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한 손님-

 

뤼비올라에게 편지를 쓰고, 답신이 오고나서 일주일이 지난 날. 로리미엘과 멜레피슈는 시내로 나갔다. 집에서 나오기 직전까지는 간만에 하늘이 쨍하니 화창했는데 마차에서 내리니 또 날씨가 변덕을 부린다.

 

"장갑 예쁘네"

"류디트 아가씨께서 선물로 주셨어요"

"누나가?"

"외출할 때엔 꼭 착용하라고 하셔서..."

 

로리미엘은 장갑을 끼고 있는 멜레피슈의 손을 쥐어본다. 장갑 낀 손은 우아했지만 역시 손을 맞잡은 느낌은 맨손일 때가 더 좋았다.

 

"비는 안오겠지?"

"아마도요?"

 

로리미엘이 베시올에 오고나서 2년쯤 지났을 때 베시올 역이 완공되었다. 이 곳에 처음 올때만 해도 츄딩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곳이, 역 하나 세워졌다고 내로라하는 상권지역이 된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마을에서 마차를 타고 느긋한 마음으로 대화를 즐기다 보면 시대를 뛰어넘어 이 곳에 도착하게 된다. 류디트가 인수하고 클럽으로 개조한 여관보다도 큰 포목점 앞에 두 사람이 도착한다.

 

"직접 만드는 것 보단 만들어져있는 걸 사는게 낫겠지?"

 

호텔이 아닌 상점은 단층의 작은 건물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 포목점은 눈이 어지러워질 정도로 넓고 웅장했다. 원단과 기성제품을 좀 빼면 다른 상점을 가져다 넣어놔도 될 만한 크기였다. 기성 외출복이 있는 1층에서 계단을 올라간다. 2층에는 좀 더 다양한 기능성 복식들이 구획마다 나누어 전시되어있었다. 자신의 정장 못지않게 화려한 남성 하인들의 옷을 지나 작게 마련된 메이드복 코너를 향해 간다.

 

"메이드용품은 생각보다 적네?"

"손님이나 주인 눈에 띌 일이 적으니까요"

 

격이 높고 부유한 집안일수록 남성 사용인들에게 화려하고 격식있는 제복을 지급한다. 그에 반해 이직과 해고가 잦고 청소, 빨래 등 지저분한 일을 하는 메이드들의 경우에는 복식은 개인지참, 혹은 천을 지급해 저택의 룰에 맞춰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도시에 사는 젊은 아가씨들 중에 아직 장사를 할 여력이 안되거나 별다른 재능이 없는 아가씨들이 할 일은 메이드 말고는 없다해도 무방했으니, 그만큼 메이드를 하고자 하는 인원은 언제나 넘쳐났다. 그러니 메이드에 대한 처우는 남성 하인에 비해 열악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기성 메이드복을 사는 경우는 보통 둘이었다. 안주인이 사용인의 복식에 관심이 없어서 지정해준 곳에서 사서 복식의 통일만을 노리거나 작은 집에서 고용한 올 워크스에게나 맞춰주는 용도였다. 전자던 후자던 과시하고자 하는 욕구는 모두 같았기에 기성 메이드복은 대체로 화려하고 예쁜 것들이 많았다.

막상 멜레피슈에게 새 옷을 권유한 류디트는 이런 곳에서 사 입은 몰개성한 복식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 멜레피슈가 입고있는 좁은 소매에 민무늬 에이프런에 비하면야 낫겠거니 하며 쿡 찔러본 것이었다.

 

"저기요"

 

강한 색감의 원피스를 입은 점원을 불러세운다. 작은 도련님에 키가 큰 메이드, 어딘가 미묘해보이는 조합이지만 점원은 웃으며 두 사람 앞에 선다.

 

"에이프런이랑 캡, 그리고...또 뭐였지?"

"원피스 빼고는 다 보고싶습니다. 괜찮을까요?"

 

속옷이니 드로어즈니 하는 것들을 여점원과 주인 앞에서 말하기엔 조금 껄끄러웠다. 점원은 멜레피슈와 로리미엘을 흘끗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멜레피슈의 눈치를 받아들인다.

 

"도련님도 보시겠습니까?"

 

괜히 원피스 치마 속에 입는 페티코트의 코너에서 말을 거는 점원과 멜레피슈를 한 번씩 슬쩍 쳐다본 로리미엘은 눈치를 보며 자리를 피한다.

 

"맘에 드는 거로 골라. 알았지?"

"네, 주인님"

"난 잠깐 다른 칸 좀 구경하고 올게"

 

로리미엘이 1층으로 걸어내려간다.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마냥 사람과 옷 속을 걸어다니는 로리미엘을 한참 바라보던 멜레피슈가 점원쪽을 향해 걸어간다.

