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F : 친구는 영혼의 동반자

 

“그만 좀 따라다니지?”

 

“…”

 

“…귀찮게 하지 말고 갈 길이나 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니는 거야?”

 

“그건 네가 알 바 없지 않나.”

 

대마법사란 녀석이 날 쫓아다니며 며칠째 저런 것만 물어본다.

 

“보아하니 삶의 이유가 없는 거 같아서.”

 

“쓸데없는 걸 묻는군.”

 

“쓸데없지 않을 텐데?”

 

“초면인 사람한테 그런 걸 묻는다면 이상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나?”

 

“….”

 

“하아… 굳이 대답을 바란다면, 대답해주지. 그래, 나한테 살아가는 의미 따윈 없어. 혈육도, 친구도 없고, 그렇다고 무언가 대의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도 아닌데.”

 

“그런가?”

 

“삶의 이유 없이 떠돌다가 언젠가 죽는 게 내 인생이다. 너 같은 아주 강력한 마법사와는 다르게. 이제 만족하나?”

 

제발 돌아가라.

 

“그럴 리가.”

 

“…뭐?”

 

“방금 삶의 이유가 없다며, 그렇다면 아직 죽을 이유도 없겠네.”

 

“…?”

 

“그럼 약속 하나 할까?”

 

“오늘 처음 보는 사람에게 약속이라니?”

 

“너에게 삶을 살아갈 이유를 찾아줄게.”

 

“…농담하는 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삶의 이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거야. 그게 혈육이든, 친구든, 뭐든지 간에…. 너의 삶의 이유가 없다면 내가 만들어줄 거야.”

 

“…”

 

“아직 죽기는 너무 억울하잖아? 동료애가 무엇인지, 어떤 명분을 가지고 활동하는 게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아?”

 

퍽 상냥해 보이는 얼굴로 제안하는 저 마법사의 이름은 익히 들어 봤다.

 

프리드.

 

엄청난 마력을 가진 천재 마법사. 오닉스 드래곤의 왕과 계약을 맺은 드래곤 마스터.

 

이미 삶의 의욕 따윈 개나 줘버린 나한테 갑자기 나타나 삶의 의미를 찾아주겠다니.

 

그것도 저런 대마법사가.

 

저건 미친 소리야.

 

그냥 무시해야 해.

 

“그게 지금…”

 

말이나 되는 소리야?

 

“….”

 

말의 뒷부분이 목에 걸린 듯 나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사람을 묘하게 끌어당기는 재주가 있었다.

 

저런 갑작스러운 제안을 믿게 할 정도로.

 

생글생글 웃고 있지만, 꽤 진지한 눈빛, 신뢰가 가는 말투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어쩐지 신뢰가 가능한.

 

“그게… 무슨 소리인지….”

 

“누군가를 위해 사는 것, 꼭 누군가가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위해 사는 것. 짧은 인생, 이대로 가기는 아깝잖아. 무언가를 위해 살지 않아도 돼. 어떠한 이유만 있어도 돼. 내가 너의 삶의 이유를 찾아줄게. 무조건.”

 

허무맹랑한 말.

 

정신이 제대로 붙어 있다면, 초면에 저런 말을 한다면, 분명히 거절해야 하는 말.

 

그러나 이상하게 믿을 수 있는 말.

 

어느샌가 나는 그의 옆에서 걷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그저 옆에 있었다.

 

그늘진 내 삶에 한 줄기 햇볕이 내려온 것 같았다.

 

*

 

프리드와 내가 함께 다닌 지도 시간이 많이 흘렀다.

 

자연스레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게 되며, 프리드는 나에게 이 세상에 대해서 이것저것 말해주었다.

 

그 덕에 세상에 관한 여러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리드가 약간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

 

“타락한 초월자가 거병했다는 소식.”

 

“타락한 초월자?”

 

“검은 마법사 말이야.”

 

“검은…마법사.”

