쾌한 전략을 그가 꺼냈다. 사리 분별이 명확했다. 옛날옛적 어딘가의 중학생처럼 열정만 넘치는 청소년은 아님을 확신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어. 그럼 내일 보자."


 청소하다 말고 화장실에서 노가리를 까던 동아리 부장이 다시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네엡'소리가 들려왔다. 싱글벙글 들뜬 표정을 지은 채 고마움의 표현을 아끼지 않는 후배를 뒤로하며 나는 오늘 내가 몇 번의 감사 인사를 받았는지 떠올려 보았다. 최소한 인생 최고기록은 무난하게 갈아치웠을 것이다. 사랑과 시험 기간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이율배반적인 광기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물기와 먼지가 털어진 대걸레가 발치에서 찰랑거렸다.





*





 24시간이 지나자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시험 기간의 긴장감으로 흔들다리 효과를 느끼는 건 좀 아니지 않냐?


 복잡한 사색 과정을 생략한 끝에 단편적으로 내린 결론을 순화한 뒤 다섯 음절로 나타냈다. "무리수였네."


 그는 대답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도서관에서의 숨 막히는 긴장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도망나와버린 그였다. 긴장이 끝나고 이성이 돌아오면 남는 건 허무함 뿐. 비슷한 경험을 몇 번 겪어본 선배로서 나는 그를 달래기 위해 찾아갔다. 석식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하늘은 미치도록 푸르렀다. 야간자율학습에 자율적으로 꼬박꼬박 참여하는 우등생 무리가 매점에서 저녁거리를 사고 있었다.


 나는 커피를, 그는 바나나우유를 골랐다. 남아 있는 벤치에 자리 잡은 우리는 인생의 무상함을 들이켰다.


 발단은 이러했다.


 14일마다 한 번 청소를 하는 독서부 부장과는 다르게 매일매일 도서관을 청소해야만 하는  불쌍한 영혼 중 사랑을 알아버린 1학년 개체, 그리고 그들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는 입장인 도서관 손님 두 명. 계획대로, 나름 자연스럽게 두 1학년은 만나게 되었다. 


 전개는 이러했다.


 두 남자는 손발을 맞춰놨던 대로 대화를 무난하게 이끌어갔다. 하지만 계획에 참여하지 않았던 한 명의 인물은 그런 전개를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위기는 이러했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어떠한 반응 하나 없이 수학 자습서를 묵묵히 풀어나갔다. 말 그대로, 말 한마디 없이 두 남자를 바보로 만들어 버렸다.


 절정은 이러했다.


 바보가 된 두 남자는 바보같은 행동을 취했다. 1학년은 뻘쭘함 속에서 도서관을 나간다는 선택을 했고, 2학년은 1학년을 따라간다는 선택을 했다. 


 이상이 결말을 스스로 만들어가게 된 두 청소년의 이야기이다. 아아, 아름다운 청춘이어라.


 집단적 행동 양상을 강하게 띤 나머지 집단적 광기에 휩쓸린 두 남자와는 다르게도 그녀는 시험 기간의 정열을 순수하게 학문에 힘쓰는 데 사용했다. 그걸 간과한 두 바보의 바보다운 결말이었다.


"선배님은 왜 따라오셨습니까?"


 뒤늦게 찾아온 허탈함을 잊으려는 듯 그는 화제를 나에게로 돌렸다. 네 흑역사 기억해 주려고. 같은 본심을 숨기며 또 다른 본심을 꺼내 적절한 위로를 해줬다.


"내 책임도 있으니까. 우리 바보 돼버렸네."


 "하하."


 그는 웃었다. 무슨 의미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이불을 같이 걷어차 줄 인간관계가 더 생긴 것에 기뻐하며 나도 어설프게 따라 웃었다.


"생각보다 허망하네요. 입학식 날 이후로 계속 망설였는데. 처음에는 다른 선배나 친구들이 계속 말을 걸어서 가까이 갈 엄두가 안 났어요. 그 이후로는 다른 사람들이랑 대화 자체를 별로 안 해서 먼저 다가가기 힘들었고요."


