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문화전반에 끼친 영향력에 관해선 본문대로 일장일단이 있음. 장점은 라틴어로 학자층의 언어를 한데 묶었다는 데 의의가 있고(현대 모든 학술서의 원전이 영어이고 세계 학자들이 영어를 모르면 연구도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 단점은 모든 사고방식이 신에 구속됐다는 거지
그래서 우상 숭배 금지 좆까고 잘만 깎고 그렸죠 좆되게 잘나가던 이집트 박차고 나오던 노예민족 열등감 오졌던거 알 사람 다 아는데 이쁘게 포장해서 선교지 바이킹 침략 시절 때 아가리털기 삼파전으로 들쑤시고 다니면서 테라포밍질 한거 아니었으면 로마 도로는 한참은 더 깔끔하게 남아있었을텐데
지금 기독교가 로마 예술의 퇴보 원인인가?를 다루고 있잖아. 그런데 넌 로마 예술의 퇴보 원인 예시를 우상 숭배 금지로 들었고. 근데 난 우상숭배 금지가 기독교 말고도 로마의 원래 국교에도 비일비재한 교리였고 따라서 기독교의 우상숭배 금지 교리와 로마예술 퇴보는 관계없단 말을 하려는 거임
땅 없는 가난뱅이들이 남의 땅에 낑겨들어서 기독교 같은 똥찌꺼기 뿌리면서 트롤짓한게 로마가 약해져간 이유 중 하나인건 왜 빼는데 역사에 If는 없다는둥 소리를 해도 영향력 준 건 사실인데 망한 이후에만 포커스를 맞추면 안 되지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제국이 멸망하는데 일조했는데 그리고 우상숭배금지가 그림이나 조각으로 신의 형상을 남기던 예술의 명맥을 끊게 만들었는데 왜 관계 없다 생각하지 로마나 이집트 때 유지되던 예술성이 다 쇠퇴해서 기독교 강세가 시작되었던 초창기 예술이 크툴루 신앙에나 나올법한 흉측한 모습이 된 게 다 남아있는데
옛 로마의 다신교에는 감정적인 요소가 매우 희박하였지만 이교도 번창이 오로지 기독교 탓으로 돌릴 수 있는가? 나라멸망이 다가오면서 종말론이 불거지게 되고 언젠가 터질 갈등이어도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너랑 나만 해도 이렇게 두 가지 견해도 다투고 있으니까, 여러 신을 믿었던 걔들도 세상살이 팍팍하면 내 신이 옳네 네 신은 똥받이네 싸웠겠지. 그럼 나라멸망은 기독교 탓인가? 제국에 치명타를 가했던 노예공급 부족이랑 야만족에게 군대편성을 맡겼던 실수에 관해선 왜 언급을 안 하는지 모르겠다.
기독교 자체는 로마가 멸망하기 이전 로마 문화나 벽화를 파괴할만큼 강력하지 않았음. 영향력을 얻었던 건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던 이후이고, 그땐 이미 예산부족과 노예공급의 어려움 및 군대평성의 문제, (물론 유대인 비중도 적지 않겠지만)제국에 망조가 들어 있었다. 그땐 로마의 정통교회가 콘스탄티노플의 황제와 이권다툼으로 교리수정 및 전통성을 증명하려고 했고, 이 전통성을 증명하려는 와중에 옛 로마 문화를 파괴할 이유가 없다. 제국의 전성기에서 이어지는 전통성을 증명하려면 오히려 로마 문화와 연속성을 주장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아브라함교가 강하지 않았다고? 수메르의 비주류신이다가 깡패질로 전쟁신으로 승격된 야훼가 바알 신앙의 풍요를 집어삼켰고, 온갖 소수 민족을 약탈했으며 미트라 신앙을 흡수해서 미트라의 축일인 12월 25일을 대신하게 됐는데도? 지금이야 이집트 노예였던 역사랑 홀로코스트 덕에 피해자 코스프레 오지게하지 만만찮은 야만족이었는데 잘도 그런 소릴하네, 그리고 견해의 차이 얘길하는건 동의하는데 그 차이는 넌 예술의 쇠퇴가 바이킹 침략으로 인한 로마 문명의 소실이라고 보는데 난 아님
단순 한 사건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임 로마 멸망이건 바이킹 침략이건 단 한 사건이 중요한게 아니고 기독교는 기원전후로 인류발전을 저해한 암덩어리란 말이다 내 의견은 많은 철학자들이 비판과 동일하게 기독교는 이데아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사후를 중시하는 교리로 현세를 깎아내렸고, 노예던 시절의 교리가 남아서 가난을 검소로, 풍요를 방탕으로 역전시킨 기독교 사상이 치명타로 작용했다 보는거임 영국의 유명한 역사소설가는 기독교 집회를 더러 아이가 부모 관심을 얻으려 징징댄다고 표현하는데 실제로도 용서를 빌고, 자비를 구하는 모습이 노예의 모습 그 자체 아니냐고 로마 멸망? 한국도 전쟁으로 쑥대밭난 후에 100년도 안 걸려서 재건됐는데 유럽의 문화 재건이라고 못 했을까? 로마 망한게 그렇게 큰일이어서 다빈치 생전까지 그 긴 시간동안 해부학도 발전 못 했었나? 지금도 그림 좀 진지하게 그리려치면 해부학은 기본기로 통하는데? 지금도 남아있는 로마시절 예술들은 그 때는 어디로가서 연구조차 안 됐지? 그 당시 다빈치 같은 예술가들이 단순 예술가일뿐만 아니라 과학, 공학 등 다분야를 망라하던 전문가였던건 유명한데 그런 인재들의 발전에 제동을 걸었으니 결과는 뻔하지않냐 기독교의 제재가 단순 지동설이나 진화론 같은 약간의 이론에 영향을 준게 아니라 인류 지성의 발전 자체를 발목 잡던 함정이었다고 단 한 순간만이 아니라 인류가 촌락을 구성하고 사회를 구성하던 기원의 순간부터 인간이 창 대신 욕을 한 순간이 문명의 시작이었다고 하는데 그 시절부터 가장 적극적으로 돌을 던지고 창을 휘두르던 집단이었다고