 

아, 프리드가 이야기해준 적이 있었다.

 

메이플 월드에는 총 3명의 초월자가 각각 빛, 시간, 생명을 다스린다.

 

시간의 초월자인 여신 륀느, 생명의 초월자인 세계수 알리샤, 그리고 타락한 빛의 초월자 검은 마법사.

 

듣기로는 너무나도 강력하다는데….

 

“아직 전쟁이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곧 본격적으로 침공이 시작되면, 메이플 월드는 대부분이 파괴될 거야.”

 

“싸울 건가?”

 

“지금까지 내가 모은 힘과 지식을 메이플 월드를 구하는 데 쓸 거였으니깐.”

 

“….”

 

“당연히, 싸울 거야.”

 

“너답군.”

 

“옛날에 내가 세웠던 봉화가 있어. 만약 메이플 월드가 정말로 위기에 처했다면 누군가가 봉화를 올릴 거야.”

 

“봉화?”

 

“응. 누군가 봉화 마법 영창에 성공하면 메이플 월드의 모든 사람이 위기를 알 수 있어.”

 

아직 봉화는 올려지지 않았다.

 

만약 그 봉화가 올려진다면 프리드는 검은 마법사에 맞서 싸울 것이다.

 

“…별 도움은 안 되겠지만, 나도 갈게.”

 

“!”

 

“네가 전부터 내 삶의 목적을 찾아주겠다며.”

 

“그랬지.”

 

“나도 한번 너처럼 이 세상을 위해서 살아볼 거야.”

 

“!”

 

“예전에 넌 꼭 누군가가 아니더라도 괜찮다고 했지만… 어차피 짧은 삶, 대의를 위해서 사는 게 더 좋을 거 같아서.”

 

프리드는 약간 놀란 것 같았다.

 

하긴. 예전에는 삶의 목적도 없이 그냥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하루하루 살아가던 내가 세상을 위해 한 번 살아보겠다니.

 

프리드가 놀랄 만도 해.

 

내가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었던 건 다 프리드 덕분이다.

 

처음 나는 그를 그저 막연한 이상주의자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허상을 좇는 마법사가 아닌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살아가기만 해도 빛이 나는 존재 그 자체였다.

 

더 이상 삶의 의미가 남지 않은 떠돌이 시절의 나에게 의미 없는 삶은 없다며 희망을 불어 넣어주던 진정한 친구, 동료, 인생의 동반자 그 자체.

 

산속에 갇혔을 때 먼 곳의 불빛처럼 길을 잃은 자를 계속해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사람.

 

나한테 너는 그저 친구가 아니야.

 

네가 나의 진짜 삶의 이유지.

 

넌 평생 모르겠지만.

 

“그럼, 가 볼까.”

 

“이번엔 어디로 갈 건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그동안 강한 자들을 모아야지. 검은 마법사에 대항할 영웅들을. 

…세상을 구할 영웅들을.”

 



A : 메이플 월드를 위하여

 

“뭐야, 저건.”

 

어디선가 거대한 빛이 기둥처럼 올라가 메이플 월드 전체를 비추고 있었다.

 

“설마, 드래곤 마스턴가 뭔가가 세웠던 봉화인가?”

 

뛰어난 마법사인 드래곤 마스터는 세상에 위협이 닥쳤을 때 메이플 월드의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위험을 알리는 봉화를 설치했다고 했지.

 

그 봉화가 올려졌다는 건 메이플 월드가 현재 위험에 놓여있다는 것.

 

“가야 하나.”

 

“어딜 가는 건데?”

 

“봉화가 올려졌잖아. 가야지.”

 

“오, 드디어 수련의 의미를 보는 거야, 주인?”

 

이놈… 아니, 나한테만 보이는 얘는 폴암 마하다.

 

거대한 폴암을 들고 다니는 나에게 사람들은 ‘무적 무패의 폴암의 전사’라는 긴 수식어를 붙인다.

 

실상은 매일 수련이지만.