"혹시 지금 나한테 차였다고 푸념하는 건 아니지?"


"...맞습니다."


 나는 선배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떠올렸다.


"악!"


 그가 보여주는 자기혐오와 동심을 불러일으키는 태도에 대해서는 등짝을 후려쳐 주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되었다.


"차이긴 개뿔. 시기가 안 좋았던 거야."


 내 불찰이었다. 그녀의 독서 활동과 잡담의 빈도가 줄어들었음을 간과하고 안일한 훈수를 두어 후배 남학생이 오늘밤 잠을 못 이루고 이불을 실컷 걷어차게 만들어 버렸다. 사죄의 의미를 담은 격려를 시도했다.


"시험 끝나면 다시 마음의 여유가 생길 거고, 방학도 올 거 아냐. 그때까지 적당히 접점을 만들어 놓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를 격려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 내 청춘 시절을 어렵지 않게 추억할 수 있었다. 아아, 내 빌어처먹을 청춘이여. 너도 저렇게 자신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울 거라고 나르시시즘 섞인 우울감에 빠져 있었더냐? 나는 지금이 시험이 2주도 안 남은 기간이자 잡담에 빠질 만한 상황은 아니라는 사실을 성실하고 이성적인 그녀가 알고 있었기에 우리의 시도가 실패한 것이지 결코 그녀가 너를 싫어해서 대화를 거부한 게 아니다 등등의 현실을 그에게 주입해야만 했다. 자의식 과잉인 두 청소년의 결말로 딱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감사합니다."


 내 노력이 결실을 보았다. 그는 우수에 잠긴 표정을 집어치웠다. 비록 목소리가 약해지기는 했으나 어제 보았던 태도가 돌아왔다.


"시험 끝나고 다시 말 걸어봐야겠네요."


 그가 한 모금 마신 뒤 계속 손에 들고만 있던 바나나우유를 한 번에 다 마셨다.


"교훈을 얻은 기분이네요. 망설이면 기회를 놓친다... 행운은 용감한 자를 돕는다? 그런 말처럼요."


 동의했다. 맞는 말이다. 행운은 준비된 사람에게 오는 법이다. 대우를 사용하면 더 확실했다. 용감한 자가 아니면 행운의 도움을 받을 수 없고, 준비된 사람이 아니라면 행운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일에 불과하기 마련이다. 노을이 있으면 어울렸겠지만 6시가 되었음에도 날은 여전히 창창했다. 청춘스러운 저녁 시간에 그는 나쁘지 않은 표정으로 내게 얘기했다.


"선배님은 어떻게 예은이랑 친해지셨습니까?"


"독후감 확인하고, 책 얘기하다 보니까 친해졌지. 근데 그렇게 말하면 너무 부담스러우니까 좀만 더 편하게 말해 줄래."


"옙. 선배님도 책 좋아하시나 보네요."


"싫어하진 않아. 취미 수준까지는 아니고. 독서부는 그냥 가위바위보 져서 남는 데 간 거고. 너는 도서부인데 책 별로 안 좋아해?"


"별로... 도서부는 친구 따라 들어갔어요. 면접 붙을 거라곤 생각 안 했는데."


"따로 가고 싶은 부는 있었어?"


"문예부요."


"책 싫어한다며."


"시는 좋아해요."


"...그래서 문예부는 갔어?"


"친구가 뜯어말리더라고요. 아는 형 말로는 문예부가 짹짹이 가지고 별 소란을 다 피운다고..."


 잡담을 잠시 나누었다. 웹소설 작가라면 또 모를까 문예창작과를 지망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문예창작과를 지망하는 사람은 보통 책을 많이 읽기 마련이다.


 성비나 가방끈 이야기였다. 청춘 성장물 섞은 러브코미디 라이트노벨에나 나올 법한 동아리 활동을 좋은 친구 덕분에 하지 않게 된 후배에 대해서만 묻기로 마음먹고 잡담을 관뒀다.


