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에 피어난 이름 없는 들꽃을 바라보던 공주가 허리를 숙이며 수줍은 미소를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비가 내린 정원의 싱그러운 냄새가 그녀의 우울했던 기분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주었다. 왕인 그녀의 아버지가 내린 명에 따라 정원사들은 잡종이라 치부되는 들꽃들을 모조리 뽑아 높다란 왕성의 성벽 너머로 내 던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끈질기게 꽃들은 땅이 품은 제 씨앗들을 움트게 만들어 결국엔 환한 미소를 피워냈다.


 속박할 수 없는 자유로운 생명력을 공주는 사랑하고 있었다.


 단순히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다. 정원에는 흔한 들꽃들 따위보다 훨씬 고귀하고 화려하면서 희귀한 꽃들이 셀 수 없을 만큼 가득 피어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밟고 지나가도 모를 초라한 꽃 따위가 비빌 수 있는 미(美)가 아니었음을 공주는 안다. 들꽃의 아름다움은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닌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꿋꿋하게 피어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공주였지만 초라한 들꽃이 가진 자유로움만은 결코 손에 넣을 수 없었다. 공주는 무궁한 영광의 역사를 넘어온 강대한 왕국을 다스리는 현명한 왕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누구나 부러워할 고귀한 신분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상자를 채울 수 있을 정도의 막대한 부가 첫 울음을 터뜨렸을 때부터 손에 쥐고 있었다. 꿈꾸는 어린 소녀들에게 그녀가 서 있는 자리는 환상과 동경의 빛을 품고 있었다.


 헛소리.


 전부 부질없는 헛소리에 불과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보석도, 푸른 하늘이 수 놓아진 고급 드레스도, 눈짓 한번 손짓 한번 만으로도 허리를 굽히며 저를 띄워주는 권력도 모두 ‘왕국의 아름다운 공주님’을 위한 것이지 온전히 그녀의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웅장한 성벽과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왕성은 세계에서 가장 비싸고 넓은 그녀를 위한 감옥이었음을 좀 더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구름 한 점 없는 차가운 푸르름이 번지는 하늘 위로 새가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웠다.


 부디 나를 데려가 주렴.


 그 날개 짓에서 그녀는 눈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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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이 묻은 꾀죄죄한 제 손을 바라보며 소년은 저에게 내밀어진 달빛을 품은 소녀의 가녀린 손을 감히 붙잡아도 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옆 집의 들꽃과도 같은 괄괄한 자신의 친구와는 다르게 소녀의 미소는 반짝거리는 별빛 사이에 피어나는 수줍은 백합과도 같은 순수함이 깃들어 있었다.


 인사를 받아주지 않을 거냐며 살짝 토라진 목소리를 내는 입술은 붉은 장미향을 풍겼다. 소년은 허둥지둥 급히 낡은 바지에 흙을 털어내고 머뭇거리며 소녀의 손을 붙잡았다. 거칠거칠한 제 손이 부끄러워 울상을 짓고 있었으나 소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남은 손을 들어 제 손을 잡은 소년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때, 소년은 사랑을 품었다.


 감히 넘볼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꽃을 소박한 제 마음의 들판에 조심스럽게 심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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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르는 들판에 자란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등을 맞대고 서로를 향해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속삭이는 두 사람. 이따금씩 들려오는 메아리 같은 머나먼 목소리 들만이 여전히 세계의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소녀는 소년으로부터 머뭇거리면서도 담대하게 내밀어진 작은 들꽃 다발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볼품없는 꽃이지만 세계를 가득 채울 수 있는 강인한 마음의 현신이기도 한 이름 없는 꽃들.


천천히 눈을 감으며 제 몸을 가득 채우는 은은한 향을 느끼던 소녀는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질끈 감고 있는 소년을 향해 조심스럽게 눈을 뜨고 말했다.


 “나에겐 이 들판을 가득 채울 황금이 있었던 적이 있었고, 말 한마디 손짓 한번으로 세계에서 가장 진귀한 보석들을 이 손안에 가득 쥘 수 있었던 적도 있었지. 모든 이들의 두려움과 존경과 사랑과 질투를 한 몸에 받았고, 어떤 생명보다 고귀한 이름 아래 군림한 적도 있었지.”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여태 받아온 어떤 가치 있는 보석들보다 더 내 마음을 떨리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