 

“어디로 갈 건데?”

 

어디로 가야 하냐니….

 

봉화가 올려졌다는 것은 그만큼 큰 위험이 닥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많은 수많은 사람이 봉화를 보고 모여들 것이다.

 

그들이 약하든, 강하든 간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인 용사들이 모두 화합을 이룬다는 보장은 없다.

 

게다가 현재 메이플 월드의 지역 간 사람들의 갈등이 심한 상황이니.

 

이런 상황에서 과연 사람만 많이 모인다고 화력이 날까?

 

그렇지 않다.

 

통제할 수 있는 인원에, 유능한 지도자, 그리고 서로 간의 신뢰가 있어야 검은 마법사에 겨우 대항할 수 있는 정도다.

 

“저걸 보고 모여들 수많은 사람이 있겠지만, 지역 갈등이 심한 상태에서 화합을 이룰 가능성은 없겠지.”

 

“웬일로 진지하네, 주인.”

 

“…어쨌든, 아무리 여제가 있다고 해도 오합지졸인 용사들을 통제하기는 쉽지 않을 거야.”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일단 당장 위험이 닥칠 수는 없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야겠어.”

 

*

 

“누구냐.”

 

“당신이, 아란?”

 

“누군데 나를 알고 알고 있지?”

 

“저는 프리드, 검은 마법사에 대항할 영웅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나한테 찾아온 걸 보면, 합류를 제안하려고 온 거군.”

 

“당신이 무적, 무패의 폴암의 전사라는 것은 들었습니다.”

 

“저 소리는 여전히 들어도 오글거린다, 주인.”

 

“당신의 말 그대로, 합류를 제안하려고 온 겁니다.”

 

프리드의 이름은 얼핏 들은 적이 있다.

 

천재 마법사로 명성이 아주 높았지.

 

그리고 그 봉화를 만든 장본인.

 

그를 한 번 훑어보았다.

 

맑고 총명한 기운.

 

온순해 보이지만 자신만만한 저 미소.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인물.

 

저런 자라면….

 

“아직 ‘영웅’들을 다 모은 것은 아닌가?”

 

“아직 다 모으지는 못했습니다만, 저희의 이름을 듣고 찾아오는 이들이든, 저희가 직접 찾아가든, 결과적으로는 다 모을 겁니다.”

 

자신감이 충분하군.

 

결단력도 높고.

 

저런 이를 중심으로 뭉친다면 가능성은 있지.

 

“좋다. 합류하도록 하지.”

 



M : 종족을 위한 선택

 

엘프의 왕은 혈통으로 계승되지 않는다.

 

엘프 종족 중 가장 강한 자가 다음 왕으로 계승된다.

 

나는 무리 중 가장 강한 엘프였다.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인간들 사이에서도 ‘전장을 지배하는 엘프의 왕’이라고 불릴 정도니.

 

그러니 자연스레 왕으로 지목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름다움과 뛰어난 능력을 겸비한 왕.

 

그만큼 기대를 많이 받았다.

 

‘미모만큼이나 실력도 굉장하십니다.’

 

‘정말 대단해요! 저도 꼭 메르세데스 님처럼 되고 싶어요.’

 

엘프들이 정말로 나에게 동경심을 갖고 진심으로 하는 말은 고마웠다.

 

나도 누군가의 롤 모델이 될 정도의 사람이 되었다고 느끼니까.

 

반대로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런 기대에 부응해 언제나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감도 존재했다.

 

왕으로서,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드러내지도 못했다.

 

나의 잘못된 판단으로 엘프들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혼자서 전전긍긍할 뿐.

 

그래도 에우렐은 다른 지역에 비해 갈등과 불화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 매우 평화로운 엘프들의 공간이라 골머리를 앓을 일은 적었다.

 

*

 

“!”

 

‘이 기운은?’

 

어두운 기운.