"그래. 도서부는 어때?"


"힘들죠. 간식 없었으면 진작 때려쳤을 겁니다. 선생님이 추천해주는 외국 과자가 맛있는 게 많더라고요."


 덤덤하게 그가 말했다.


"예은이 많이 보게 된 것도 좋고요. 기회도 생겼고..."


"반에서는 많이 못 봐?"


"그건 아닌데, 뭐라고 해야 할까, 다가가기 힘든, 그런 붕 떠 있는 분위기라서 어떻게 말 붙일 수가 없었죠."


 그가 반에서의 그녀를 설명해 주었다.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며 혼자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고, 먼저 말을 거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답이라던가 부탁은 잘 들어주지만, 사교를 위한 시시콜콜한 대화는 반기지 않는다. 


 그 점 때문에 그녀의 인기가 식어버린 거겠지. 관심을 가지려고 해도 건수를 없애서 접근을 차단해 버리는 그녀의 생활 태도였다.


 예전에 금발 양아치가 알려준 그녀에 대한 소문과 그가 지금 말한 내용들을 종합해 보았다. 그녀의 비호감도, 호감도 아닌 딱 선 자르는 그 미묘한 태도로 인해 순수한 인기에 기반한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소문은커녕 악명조차도 쌓이지 않았다. 음지에서 이루어지는 조용한 험담과 암투라면 모를까, 고등해진 학생들이 굳이 정성 들여 한 사람을 괴롭히는 데 시간과 열정을 소모할 정도로 똥통인 학교는 아니었다. sns도 하지 않는 그녀에게 앙심을 품을 계기와 방법도 없다시피 했고. 유난히 더 미워할 수조차 없게 만드는 품위라고 할만한 그런 게 있었다. 가장 큰 소문이 동아리 선배랑 어울린다는 소문이었고, 나와 그녀의 무미건조한 대응으로 인해 그마저도 어떤 당돌한 후배 한 명의 등장을 제외하면 큰 영향은 없었다.


 정리해 보니 확실해졌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말 그대로 붕 떠 있는 인간관계의 소유자가 그녀였다.


 그녀가 평가한다면 인간 군상 중 관음 계통으로 분류되었을 그는 그런 그녀와 가까워지길 원했다.


 텅 빈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도와주고 응원할 이유가 아주 없지는 않군.


"...생각해 보니 나는 걔가 아니라 걔의 책이랑 사상에 집중하다 보니 걔랑 친해진 게 아닌가 싶다."


"무슨 뜻이십니까?"


"친해지기 위해서 화제를 맞추는 게 아니라, 화제를 맞추다 보니 친해진 거지."

 

 그가 말한 그녀에 대한 감상에 내 의견을 덧붙였다. 그의 말투가 다시 군대체로 변할 걸 통해 그의 열렬한 흥미를 체감할 수 있었다.


"음, 걔가 얼굴 보고 다가오는 사람 싫어한댔거든?"


"네. 그러면 선배님은 예은이 취미를 맞춰 줘서 친해진 겁니까?"


"응. 말하자면 수단과 목적이야. 나는 취미를 수단으로 쓴 거고.


"느낌이 별로 안 좋은데요. 친해지고 싶어서 관심사 맞추는 건 그냥 평범한 게 아닙니까?"


"평범하지. 그래서 착각하게 되는 거야."


 연애 실패자가 남에게 연애 조언이라니. 돌겠네. 추상적인 지식 본연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는 말 알지?"


"들어는 봤습니다."


"칸트가 한 주장이야. 근데 그거 살짝 왜곡된 거다. 원래는 사람을 목적으로만 대하라는 게 아니라, 목적으로도 대하라는 뜻이거든."


 요즘 들어 고2병 걸린 장황설 늘여놓는 버릇이 생겼다. 후배면 다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게 되 버린 걸까. 약간의 갈증을 느끼며 말했다.


