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10화>>>





어느새 드디어 봄이라고 부를 만한 4월이 되었다.


슬슬 꽃눈이 화려하게 열리며 식물의 가장 아름다운 한 때를 만들어내고, 세상은 겨울의 회색빛에서 본격적으로 벗어나 형형색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특히나 4월 초순에는 아름다운 벚꽃들이 거리와 공원을 아름답게 수놓는다. 뚜렷한 사계절이 붕괴하고 있는 요즘, 벚꽃은 사람들에게 '봄'이라는 스쳐지나가는 나그네를 잊지 않게 해주는 징표와도 같았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은 봄이라는 따스함을 품에 안고 잊지 않기 위해 사랑하는 이들과 벚꽃을 만끽한다.


물론 그 벚꽃마저도 순식간에 스러져버리는 아주 짧은 방문객이었기에, 사람들은 그 찰나의 순간을 위해 각지에서 모여든다. 사람들은 그 인파에도 불구하고 분홍빛 꽃잎을 보기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리고 그 인파 속에는 현성과 은아가 포함되어 있었다. 벚꽃을 보러 두 남녀가 거리로 나서게 된 원인은 은아의 친구 서아현 양에게 있었다.


은아가 막 감기를 떨쳐내고 등교한 날의 이야기이다.









"은아야아~ 화 풀어, 내가 은아 걱정하는 마음으로 그런거라니까??"


점심 이후의 은아의 요구르트 타임은 은아에게 하루 중 몇 안되는 귀중한 힐링의 순간이다. 하지만 아현이 옆에서 칭얼거리고 있으면 힐링이 될 리가 없는 노릇이다. 등교한 뒤로 쭉 뾰루퉁하게 아현이를 무시해온 은아는 이제 스스로가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 그만해! 왜 사과하는 사람이 더 칭얼거리는거야 정말!"


"히잉.. 반응 안해주는 은아는 감당할 수 없단 말야.."



애초에 아현이 먼저 신경을 긁어 놓고, <삐져있는 은아>라는 보복의 뒷감당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한 것까지는 은아도 이해를 했지만, 대체 왜 그 해결책으로 받아줄 때까지 칭얼거리는 건지. 은아는 뻔뻔한 아현이 짜증났지만 동시에 측은해지기 시작했다.



"알았어 알았어.. 앞으론 나한테 귀띔이라도 해줘, 알겠지?"


"네 언니이.."



아현은 은아가 마지못해 용서해주자 바로 은아에게 안겨 들었다. 은아는 가끔씩 여우 같은 아현이 얄미웠지만, 그래도 이만큼 자기를 좋아해주는 친구가 어디 있겠냐는 생각으로 이번만큼은 아현을 안아주었다.



"그래서, 어젠 잘 쉬었어? 별 일 없었고?"



그와 별개로 은아를 너무 좋아하는 아현은 은아와 현성 둘 사이에서 무슨 일은 없었는지가 너무나도 궁금했다. 은아 모르게 현성과 통성명하는 정도로 단단히 삐친 은아를 보고, 아현은 은아의 독점욕을 절절히 체감했다. 이런 귀여운 친구의 남녀상열지사는 미안하지만 관심을 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응. 걔가 오자마자 나 하던 게임 꺼버리고 막 장난치구.."



아현이 만났던 현성은 되게 조용하고 덤덤한 모습이었다. 그랬던 남자애가 은아 앞에서는 조금 더 편한 모습을 보여주는 듯 했다. 물론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소꿉친구는 다른 사람들과 대하는 게 다른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두 사람을 지켜보고 싶은 욕심은 한창 연애사에 관심 많을 여학생으로 떨쳐낼 수 없는 것이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친구 은아의 성장을 옆에서 지켜보는 느낌이라 즐거웠다.



"낮잠도 같이 자고.."


"어? 같이???"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물어보는 아현에게 은아는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은아 입장에서야 같은 방에서 낮잠 좀 때렸으니 틀린 말은 없지만, 청자인 아현은 아연실색하고 얼굴을 붉혔다.



"소꿉친구여도 너네 고등학생이야.."


"졸리면 자는거지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현성이 걔는 달리 이상한 점 없고?"