 

하지만, 지금까지 느꼈던 어둠과는 확실히 다른, 너무나 어두워서 모든 걸 못 느끼게 할 정도의 어둠.

 

‘설마…!’

 

“메르세데스님!”

 

“다니카. 무슨 일인가?”

 

“그 소식 들으셨어요? 검은 마법사, 그러니까 타락한 초월자가 거병했다고 합니다!”

 

‘검은 마법사…!’

 

평화로운 에우렐에도 바깥의 소식은 들려온다.

 

지금껏 에우렐 밖의 세상은 매일같이 전쟁과 불신, 비극이 넘쳐나니까.

 

게다가 검은 마법사…. 메이플 월드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니.

 

이전부터 알음알음 그가 거병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었다.

 

어쩌지.

 

‘나도 힘을 보태야 하나….’

 

엘프의 왕은 모든 엘프와 연결되어 있다.

 

한 마디로, 왕의 안녕이 곧 모든 엘프의 안녕이다.

 

내가 만약 검은 마법사에 대항하지 않으면, 최악의 경우, 엘프는 자칫 검은 마법사에 의해 멸족할 수도 있다.

 

반대로 내가 검은 마법사에 직접 대항하면, 검은 마법사가 나에게 어떠한 저주나 피해를 입히면 그대로 모든 엘프에게도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선택의 기로에 만약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된다면.

 

그 선택이 나뿐만 아니라 엘프 종족 모두에게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면.

 

두렵다.

 

“휴….”

 

“저, 그리고 메르세데스 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엘프들은 인간들을 배척하지 않았다.

 

가끔 왕인 나를 알현하러 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

 

그러나 요즘은 시국이 시국인지라 인간들이 엘프의 마을을 찾아오는 경우는 줄어들었다.

 

설마, 반 검은 마법사 동맹에서 온 건가?

 

반 검은 마법사 동맹은 표면적으로는 검은 마법사에 대항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유일한 연합이었으나 실제로 그들이 하는 일은 자신들과 반대되는 뜻을 가진 이들을 무참히 짓밟는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나 다름없었다.

 

반 검은 마법사 동맹에서도 분명 내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자신들과 협조하라고 협박 가까운 제안을 할 것이고, 만약 이를 거절한다면 엘프들이 위험해질 수 있었다.

 

그렇다고 협조하기에는 그치와 동급이 되는 게 내키지 않았다.

 

어쩌지.

 

그러나 찾아온 이를 보자, 지금까지의 내 걱정은 헛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

 

저… 사람은 프리드?

 

메이플 월드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이니,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반 검은 마법사 동맹과 같은 집단에 있겠는가.

 

“당신은… 프리드?”

 

“제 이름을 아시는군요.”

 

“알지 못할 리가 없지.”

 

*

 

주위를 다 물리고 에우렐의 전경이 보이는 나의 공간으로 프리드를 안내했다.

 

그곳에 오자마자 프리드는 에우렐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께 제안을 하러 왔습니다.”

 

“나에게 제안을?”

 

“네. 최근 검은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 들어보셨겠지요.”

 

“당연하지. 그의 군대가 거병했고, 그에 따라 메이플 월드가 위험에 빠졌다지.”

 

“그렇습니다. 그리고, 지금 수많은 용사들이 검은 마법사에 대항하기 위해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것도 아실 겁니다. 

 

“그렇다면, 나한테 찾아온 이유가….”

 

“네, 그렇습니다. 저희는 검은 마법사에 대항하기 위해 이 세계를 구할 영웅들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엘프의 왕께서 저희와 함께 이 세계를 구하는 데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

 

“압니다. 검은 마법사의 군단은 강하고, 그 너머의 검은 마법사는 더 강합니다. 게다가 엘프 왕의 안위는 곧 엘프 모두의 안위나 마찬가지이기에, 만약 당신이 검은 마법사와 직접 맞섰다가 검은 마법사가 당신에게 해를 끼치거나 혹은 종족 전체에게 저주를 내린다면 그 피해는 엘프 모두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겠지요.”

