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지금부터는 마을의 아인분들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빌게요.”
이리엘은 이제 자기의 역할이 전부 끝났음을 직감하면서 공손한 마무리 인사와 함께 뭔가 아쉬움이 남는 마음은 깊은 곳에 묻어둔 채 천천히 대성당 정문 너머로 사라졌다. 부족한 자신을 위해 끝까지 헌신해 준 이리엘이다보니 생각보다 빨리 찾아와버린 기약이 있는 헤어짐조차도 꽤나 길게 다가왔다.
이반은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마을 주변을 하염없이 둘러보았다. 이 마을의 아인 여자들 모두가 지극히 개성적인 생김새를 지녔지만, 무섭게 생겼다고 기피한 자신을 뉘우친 지금 이반의 눈에는 누구 하나 거를 엄두가 안 나는 미녀 천국일 뿐이었다.
그런 간절하고도 답답한 마음이 정말로 주신 아모루스에게 닿았던 건지, 아니면 새로운 마을의 식구가 되버린 이반에 관한 소문이 쫙 퍼져버려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정도 시간이 흐른 지금이 되어서야 이반을 위해 요리를 만들어 주었던 두 명의 아인들이 이반에게로 다가왔다.
“후후, 무엇을 그리 보고 있느냐. 인간 남자여… 우리 마을의 여인들이 그리도 들판에 피는 꽃들처럼 아름답더냐.”
“아즈미 씨, 업무 상 휴식은 다른 종족에게는 필요할지는 몰라도 저희같은 기계에겐 업무를 온전히 배제한 비효율적인 일과일 뿐입니다.”
오토마타 소녀 에밀리가 아즈미의 제안을 거부한 듯 보였지만, 그래도 명령에 따른다라는 기본적인 사상이 비효율적이라고 인식하는 휴식 모드보다 상위에 있는지라 어쩔 수 없이 동행하면서도 은근히 자신은 내빼겠다는 듯한 뜻을 사무적인 말에 섞어서 건넸다.
“에밀리여, 그대가 방금 전에 냄비를 다시 치우면서 얘기했잖느냐. 인간 남자란 어떤 존재인지 한 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이야.”
“농담 언어 체계가 조건부로 발동한 것 뿐입니다.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처리하기 번거로운 문제가 될 수 있으니 권장하지 않겠습니다.”
에밀리의 말하는 태도는 기계의 특성상 마치 삶의 의미가 단지 놀이 대신 일이 되었을 뿐인 내향인의 그것과 닮아있다. 물론 에밀리 본인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아서 일의 효율을 위해 나름대로 자기 방어를 한 것이었다.
결국 ‘권장하지 않는다’ 라는 에밀리의 말은 비효율적인 기회 비용을 소모하는 것임을 단순히 경고하는 매우 느슨한 규제에 불과하였다. 즉 거리감을 좁히는 일이 불가능한 일이 아닌 것이었다. 아즈미도 이를 알고 있는 듯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이반과의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을 거부하겠다는 뜻은 아닌게로구나. 후후, 그러면 됐다. 그저 마을 한 바퀴라도 돌며 하나하나 천천히 왜 이런 비효율적인 행복을 추구하는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기라도 하거라.”
아즈미는 느긋하게 부채를 접고는 에밀리가 아인들과 이반의 명을 거부할 수 없는 이 곤란한 기류에 휩싸인 듯한 에밀리의 표정 변화를 지켜보았다. 에밀리가 소위 ‘방어’ 에 약한 탓인지 이 비효율적인 행위를 감행하자마자 눈동자가 뱅글이로 바뀌며 함께 나란히 마을 길을 걸으며 얘기하였다.
“혼란, 이해 불가능한 행동 의도입니다. 이반 씨도 아즈미 씨도 마을의 풍경을 시야에 담는 행위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몸의 자원만큼이나 각자의 방식대로 마음의 자원을 채우는 일 또한 중요한 일과라고 생각해요.”
이반이 웃으며 에밀리를 쳐다보며 얘기하였다. 그리고 아무런 감정이 없는 에밀리에게조차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 표정을 관찰한 에밀리는 자신의 사고 체계와는 다르게 눈썹과 입꼬리가 묘하게 아래로 쳐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해 불능, 왜 유기체들의 생태 방식은 번거롭게 신체적 자원과 심리적 자원의 균형을 맞춰야만 하는 것입니까?”
“보았느냐? 이게 에밀리를 일상으로 끌어들일 때 가장 곤란한 점인게다. 결여된 지식 체계와 명령만을 기다리는 태도가 에밀리 스스로의 자유 의지를 온전히 구속하고 있지.”