서로마가 멸망하고 나서 각 도시와 농가는 새장에 갇혔다. 도로망이 붕괴되고 파발제도가 소멸되면서 교통, 통신의 장애로 인해 인적 교류가 어려운 상태였다. 도적들이 늘비한 숲길을 뚫고 도보나 기마로 전보를 전하던 시기였으니 통신시설 발달한 근대 한국과 비교는 무리인 점이 보인다. 로마멸망 이후 시대 교역은 베네치아에서 비잔틴으로 연결되는 동방 해상로 같은 극히 제한된 무역로를 통해 행해질 수밖에 없었고, 내용도 빈약하여 적자를 면치 못했다. 사회망이 원시시대로 회귀했던 시기에 과학, 공학, 다분야를 망라한 문화들을 재발견한다? 어불성설이지.
실제 고중세를 지나 중세성기(12~13세기)에는 플라톤철학 및 아리스토텔레스학파가 대두되던 시기였다. 이걸 12세기 르네상스라 부르고, 기도교주의에서 성장했던 고대문화발견 혁명이었다. 이게 기독교 중심의 파리대학교, 볼로냐 대학교, 샤르트르 대학교에서 발원된 걸 보면 너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기독교와 로마문화 재발굴의 지체됨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동일한 12세기 시토회의 개간과 인구 급성장, 도시발달과 겹쳐서 보면 문화재발견이 지체됨은 사회상의 여유가 없음과 통신수단의 부족, 지역마다 폐쇄되고 교류할 여력이 없어서라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즉 세상사 여유가 없어서 문화재발굴이 느려졌지, 기독교가 문화발굴을 늦춰서라는 견해는 틀렸다고 봄
동일하게 기독교는 이데아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사후를 중시하는 교리로 현세를 깎아내렸고, 노예던 시절의 교리가 남아서 가난을 검소로, 풍요를 방탕으로 역전시킨 기독교 사상이 치명타로 작용했다 보는거임 영국의 유명한 역사소설가는 기독교 집회를 더러 아이가 부모 관심을 얻으려 징징댄다고 표현하는데 실제로도 용서를 빌고, 자비를 구하는 모습이 노예의 모습 그 자체 아니냐고 ////// 이 부분은 너가 학자들 권위로 찍어누르려는 의도인지 뭔가 서두를 떼려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쟁점에서 벗어났다.학자들의 주장은 기독교도들이 신에 얽매여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것이지, 로마문화 단절과는 상관관계가 안 보인다. 니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토마스 아퀴나스 이전 중세의 반 아리스토텔레스파를 예로 들어야 했다.
이데아 얘기가 단순 시기상 안 맞다는 소릴 하고픈 모양인데 그래봐야 로마 멸망 순간만 꼬투리 잡는거고, 로마 문화의 재조명이 조금 늦어진데에 대한 변명이고, 지식인들을 깎아내렸던것 또한 성행했다는건 어떡할것이며 난 얘기했지만 기원 전후를 포함하는 인류 전체 역사를 말하니 르네상스 전후는 물론 오늘날의 순간까지 포함해서 말하는거며 예술 얘기로 국한해도 르네상스의 시작인 14세기 이전까지를 포함해서 비판하는데 자꾸 편협한 시각의 로마 멸망 전후 상황 주장만 하네 그리고 이데아 사상의 도입 없이도 고대부터 기독교가 사후를 교리로 한다는것도 동일한데 그 점은? 유럽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고 하는데 당장 과거의 대제국들은 처음부터 금덩이 위에 지어졌나? 뛰어난 통솔과 정책을 기반으로 발달한것인데 이를 막은것 또한 기독교의 교리를 강요한 탄압의 영향인건? 중세의 가장 큰 사건 중 하나였던 흑사병도 14세기 즈음인데 그 전부터도 그냥 사이좋게 멸망해도 천국 갈 놈 가겠지 하면서 방만했고 나태했을 뿐인데 그 변명은? 대표적으로 지동설이 처음 나타났을 때도 이전까지의 천동설 관측 결과를 검토할만한 과학적 지식이 교회에도 있었음에도 오로지 교리에 반한다는 권위주의로 찍어누르려했던건? 그건 다 14세기 즈음이니까 당시의 기독교만 타락했었다는 변명이 되나? 말했다시피 기독교는 인류사 전체와 사상까지 좀먹던 병원체였는데?