괜히 혼자서 열을 내고 있는 아현을 은아는 이상하다는 듯 한 쪽 눈을 치켜 뜨고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아현은 이 둘의 관계가 머리에 완전히 그려지지 않았다. 분명 간지러운 감정들이 내재되어 있고 가끔씩 표출되는 오묘한 사이면서도, 오랜 기간 알고지낸 소꿉친구다운 가족 같은 편안함도 있는 모양이었다. 여기에 평소에 은아가 누나행세를 하고 싶어하는 어리광까지 섞이면, 둘의 관계는 대체 어디를 종점으로 달려가고 있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아현은 괜히 편한 소꿉친구 관계에 자신이 연애세포를 강제로 주입하는 생화학 테러를 하게 되는 것이 아닌지 순간 고뇌했지만, 되려 이런 베일에 싸인 은아와 현성의 관계가 주는 흥미가 그 고뇌를 덮어버렸다.



"은아야, 내가 사과하는 김 해서 제대로 누나로써 리드하는 법이나 좀 가르쳐줄까?"


"어..? 아니, 내가 현성이보다 누나 맞는데."


"그런 얼빠진 소리도 그만둬야 누나다울걸?"



아현은 은아도, 현성도 떠보기 위해서 자신이 움직여야 할 때라는 것을 느꼈다. 왜냐면 이 둘은 이러다가 80살까지 소꿉친구를 할 것 같았기에.










그리하여 아현의 계획하에, 은아는 4월 초순의 주말이라는 봄의 황금기에 현성과 함께 벚꽃구경을 나오게 된 것이다. 은아는 내심 아현의 계획으로 현성을 마주한다는 판도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래로 남동생만 둘 있는 아현의 말이니까 들어서 손해볼 것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승낙하기로 했다.


물론 아현은 <누나 컨설팅>을 핑계로 은아의 성숙한 모습을 이끌어내면 둘의 관계에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잔뜩 품고 있었다.



서아현 양의 누나의 조건 첫번째는 <여유로움>이다. 아현은 평소에 재잘재잘 말이 끊이지 않는 병아리 같은 은아가 가장 먼저 갖추어야할 요소가 여유로움이라고 판단했다. 평소보다 언행에서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면 누나다움이 더 드러날 거라는 조언이었다.



하지만 단신의 은아가 장신 현성을 따라가려면 일단 여유로움을 갖출 수 없는게 문제였다.



"누나 오늘 좀 지나치게 느리게 걷지 않아?"


"...좀 여유롭게 벚꽃이 보고 싶으니까."



평소 같으면 현성에게 천천히 가자고 한마디 했을 은아지만, 여유로움 네 글자를 머리에 새기고 또 새기며 참는 은아. 현성은 그런 은아를 보고 걸음을 은아의 보폭에 맞춰주었다. 현성도 뭔가 은아가 평소와 약간 다르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여전히 뒷바라지 잘 해줘야 하는 소꿉친구인 것은 변함없었다.



"누나, 사람 많으니까 잘 붙어있어."


"...응."



여유로운 은아는 그냥 현성이 여유롭게 챙기게 된다.




서아현 양의 두번째 조언은 <리드> 그 자체이다. 함께 있는 두 사람 중 자기가 먼저 능동적으로 제안하고, 움직여야 연상이라는 인식을 확실히 줄 수 있다는 것이 요점이었다. 그런 점에서 벚꽃구경을 나오는 것 자체는 플러스 요소였다.



"현성아, 우리 저기 호숫가쪽에도 가볼까?"


"호숫가 가고싶어? 가자 그럼."



여전히 여유로움을 유지하려는 은아는 현성보다 겨우겨우 한걸음 앞에서 걸으며 호숫가 쪽으로 걸어갔다. 현성은 그런 은아를 앞에 두고 역시나 여유롭게 은아의 보폭에 맞춰 따라가고 있었다. 오늘의 은아에 약간 이질감을 느끼던 현성은, 평소처럼 먼저 여기저기 가자고 데리고 다니는 은아인 것 같아 안심했다. 단지 말투가 평소보다 묘하게 차분해졌을 뿐인 듯 했다.



