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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후기 사회에 두루 영향을 미친 그리스도교 생활을 출발점인 초기 그리스도교 가정의 특징을 알고자 한다면, 고대 후기 가정의 구조와 생활 습관을 물어야 한다. 당연히 이러한 질문에 포괄적으로 답변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리스 가정은 이집트 또는 로마 가정과 같지 않다. 농촌 생활은 시대에 따른 일부 변화를 제외하고는 도시 생활과 달랐다. 이 떄문에 특히 개별적 기술들이 일반화될 수 없으며, 또한 중류층과 하류층의 상황에 관해서는 문헌상 거의 다루어지지 않기 떄문에 주로 상류층 가정에만 적용된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문헌에서 '일생생활'에 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는 내용이, 개별 현상의 사회사적私會史的 일반화와 특성에 관한 정확한 보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남아 있는 문헌들을 주의 깊게 분석하면 일반적인 몇몇 특징을 알게 해 주는 다른 예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예를 들어 고대 후기 가정의 규모에 관한 중요한 의문에 적용된다. 가장paterfamilias[또는 '오이코데스포테스'(oikodespotēs)]이 있는 고대의 집안oikos 또는 가정familia이라 하면, 대부분 몇 세대가 함께 살고, 경제적·문화적·종교적 공동체에서 친척·일꾼·노예가 함께 사는 대가족을 떠올리기 쉽다. 이러한 집안/가정들은 특히 농촌에 많았다. 그러나 이전의 연구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견해, 즉 혼인한 모든 아들이 아버지의 통제 아래 그가 죽을 때까지 가족과 함께 머무르는 가부장적 대가족이 먼저 자리 잡았다가, 뒤에 산업이 발전하면서 결과적으로 소가족으로 분화되었으리라는 가설은 그리 옳은 것 같지 않다.(주34)

이미 고대 후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녀로만 구성된 소가족으로 살며 생계를 이어 갔다. 개인적 관계를 나타내는 수천 개의 비문卑文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중류층과 하류층 국민의 비문에는 남편과 아내, 자식과 부모 또는 그 반대의 관계만 기록되어 있다. 다른 친척 또는 개인적으로 관련 있는 인물들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원로원 의원, 기사 또는 장기간 먼 곳에 산 군인들의 비문은 이와 다르다. 이들의 비문에는 관련 인물들로 상속인, 친구, (노예에서 해방된) 자유민, 노예, 동료들이 기록되어 있다. 기록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대가족의 가장인 귀족의 상황 또는 가족과 멀리 떨어져 산 군인들의 상황은 더 자세히 설명되며, 그들의 특수한 경우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확증된다. 비문에 쓰인 기록에 따르면, 자식과 부모 및 한두 명의 독신자나 친척으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고대 후기 일반 사람들의 일상적이고 적서적으로 평범하고 일상화된 생활 방식이다.

무엇보다도 도시(대부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도시에서 먼저 생겨났다) 가정의 규모를 알려 주는 그 밖의 정보는 거주 상황을 알게 해 준다. 얼마 안 되는 정보지만 많은 가정이 매우 궁핍한 상태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400년경 사망)는 로마에 사는 많은 사람이 매우 가난하며, 셋집에 살거나 싸루려 이인숙이나 공공건물에서 밤을 지냈다고 보고한다(『연대기』 14,6,25-26). 셋집은 비좁고 많은 식구가 함께 살았기 때문에 개인 생활이나 종교 활동을 위한 공간이 없었다. 거실은 너무 좁아 가정의 수 호신인 라라들을 세워 놓을 자리가 없었다(살루스티우스 『카탈리나』 20,11). 2세기 로마에는 1,800여 채의 고급 저택이 있었지만, 4,6000 주택단지의 조밀한 셋집에 사는 가정이 적지 않았으리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대부분의 가정은 부모와 자녀들로만 이루어진 소가족이었다. 한 가정에 몇 명의 자녀가 있었는가? 여러 증언을 살펴보면, 고대 사회에는 현실적이고 경제적 이유에서 자녀의 수를 의도적으로 제한하려 했으며, 어린이에 대한 적대감마저 있었음을 추론케 한다. 어린이에 대한 적대감은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에게 똑같지 않았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돈을 버는 옥시린쿠스 출신의 이집트 노동자는 자신의 부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당신이 아기를 낳는다니 축하하오. 그 애가 아들이면 살려 두고 딸이면 내버리시오."(주35) 이 편지에서 노동자가 처한 사회적 곤경을 짐작할 수 있다. 아들은 양육할 필요가 있는 반면, 딸의 양육은 가계에 부담이 될 뿐이다. 어떤 남자가 여행을 떠나면서 임신한 부인에게 아이가 딸일 경우 죽이라고 지시했다는 아풀레이우스(『변모』 10,23,3)의 보고는 매우 충격적이다.