"칸트가 완전 이상주의자는 아니었거든. 사람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다고 해도 사람 일부는 수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건 알았어. 신분, 능력, 성격, 신체... 다른 사람의 인간성에 가까워지려면 뭐든지 간에 수단이 필요할 거 아냐. 수단과 목적은 연결되는 게 당연하고. 그래서 사람이 순수하게 목적으로만 쓰이기는 힘들다고 칸트도 생각한 거야."


 이 후배도 장광설을 잘 들어주는 편으로 보였다. 


"듣기는 별로 안 좋지? 그럼 한번 거꾸로 생각해 봐. 사람과 가까워지기 위한 구실로, 수단을 수단으로만 쓰면 어떻게 되겠어? 목적만 얻고 끝나지. 상대방만 얻고 상대방과 가까워지기 위해 사용한 수단들을 내치면 어떻게 되겠어? 상대방을 쟁취하는 구도가 되겠지. 쟁취한 뒤에는? 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을 내쳐 버리면, 공허해질 수밖에."


 얼마 전 그녀가 나에 대해 내린 평가 하나가 떠올랐다. 당연한 소리를 쓸데없이 길게 늘어놓는 꼰대의 자질이 내게 충만함을 자각하며 나는 계속해서 나불거렸다. 


"나는 책 읽는 취미가 수단이면서도 목적이었고, 걔도 마찬가지였지. 내가 걔랑 무난하게 친해진 건 그래서였을 거야."


 마무리 자기도취 대사까지 완벽하군. 내가 기성세대였으면 더 완벽했을 것이다. 분위기 전환을 위해 마지막으로 말했다.


"들어보니 너도 그런 것 같더라. 너도 친해질 수 있을 거야. 지금 말고 서로 여유가 있을 때는."


 빙빙 돌고 돌아서 격려를 끝냈다. 긴장이 풀리니 다시 한번 쪽팔림이 찾아왔다. 기특하게도 그는 쪽팔림을 무마해 주었다. 느낌표 두 개는 넘게 붙을 법한 감사하다는 말을 통해서.


"조급하게만 안 굴면 괜찮을 거야."


"넵. 너무 들떠 버렸네요. 시험이 코앞인데 뭘 한 건지..."


 미래를 희생하고 현실에 충실해지게 만드는 사랑이라. 낭만적이기 그지없었다. 또 다른 사랑꾼인 1학년은 서서히 웃음기를 지워나갔다. 다시 한번 진지한 이야기를 꺼낼 생각인가 보다.


"선배님은 왜 저를 도와주십니까?"


"네가 도와달라고 했으니까."


 진지함에 대해 당연한 소리로 되받아 주었다. 이러니까 청춘물 주인공이라도 된 기분이다. 어물쩍 대답을 회피하기 좋은 당연한 대답 겸 명대사를 바라진 않았겠지. "어차피 내가 도와줘도 받아들이고 말고 하는 건 결국 걔고, 네가 시도도 못 한 체 우물쭈물하는 게 보기 안 좋기도 했고." 듣기 편하도록 팩트와 독설을 섞어 말했다. 그의 표정이 조금은 풀어졌다.


"선배님은... 예은이를 안 좋아하세요?"


"좋아하는데."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좋아하는데 왜 저를 응원하시는 겁니까?


"love가 아니라 like라서. 너는 love잖아. 그리고 난 너 정도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


 뒤늦게 현실 자각의 시간을 가진 모양이다. 그의 눈이 안도감 반 의심 반을 담은 듯했다. 그 의심의 근원인 응원에 관해서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도 그저 광기에 휩쓸려 버렸을 뿐이다만. 총 20권 남짓의 옛날 판타지가 그렇게 술술 읽힐 줄은 몰랐다. 거기서 커플링과 연애 이야기를 꺼내는 게 그렇게 재미있을 줄도 몰랐다. 그리고 내 동심을 자각하는 얼간이를 응원하는 건 생각보다도 더 재미있는 일이었다.


"...선배님이 왜 예은이랑 친해졌는지 알겠네요."


