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포(九葡)! 일어나시게!」
  하는, 구춘의 목소리가 들렸다(구포(九葡)는 내 호(號)로, 부모님을 여의고 한참 세상과 떨어져 지냈어서 자(字)는 아직 없고, 대신 호를 지어 자 대신 쓰게 하고 있다).

  나는 그 목소리에 정신이 들어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러고 힘없는 목소리로,
  「……얼마나 지났나? 또, 떨어진 후 무슨 일이 있었나?」

  그리 말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은 내가 떨어진 석벽의 주변이었다.

  구춘은 내 질문에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다.
  「얼마 안 지났다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자네가 떨어진 순간, 절벽 저 아래서 갑자기 무슨 새하얀 늑대가 튀어나왔어. 그 백랑(白狼)은 날아올라 온몸으로 자네를 휘감구, 그대로 오그라지더니, 사라졌네. 마치 다른 공간으로 빨려 드는 것만 같이 말이야.
  내 그 광경에 넋이 나가 멍하니 있는데, 얼마 안 있어 어디선가에서 위엄 있는 여자 목소리가 들려오더군.〈김옥민은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주의하도록.〉이라구.
  나는 그 말에 〈넵 알겠습죠!〉하며 넙죽 절하였네. 그리고 몸을 일으키니 내 왼편에 자네가 엎어져 있더군. 그래서 난 자네를 이 안전한 곳으로 옮기구, 자네가 눈을 뜨기만을 기다렸지.」


  그 말을 들은 나는 자신에게 신비로운 일이 일어났음이 실감되어 몸이 굳었다. 그런 새에, 구춘은「앗!」하고 놀라고는,
  「혹시, 그 늑대가 자네가 말한…….」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뭐, 그 늑대가 맞는 것 같군.」

  그는 그 말에 격하게 반응하며,
  「호오? 그럼 혹시, 사라지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말해 줄 수 있는감?」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네.」

  「그럼, 어쩔 수 없군. 뭐 이제 볼 장 다 본 것 같으니, 이제 하산함이 어떠한가?」

  「……그러지.」
  (내가 있었던 일을 말하지 않음은 그의 입이 무겁다는 것을 알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혹여 이 일이 새어 나가면 하랑에게 퍽 난처한 일이지 않을까 싶은 까닭이다. 다만 내가 말하지 아니함에 내 벗 되는 사람인 구춘으로선 썩 시원치 않을 것임은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산을 내려가던 중, 구춘이 혼잣말을 했다.
  「그나저나, 정말 영물인가 보구만…….」

  나는 그 말에,
  「그럼, 아닌 줄 알았나? 나도 처음엔 아니 믿었었는데, 어느샌가 자연스레 영물로 생각하고 있더군. 하긴 그런 신묘한 일을 겪었는데 누가 의심하겠어.」

  「그렇다마다. 나두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진 사실 자네 말을 반쯤 흘려들었었지.〈아니 세상에 어쩐 저런 일이 있을 수 있겠나?〉라구. 근데 하늘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데다 내 이름 석 자까지 죄 맞히니, 생각이 싹 바뀌더라구.〈뭐 그런 일, 있을 수 있지.〉허구 말이야.」

  「허허, 자네는 미신을 잘 안 믿었지?」

  「그렇지. 안 믿었구, 앞으로도 안 믿을 걸세. 혹여 오해할까 말하자면, 이번 경우는 실제 내 앞에 나타났으니 미신이 아닌 사실이야. 난 그래도 내 눈앞에 들이닥친 건 믿는다구.」

  「잘 알고 있다네.」

  나는 그 말을 하고, 고개를 돌려 한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한없이 깊은 절벽을 보았다. 그리고……
  「앗, 웬 한바위가 있군.」





  커다란 바위가 눈에 띄었다. 그 바위는 높이가 족히 스무 척은 되어 보였는데, 약간 우리 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썩 깊은 그늘이 져 있었다.