물론 가정마다 이기주의, 안락, 경제적 고려 또는 극심한 가난 가운데 어떤 요인이 자녀의 수를 제한하게 했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어린이들이 철학적 안식을 반해한다고 느낀 학자들과 부유한 여인들이 어린이를 혐오한 사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경우 어린이를 많이 낳지 않은 실제적인 이유는 가난인 것 같다. 2세기 로마제국의 여러 지역에는 토지나 재산이 없어 무리를 이루어 일용노동자와 계절 노동자로 생계를 이어 가야만 하는 농부들이 있었다. 더욱이 4세기 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통화 안정 조치에 따르면, 생활에 필요한 물건에 관한 가격지수와 농부 또는 수공업자들이 받는 평균 임금을 비교해 볼 때 이들이 가족을 부양하기가 매우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주36)

어린이 수를 제한하는 방법은 냉혹했다. 부모는 태아를 낙태하고, 어린이들을 내버렸으며, 노예로 팔거나 구걸이나 매춘을 강요했다. 예를 들어 『플리니우스의 편지』 10,65,1에 따르면 버려진 아이들의 법률상의 신분은 모든 지방에 해당하는 문제였다.

노예들은, 자신들이 속해 있는 집안에서 몇몇 조건을 내세워 혼인과 유사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이 특별히 관심의 대상이 된다. 이들이 몇 명의 자녀를 두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어떤 한 지역의 납골 단지에 있는 107개의 비문(1세기) 가운데 두 명 이상의 아이가 있는 것으로 추론되는 사람은 없다. 그 당시에 활동한 경제 저술가 콜루멜라는 지주들에게 적어도 서너 명의 아이를 낳은 노예들만 해방시킬 것을 제안한다. 노예 가정의 자녀 수는, 주인이 아들을 양육하는 것이 경제적 비용이 더 들지 아니면 앞으로 이들을 노예로 부리는 것이 유익한지에 따라 정해졌다. 마찬가지로 어렸을 때 다른 집에 팔렸다가 해방된 노예 자녀의 수가 많았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어린이들은 노예들이 가정을 유지하는데 부담이 되었다. 이는 부모와 자식 간에는 가족애pietas에 관한 로마제국의 선전이 노예 신분에는 적용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주37)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노예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유산을 분재할 때 노예 가족을 뿔뿔이 헤어지게 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가정생활을 형성하는 도덕적·윤리적 기준에 대해 확실한 사실을 밝히는 것은 가정의 규모, 가족 관계, 어린이 수에 관한 것보다 더 어렵다. 이러한 사실에 관해서는 많은 보고가 있지만 문헌에 나오는 다른 내용으로 인해 그 진술 가치는 떨어진다. 문헌들은 당시 경향에 따라 가정생활에 대해 서약하거나 풍자하며 찬미하거나 비판했다. 예를 들어 극장, 속담 또는 풍자문에서 가정 상황과 갈등이 희화화된다 하더라도 실생활을 제한적으로만 추론할 수 있다. 고대에서도 인기 있는 주제가 나쁜 계모다. 플루타르쿠스는 속담과 같은 이야기를 인용한다. "자기 개에게 돌을 던지는 소년처럼 나는 그가 개를 맞히든 못 맞히든 상관이 없다. 그러나 그의 계모는 그를 만나, '앞으로는 제발 좀 제대로 맞추어라' 하고 말했다" (Sept., sap. conv. 2,147c). 혼인과 가정을 거부하고 그 상황을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진지한 외침도 있었다. 시인과 철학자들은 가정의 도덕적 타락을 한탄했다. 사람들은 종종 혼인한 부인들의 부도덕을 명백히 여성 적대적인 색조로 비난한 반면, 간통과 이혼을 당연한 관례로 평가했다.(주38) 남성의 경우에는 그가 다른 사람의 혼인을 방해하는 경우에만 간통에 관한 보고가 있듯이 그 이외의 경우에는 간통죄에 해당하지 않은 것 같다. 자신의 부인에 대한 혼인 서약은 도덕적 의무 사항에 속하지 않았다.(주39)

