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조직의 말단인 남자와 감금당해 노리개로 쓰이던 여자


남자는 협박에 못 이겨 시작한 자기 일을 혐오하지만 한번 이쪽 세계에 발을 들인 이상 다시는 뺄 수 없음을 알고 어쩔 수 없다 되뇌이고

여자는 오랜 고문에 완전히 정신이 붕괴되어서 갇힌 자신을 구해줄 용사님을 만나는 환상에 매일을 젖어있는 비참한 삶


비 내리는 어느 날 여자가 차가워진 몸에 하루종일 미동도 없자 죽은 걸로 판단해 남자가 시체 처리를 맡게 되고

여자를 매고 이 여자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였고 언젠가 자신도 같은 꼴이 될거라 중얼거리며 암매장할 곳을 찾아 돌아다니던 중

하얗게 비추는 가로등 아래서 죽은줄 알았던 여자가 깨어나고 그녀는 남자가 자신을 구하러 온 왕자님이라고 생각해 부둥켜안는다


남자는 여자가 살아있었음에 당황하지만 살아있는 사람을 생매장할 수도 없고 다시 조직으로 돌려보내기에도 뭣했던 탓에

남자는 자신의 집에 여자를 들인 채 동거생활을 시작한다


오랜 감금과 고문에 정신이 붕괴되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몇 마디도 겨우 더듬는 흉터 투성이의 여자를 돌보는 남자는 처음에는 무척 힘들어하며 다시 조직에 돌려보내는게 맞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오랜 시간 보살핌과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남자는 여자를 진심으로 챙기게 되고

여자도 그에 부응하듯 몸과 마음을 점차 회복해나간다


여자가 거의 회복되어 보통 사람들처럼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정도가 되자 남자는 이전부터 고민해온 결정을 내린다

조직을 떠나 여자와 함께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자고

남자는 보스를 찾아가 조직과 연을 완전히 끊고 싶다 말하고

슬프게도 조직과 연을 완전히 끊는 방법은 남자가 각오한 대로 죽음 뿐이었다


비오는 날 여자는 남자가 돌아오지 않자 불안감에 남자를 찾아 나서고

자신이 남자와 처음으로 눈을 마주쳤던 하얀 빛이 깜박이는 가로등 아래서 피투성이가 된 채 비틀거리는 남자를 만난다

남자는 말단답지 않은 필사적인 몸부림으로 자신을 처리하려 한 조직원 몇 명을 역으로 죽이고 탈출하지만

그 과정에서 심한 상처를 입고 말았다


오직 여자에게 돌아가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텨온 남자는

울상이 된 채 자신에게 달려오는 여자를 보고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눈물 범벅이 된 그녀에게 안기자마자 정신을 잃는다


그로부터 몇년 후

조직은 누군가의 자세한 신고로 뿌리까지 뽑혀 와해되고

그들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이국의 땅의 아무도 없는 고요한 성당

온몸에 흉터가 새겨진 한 쌍의 남녀가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비춰지는 하얀 빛을 받은 채 카펫을 밟으며 단상으로 나아간다

부부의 언약을 맹세하기 위해


그런 밑바닥부터 시작해 빡세게 구르다가 서로가 구원받는 순애가 나는 너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