수정했으니 다시 보샘. 이 부분은 너가 학자들 권위로 찍어누르려는 의도인지 뭔가 서두를 떼려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쟁점에서 벗어났다.학자들의 주장은 기독교도들이 신에 얽매여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것이지, 로마문화 단절과는 상관관계가 안 보인다. 니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토마스 아퀴나스 이전 중세의 반 아리스토텔레스파를 예로 들어야 했다.
기원 전후를 포함하는 인류 전체 역사를 한 주제에 포괄해서 말할 순 없어. 왜냐하면 저마다 너무도 다른 사회특성을 가졌기 때문이지. 기독교가 강세일 적이 있었고, 약세일 적이 있었어. 풍년이 있었고, 대기근이 있었고. 무정부 상태에서 봉건제가 태어났고, 교방서방교회 대분열이 있었어. 기독교 교리만 해도 1세기부터 14세기에 걸쳐 많이 수정되고 고쳐졌고, 한때는 7대 성사라는 개념도 미흡해서 종부밖에 없던 시절이 있었어. 그 시대를 한 단락에 모두 포괄해서 설명하는 건 불가능해. 오만이야. 일관성이 없는 게 내가 니 주장에 혼란만 겪는 이유인 것 같아.
내가 회사에서 업무보면서 눈팅으로 대화중이라 답이 늦는것도 있고, 인용자료 찾아오기도 힘들고 생각 정리할 시간도 없어서 얘기가 퉁치는 내용인건 아는데 그래도 큰 틀로 본다면 크게 벗어난 얘기 또한 없다고 생각함 이데아의 도입이 10세기 전후인건 처음 들었고 참고사항이지만 그렇다고 큰 물줄기가 틀어질 얘기 또한 아니고 엄청 자세하게 본다면 17세기를 피크로 당시가 소빙하기였던 기후적 상황으로 농작이 어려웠다던가 등의 얘기까지 다 파헤쳐야하지만 그럴 생각의 여유도 없고 지식인 탄압 얘기는 지동설이나 해부학 얘길 했으니 조금의 예시는 된다고 봄 물론 당시 코페르니쿠스도 종교 재판까진 아니고 서적의 발간에 장애가 있었던 정도인걸로 아는데 그래도 당대의 종교적 압박이 있었음은 분명하고 그런 부분은 생활 구석구석까지 있었음도 사실이었고 내가 지금 대리 씹새끼 눈치 봐가면서 조금씩 덧붙이느라 좆빠진다는것도 사실이거든 어느 시대던지 크고 작은 사건은 있었지만 시대를 관통하는 큰 원인이 있고 그게 아브라함교라고 말하는거임
이데아의 도입이 10세기 전후라고 하지 않았어. 중세에 플라톤적 이데아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진 건 12세기부터 시작이지. 기독교식 세계관에서 천당에서 벋는 벌을 의식하게 된 시점이 10세기부터란 거야. 교회의 평화선포가 있고 1차 라테란 전엔 죽음녀 천당 아니면 지옥이다, 딱 이정도 인식이 끝이었어. 어떤 3차원 공간이 아니라 2차원으로 생각했다고
어느 시대던지 크고 작은 사건은 있었지만 시대를 관통하는 큰 원인이 있고 그게 아브라함교다 // 그리고 로마문화 단절의 원인도 아브라함교다 이거 맞음? 코페르니쿠스가 탄압받았듯이 당대 로마문화도 탄압받았을 거다. 이거 맞음? 이게 15세기와 고중세, 중세성기 간 다른 시대상을 상정하지 않은 비약이란 걸 내가 알려주면 받아들일 거임? 15세기는 기독교 부패가 극에 달한 시점이고 그래서 예시로는 결함이 많다 해도 구차한 변명임? 서로마 멸망 이전부터 중세 동안에 기독교 교리가 오히려 (삭제되기 직전인)로마문화 재생을 촉발하는 식으로 작용했다는 예시랑 참고 서적 출처까지 알려주면 받아들일 거임?
3. 바이킹 침략 시절이면 로마가 멸망하고 서유럽 전역에 문화절단상태가 지속된지 3~4세기 지났을 무렵이다. 왕조가 들어섰다곤 하나 왕으로부터 지방으로 이어지는 행정체계는 미흡했음. 단절되어서 상행이 끊겼고 자연히 도로를 유지할 수 없는 상태였다. 샤를마뉴가 카롤링거 소문자체를 고안하고 그게 대머리왕을 지나 관리문서가 성문화되고 나서야 로마도로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샤를마뉴가 카롤링거 소문자체를 고안한 게 신앙심에서 비롯됐으니 이건 기독교가 좋은 영향력을 끼쳤다 할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