 그런 말은 재미없는데. 장기연재의 폐해에 빠진 청춘물 특유의 자기비하와 자격지심 가득한 주인공 흉내라도 내려고? 설마 다음 말은 그거냐? 나는 걔랑 안 어울려 흑흑, 그런 식의 자존감 증명?


 재미없는 말이 예상까지 되니까 참 재미없게도 들려왔다. 


"내가 조급하게 굴지 말라고 한 게 몇 분 전이었지?"


"...죄송합니다."


"차인 거 아니라고. 일단 어깨부터 펴고 자신감부터 찾아라. 그렇게 구부정하게 다니면 쓸데없이 목만 피로해진다. 피곤하니 쉬고는 싶어지는데 다른 곳은 다 쌩쌩하니까 휴식 효율이 낮아지고, 그렇게 만성피로 되는 거야. 어깨부터 펴. 더. 그렇게."


"넵."


 싹싹한 모습이 어울리는, 청춘이 어울리는 후배 녀석이었다. 그래서 녀석이 "선배님은 똑똑하고 상냥하니까 예은이랑 잘 어울리는..." 이라는 말을 또 꺼냈을  그의 청춘 러브코미디가 잘못되었다고 일갈하며 등짝을 한 번 치고 싶은 자살 욕구 섞인 살인 충동을 참아야만 했다. 아아, 동심이 추억 보정 없이 다가오니까 이리도 흉하게 보일 줄이야. 내 등짝을 후려쳐 준 친구들이여, 너희들의 심정을 이제야 알았다. 미안하다.


 기만으로 느껴지지 않게 주의하며 그를 어르고 달랬다. 그를 먼저 집에 보낼 때쯤에는 석식 시간이 끝나 자율적으로 다시 야간자습하러 학생들이 모두 돌아간 뒤였다. '먼저 갈게요' 스마트폰 알림에 그녀의 기본 프로필 사진이 떠 있었다. 졸고 있는 사서 누나를 뒤로하고 나도 가방을 챙겼다.


 그쯤 되서야 해가 저물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비일상을 만끽한 나는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로 내려갔다. 커피를 사려다가 이미 마신 걸 기억하고는 관뒀다. 






*





 대략 23시간이 지난 뒤였다.


 카페인, 알코울, 니코틴, 뭐든 간에 몰입하고 미친 기분을 느낄 무언가가 절실히 필요했다.


 어색한 공기가 흐르는 도서관 때문이었고, 어느 정도 마음을 다잡은 후배 때문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느끼게 된 정서 불안의 원인은 다양했지만,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맞은편에서 같이 자습 중인 내 후배 때문이었다.




 갈래는 이러하다.


 심리주의. 아마도. 


 성격은 이러하다. 


 서정적, 애상적... 아마도.


 제재는 이러하다. 


 집, 공부.

 

 주제는 이러하다.


 집에서 같이 공부하자고 말을 꺼낸 한 소녀의 용기.





 돌겠네.

 



 이미 돌았을지도.



 내가? 그녀가? 아니면 이 세상이?



 아무튼 간에 지구는 돌겠지.



 돌았네.







 언제 이렇게 감정선이 진전된 거냐. 사건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반동인물은 이런 전개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인물 배경 사건 모두 생략된 부분이 너무 많지 않냐? 정서 불안도 그런 감상의 연장이었다. 동심에서 기반한 알코울과 니코틴에 대한 추억이 떠올랐다. 설마 뜨거운 커피는 아니겠지. 노망이 들었는지 망상도 덩달아 떠올랐다.


 설마 나도 같이 공부하니까 집단 광기가 더 강하게 발현된 건가? 평정을 잃어버린 뇌가 팽팽 돌며 생각을 싸냈다. 성에 눈뜬 사춘기 소년스러워졌다. 동심이라, 낭만적이기도 해라.


 금요일이 불타올랐다. 미덥지 못한 내 사고방식을 최대한 굴려가며 합리적인 반응을 도출해 보았다.


"공부 봐줄 거라도 있어?"


 꽤 괜찮군.


"그건 아니고요."


 아닌가?


"그럼 뭔데?"


