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고 싶어서인지 릴은 말을 돌렸다.

 

“그래, 다치지 않았으면 이제 가서 쉬어.”

 

자기가 원할 때 애정표현을 해달라는 것치고는 너무 반응이 과한 거 아닌가 싶었지만, 수긍했다.

 

“그럼 방으로 가도 되나요?”

 

“그래, 똑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는 않을 거야.”

 

궁금한 것들도 말할 것도 많았지만, 차차 말하기로 하고서 방으로 들어가, 간신히 들고온 2권의 책을 꺼냈다.

 

악마와 계약을 소개하고 있는 이 2권의 책을 들고온 이유는 계약 때문이었다.

 

나는 어찌 되었든 계약이 오래가는 것을 원하는 만큼, 릴과 오랫동안 지속할 계약을 생각해야 한다.

 

어쩌면 이 두 권의 책이 나에게 해답을 줄 수도 있다.

 

책을 읽으려고 하자 릴이 갑자기 방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했다.

 

“술 한 잔 어때?”

 

그러고서는 나를, 정확히는 내가 가지고 있던 책을 쳐다보고서는 외쳤다.

 

“야!”

 

릴은 바로 책을 뺏은 다음, 이리저리 살펴봤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싶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놀라는 거예요?”

 

릴은 어지간히도 답답했는지 한숨을 내쉰 뒤, 내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정확히 미간에 꽂힌 딱밤의 고통에 정신을 못 차리고 몸부림칠 때 릴이 입을 열었다.

 

“이 책, 마계에서 가지고 온 거지?”

 

나는 더 맞기도 싫고, 들킨 것 같아 그냥 바로 대답했다.

 

“예.”

 

“네가 읽고 있는 걸로 보아서는 통역 마법이 걸려있는 거지?”

 

그 꼬마가 대충 그런 마법을 사용했겠지?

 

“예, 아마도요?”

 

그러자 릴은 내 멱살을 쥐어 잡고 짤짤 흔들면서 화를 냈다.

 

“만약에 이 책에 걸린 마법으로 추적하면 우리 위치가 바로 걸리는데, ‘예, 아마도요?’같은 소리를 해!”

 

나는 그렇게 화를 내는 릴의 마음이 이해가 갔기에 얌전히 화를 받아들였다.

 

내가 얌전히 있자, 화가 조금 풀렸는지 멱살을 풀고서 다시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따라와.”

 

따라나오니 식탁 위의 은은한 촛불만 있을 뿐 나머지는 어둠에 잠겨있었다.

 

릴은 손짓으로 반대편 의자를 가리켰고 나는 그 자리에 앉았다.

 

나는 할 말이 없어 그냥 조용히 의자에 쭈그리고 있었다.

 

릴또한 아무런 말 없이 그냥 와인잔에 와인을 따르고서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어떻게서든 이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서 먼저 말을 꺼냈다.

 

“살면서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네요.”

 

하지만 여전히 릴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물론 지금까지의 행동 때문에 분노가 치밀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전부 내 고의가 아니라서 섭섭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웃음이 나왔다.

 

내 웃음을 보고 오해했는지 릴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뭐가 웃겨서 웃어?”

 

나는 잠깐 숨을 들이마쉬고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제가 당한 폭력과 불평, 불만은 전부 저의 고의라기보다는 우연한 일들이었죠.”

 

나는 잠시 말을 쉬고서 생각했다.

 

어머니가 나간 것도, 왕따를 당한 것도, 친구들에게 이용당한 것도, 그리고 마계로 끌려간 것도.

 

모두 고의가 아니었음에도 늘 나의 책임으로, 나의 잘못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모든 것들이 저의 잘못으로 돌아왔죠, 하지만 그건 인간들만 그런다고 생각했어요.”

 

내 말을 들은 릴은 점점 표정을 굳히더니, 급하게 말을 꺼냈다.

 

“아니, 나는 네가 잘못한 걸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릴이 말하는 것을 들으며 생각했다.

 

이제는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고, 이곳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나는 내가 원래 있던 자리가 그나마 어울린다고.

 

모두에게 버림받았던 그때가 어울린다고.

 

“저는”

 

내가 말하려는 순간 릴은 갑자기 와인을 물 마시는 듯이 들이킨 다음 외쳤다.

 

“내 말 좀 들.어.봐!”

 

그러고서는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마치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이 읊었다.

 

“네가 잘못해서 내가 혼내는 것도 물론 있지만, 그것보다는 내가 너를 걱정해서 그런다는 생각은 안 하냐?”

 

릴의 질문에 할 말이 없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만약 그렇다면 릴은 나를 구하러 오지도 않았겠지.

 

“물론 네 잘못보다는 우연의 일치가 계속 겹친 것도 있지, 하지만 그것 때문에 다시 그런 사랑을 받지도 못한 삶으로 돌아가겠다고? 그게 제정신으로 할 말이야?”

 

릴은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일까, 내가 돌아간다는 사실인데, 계약이 깨진다는 것 때문일까?

 

릴은 다시 와인잔에 와인을 따르더니 들이킨 뒤 입을 열었다.

 

“계약 때문에 너를 붙잡아 두는 것도 없잖아 있기는 해, 그런데, 나는 자꾸만 널 볼 때마다 내 과거가 떠올라서 붙잡는 거야.”

 

릴의 고백에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서는 다시 릴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내가 이 자리를 만든 것은 우리가 조금이라도 솔직해지자고 만든 건데, 너 솔직히 사랑받는 게 네가 원하는 삶이 아니잖아, 그러면 잠시 그랬다고 돌아가는 게 말이 안 되지.”

 

내가 무어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릴은 품속에서 우리가 썼던 계약서 2장을 꺼내고 그것을 찢어버렸다.

 

쫙 쫙

 

“나는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릴의 어두운 표정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이 악마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것을.

 

“당신이 행복해지지 못했으니까요?”

 

릴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와인을 병째로 들이켰다.

 

“우리 솔직해지자, 나는 흥미라고 했지만, 사실은 네가 안쓰러웠던 것이고, 너는 솔직하게 원하는 것이 있었잖아, 그걸 말해봐, 다시 계약하자.”

 

릴의 눈을 쳐다본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