 

정확히 알고 있구나.

 

그런데도 나한테 제안을 하러 왔다는 것은….

 

그만큼 날 믿고 있다는 것인가?

 

“…그대의 말대로, 나의 안위는 백성 모두의 안위랑 같지. 사실, 검은 마법사에 대항하여 싸울 의지는 있었네. 그것이 나와 내 백성들을 지키는 길이기 때문이지. 하지만….”

 

여기서는 에우렐의 전경이 보인다.

 

이따금 바람이 불면 어여쁜 꽃잎이 흩날리고, 엘프들은 흩날리는 꽃잎 속에서 즐거운 웃음소리를 낸다.

 

크진 않지만 평화로운 엘프들의 마을.

 

사시사철 봄에 피는 에우렐은 겨울을 알지 못했다.

 

“만약 메르세데스 님이 저희와 같이 뜻을 하게 된다면, 감히 당신의 백성들이 무사하다고는 말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알고 있다. 그에게 맞선 대가는 혹독할 테지.”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 가만히 앉아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어둠이 스며드는 것을 지켜보는 것보다, 검은 마법사에게 어떠한 타격이라도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메르세데스 님께서 제 제안을 받아들이시든, 받아들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저는 메르세데스 님의 명성을 듣고 제안을 하러 온 것뿐 이니깐요.”

 

 

 

그의 제안을 들은 뒤로, 마음이 굳어졌다.

 

이미 그는 내가 전쟁에 직접 참여한 최악의 결말까지 알고 있는 상태에서 나를 찾아왔다.

 

그만큼 나를 믿고 있다는 것이겠지.

 

에우렐은 평화롭지만, 그 평화가 영원히 지속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어둠에 휩싸이는 것은 원치 않았다.

 

물론 내게 찾아온 엘프들과 장로들도 내 결정에 한몫했다.

 

그리고, 그를 의심했던 것은 아니지만….

 

프리드라면 신뢰할 수 있다고 느꼈다.

 

그의 소문은 익히 들어봤으나 직접 만나보니….

 

호감이 가고, 신뢰가 갔다.

 

*

 

“잘 다녀오세요, 메르세데스 님.”

 

“조심하세요!”

 

“모두 고맙다.”

 

“저희가 뭘요.”

 

“메르세데스 님은 저희 걱정하지 마시고, 그 나쁜 검은 마법사를 물리쳐 주세요!”

 

내가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 날 배웅하는 엘프들이 무사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내 선택이 종족을 위한 좋은 선택일 수도 있고, 나쁜 선택이 될 수도 있다.

 

그래도, 날 믿어주는 엘프들이 있다.

 

내 백성들이, 내 선택을 존중해 준다.

 

“후….”

 

그래. 이건 내 종족을 지키기 위한 내 선택이야.

 

후회하지 않도록, 싸우겠어.




L : 빛의 결정

 

오래전, 한 마법사가 있었다.

 

너무나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 아무도 그의 스승이 될 수 없었다고 하는 천재 마법사는 미친 듯이 책을 써 내려가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수많은 사람을 도왔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하얀 마법사라 불렀다.

 

그는 언제나 ‘궁극의 빛’을 좇았고, 어느 날 해답을 찾은 듯 말했다.

 

“궁극의 빛은 궁극의 어둠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이 말을 남기고 그는 빛이 거의 들지 않는 평온의 숲으로 들어갔고, 빛을 연구하는 집단인 오로라를 세웠다.

 

그는 금기를 어겨가며 연구에 밤낮없이 몰두했고, 마침내 그 끝에 다다랐다.

 

“저는 성공과 동시에 실패했습니다. 금기를 어겨가면서까지 연구에 몰두했고, 그 끝에 닿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궁극의 빛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제가 닿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궁극의 어둠은 존재하죠. 이것이 제가 내린 결론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남은 순수한 빛의 결정을 스스로 떼어냄으로써 검은 마법사로 타락했다.

