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끌벅적


이 말이 정말 잘 어울린다.


나를 포함해서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의 30명의 인원이 10여년에 걸쳐 전부 모인 자리니까 말이다.


아, 전부는 아닌가. 자세히 보니 아직 한 명이 안 온거 같다.


"여어~ 주최자가 늦고 말이야. 그래도 되는거냐 어?"


분명 이름이 준영이었던가.


"원래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거야. 그나저나. 다 온건가?"


나는 이곳에 들어선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몇 명이 안 왔는지. 누가 안 왔는지를..


그야 그 사람은, 그녀는 내가 이 자리를 만들게한 그리고 오도록 한 존재니까.


그럼에도 난 능청스럽게 다 알면서 물어봤다.


대답은 뭐, 뻔했다.


"안그래도 너가 인원 체크 꼭 해라고 해서 했는데 너 말고 한 명이 비어. 분명 안 온게...."


"주영. 김주영."


"어어, 그래 맞아. 알면서 물어본거냐? 여전히 이상한 녀석이구만."


그러려나. 하긴 내가 봐도 나는 이상하다.


나는 언제나 중간이었다.


관계에 있어서도 중간.
성적에 있어서도 중간.
무언갈 평가할 때 조차도 0부터 10까지에서 결정한다고 치면 그것조차 늘 5를 줬다.


그랬던 내게 유일하게 10이었던 존재.


나를 10으로 올려주었던 존재.


나를 이 나라 최고의 인플루언서가 되게 해준 존재.


그리고 지금의 내가 있게 해준 존재.


그녀는 내게 그런 존재였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떠나보냈다.


"오늘.. 오려나."


"응?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서 예약한 방은 어디 있어?"


"다 왔어. 이제 너 들어가면 애들 깜짝 놀랄거다."


학창시절의 모습을 생각하면 다들 그럴지도 모르지.


늘 중간만 하던 녀석이 갑자기 돌연 최상위에 위치해 있으니.


하지만 난 그런 반응은 원치 않는다.


아무리 좋은 말을 늘어놔도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하니까.


그건 그녀만의 것이니까.


***


연락이 왔다.


동창회에 초대한다는 내용이다.


당연히 안 갈꺼다.


그동안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회도 안 갔는데 고등학교라고 예외는 없다.


하지만 단 한가지 걸리는 것.


주최자의 이름이다.


"이선우..."


그는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뭐든지 중간만 가려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상위권를 달리는 나로써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하다. 뭐든지 중간만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곧 뭐든지 상위권에서 놀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어쩌면 이런 이상함도 그를 닮은 걸 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그는 나를 밀어냈다.


아닌가. 밀어냈다기 보다는 나를 그의 기준 이상으로 들어가려 할 때면 막았다.


 그런 그의 반응에 오기가 생겼다.


내가 언젠가 그의 기준 이상으로 들어서게 된다면 어떤 반응일까.


나는 계속해서 그에게 다가갔다.


막히는 걸 알면서도 선을 넘고자 했다.


넘어가려하고 막으려하는 그런 공방전이 지속됐다.


어느 순간부터 이 무의미한 반복이 지겨워졌을 무렵, 마침내 해냈다.


그의 기준에 구멍이 생기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처음으로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이게 무슨 소린가 할거다.


하지만 그가 다른 이에게는 성까지 붙여 말하는데에 비해 나는 이름만 불렀으니까.


분명 조금의 구멍이라도 생긴 것이다.


나는 그 구멍을 계속해서 벌렸다.


그리고 기어코 기준을 넘어 그의 속에 들어오는 것에 성공했을 때였다.


나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처음에는 목적 달성에 대한 성취감이라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내가 그의 속에 들어간 만큼 그 역시도 내 마음 속에 들어와 있었다.


이는 그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 뒤는 예상대로다.


남녀가 서로의 마음 속에 들어왔다는건 사귄다 이외의 선택지는 없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고, 맺어졌다.


나는 이 관계가 나에 의해 생겨난 만큼 연애만큼은 그에 의해 만들어지게 했다.


무엇이든 중간을 고수하는 그의 기준을 맞춰주고 따랐다.


하지만 사랑하면 닮는다 하였던가.


그도 나를 존중해주었고 나에 한해서는 기준을 위로 잡아주고 이미 중간이던 내신은 그렇다 치고 수능에서는 최상위인 내 성적을 따라 잡았고 같은 대학교에 가게 되었다.


대학에 가서도 서로에 대한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바뀐게 있다면 그는 대학에서 늘 피라미드 꼭대기에 위치했지만 반대로 나는 명문대에 들어왔다는 것에 충분하다 생각하고 적당히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오히려 서로 바뀐 모습에 웃으며 행복해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둘의 사이에 균열이 생기고 말았다.


***


군대.. 갔다와서 였지.


우리 사이가 틀어진 날은..


입대를 했더니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그런 버러지 같은 이유가 아니다.


그녀를 얕보지 마.


우린 서로를 이해해주고, 서로를 닮아가고


그렇기에 틀어졌다.


우리는 그야말로 이상적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의심해야됐다.


이상은 언제나 깨진다는것을.


