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망한 이곳에, 쓸쓸한 눈이 내린다.


"이름은?"


"... 류드."


"수고했다, 류드."


검사는 말이 없었다. 망가진 하프를 품고, 검을 쥔 채 멈춰선 그는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 이게 전부겠지. 나는, 돌아간다."


"어머, 위대하신 그분을 따르지 않겠다는 뜻인가?"


"그런 게 아니야, 대무녀. 나는 그저..."


쉬고 싶었다.

회한이 밀려왔다.

무엇하러 이들을 짓밟았단 말인가. 무엇을 위하여 내 소중한 백성들을 저 괴물로 바꾸었단 말인가.

이피아, 당신이 지금 날 본다면 과연 내게 뭐라고 할까.

힐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떠나갔다. 아마도 내 이야기를 전할테지. 아무래도 좋다. 나는 지친 것도, 약해진 것도 아니다. 그저 슬퍼할 뿐. 내 영혼은 그에게 묶여있다. 이대로, 내 육체는 저 성 안에서 썩어들어가겠지. 그렇게 나는 저 음유시인처럼 사그라들 것이다.


그렇게 믿었다.


하루이틀은 아무렇지 않았다. 눈은 그치지 않았다.

한두해가 지나고, 조금 쓸쓸해졌다. 눈은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수십년이 지나도록, 나는 이 자리에 서있었다. 눈은, 그래. 마치 그날을 기억하라는 듯이 내리고 있었다.

수백년이 흐르도록, 누구도 오지 않았다. 나는 검 한 자루만을 쥔 채 같은 자리에 있었다. 눈이 오는가, 아니면 그날의 잿가루인가를 나는 구분할 수 없었다. 차라리 그날의 검사에게 했던 말이 나를 향한 것이었더라면, 나는 계속 바랐다.


그가 오기 전까지는.


그는 이피아를 알고 있었다.

나는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그녀를 이 모험가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거짓말하지 말라고 일갈했지만, 그럼에도 공허한 마음 어딘가가 다시 아려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모험가를 보낸 것은 루덴이었겠지, 만일 그가 살아있었더라면. 나는 모험가가 없는 사이 혼자 쓴웃음을 지었고, 동시에 울적해졌다.


모험가는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그녀의 플라워북을 건넸다. 분명 어딘가에서 주웠을 뿐이리라, 그리 생각하면서도 나는 애써 슬픔을 감추어야 했다.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그럼에도 그는 또다시 내게 찾아왔다. 이번엔 나와 그녀만이 알던 길이었다. 더는 부정할 수 없다는 뜻이겠지.


"이피아를 알고 있는 자여, 이것을 받아다오."


그녀의 얼굴이 그려진 펜던트. 이젠 의미가 없는, 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워서 그리운. 그것을 나는 이 모험가에게 주었다. 내 영혼을 바쳐서까지 이룬, 그리고 잃은 그 허무한 복수에 이 펜던트가 어울릴 수는 없으니.


"그만 돌아가라. 지금은 싸울 기분이 아니다..."


다시 찾아온다면, 실력을 겨루게 되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게 어떠한 열망도 의지도 없는 한, 나는 이 자에게 의미없는 싸움을 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날의 검사처럼 필사적이지는 않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 상대에 대한 예의임에는 틀림없으니.


모험가는 다시 찾아왔다. 나는 실감한다. 이 날이 내 마지막이라고. 나는 검 대신 본성을 꺼내기로 했다. 어차피 그날 이후로 검은 쓴 적도, 쓸 자격도 없었다. 그저, 이 모험가를 위해 한 마리 괴물이 되어주는 것이 낫겠지.


"강해졌구나, 메이플 월드의 사람들은..."


눈앞이 흐리다.

그녀가 보이는 것 같다.


"그대여, 이름은?"


"... 반 레온."


"수고했어요, 내 사랑."


황망한 이곳에, 처음으로 포근한 눈이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