 이러면 차라리 바로 묻는 게 낫겠다.


"학원 선생님이 사정이 생겨서 오늘 쉰다고 하시거든요. 그래서 같이 공부할 상대가 필요해서요."


 그녀가 덧붙였다.


"혼자 있으면 공부가 잘 안 되거든요."


 여기서 집에 아무도 안 계셔? 같은 말을 꺼냈다가는 얼간이가 된 기분을 맛볼 수 있겠지. 질문한다고 쳐도 답변을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떠올려 봐라. 날라리 시절 써먹던 변명거리들을 떠올려 봐라, 내 대뇌피질아. 중독 상태는 아니잖아. 일 좀 해봐.


"그래."


 이럴 때는 그냥 모르는 척 따라가는 게 나을 것이다. 아마 부모님 계시니까 부르는 거겠지. 부모님 계시니까 괜찮아요, 하면서 친구 아빠랑 친구랑 같이 술 마시던 태권도장의 추억도 떠올랐지만, 그런 일은 내 내뇌 히토미만 꺼 두면 망상의 영역에 불과하겠지. 어떤 생각이든지.


"전수할 시험 팁 있으면 알려주세요."


 그녀가 목적을 상기시켰다. 가방을 챙기는 그녀를 따라 나도 덩달아 펜을 내려놓았다. 


 주동인물의 행동은 종잡을 수가 없다. 따라 붙는 당사자도.


 그러니 네가 그런 표정 짓지 말아다오. 불쌍한 영혼아.


 




 도서부가 탈출하는 것보다 빠르게, 평소보다 일찍 우리는 교문을 나섰다. 운동장은 한산했고, 경비 아저씨는 꾸준히 인사하는 우리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같이 묵례해줬다. 설마 젊은 커플을 바라보는 노인들 특유의 훈훈한 시선은 아니겠지.


 건전하고 정신적으로 성숙한 교감을 중시하는 내 가치관을 다잡으며 나는 건전한 선후배 관계를 구축해갔다. 어디 자유지상주의자가 부르짖는 구축 말고 생산적인 뜻의 구축을 말이다. 우리학교 국어 특. 30문항인데 번호 하나당 6개씩임. 검토할 때 번호수 맞추면 객관식 만점 가능. 게으르면서도 문제 출제에 이바지할 권력은 있는 우리 동아리 담당 선생님에 대한 존경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순간임. 족보 많이 풀어봐서 이미 안다고? 그러면 됐고. 영어 특. 의외로 서술형 부분점수 후하게 주심. 동사만 대충 써넣어도 어지간하면 1점은 받음. 대충 써넣을 일이 없으니 상관없다고? 그러면 됐고. 이런 식으로.


 그리고는  시시콜콜한 잡담. 그동안 밀려 있던 일상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았다. 왜 우리 체육할 때만 소나기 쏟아지냐, 수행평가 밀려서 자습 대신 운동장으로 나가게. 등등.


 대화의 소재가 고갈될 쯔음 익숙하기 그지없는 풍경이 나왔다. 사거리와 횡단보도.


 역사 대신에 저 아파트로 향할 것이라는, 무서운 소재를 눈앞에 두고서.


  항상 빨갛게 빛나며 길을 가로막던 신호가 이번에는 미치도록 푸르렀다. 나는 그 사실에 안도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며 걸음을 계속했다.


"있잖아요."


 조언이랍시고 실없는 소리를 반복하던 선배놈의 말이 끝나자, 그녀가 말을 꺼냈다.


"어제 하늘이랑 따로 말한 거라도 있었어요?"


 앞서 걸어가며 뒷모습을 보인 채 그녀가 말했다.


 강하늘. 그녀와 같은 반인 1학년이자 도서부원. 


 그녀가 어제 보인 반응은 의심이었겠지. 나름 자연스러움을 노렸다지만 어색함 투성이인 접근. 다시 떠올려보면 확실히 바보 같은 짓이었다.


"너랑 같이 공부하고 싶다더라."


 이루어지지 못한 결과로 대답했다. 