핵심은 은아는 평소에도 리드를 했다는 점이다. 단지 그게 어서 따라오라며 앞서나가는 웰시 코기의 리드같은 느낌이라 문제였던 것이다.




세번째 조언은 <텐션>, 긴장감이었다. 두번째 조언과도 연관이 있는 아현 양의 세번째 조언은 즉 자연스러운 스킨십처럼 일정 정도의 긴장감을 부여하는 것이 연상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는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아무튼 은아는 세번째 조언을 바탕으로 가볍게 현성의 손을 쥐고 호숫가로 이끌었다. 현성은 갑작스레 손에 찾아온 부드러운 따스함에 이끌려 계단을 거쳐 물가로 내려갔다.



"호수에도 벚꽃잎 진짜 많이 내렸다. 그치?"



은아는 현성의 손을 꾹 쥔 채 우아하게 고개를 돌려 그런 말을 했다. 물에 반사된 강렬한 태양빛이 그런 은아를 환하게 비추어주고 있었다.



"오랜만에 놀러나오니까 좋지?"



하지만, 현성은 묘한 긴장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그저 오랜만에 즐거워하는 은아를 보고는 시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은아는 그런 현성을 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긴, 옛날부터 쭉 달라붙어 다니던 둘이서 손을 잡았다고 스펙타클한 변화가 생길 리 만무했다.



'...평소랑 똑같은데.'



아현의 조언들이 영양가가 별로 없다고 느끼는 은아였지만, 그 조언들을 무력화시키는 게 바로 본인이라는 것을 은아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왜 그래 누나, 갑자기 왜 뾰루퉁해졌어?"



현성은 은아의 살짝 찌뿌린 미간을 보고는 바로 당황해서 시선을 맞추어 물어보았다. 잠시 감정이 표정에 드러난 걸 몰랐는지 은아는 움찔 놀랐다가, 그대로 표정을 풀었다.



"아니, 별 거 아냐!"



역시 은아는 평소대로 행동하는 게 훨씬 편한 듯 했다. 은아는 현성이도 사실 장난 칠 때 빼고는 재깍재깍 누나라고 불러주니까 평소대로가 최고라는 계산을 끝마쳤다. 은아는 맞잡은 현성의 손을 그대로 품에 안았다.



"살짝 추운데 커피 마시러 가자!"


"그러세요 누님."








그렇게 은아는 현성과 벚꽃을 보고, 카페에서 재잘재잘 열심히 이야기꽃도 피우고, 맛있는 저녁까지 함께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현성과 즐거운 하루를 보낸 은아는 집에 들어와서 따뜻하게 씻은 후 옷을 갈아입고, 휴대폰을 꺼내 아현이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이제 집이야!]



하고 메세지를 보낸지 얼마 안돼서, 아현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어 은아야! 오늘 재밌게 놀았어?? 어때, 좀 분위기가 달랐어?>>


"놀긴 재밌게 놀았어! 근데 너가 말해준대로 해봤는데 그건 하나도 별 효과가 없던데?"


<<어?? 그래?>>



은아는 자초지종 오늘 하루 현성과의 상호작용을 또 재잘재잘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유로움, 리드, 텐션 모두 조언받은 그대로 열심히 이행했지만, 현성은 평소 그대로였다는 이야기를 열심히 아현에게 풀어놓았다.



"아! 그래도 오늘은 꼬박꼬박 누나라고 잘 부르더라?"


<<너 일단 제발 누나 호칭에 집착 좀 버려..>>



아현은 머리가 아파왔다. 조금만 건드리면 연인이 될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아현은 순간 단 둘이 어디에 가둬놓아야하는지 고민하고 말았다.



<<은아야, 그냥 시원하게 현성이가 좋다고 인정하는게 편할거 같은데?>>


"현성이 좋은데?"


<<언니 그냥 잠이나 자자 오늘은.>>


아현은 그냥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자고싶어졌다. 아무래도 아현이 둘을 붙이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 보이는 듯 했다.



되려 제3자가 고민이 많아지는 밤이었다.



어제 오늘로 일이 많이 힘들어서 글 퀄리티가 좀 떨어지는 느낌이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