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잠시 500년 전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이 사람은 스웨덴 제국의 국왕이었던 구스타프 2세 아돌프로, 영미권에서는 러틴어식 이름인 구스타부스 아돌푸스(Gustavus Adolphus)로 알려져 있다. 흔히 북방의 사자왕(Der Löwe aus Mitternacht)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16112년부터 1632년까지 스웨덴 제국의 국왕으로 재위했으며, 스웨덴의 최전성기를 열고 30년 전쟁의 향방을 뒤바꾼 훌륭한 명장으로 평가받는다. 

스웨덴 국왕으로서의 내치에도 굉장히 훌륭해 법정과 대학을 세우고 구리광산을 개발해 무역수입과 군사력(당시 대포는 청동으로 만들었다)을 모두 크게 끌어올렸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군사적인 혁신인데, 30년 전쟁기의 군대는 지금과는 많이 다르기에 우선 이를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30년 전쟁이 벌어지던 17세기에는 보병의 무기가 크게 파이크, 아퀘버스, 머스킷 3종류로 나뉘었다. 파이크는 장창을 의미하며 주로 방진을 짜고 기병 돌격을 막는 등 널리 알려진 그리스의 팔랑크스 방진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 아퀘버스와 머스킷은 화승총으로, 각각 12~13mm, 19~20mm로 구경의 차이가 있었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이 무기를 병사들이 자비로 구매해야 했다는 점이다px에서 총사오는게 드립이 아니었다. 무기에 따라 월급도 차이가 있었는데 가격도 월급도 파이크가 가장 쌌고 머스킷이 가장 비쌌고 여러 보급품도 병사들 개인이 구비해야 했다. 근데 그러고도 월급은 밀리고 밀리는게 당연하게 느껴졌다. 또 상비군 체제도 굉장히 부실했으며, 대부분의 군대는 용병으로 구성되었다. 이 때문인지 유럽 각국의 얽히고설킨 귀족관계 때문인지 우리 군대 지휘관이 적국 출신인(그러니까 프랑스랑 오스트리아랑 싸우는데 프랑스군 지휘관이 오스트리아인이라던가...)경우도 허다했고, 군대의 보급을 충당하는 대표적인 방법이 현지 약탈이기도 했다.(실제로 30년전쟁 도중 구교군의 약탈로 대도시 마그데부르크가 사실상 '소멸' 하기도 했다)


구스타프 아돌프는 이런 아직 중세 느낌이 남아있던 전쟁에서 근대전으로 발전하는 기틀을 닦은 사람으로 업적 중에 일부는 현대전까지도 내려오기도 한다.  


앞서 말했듯 당시 유럽은 상비군과 징병제가 부실했는데 구스타프 아돌프는 이를 최초로 도입했다. 용병은 돈에 따라 바로 적국에게 넘어갈수도 있었다(실제로 용병 포로가 잡히면 '싼값에' 우리 편으로 데려왔다고). 그래서 구스타프 아돌프는 자국의 자체적인 상비군과 징병제를 실시했다. 당대 최강국이던 스페인도 군대의 80%가 용병이었는데, 30년 전쟁기의 스웨덴군은 무려 50%가 스웨덴 출신 상비군이었다. 문제는 스웨덴은 북방의 나라라서 인구가 적었다는 것. 그래서 영국, 독일, 스코틀랜드 등등 여러 국가에서도 병력을 데려왔고(그래도 스웨덴 출신 병사들이 더 많았다) 사병과 간부들을 묶는 방법으로 종교(개신교)를 선택했으며, 외국인 간부들은 계급에 따라 확실히 구분되는 월급으로 스웨덴에 대한 충성과 진급에 대한 욕망을 부여했다. 


징병제의 일환으로 일종의 향토예비군을 구성해 주기적으로 군사훈련을 받게 했으며, 간부들은 100% 상시편제로 두어 언제든지 원활한 병력증원이 가능하도록 했다. 덕분에 30년 전쟁에서 모든 나라들의 예상보다 훨씬 많은 군대를 투입했고 이는 현대 총력전의 원형이 된다.