따라서 개별적 내용을 평가하는 것도 그리 쉽지 않다. 그렇지만 당시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친 작가들이 엄격하게 유지되지 않는 혼인에 관해 분노하고 조롱하고 나아가 냉소함으로써, 가정의 연대감을 해쳤다는 것은 틀림없다. 이혼이 일반적으로 널리 행해지고, 남자의 혼인 서약을 벌률로도 관습으로도 요구하지 않으며, 자녀를 많이 두는 것을 임의로 회피하고, 어린이를 태어난 뒤 내버리거나 노예로 파는 사회에서는 가족의 연대감이 온전하게 남아 있을 수 없었다. 혼인의 공동생활과 자녀 양육에 필요한 갖가지 부담이 도덕적 책임을 수반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경제적·사법적 관점에서 규정되었다면, 가정에 대한 이해는 틀림없이 당시의 사회적 풍조에 영향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매우 일찍이 혼인을 통해 확립된 남자와 여자의 도덕적 관계를 강조한 신新피타고라스 학파를 제외하고, 여러 철학 학파에서 도덕에 관한 주제 가운데 혼인과 가정을 연관시킨 것은 신新스토아 학파(1~2세기)에 이르서야 나타난다.(주40) 혼인을 통한 가정 공동생활의 이러한 사적 영역에서 많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 부담과 개인적 괴로움을 겪었는지는 추측만 할 수 있다.

확실히 당시에도 행복한 가정, 부부애, 부모 사랑, 자식 사랑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법률, 관습, 또는 일반적인 도덕적 감성으로 보호되지 않는 행운이었다. 그리스도교 가정은 남편 측에서 보인 혼인에 대한 순수한 신의와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과 자녀들에게 주어진 많은 생존권을 공개적으로 선포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실천하여 많은 사람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교인들이 이를 조롱하고 이와 같이 살기를 거부했지만 많은 이에게 알게 모르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교인 가정의 많은 부인은 이웃에 사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부인들이 혼인생활에서 보호받고 남편에게서 존경받고, 품위를 누리듯이 그들도 그렇게 살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주34 이후 내용의 전거에 관해서는 E. DASSMANN/G. SCHÖLLGEN, Haus II (Hausgemeinschaft): RAC 13 (1986) 805-11를 참조하라.
주35 A.DEISSMANN, Licht vom Osten (Tübingen 4 1923) 134; WEIGST 93.
주36. DASSMANN, Haus 809-10
주37 B. RAWSON, Family life among the lower classes at Rome in the first two centuries of the empire: ClassPhilol 61(1966) 78-81; P.VEYNE, Das Römische Reich: Geschichte des privaten Lebens, Bd. 1: Vom Römischen Imperium zum Byzantinischen Reich (Frankfurt 1989) 87-90.
주38 G.DELLING, Ehescheidung: RAC 4 (1959) 707-19.
주39 G.DELLING, Ehebruch: RAC 4 (1959) 666.
주40 참조: A.DIHLE, Die goldene Regal, Eine Einführung in die Geschichte der antiken und frühchristlichen Vulgärethik = studienhefte zur Altertumswissenschaft 7 (Göttingen 1962) 123, Anm. 1.


에른스트 다스만(Ernst Dassmann), 《교회사 I》(KIRCHENGESCHICHTE I), 하성수 옮김 354-3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