 

하얀 마법사… 아니, 검은 마법사에 의해 대부분이 희생되어 겨우 명맥만 유지한 오로라는 검은 마법사가 떼어낸 순수한 빛의 결정을 인간의 모습으로 훗날 환생시켰다.

 

온전한 어둠인 검은 마법사와 한때 순수했던 하얀 마법사에게서 떨어져 나온 빛의 결정은 존재만으로도 서로의 대적점에 서 있다.

 

그렇기에 검은 마법사는 미처 회수하지 못했던 자신의 빛을 항상 경계했다.

 

검은 마법사에 대항할 순수한 빛을 지키기 위해, 오로라는 점차 비밀 결사로 변모했고, 인간의 형태의 빛의 결정, 별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두 가지 방침을 세웠다.

 

첫 번째는 현실과 분리된 독립된 차원 안에서 특수한 빛의 결계인 ‘세레니티’를 세우는 것.

 

두 번째는 별의 아이를 대신하여 죽을 대체자를 키우는 것.

 

“…그리고 그 대체자가 바로 저, 루시아이죠.”

 

“두렵지 않아?”

 

“뭐가요?”

 

“검은 마법사는 지금도 계속해서 나를 죽이려 들고 있을 텐데, 네가 대신 죽는 거잖아.”

 

“루미,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루미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미안해요, 루미.”

 

“루시아….”

 

별의 아이와 그 대체자라는 관계 때문에 루시아와 나는 같이 공부하고, 놀며 지낸다.

 

역시 특수한 빛의 결계인 세레니티 안에서.

 

어쩔 수 없다.

 

지금도 검은 마법사는 나나 루시아가 눈에 띄는 순간 바로 죽여버릴 테니까.

 

나의 존재는 오로라의 희망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위험이기도 했다.

 

내가 힘을 계속해서 키워 갈수록 검은 마법사는 이를 더 두려워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나를 죽이려 하고 있으니.

 

검은 마법사는 세력을 계속해서 기르고 있었고, 최근 들어 오로라를 향한 습격도 증가했다.

 

아직 까지는 소수이긴 하지만 몇 명의 연구원들이 희생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점점 그 수가 증가하고 있어 무시할 수 없었다.

 

검은 마법사는 너무 강했다.

 

당연히 나 혼자 감당하기 힘들 만큼.

 

*

 

유난히 뒤숭숭하던 날이 있었다.

 

하루 종일 불길한 기운이 끊이질 않던 불안한 날.

 

검은 마법사의 습격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루시아도 죽었다.

 

루시아는 나를 대신해서 죽었다.

 

빛의 대체자가 된 이상 빛을 대신해서 죽는 것이 루시아의 정해진 숙명이었다.

 

검은 마법사는 자신의 성정대로 루시아를 잔혹하게 살해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게다가 루시아가 죽은 뒤 오로라도 궤멸 상태에 몰렸다.

 

루시아가 살해당할 때 수많은 오로라의 연구원들도 죽었다.

 

남은 사람은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이젠 더 이상 숨어 있을 수는 없다.

 

“검은 마법사….”

 

루시아가 나를 대신하여 죽을 운명이었던 것처럼, 나도 빛의 결정으로써 그에게 대항해야 하는 운명을 가졌다.

 

이제는 내가 그에 직접 맞설 시간이었다.




P : 복수

 

“아리아!”

 

평화롭던 에레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에레브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살육의 잔해들만 남아 있을 뿐.

 

주위를 둘러봐도 생명의 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아리아!”

 

어딨는 거야?

 

제발, 살아있다고 해줘.

 

하늘에서는 비가 하염없이 내렸다.

 

몸이 점점 젖어 들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잊은 후였다.

 

그저 아리아를 찾겠다는 생각만 가진 채, 여제의 쉼터에 눈을 돌린 순간이었다.

 

“!”

 

발걸음이 멈췄다.