 

"도련님이 어린데도 젠틀하시네요?"

"워낙 구김살이 없으셔서 걱정이에요 "

 

전신거울 앞에 멜레피슈를 세운 점원이 에이프런 몇 벌을 그녀 앞에 가져다대며 모양새를 확인한다. 멜레피슈의 혼을 빼놓기라도 하는 듯, 주인에 대한 이야기를 조잘대는 점원의 손이 옷 하나에서 멈춘다.

 

"이런 건 어떠세요?"

 

가슴과 어깨라인에 프릴이 풍성하게 들어간 에이프런은 하늘하늘한 것이 눈을 홀리기는 했지만 그것을 본 멜레피슈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래도 집 안에서 일 하면서 입어야 할 것들이라, 접대용은 조금..."

"알겠습니다"

 

손님을 접대하는 팔러메이드용의 복식을 확인하러 온 줄 알았던 점원은 다시 에이프런을 몇 벌 가져온다.

에이프런을 하나, 캡도 하나, 페티코트와 드로어즈도, 코르셋은 역시 아닌 것 같아 빼고 색이 없는 검은 스타킹을 하나 고른다.

 

"손님은 너무 화려한 건 안 받긴 하네요"

"안 꾸미고 살아서 그런가봐요"

 

결제를 완료하고 점원이 옷을 잘 개어 봉투에 넣어준다. 봉투를 건네받은 멜레피슈에게 점원이 한 마디 덧붙인다.

 

"가끔 오세요. 제 또래같기도 하고 얘기나 해요. 케이미에요. 열아홉"

"전 스물다섯..."

 

나이차가 나봐야 한 두살 차이인줄 알았는데 6살이나 나는 걸 안 케이미는 조금 당황한 듯한 눈치다.

 

"그래도 찾아오세요. 호홋"

"옷 샀어?"

 

양 손에 무언가를 받치고 걸어오는 로리미엘에게 두 사람의 시선이 꽂힌다. 잘 개어진 옷 위에 폭 올라가있는 둥근 챙에 흰 리본이 감겨있는 낮은 모자, 아가씨용 치고는 너무 어두운 것 아닌가 싶었지만 거의 매일 검은 원피스를 입고있는 멜레피슈에게는 꽤나 어울릴 듯 했다.

 

"선물이야"

"어머"

 

주변 사람의 눈치는 하나도 보지 않고 직접 옷을 들고와서 건네는 모습을 보며 점원은 구김살이 없단 말의 뜻을 다시금 알게된다.

 

"케이프 코트랑 모자야. 외출할 때 입어...담아주시겠어요?"

"봉투에도 안 담아주고 누구람? 담아드리겠습니다"

"아, 입고 갈게요"

 

멜레피슈는 주인의 팔을 무겁게 할까 옷을 바로 받아든다. 점원이 모자를 잠시 받아준 동안 케이프 코트를 걸친다. 상반신을 감싸는 코트를 어깨에 두른 뒤에 단추를 잠근다. 불룩한 가슴이 조금 가리워지긴 하지만 뻣뻣한 원단에 부자연스러운 굴곡이 진다. 그래도 로리미엘의 눈에는 예쁘기만 하다. 케이미도 옷태가 안받는 것과는 별개로 나름 부러움의 시선을 보낸다. 옷을 파는 것 뿐 아니라 입는 것에도 나름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몸에서 오는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예쁜가요? 주인님"

"엄청, 흐흣"

 

자기보다 여섯살 많은 언니의 귀여운 모습과 더 귀여운 어린 도련님의 모습에 케이미도 미소를 싱긋 짓는다.

 

"도련님 사탕 드시겠어요?"

"감사합니다"

 

케이미는 나무 서랍 속 양철캔 안에서 작은 사탕 하나를 꺼낸다. 역시 아이에겐 사탕이 제일 좋다는 지론을 다시 한 번 검증하며 장갑을 벗고 사탕을 받아드는 로리미엘을 보는 케이미의 미소가 점점 커져간다. 키가 꽤 빨리 큰 듯한 도련님의 모습이 너무 귀엽기만 하다.

 

"도련님은 몇 살 이신가요? 열 살?"

"열 셋입니다. 봄 지나면 열 넷이구요"

"죄송합니다..."

 

생각보단 나이가 많았다. 어릴 때엔 한 살 한 살의 차이가 크니까 멜레피슈의 나이를 오해했던 6살 만큼이나 큰 나이차를 헷갈려버리고 말았다. 사람보는 눈이 잘못되었나 하는 생각과 함께 케이미는 사탕 하나를 집어먹는다.