전술적인 부분에서도 혁신이 있었는데 당시 흔히 사용하던 머스킷의 3열 순차사격(1열 쏘고 빠지고 2열 쏘고 빠지고 3열 쏘고 빠지고 다시 1열)을 3개 열이 한번에 사격하는 방식을 도입해 순간화력을 극대화했고, 파이크의 길이를 줄여 근접전에 대비했으며, 묵직한 머스킷을 경량화하는 등의 혁신을 이룩했다. 당대 기병은 돌파 기병과 카라콜(적 코앞까지 접근해 권총사격을 가하고 바로 말을 돌려 빠져나가는 전술) 기병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이를 합쳐 카라콜 후 바로 기병이 적을 돌파할 수 있도록 했으며, 중기병의 갑옷을 줄여(극단적인 경우에는 투구 하나 달랑 쓴 게 다였다) 기동력을 올렸다.


구스타프 아돌프의 가장 큰 업적은 포병으로, 당시 주로 쓰던 중포 대신 3파운드짜리 경포를 대량 도입했다. 언뜻 보면 위력이 약화될 것 같지만, 가격이 싸 보다 많은 포를 확보할 수 있었고 연사력도 올릴수 있었다.(애초에 맞는 사람 입장에선 이게 3파운든지 9파운든지 알게 뭔가) 또 규격화를 도입하고(놀랍게도 당시 대포는 규격화도 되지 않았다) 포탄 운송 전용 상자도 규격을 만들어 보급한 덕에 포탄의 보급속도를 크게 올렸다. 그리고 포의 조준기와 일종의 사표를 도입해 포를 제대로 조준할 수 있도록 했다(지금처럼 돌려서 맞추는건 아니고 나무조각 같은걸 수동으로 끼워가며 맞췄다고). 

경포를 도입해 얻은 또다른 이점은 보병, 기병과의 합동작전이 가능해졌다는 것으로, 3파운드 포는 인력으로 운반이 가능해서 보병이 전진하면 그에 맞춰 전진하며 지속적인 화력지원이 가능했다. 이 3개 병종의 유기적인 협력은 스페인의 테르시오(싑게 말해 총병이 추가된 팔랑크스의 최종진화버전이다)를 깨고 스웨덴군에게 연전연승을 안겨 주었다. 


테르시오를 상대하기 위해서 구스타프는 테르시오가 주는 그 충격력을 상대할 수 있는 새로운 편제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연대 3개를 합쳐 새로운 군 편제를 만드니 그것이 바로 여단(Brigade)이다. 여단 편제 예하에서 포병과 기병, 보병이 유기적으로 함꼐 작전할 수 있었고, 덕분에 앞서 말했듯 테르시오를 격파할 수 있었다. 

참고로 스웨덴의 여단 편제는 프랑스가 모방해 동일병과의 연대를 모아 여단, 여단과 포병, 보급부대를 모아 사단을 편제했고 이 편제가 1차 세계대전까지 이어지다가 독일군에 의해 오늘날의 3연대+포병의 사단편제가 등장하며 프랑스식 여단은 사라졌다. 그러나 구스타프가 처음 창설한 독립 전투가 가능한 여단은 오늘날에도 독립여단 편제로 남아있다. 


군사적으로 남은 업적은 아니지만 구스타프는 병사들을 잘 챙겨주었다. 본인부터가 자신이 육성한 상비군에 대해 애착이 아주 강했고, 병사들과 함께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최전선에서 시찰을 자주 했다고 한다. 또 병사들이 실수한 건 웬만해선 다 넘어가 줬고, 월급 밀리는게 당연한 세상에서 월급 밀리면 보급품이라도 잘 챙겨줬다고(앞서 말했듯 보급품도 병사 개인이 챙기는게 더 자연스러운 시대였다) 한다. 그래서 스웨덴군은 구스타프 아돌프를 아주 좋아했고, 뤼첸전투에서 구스타프가 전사했을 때 스웨덴군은 와해되기는 커녕 다같이 분노에 찬 돌격을 실시해 구교군을 도륙냈다고 한다.


이러한 업적을 세운 덕에 나폴레옹은 구스타프를 한니발, 카이사르, 알렉산더 대왕 등과 함께 7대 명장으로 꼽았으며, 러시아 제국과 프로이센 등 여러 국가들이 롤모델로 따르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구스타프는 무기의 주역을 냉병기에서 화기로 넘어가게 했으며 중세의 전쟁을 근대전으로 넘긴, 나아가 현대전의 기틀을 마련한 천재적인 장군이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