 

몸이 마비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피로 범벅이 된 몸.

 

힘없이 나부끼는 머리카락.

 

아리아가 신수의 품에 쓰러져 있었다.

 

설마.

 

“죽은 거 아니지? 그렇지?”

 

제발.

 

“아니지…?”

 

“…왔는가, 팬텀….”

 

신수가 천천히 말했다.

 

“…그녀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네….”

 

비가 더 거세게 내렸다.

 

눈물인지, 비인지 모를 것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평범한 소녀처럼 사랑해 본 적이 있던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여제로 점찍어진 나에게는 황제로서의 아리아만 있을 뿐, 인간 아리아는 없었다.

 

저 너머에 있는 소녀들은 누군가를 좋아하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감정을 쏟아낼 수 있을까.

 

나는….

 

“황제님!”

 

“!”

 

괴도 팬텀.

 

화려하고, 경박하고…

 

자유롭다.

 

세상을 자유롭게 누비며, 원하는 것을 모두 손에 넣는 괴도.

 

내가 동경하는 사람.

 

“표정이 왜 그래?”

 

자연스럽게 가까이 다가온다.

 

“무슨 일 있어?”

 

“글쎄요….”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는다.

 

“오늘도 스카이아를 가지러 오신 건가요?”

 

“…이젠, 다른 걸 훔치고 싶어서.”

 

 

 

상황은 매일 같이 나빠졌다.

 

검은 마법사와 군단장들이 거병했다는 소식은 메이플 월드 모두가 아는 사실이 되었다.

 

하나같이 검은 마법사에 대항하여 맞서야 한다고는 하지만….

 

유일한 연합, 반 검은 마법사 동맹은 표면적으로만 검은 마법사에 대항할 뿐,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연합한 국가들이나 마찬가지였지.

 

그러면서 엘나스의 왕인 사자왕 반 레온이 반 검은 마법사 동맹 가입에 반대하자 그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결국, 반 레온은 검은 마법사의 군단장이 되었고.

 

그러나 드래곤 마스터의 봉화가 올려진 이후, 그들과는 다르게 올곧은 뜻을 가진 수많은 용사가 검은 마법사에 대항하여 내 아래에서 협력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같은 목표 의식 아래 똘똘 뭉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같은 뜻으로 모였다고는 하나, 그들 사이의 교류가 적었고, 서로를 불신하는 상태에서 너무나도 강한 검은 마법사에 맞서는 것이었기 때문에 실상은 연합의 탈을 쓴 오합지졸에 가까웠다.

 

그나마 메이플 월드의 황제인 내가 있기에 통제는 되는 상태이다.

 

상황은 매일 안 좋아지는데….

 

이 와중에 검은 마법사의 군단장인 정령, 오르카와 스우와 회담을 하기로 했으니….

 

“아리아?”

 

“아…, 누구?”

 

그는 매일은 아니더라도 자주 나를 찾아온다.

 

명분은 스카이아지만 실제로는….

 

“내가 오기를 마중 나온 건가?”

 

“정말 끈질기네요. 아무리 찾아와도 에레브의 보물을 내주진 않을 거에요.”

 

“흐음…, 그건 두고 봐야 알 것 같은데… 표정이 왜 그래?”

 

“아….”

 

“무슨 일 있어?”

 

“…검은 마법사의 군단장, 오르카와 스우와 회담을 하기로 했어요. 이곳, 에레브에서. 잘 돼야 할 텐데….”

 

“그렇게 우울한 표정만 지으면, 빨리 늙는다?”

 

“!”

 

그의 손에 쥐어진 카드 한 장이 새빨간 장미꽃 한 송이로 변했다.

 

“당신은, 웃는 모습이 제일 잘 어울려.”

 

그에게서 장미꽃을 받았다.

 

저절로 미소가 새겨졌다.

 

그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간질간질하다.

 

편안하고, 좋다.

 

저 너머의 평범한 소녀가 된 느낌.