"어색하게 끼어들고 싶지는 않아서, 나를 빌미로 말 걸어본 거래. 걔가 미리 말해둔 것도 있고.어제는 걔가 좀 놀란 것 같아서 따라나갔어."


 이루어진 과정에 대해서도 말했다. 


"왜요?"


 이루어진 원인을 그녀가 물었다.


"...기회는 줘야지. 뭐가 됐든 간에."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의문문에 추상적이고 포괄적으로 답했다. 실망스러운 대답은 아니었는지 그녀는 걸음 속도를 줄였다.


"말할게. 하늘이는 네가 좋데. 지금까지 계속 고민해 오다가, 긴장을 못 참고 일을 벌인 모양이야. 짝사랑이긴 해도 그걸 3자인 내가 뭐라 평가할 수는 없잖아."


 그녀의 옆에 섰다. 생각을 읽을 수 없는, 그녀의 기본 상태와 비슷한 무표정을 볼 수 있었다.


"하나 물어볼게."


 문화는 결국 현실을 바탕으로 창조된다는 게 실감되었다.


 감정을 숨기는 척하면서도 다 드러나는 인물이 여기 있다니.


 가상보다 현실이 더하다더니, 이 현실은 대체 뭘까나. 여러 매체에서 뻔히 보이는 반응들을 모아놓았다는 감상을 그녀에게서 받을 수 있었다.


"내가 도와준 게 마음에 안 들어?"


"......"


 하여간, 여자랑 똑바로 말도 못 하는 머저리같은 선배가 아닐 수 없다. 쓸데없이 오지랖을 부려서 이 꼴이라니.


"선배도 순애를 좋아했었죠?"


"응."


"그래서 도와준 건가요? 짝사랑을."


"응."


"...하긴. 짝사랑은 고독하니까요. 선배 성격 떠올리니까 알 만 하네요."


 그녀가 이제 나와 눈을 마주쳤다. 걸음을 멈추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갔다가 한 박자 늦게 멈춘 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저도 순애 좋아해요."


 알고 있어.


"짝사랑보다는 상사상애를 하고 싶네요. 그게 순애니까요."


 알고 있어.






*





"...맞아. 넌 정말 좋은 친구고, 계속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이대로 쭉."


 완곡어법. 은유적인 요구에 대한 대답에 어울리는 은유적인 대답. 우리 친구로만 지내자, 라는 대답을 떠벌릴 수 있었다.


 결실은 단순한 확인으로만 끝났다.





 정숙한 분위기였다. 나도, 그녀도 살짝 굳어 있는 진지한 얼굴이었고, 애매한 시간대의 아파트 앞 거리는 차 지나가는 소리만이 있었다.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시험 좀 빨리 끝났으면, 어디 영화라도 보러 가고 싶은데."


 그녀는 웃지 않았다. 


"제가 너무 어색하게 굴었네요. 부담스러우면 안 오셔도 돼요."


 그녀는 웃어주었다. 


 차가운 인상과 차가운 성격은 다르다. 그녀의 성격은 차갑지 않았다. 차가운 인상이 습관화되서 그렇지.


 그녀는 웃어주었다. 미련한 선배를 배려하기 위해서.


 그녀는 웃지 않았다.


 나도 웃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만들어낸 배려와 호의를 거절할 수 없었다.


 나는 떨떠름함을 무마하고자 나서서 반대편으로 걸어나갔다. 잘 가, 따위의 얼빠진 인사를 남기고는.







 차버렸네.


 잘도 찼구나.






 지랄하네. 


 배려는 무슨.


 연심 가지고 간 보니까 재밌냐? 정도를 모르는구나. 병신아.


 머저리같은 면도 정도가 있지. 감정선을 이해 못한 게 아니라, 이해할 생각도 없는 거잖아. 남의 호의에 익숙해지니 그게 당연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지? 기고만장하구나.


 덜컹거림을 느끼고 싶지는 않은 날이었다. 집에 걸어 가기로 마음먹었다. 이상 성욕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구나 약간의 피학증은 있다. 자기학대도 때로는 효과적인 감정 조절 수단이다.