 

"계피맛이었네..."

 

케이미는 혓바닥 위에 구르던 사탕을 볼 쪽으로 밀어낸다.

 

케니시메이어 호텔, 거대한 상업구역인 베시올 역 인근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호텔. 어차피 베시올에 사는 두 사람은 작은 여관이던 큰 호텔이던 머물 일이 없었으니 크게 관심은 두지 않았지만 그래도 흐린 날 속에도 요정의 궁전처럼 환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나쁘지만은 않다.

 

"드탱 뤼비올라씨를 뵈러 왔습니다"

"아, 뤼비올라씨는 지금 자리를 비우셔서..."

 

자리를 비웠단 말에 시계를 확인하자 두 사람이 일찍 온 것을 알게된다. 옷을 사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는데 쇼핑에 익숙하지 않은 두 사람은 시간 보내는 법도 제대로 몰랐다. 호텔의 로비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기로한다. 차를 한 잔씩 주문하고는 로비에 앉아 찻잔을 비울 때 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가끔 주변 사람들이 기묘한 조합에 흘끗 쳐다보고는 했지만 둘은 시선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서로간의 대화에만 바빴다.

 

"그런데 선물은 하나 아니었어요?"

"메이드복은 그냥 가재도구라고 생각하자구. 코트랑 모자 쓰니까 이쁘잖아. 장갑은 있는데 모자는 없어서야 되겠어?"

 

계피맛 사탕을 다 녹여먹은 로리미엘은 혓바닥으로 입 속을 긁는다.

 

"어?"

 

모든 사건은 엇 하는 순간에 시작된다.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메이드복 세트를 누군가 들고 대뜸 로비 밖으로 뛰어나간다. 일어나서 쫓아야하나? 소리를 질러야하나? 하는 머뭇거림 사이에 남자는 다른 사람을 밀치며 뛰어나간다.

 

"도, 도둑..."

 

얼타고 있는 멜레피슈보다 동작이 빨랐던 건 로리미엘이었다. 모자와 장갑도 팽개쳐둔 로리미엘은 그대로 남자를 향해 내달린다.

 

"주인님!"

 

로리미엘이 뛰쳐나가자 멜레피슈도 주인을 따라 뛰어나간다. 수 많은 사람들의 눈이 소동에 잠깐 얼어붙은 순간에 남성은 문을 열고 인파 속으로 사라질 계획이었다. 분명 계획상으론 그러했다.

 

"비켜!"

 

비키란 말과 함께 남성이 뒤로 나자빠진다. 문을 열고 걸어들어오는 신사 한 명이 자신의 지팡이를 휘둘러 남성의 옆구리를 후려친다. 냅다 뛰어오던 로리미엘도 지팡이에 얻어맞을까 놀라 브레이크를 걸다 엉덩방아를 찧어버린다. 어지간히도 세게 휘둘렀는지 아니면 급소라도 얻어맞았는지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일어나는 남성의 팔에 지팡이를 걸어 그대로 비틀어버린다. 고급 호텔엔 어울리지 않는 비명을 정리하기 위해 호텔 보이 몇 명이 다가온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어? 아, 응. 미끄러진거야"

 

물건을 찾아야한다는 생각 속에서도 멜레피슈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싶단 생각을 했는데 미끄러져서 엉덩이나 찧어버린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멜레피슈도 놀란 나머지 주인을 금방 일으켜 세운다. 소동이 정리되자 문 앞에 쏠리던 시선도 금방 사라진다.

 

"그 쪽 물건이죠?"

 

지팡이를 휘둘러 도둑을 순식간에 제압한 신사는 엎어진 봉투에서 쏟아져나온 메이드복을 대강 정리해 로리미엘에게 건네어준다. 장갑을 쥔 손에서 봉투를 건네받고 인사를 하려 눈을 맞추려던 로리미엘이 자신 말고 다른 곳을 응시하는 남성의 시선을 따라간다. 오묘한 표정을 짓고있는 멜레피슈와 남성을 번갈아가며 바라본다.

 

"멜리, 아는 사람이야?"

"이 분이, 드탱 뤼비올라 도련님이십니다"

"아. 그러면 이 쪽 분이..."

"민트 로리미엘입니다. 반갑습니다"

 

멜리의 소개에 로리미엘은 봉투를 잠시 내려두고 악수를 청한다. 뤼비올라도 의외의 행색을 한 로리미엘에게 장갑을 벗어 그 악수를 받아준다.


지팡이 들고 싸우는게 씹간지긴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