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힘든 싸움이었어."

 이제는 생기를 되찾은 정령의 나무 아래에서, 같이 싸운 전우들이 말했다. 아마 레헬른에서의 격전을 말하는 것이리라.

 "맞아요. 군단장이 계속 움직여서 미르가 따라다니려고 고생 좀 했다니까요. 그렇지. 미르?"

 "응, 마스터. 그날은 마스터가 골렘이라도 된 줄 알았어."

 "뭐? 골렘은 좀 심했다~"

 에반은 전체적인 상황 조망과 인원 이동을 맡았던가. 공중에서 그가 계속 신호를 보내왔던 기억이 난다.

 꾸준히 소환되는 몬스터들과 위협적인 탄환 속에서,  우리 영웅들은 군단장, 루시드의 꿈을 격파할 수 있었다.

 피할 수 있을지 의심이 가는 공격이 난무할 때, 루미너스와 은월의 분석력이 돋보였다. 어떤 상황이라도 침착할 수 있는 그들의 활약 덕분에 루시드의 공격을 회피할 수 있었다.

 "중요한 타이밍에 아란과 팬텀이 주의를 끌어주지 않았다면 이번 승리를 얻지 못했을 거야. 고마워, 친구들."

 "에이, 나는 그냥 잡졸을 쓸어버린 것 뿐인데? 마하가 신나게 날뛰어가지고 나야 별로 힘들지 않았어. 고생은 팬텀이 다 했지."

 "쑥스럽게 뭘 그런 말을. 우리가 합을 맞춘게 얼마나 오래 되었는데 그 정도는 당연하지. 안 그래, 샌님?"

 "네 활약은 인정하지만, 샌님으로 불리는 것은 사양하겠어, 팬텀."

 "칫. 재미없기는."

 나누는 담소를 들으면서, 나 또한 그날의 일을 회상했다. 그날, 나는...

......

 처음 레헬른에 당도했을 때, 나는 루시드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나와 같이 길쭉한 귀를 가지고 있었다. 분명 그녀는 엘프였다.

 "어머, 메르세데스님이잖아요?"

 그녀의 눈이 나를 바라보더니, 죽은 듯 했던 눈동자가 일순 생기를 되찾았다. 양 볼은 상기되어 달아오르고, 황홀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는 내게 말했다.

 "아아, 오늘은 정말 꿈만 같아요.. 가장 갖고 싶던 분이 내 눈앞에.. 흐아아.."

 나는 혼란스러웠다.
 누구지? 내 기억 속에 저런 엘프는 없는데.
 왜 엘프가 검은 마법사의 군단장인 거지?

 "최고의 꿈을 선사할게요. 시계탑 꼭대기에서 뵈어요~"

 그 말만을 남긴 채로 그녀는 나비 날개를 펼쳐 날아가버렸다.


 시계탑에서 벌인 전투는 생각 이상으로 고통스러웠다. 자신이 만든 꿈에서, 루시드는 절대자와 같은 존재였다. 시간, 공간, 모든 것이 그녀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치열한 공격이 오고가던 도중, 모든 공격이 갑자기 멈췄다.

 "메르세데스님, 봐 주세요. 제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눈을 감으며 외친 루시드의 곁으로 마력이 모아졌다. 멀리서 에반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위험해요! 다들 회피에 전념해.."

 마력에 점점 형태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듀얼보우건과 흡사했다.

 잠시 후 그녀의 양손에서 무엇인가 쏘아졌다.

 '저것은.. 이슈타르의 링..!'

 우수수 쏟아지는 화살의 비. 나는 이 감각을 놓칠 수가 없었다.

 "어떤가요, 메르세데스님. 꽤 잘 하지 않았나요? 칭찬해주세요, 날 더 바라봐줘..!"

 이제는 광기에 젖어버린듯한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왜 그녀가 나의 기술을 알고 있는 거지?

 나는 어린 엘프들에게 훈련 시범을 보일 때 말고는 동족에게 이 기술을 보인 적이 없는데..

 하지만 여전히 그녀가 누군지는 기억이 없어. 도대체 무슨 일인..

 "여왕님, 정신 차려요!"

 날카로운 바람소리와 함께 날아든 에반의 목소리에,  그제서야 나는 상황을 자각할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나는 화살의 십자포화 속에 있었던 것이다.

 "여왕님, 잠시 실례할게요. 미르 위에서 회복하고 계세요."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에반의 팔에 붙들려 미르 위에 함께 있었다. 그는 나를 여왕님이라 부르지 않았는데,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다.

 저 작은 손이 나를 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언제까지 꼬마 녀석일 줄로만 알았는데. 그날엔  작은 손에 프리드가 겹쳐 보였다.

 '많이 듬직해졌구나, 에반.'

 바쁘게 회전하는 전투 중에 은월이 잠시 찾아왔다.

 "지금 메르세데스는 기억과 현실의 괴리감 때문에 잠시 정신적인 충격을 입은 상태일 거야. 조금 있으면 회복하니까 잠시만 더 같이 있어줘."

 "알겠어요, 은월님."

 나는 둘의 배려에 힘입어 빠르게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른 생각을 접어두고, 눈앞의 적을 어떻게 처리할지만 생각하며 전투에 임했다.

.......

 흐뭇해진 마음으로 에반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팬텀이 말했다.

 "아아, 그때 정말 위험했지. 여왕님이 당하는 줄 알았다니까. 점수 좀 땄겠다, 에반?"

 "동료라면 당연한 일인거죠."

 "그래, 그럼 그때 손 위치도 당연한 일인 건가?"

 그 말을 듣자마자, 에반의 손이 살살 떨렸다. 당황한  모양이다.

 "아, 아니.. 그건 전투상황이었잖아요오.."
 
 팬텀의 웃음기가 짙어졌다. 이 자식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거야.

 "어어? 그것 참 위험한 발상이네. 전투상황이라면 숙녀의 그곳을 만져도 되는 건가? 이야.. 다시 봤어."

 ...왠지 아브락사스에서의 일이 떠오르는데. 에반은 터질 듯이 빨개진 얼굴을 하고서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까 전에 듬직해졌다고 한 것 취소.

 "자자, 농담은 그만 하고! 다들 충분히 쉬었겠지?"

 내가 말을 꺼내자, 다들 그렇다는 눈치로 나를 바라봤다.

 "힘든 싸움이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테지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해."

 앉아서 고민하는 것은 내 성미에 안 맞거든.

 "다들 정비하고, 내일 아침에는 출발하자. 다음 지역으로, 그리고 검은 마법사를 향해서."

 "네!"

 "응!"



 "그리고, 에반. 넌 좀 있다가 나 좀 보자."

 에반의 손이 더 크게 떨렸다.

 "히익! 네,  네에.."

 "여왕님의 참교육 시간인가? 좋은 시간 보내라구!"

 팬텀이 특유의 능글맞은 투로 말했다.

 "팬텀, 너는 정말.. 어휴, 내가 말을 말지."

 딱히 혼내려던 거는 아니었다고.
 그저 고맙다고 하려던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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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질렀습니다
메르가 본캐인 입장에서 루시드와의 만남을 조금 더 극적으로, 영웅즈의 성격이 잘 드러나게끔 쓰려고 했는데 어떠셨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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