나는 그녀와 같은 대학에 들어갔어도 그녀에 맞추기 위해, 어울리는 남자가 되기를 위해 달렸다.


그러나 전역 이후로는 살짝 달랐다.


그녀는 이미 2학년 위로 올라가 졸업을 위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난 2년이나 뒤쳐져 있었다.


그때였던거 같다.


그녀가 나를 떠나갈 것 같다고 느낀 것은.


그리고 그녀를 지금 놓아줘야 한다고.


그녀는 언제나 최상위를 달렸다.


하지만 내 속에 들어온 그녀는 나를 닮아 변했다.


그녀만의 배려이자 사랑이었겠지.


나 역시 보답해야했다.


그녀가 나에게 맞춰준 것 처럼 나도 노력했다.


내 인생이나 다름 없던 기준에서 그녀라는 예외를 만들고 그 속에서 만큼은 나 역시 최상위여야만 했다.


이는 대학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언제나 과 톱을 달렸다.


그녀는 반대로 나 처럼 적당히만 했지만 그 조차도 내겐 높았다.


그런 상황에서 2년이라는 격차가 생기니 톱니바퀴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점을 비밀로 한 적은 없다.


이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내게 어차피 입대하면 언제든 생겨났을 일이 아니냐며 차라리 학교 다닐 때 생긴 2년인게 어디냐며 말해주었다.


맞다. 지극히 맞는 말이다.


대학을 졸업한 상태에서의 2년과 그렇지 않을 때의 2년은 다르다.


그러나 다르게 말하면 그때 우린 23살이다.


가뜩이나 남자라 철이 없었다.


이미 한 번 어긋난 톱니바퀴의 영향은 컸다.


점점 비틀려 갔다.


나는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2년이라는 시간을 메꾸기 위해 다시 달렸다.


자칫 관계가 소원해질 수 있다고 느낄 수 있지만 서로가 서로의 앞만 보던 시기이기에 그러지는 않았다.


다행히 그녀가 졸업할 때까진 관계가 이어져 갔다.


하지만 난 눈치 채고 있었다.점점 비틀리기 시작한 관계는 곧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걸.


그녀도 눈치 챘었겠지.


4학년이 되고 한 학기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때였을 것이다. 이별을 고했던게.


별 이유는 없었다. 무너져 내리던 것이 결국 전부 무너져 내린 것 뿐이다.


또, 막 취업해서 달려가는 그녀가 찰나의 순간도 나를 뒤돌아보지 않았으면 했다.


이별을 들은 그녀는 우리가 첫 키스를 했던 그날 처럼 눈물을 흘렸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기쁨의 눈물,
이때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너무나도 착했던 그녀는 그때 이렇게 말했었지.


***


"언젠가 정상에서 다시 보자."


지금 생각하면 그만큼 이기적인 말이 없었다.


멋대로 그의 기준 속에 들어가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으면서 예전처럼 중간만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닌 또다시 내 기준을 들이밀었다.


애당초 그가 톱을 향해 달렸던 이유는 나였고 그가 바라보고 있던 목표도 나였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해진 관계는 전적으로 내 탓이 맞음에도, 또 그를 붙잡았어야 했음에도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가 나를 닮아 정상을 향해 달렸듯, 나 역시 그를 닮아 그거면 된거라며, 언젠가 다시 만날거라며 나만의 기준 속에 사로잡혀 버렸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날로 그를 만나는일은 10년 가까이 없었다.


딱히 서로를 차단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새해 때 서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형식적인 문안만 물어볼 뿐, 다른 연락은 일절 없었다.


또한, 적어도 내가 먼저 연락할 염치가 있었을 리가 없지.


멋대로 그를 바꿔놓고 도망친 주제에 조금이라도 다시 연결되는 순간 나는 그를 다시금 나에 맞게 바꿀 것이 뻔했다.


그래서 연락 없이 지냈고


2년전 티비에 나온 그를 봤을 뿐이었다.


뭐, 솔직히 말해서 오랜만에 그의 얼굴을 본 소감은...


좋았다. 고된 일 때문인지 다크써클진 모습은 퇴폐미가 돋보여 더 잘생겨졌다는 생각도 들었고 만나는 여자가 없다는 사실엔 염치 없이 안도감도 들었다.


너가 만일 내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면 어떤 반응이었을까.


***


그렇게 헤어지고 처음으로 들은 그녀의 소식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이었다.


국내 최고 기업에서 아주 혁신적인 나노 기술 개발해냈다는 기사를  봤다.


대체 누군지 사진과 이름을 봤을 땐 숨이 멎는 줄 알았었지.


그 기사를 보고 든 생각은 역시 헤어지는게 그녀에게 더 좋았던 것이라는 비겁한 변명이었다.


물론 애인 있냐는 기자의 짓궂은 질문에는 없다고 말해 안도하고 말았지.


앞선 것들과는 반대로 나는 다시금 불안에 휩싸였다.


또다시 그녀와 멀어지는구나.


그때당시 나도 시장 내에서는 떠오르는 샛별이었지만 너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다.


물론 바로 다음 해에 공중파 출연까지 했지만 말이다.