  나는 그 그늘에〈깊은 산속 어느 그늘에서 높이 솟은 물결에 꽃잎 아래서 절경 맞이하리〉라는 그녀 노래의 노랫말이 떠올라, 그늘로 다가갔다. 구춘은 그런 나에게,
  「무슨 일인가? 쉬고 싶기라도 한가?」

  나는 그 말에,
  「그냥, 이전에 그녀에게서 들었던 게 신경쓰여서.」

  「으흠, 신비한 일이라면, 나도 한번 가 봐야겠군.」
  구춘은 그렇게 말하고, 나를 따라갔다.


  그늘에 발을 딛었다. 그러자, 발이 마치 물에 담그는 듯한 느낌으로 푹 빠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발끝에서 허리까지, 허리에서 어깨까지 그늘에 빨려들어갔다. 구춘은 그런 광경에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했고, 이윽고 나의 머리조자 빠져 버렸다. 그런 상황에 나는 〈아아, 이렇게 죽는 건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왜인저 더욱 생기가 넘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느낌에 어느샌가 감았던 눈을 뜨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먼저, 한없이 맑아 속이 투명히 비치는 호수가 있었다. 호수 안에는 잉어 수십 마리가 있었는데, 한눈에도 때깔이 썩 좋은 것들뿐이었다.
  그다음으로 눈에 띈 것은 하늘이었느니,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하고 맑게 갠 하늘이었다. 태양은 지상을 밝게 비추어 지상을 황금으로 물들였으매, 땅에 생명의 기운을 넘치게 하였다.
  그 넘치는 기운으로 밝게 빛나는 풀과 꽃을 보니, 형형색색의 다채로움이 눈앞까지 다가왔다. 거기다, 철쭉, 진달래, 목련, 수선화……. 만발한 봄꽃들이 나그네를 환한 표정으로 반기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놓고 감상하기만 하고 있는데, 갑자기 호수에서 큰 소리가 나더니, 거센 파도가 세상을 덮쳤다. 바깥쪽을 향하는 푸른 곡선이 나의 위를 덮었는데, 나를 덮치지 않아 꼭 높이 솟은 물결 아래…… 하랑(下浪)에 있는 듯했다.

  얼마 안 가 그 물결은 땅으로 스며들어 땅에 생기를 더했나니, 생기 있는 땅에서 푸르른 풀들이 무릎까지 솟아나 또 새하얀 꽃을 피웠으매, 꼭 흰눈과도 같았다. 그 광경을 신기하게 관찰하고 있는데, 그 흰눈에 무언가 분홍 꽃잎이 툭 떨어졌다. 그에 고개를 돌려 주변을 돌아보니, 분홍 꽃비가 내리고 있었다. 벚꽃이 만개한 것이다!

  분홍색 하얀색 꽃잎들은 바람에 따라 여러 모양새를 거치며 호수 중앙으로 나아갔다. 곧 충분한 꽃잎이 모이자, 그것들은 각자 흩어져, 자기가 떨어져 나온 나무를 향한 긴 끈의 형태를 이루었다. 그는 만물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떠오르게 하기도 하였는데, 그런 잡설이 없어도 충분히 감명깊고 아름다운, 절경이었다.


  그런 절경에 감탄을 넘어 감복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모든 것이 빛을 잃었다. 만개한 벚꽃은 다시 졌고, 목련잎이 후드득 떨어졌다. 땅이 생기를 잃었으매, 솟아났던 풀은 축 쳐져 죽은 꼴을 하였다. 호수의 물이 탁해지니, 잉어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아까의 절경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까까지 그런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는 것을 믿기 힘들 정도로, 죽어 있었다.


  그런 불길함에,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구포는 그늘에 발을 딛고, 찰나의 시간 동안에 너무나 대비되는 두 광경, 절경과 살풍경을 그의 두 눈으로 목도하였으니,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없을래야 없을 수 없었다.

  거기다 그의 마음속에서 막 싹을 틔운〈어떠한 감정〉은, 그로 하여금 그 변화, 불길함이 의미하는 바를 재빨리 눈치챌 수 있도록 하였다.