 정신없이 걸으니 몸에서 땀이 났다. 생각이 방울방울 떠올랐다.


  제기랄.


 더 가까워지기는 무서우니까.


 속물적이고 이해타산적인 소시민 납셨군. 잃을 게 없는 사람은 무섭다고 하는데, 잃을 게 적은 사람은 잃을 게 없는 사람만큼이나 무서워지지? 결핍은 욕구를 부르고, 욕구의 불만족은 욕망을 만든다. 소시민의 뒤틀린 욕망이 가득하구나. 


 잃고 싶지 않냐고?


 당연하지.


 나는 욕심쟁이다. 물질주의 속에서 인간성도 잃어버린 나머지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취급하는 소시민이다. 당찬 후배를 내치고 싶지도 않고, 사랑스러운 후배를 잃고 싶지도 않다. 내 경험과 가치관도 잃고 싶지 않다. 나는 이런 지긋지긋하게 나른한 일상을 정말 좋아한다고. 관음을 통한 대리만족으로 충분히 만족 가능한 나는 소시민이라고.


 찌질한 새끼. 거짓말도 유분수지. 소시민적인 삶의 태도를 합리적이라고 여기지 마라. 병신아.


 첫 눈에 반해 버렸잖아. 이미 알고 있잖아. 일방적인 연심도 아니잖아. 진짜로 네가 화학적 거세라도 당했으면 호의니 호감이니 구별하겠답시고 내적 갈등을 겪을 필요도 없었겠지. 안 그래? 이재혁 병신아. 그렇게 잘나셨으면서 다른 사람을 위해주는 것도 못 하는 거냐? 청춘이 뭐가 어째? 위선자 새끼. 둔감하니 눈치가 없느니  뭐라 따질 영역이 아니다. 머저리 녀석아.


"넌 나를 몰라."


 길과 아파트 단지를 가로막는 담 역할을 하는 수풀 사이로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울음소리에 답했다. 청춘의 경험은 소중하고, 무시무시하다. 자아 성찰의 시간은 곱씹을수록 가혹해지기 마련이다.


"넌 나를 몰라."


 이게 중2병이냐, 고2병이냐? 알 수 없었다. 


 가르쳐줄 마음은 있으신가요?


"나도 널 모르지."


 미치겠군. 길게 잡아봐야 세 달동안 만난 사이다. 뭘 그리 조급하게 구냐고.  


 그녀도 조급하게 굴고 싶지는 않았겠지. 왜인지는 이미 잘 알잖아. 진짜로 그녀의 호감이 익숙해져 버린 거냐?


 제기랄.


 비판적 자아 성찰이 멈추지를 않았다.


 자아와 초자아가 싸우는군. 지랄 났네.


 18년의 지랄맞은 인생으로 생겨난 가치관과 합리적 사고 능력이 거창한 충돌을 일으키며 머리를 팽팽 울리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 학교, 공원을 뒤편으로 팽개치고 달리듯 걸었다. 육교를 건너고, 다리를 건넜다. 열차 지나가는 소리가 멀찍이 있는 반대편 철도의 다리에서 들렸다.


 탁한 기색이 가득한 강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점처럼 보이는 오리 몇 마리도 같이 보였다.


 걷다가 멈춰 휴대폰을 꺼냈다. 무엇을 할까 고민해 보았다.


  메신저 어플을 켰다. 최상단에 기본 프로필 사진이 보였다.


 눌렀다. 가장 첫 번째 대화 기록으로 내역을 스크롤해 올렸다.


 몰라도 연락하는 데 큰 지장이 없는, 벌써 시대의 잔재가 되어 가는 전화번호가 보였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없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의 용기에 확실히 답할 필요는 있었다. 그건 공통된 견해였다.


 유치할지라도, 내적 갈등으로 끙끙대면서 주접을 떨 바에야 이해는 시켜 줘야지.


 나는 숫자의 나열을 꾹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