너가 그걸 봤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 지 궁금해.


그리고 마지막에 너가 했던 그 말.


이젠 서로 정상에 도착한게 아닐까.


***


그렇게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 시간이 어느샌가 9시 30분을 가리킨다.


"동창회는 10시에 끝난다고 했었지."


사실 준비는 옛저녁에 다 했다.


자, 이젠 앞을 보지 않아.


이젠 너가 그랬듯 너를 보러 갈거야.


***


대충 9시 30분.


곧 있으면 동창회가 끝난다.


하지만 넌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다.


역시, 아직 난 너가 말하는 정상에 있는게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동창들이 갑자기 나를 불러세운다.


"이제 시간도 다 되가는데 우리 고고학자님께서 한 말씀 해주셔야지!"


다들 나를 부추겨 앞으로 나가게 했다.


'적당히 때워야지."


정말로 형식적인 말로만 간단한 연설 비스무리한걸 마쳤다.


그렇게 이래저래 하다보니 10시가 됐다.


일단 동창회는 끝이다.


그녀는 아직 오지 않았다.


개중에는 따로 2차를 가는 동창들도 있었고 결혼해서 집에 바로 들어가야하는 이들도 있었다.


"김주영, 끝까지 안 왔네."


"그러게."


"그럼, 일단 나 먼저 갈게. 너도 조심해서 들어가~"


"신경써 줘서 고마워, 난 적당히 들어갈 테니까 조심해서 들어가. 오늘 도와준다고 수고했어."


그렇게 나를 제외한, 인원 체크를 도와준 준영이 마저 떠날 때까지 그녀는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난 떠나지 않았다.


왠지 그러고 싶었다.


원래같으면 당장 귀가하는 것이 최선이고 우선이다.


허나 지금 만큼은 예전 처럼 이상해지고 싶었다.


마치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처럼


똑같이 애매한 중간을 지키며.


***


큰 일 났다.


차가 이 시간에도 너무 막힌다.


10시 10분


이미 늦어버렸다.


'제발, 인사라도 하면서 아직 그곳에 있어줬으면..'


그런 생각을 하며 조급해 하던 차


창밖으로 문득 익숙한 얼굴들이 우르르 보였다.


이곳은 동창회가 있던 곳에서 거리가 있는 곳.


저들이 보인다는 말은 그 역시 이미 떠났을 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나는 택시비를 내고 냅다 달렸다.


동창들 옆을 슬쩍 스치며 그들이 뭐라 말하는 것. 특히 그의 절친 중 한 명인 준영이 큰 소리로 외쳤지만 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약속 장소에 다다랐다.


시간이 시간이라 좀 어둡긴했지만 분명히 보인다.


내 앞에 있는 이 남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그 역시 나를 봤는지 몸을 돌린다.


여기까지 오면서 다잡은 마음은 녹아 사라졌다.


나는 더 이상 주체를 못한다.


아니, 이미 주체를 하고 있지도 않다.


내 몸은 진작에 선우의 품 속에서 울고 있었으니 말이다.


***


계속해서 기다렸다.


밤새 기다려볼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린다.


그녀였다.


그토록 다시 만나고 싶던 주영이가 왔다.


뛰어왔는지 숨이 가파르다.


우선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그러기도 전에 주영이가 품 속에서 눈물을 터뜨렸으니까.


***


"ㅅ..선...흑 서누야아아아아"


"괜찮아. 주영아, 나 여기 있어."


울음을 터뜨린 주영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다독인다.


쉽사리 진정되지는 않는지 눈물은 그쳤지만 몸을 떨며 10여분을 더 안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밖에 있을 순 없었기에 조금 괜찮아진 그녀와 근처에 위치한 내 집으로 향했다.


"이제 괜찮아졌어?"


고개를 끄덕여서 대답하는 그녀.


그녀가 아직 말할 상황은 아니기에 계속 말을 이어간다.


"이런말 염치 없는거 아는데..."


"많이 보고 싶었어."


"나도.."


"그랬구나... 그렇다면 더 이 말을 해야되겠네."


나는 숨을 잠시 고른다.


"미안해. 멋대로 짐을 지게 해서.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 정말 미안해."


그렇게 말하며 옆에 있는 그녀를 있는 힘껏 안는다.


"나야말로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힘든 길을 억지로 달려온거지..."


그녀의 그 말에 이번에는 내가 울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가, 주영이가 아까 내가 해주듯 머리를 감싸 안아주며 쓰다듬어주었으니까.


너무 따뜻했다.


너무 편안했다.


그렇기에 그대로 줄곧 안겨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주영이의 손을 풀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주영이는 내 뺨에 손을 부드럽게 올린다.


"선우야.."


"주영아.."


서로를 부르던 우리는 입술을 포개었다.


그 순간이었다.


무너졌던 것들이 다시 세워지기 시작한다.


어긋났던 톱니바퀴들이 제자리를 찾아간다.


그리고...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다시 한 번 서로의 마음 속으로 들어간다.


마치 제 갈 곳은 원래부터 그곳이었다는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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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물이랍시고 썼는데 후챈에서 순애물 같다길래.


여기에도 한 번 올려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