  〈그래, 그 불길함은, 그녀 하랑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어렴풋이 알아챔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는 그리 생각하곤, 발을 바위 그늘에서 떼어 당장이라도 어디론가로 달려나갈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로서는 하랑이 어디 있는지, 애초에 이 근방에 있기는 한 것인지를 알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팔에 새겨진 이리의 표식 때문이었을까, 그에게는〈그곳에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그런 확신이 들자마자 산 아래쪽으로 달음박질하였다.

  갑작스러운 달음박질에 구춘은「자네! 갑자기 어딜 가는 건가!」하고 외쳤지만, 그에게는 닿지 않았다. 하랑을 구하는 것에 너무나도 몰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춘은 혹여 그가 혼자 길을 잃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구포를 쫓아갔다.


  구포의 눈에는 이 세상 모든 것이 단순하게 보였다.

  나무는 그저 구불구불한 얼룩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하늘은 어딘가를 향하고 있는 공허로만, 땅은 그녀에게로 향하는 길로만 보였다.

  그리 보이는 까닭에 구포는 오직 저 멀리서 빛나는 은빛만을 향할 수 있었는데, 그 은빛을 향해 미친 듯이 달리고 있는 꼴이 꼭 여우에게 홀린 것 같았다.

  구춘은 그런 여우에게 홀린 듯한 구포를 걱정스레 바라봤다. 하지만 아마, 그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그 이유라 함은 하나, 하랑이 꽤 섬세한 성격이기 때문이요, 또 하나, 그녀는 그녀 자신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


  이윽고 구포는 그녀 앞에 다다랐다. 구포의 눈에 비친 광경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는데, 그 정도가 얼만가 하면, 만일 심약한 사람이 그 광경을 본다면 혼절해 버리고 말 정도였다.

  그 오장육부가 뒤틀릴 듯한 광경에 말을 잃은 구포는, 열심히 눈을 굴리다, 범의 이빨에 처참해지고 있는, 하얀 늑대를 보매 갑자기 왼 위팔이 욱신거림을 느끼었다.

  그 욱신거림에 그는〈아, 저 이리가 하랑이구나!〉라고 생각하여 당장이라도 범에게 달려들 듯했는데, 그 범의 기세가 워낙 세 선뜻 움직이지 못하였다.


  그렇게 머뭇거리기만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늑대의 모습을 한 하랑의 눈동자가 노랗게 반짝거렸다.

  그러자 구포는, 마치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듯 아무 망설임 없이 범에 뛰어들어, 올라타 목을 있는 힘껏 졸랐다. 그러나 역시 역부족이었는지, 범은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움직여 구포를 가볍게 내동댕이쳐 버렸다.

  하지만, 하랑의 입장에서는 그게 헛되지 아니하였는데, 범이 구포를 내치느라 아주 잠시나마 자신에게서 눈을 떼었으니, 찰나의 시간을, 반격할 기회를 벌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변을 안개로 뒤덮고는, 노래했다.


  구포는 흐려져가는 의식 속에서, 하랑의, 아주 작게 조잘거리는 노랫소리에 귀를 귀울였다.


  생사경헤
  텬구지평 넘어 버라매
  버럼도 구룸도 나헤
  머저마도 어븐 아걸 내아
  내아 비취시니잇가
  아으 저헌 덠그림제 아래헤
  더절 님헐 도라보샤든
  년 물겨리니
  그리너다 마라 허시셔


  하랑이 노래를 마치자, 안개가 걷히니, 범 있던 곳엔 범이 없고, 하랑 있던 곳엔 하랑이 없었다.




十一
  이리는 괴로워했다. 자신의 처지를, 운명을 괴로워했다.

  「아아, 어째서 저는, 임의 곁에 있을 수도, 임을 도울 수도 없는 것이나이까.」
  그리 말하는 이리의 앞에는, 어느 환영이 있었다.