 

“…팬텀.”

 

“왜?”

 

“당신은… 세계를 위해서… 영웅이 될 생각은 없나요?”

 

“푸핫.”

 

“….”

 

“아, 미안. 나는 그냥 이대로, 자유롭게, 내 마음대로 이리저리 사는 게 더 좋거든.”

 

“…하긴, 그렇겠죠. 당신의 그 자유분방함이, 그게 제가 당신을 동경하고, 좋아하는 이유니까요.”

 

 

 

정령들은 말하는 인형에 불과하다.

 

그들에게는 그저 재미있는 것과 재미없는 것만 있다.

 

인간의 몸을 가진 정령, 오르카와 스우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휩쓴 에레브는 그들의 장난감이 있는 장소에 불과했다.

 

“역시, 인간은 너무 나약해.”

 

“스우? 여제는 죽이지 않기로 했잖아.”

 

“오르카, 이 인형이 불쌍하기라도 한 거야?”

 

“그렇지만, 이렇게 죽이면… 다음에 가지고 놀 수가 없잖아.”

 

“…오르카, 스우… 순수한 정령이었던 당신들이… 왜 검은 마법사를 돕는 거죠…?”

 

“뭐야, 아직 살아있잖아.”

 

“…세계를 파괴하지 말고… 소중히 여겨주세요…,”

 

“신기하군. 아직도 살아있을 힘이 남아 있었나?”

 

“…시시해. 아직 다 갖고 놀지도 못했는데.”

 

그들에게 인간은 그저 ‘재미있는 장난감’일 뿐이었다.

 

*

 

비가 억수같이 내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리아는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전혀 생기를 느낄 수 없었다.

 

“당신은… 세계를 위해서… 영웅이 될 생각은 없나요?”

 

순간 아리아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넌 항상 이 세계를 사랑했지.

 

아무리 그 바보 같은 연합 때문에 힘들다고 해도, 네가 손을 놓지 않은 이유가 단지 이 세계를 사랑해서….

 

“…네가 사랑했던 세계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어.”

 

그런데 너는 더 이상 네가 사랑하는 세계를 지킬 수 없게 됐지.

 

그 망할 군단장 놈들 때문에.

 

“너를 위해, 네가 사랑하던 세계를 위해, 싸우겠어.”

 

정의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도 해도 상관없어.

 

단지, 너에게 죽음을 준 놈들에게 복수만 할 수 있다면 기꺼이 세계를 위해 내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어….

 

*

 

“메이플 월드의 유명한 괴도 팬텀이 합류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대마법사 프리드.

 

검은 마법사에 대항할 영웅들을 모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리아가 죽어 오합지졸이 된 연합보다는 이쪽이 낫지 않겠는가.

 

갑자기 내가 찾아왔으니, 놀랐겠지.

 

“뭐, 함께하게 된다면 환영이야. 하지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온 거지?”

 

“….”

 

“설마, ‘그 분’ 때문인가?”

 

아리아와 내가 밀회를 가진 것은 알음알음 퍼져 있는 상태로, 그가 모를 리가 없다.

 

그만큼, 아리아의 죽음에 내가 분노했음을 알겠지.

 

프리드는 곧 쓴웃음을 지었다.

 

“훔치러 갔다가, 도로 빼앗겼단 말인가….”

 

“….”



 

“어쨌든 잘 부탁해. 너의 활약을 기대하지.”

 

“영웅이 되는 괴도라…, 나쁘지 않잖아?”

 


-Fin



문학을 학교 국어시간으로만 배워서 지금 보니까 엄청 어색함

원래는 삽화도 같이 넣을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삽화를 못 그림


대개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글을 쓰려고 노력했는데

프리드룰 관찰자 시점으로 보려고 씀

최대한 프리드를 객관적인 시선에서 보려고...라는 의도에서 시작했지만

어쩌다 보니 그냥 혼종이 되어버렸다


엉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