  그 환영은 인자한 표정으로, 이리의 한탄에 답했다.
  「너는 충분히 그를 도왔나니, 충분히 그의 곁에 있었노라.」

  「하지만, 저는 그를 수렁에 빠뜨렸나이다. 요술로 그를 조종해, 내 생을 구하도록 하였나이다. 한번 더 보고 싶어서, 범이 득실거리는 위험한 산으로 그를 이끌었나이다.」
  환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달님이시어, 제게 말해주시옵소서. 사람들을 세뇌하는 요물을, 도대체 왜 내버려 두시나이까. 이런 끔찍한 삶을, 어찌하여 뒤바꾸지 아니하나이까.」
  하지만, 호수에 비친 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을 현혹하는 이 마력을, 어찌 놓아두시나이까. 아래 없는 우두머리가 말이나 된답니까.」
  이리의 눈가에, 푸른 눈꽃 하나가 떨어져 녹았다. 뺨에 흐르는 눈물이 어느 눈에서 나온 것인지, 이리는 알 수 없었다.

  「저는 임을 끌어들여 죽일 뻔하였고, 아니 하여도 될 짓을 하여 임을 속박했습니다. 내게서 빠져나올 수 없게 하였습니다. 그를, 현혹했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여전히 고요했다.

  「저는 비록 늑대이지만, 또 인간이기도 하나이다. 저는 지금 어디까지나 인간으로서 있고, 또 요물로서, 우두머리 늑대로서 있나이다. 한데, 왜 제게는, 아무 책임도 돌아오지 아니하나이까.」
  이리는 그런 고요함에, 약간의 분노를 느끼며 말했다.


  그녀는 옛 신라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태어나고 죽은 자들을 떠올렸다. 그들의 죽음은, 너무나 많이 겪은 것이었기에, 그들이 죽는 그 순간을 떠올려 보아도, 그녀의 마음속에는 녹슨 감정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하지만, 구포…… 시랑(視郞)만은 달랐다. 시랑의 죽음을 떠올리면, 마음이 너무나 쓰라렸다. 그가 범에게 내쳐져 크게 부딛혔을 때에는 마음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오랫동안 이어져 왔던 붉은 실이, 한순간에 끊어져 버릴 뻔했다는 감각에 전율했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매, 그 실이 끊어질 뻔한 일의 원흉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상기하자, 이리는 그런 자신이 너무나 싫어져 버틸 수 없을 정도였다.



  이곳 이리가 만들어낸 공간 어딘가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아까의 그 범의 울음소리가 들리었다. 하지만 이리로서는 당장 자신의 처지가 더욱 중요했기 때문에, 전율 따위는 느낄 새가 없었다.

  달은 말했다.
  「너는 충분히 그를 도왔나니, 충분히 그의 곁에 있었노라.」

  이리는 그 말에 얼굴을 붉히며,
  「그 말은, 충분히 하였으니 이제 그만 떨어지라는 말입니까?」

  하지만 달은 아랑곳 않고 반복했다.
  「너는 충분히 그를 도왔나니, 충분히 그의 곁에 있었노라.」

  이리는 자신의 오랜 벗을 원망스레 바라보며,
  「세상을 받아들이란 말입니까?〈다시 한번〉을 인정하지 못하는 세상을 외면하란 말입니까?」

  하지만 달은 아랑곳 않고 반복했다.
  「너는 충분히 그를 도왔나니, 충분히 그의 곁에 있었노라.」

  이리는 자신의 양부모를 마주보며,
  「그리 말하여도 제 마음은 변치 아니할 것입니다.」

  그리 말한 그녀는, 달에게, 오랜 벗에게 싫증이 나 고개를 돌렸다.




十二
  이리는 호수에서 초가집으로 돌아와 툇마루에 앉았다. 하늘에는 달도 해도 없었다. 물론, 별도 보이지 않았다. 고요한 먹 뿐이었으니, 별빛도 달빛도 없는 어두운 밤이었다.

  그녀는 어두울 적엔 자기 안광(眼光)에 의지해 주변을 보았었는데, 지금으로선 차라리 눈을 감고 아무것도 보지 아니하는 게 나았다. 지금 그녀에게 시각은, 생각을 방해하는 장애물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눈을 감고, 그와 처음 만났던 그날을 떠올려 보았다. 자신이 앞으로 어찌 해야 할지 판단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범에게 내쳐져 쓰러진 시랑, 그러니까 구포는 뒤늦게 도착한 구춘에게 업혀 호랑산 아랫마을의 한 빈 주막방에 누웠다. 구춘은 쓰러진 구포를 걱정스레 바라보며,
  「갑자기 뛰어가길래 무슨 일 났나 했는데, 막상 가니 아무것도 없는 곳에 자네만 덩그러니 쓰러져 있구…….」

  그렇게만 말하고 있는데, 갑자기 구포가 화들짝 눈을 떠 몸을 일으키고는,
  「……구춘? 여기는……?」

  「주막이라네. 쓰러져서, 데리구 왔지.」

  「거…… 민폐를 끼쳤구만. 잠시 어떻게 된 것 같네. 다만…….」
  구포는 몽롱한 정신으로 말을 이으려고 애썼다.

  「다만?」

  「그래, 그, 하랑…… 늑대는?」

  「늑대라니? 뭐, 핏자국이 있긴 했었네만…….」

  「그래, 핏자국! 시체는 없었나? 내가 봤을 때는 안개가 걷히고, 둘 다 사라져서…….」

  「시체는 없었네. 걱정 마시게나.」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구포는 하랑 걱정에 몸 둘 바를 몰라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호랑산 온 곳을 이리저리 살필 기세였지만, 몸이 너무나 뻐근하고 아파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일단 안정을 취하게나. 너무 무리한 것 같더군.」

  구춘에게 있어 구포는 썩 소중한 존재였는데, 전에 산적에게 습격당해 죽을 뻔했을 때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라. 그런 까닭에, 그를 몹시 걱정하고 있었다.

  구포도 구춘의 그런 걱정을 눈치채고, 벗의 부탁인데 거절할 건 없다 하며,
  「그래, 그러지. 하랑…… 이리가 몹시 걱정되긴 하네만…….」

  「그 하랑이란 게, 네가 말한 이리란 영물을 말하는 것인감?」

  「그렇다네. 늑대일 적엔 새하얀 늑대의 모습을 하고 있지. 그리고.」

  그는 말을 이어 절벽에 떨어져 하랑에게 구원을 받은 이후의 일, 그러니까 하랑의 초가에 간 일까지 말할 뻔하였으나, 잇기 전 재빨리 눈치채 입을 닫았다.

  구춘은 말을 딱 끊어 버리는 구포의 행동에 호기심이 생기긴 했지만, 그리할 정도로 말하기 싫은 것이라면 어쩔 수 없지 하며 굳이 묻지 않았다.

  그렇게 말이 끊겨, 정적이 흘렀다.


  정적을 깨뜨린 건,〈삐걱〉 하는,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그 소리에 놀라 둘은 문 쪽을 바라보았는데, 문을 연 자는 다름아닌 한 여인이었나니, 구포는 그녀를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은빛 머리칼과 뽀얀 피부를 지니고, 눈과 들꽃 내음을 풍기는 낭인―〈이리〉는. 늑대의 귀를 단 채, 구포― 시랑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이리는 품에서 부채를 꺼내 하관을 가린 후,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구춘에게, 눈을 노랗게 빛내며 말했다.

  「잠시 자리를 비켜 줄 수 있겠느냐?」
  그녀의 그 목소리는 너무나 무거웠으니, 구춘― 옥민은 그 무거움에 짓눌려,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방을 나섰다.

  그가 방을 나서자, 이리는 부채를 접어 입을 보였다.


  그녀의 입에는, 곱디고운 미소가 꽃피어 있었다.


  〈狼終〉




  전에 다른 데에 올렸던 걸 합치고 약간 수정해서 가져와 봤습니다. 이후 내용도 있긴 한데, 순애와는 너무 거리가 먼 것 같기도 해서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문제 되는 거 있으면 내리겠습니다.


(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