아즈미는 한숨을 쉬었다. 몇 년 전부터 함께 마을의 식사 준비 담당으로 호흡을 맞춰온 사이였기에 옆에서 에밀리의 모습을 쭉 지켜봐온 여자로서 자유 의지를 가지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느껴진 것이었다. 결국 말의 맥을 여기서 자연스레 끊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마을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함께 걸었다.
각자의 일상에 집중하며 사느라 바쁜 모습이 마을의 활기를 더해주었고, 중간에 보이는 투명한 시냇물과 푸른 잎들이 수놓는 자연의 경치가 함께 어우러진 요소는 에밀리를 제외하면 언제봐도 질리지 않는 삶의 낙 그 자체였다.
이반의 얼굴에는 저절로 감탄스러워하는 표정이 아른거렸다. 인간 도시의 답답함을 완전히 벗어나고 이 드넓은 풍경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한 것이다. 아즈미가 그 광경을 보고 흐뭇하게 웃고 있는 찰나, 정체불명의 그림자 두 개가 이반의 뒤로 천천히 다가오더니 갑자기 이반을 덮쳐왔다.
“잡았다! 히히, 네가 굶어 쓰러져서 이 마을에서 실려왔다던 그 인간 남자구나?”
“라나, 이제 막 마을 풍경에 집중하고 있는 이 인간 남자한테 과도한 접근은 부담이 되는 수가 있어.”
그녀의 언니인 샤나가 입에 문 사탕을 빼고는 자제를 부탁했다. 데몬 특유의 조금 날카로운 눈매가 자매들간의 공통점이긴 해도, 제법 화려하고 엄청나게 신경 써서 꾸민 티가 나고 기본적으로 웃는 관상인 듯한 이 긴 보라색 생머리의 데몬녀의 이름은 라나였다.
은은한 강도의 향수는 이반의 코를 향긋하게 간지럽혔고 약지에 끼운 반지는 V 표시로 턱선을 드러내는 라나의 모습에서 조용히 존재감을 비췄다. 매끈한 광택을 자랑하는 주황색 네일도 방금의 상큼한 V 제스처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긴 속눈썹 화장은 그야말로 그녀의 외모를 한 층 더 돋보이게 만드는 무기였으며 진주 모양 귀걸이는 그 산뜻한 생김새 덕분에 피곤한 시선을 자연스레 분산시켰다. 그나마 자매들간의 또 다른 공통점인 지퍼를 채우지 않고 걸치는 가죽 재킷도 그녀가 입으니 시쳇말로 ‘힙한’ 느낌이 들었다.
“어, 그… 반갑습니다? 전 이반이라고 해요.”
이반은 늘 그렇듯 붉어진 뺨이 인상적인 표정과 함께 손가락으로 그것을 긁적이며 망설임을 안고 자기소개를 하였다. 인간계 사회에선 유니콘보다 더욱 기대하기 힘든 멸종 직전 1급 희귀종인 소위 ‘오타쿠에게 상냥한 갸루’ 느낌을 라나에게서 느낀것이다.
그런 탓인지 라나의 시선에 이반의 원인 모를 부담이 묻어나는 표정을 도무지 지나칠 수 없게 되었다. 라나를 제외하고 이를 지켜보는 나머지 셋은 이반이 느끼는 저 부담에 대해 얼추 짐작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들간의 조용한 수다로 이어졌다.
“역시 그거인게냐? 낯선 것이 다가오는 것을 매우 가리는 소동물의 습성과 너무 닮았다만?”
“이반 씨의 현재 행동 패턴 분석 중⋯ 소동물계 짐승의 행동 패턴과 81.7% 일치 확인. 확실히 유의미하게 비슷한 것 같군요.”
“라나 쟤가 좀 그런 구석이 있어. 한 번 흥미가 생긴 대상에게는 대인관계에서 생기는 자잘하게 충돌하는 위험은 배제해두고 일단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보는⋯”
샤나까지 대화에 끼어들면서 이반에겐 극기 훈련과도 같은 라나의 상냥하고도 적극적인 태도 적응기를 보며 안타까움에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샤나는 지금의 이반에게서 여자를 어려워하는 눈빛을 보았다.
겉으로 보이는 샤나는 세상 만사가 다 귀찮은 듯 보였지만, 사실 누구보다 이반의 진심을 면밀히 관찰하고 있었다. 붙임성 좋게 다가가는 라나를 떨어트려야 하는건지 아니면 이반을 위해서도 똑같이 여자에게 솔직해질 때까지 냅둬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다.
이반 자신의 심정은 어떨까? 라나가 허물없이 붙는 모습을 보면 여전히 과거 습관으로 회귀하고 도망칠 생각도 해봤다. 허물없이 웃으며 다가오는 여자는 무조건 의심해야 한다고 본디 인간으로서 삶은 의심에 기반한 것이라고 삶의 교훈이 그렇게 가르쳤다.
여기서 이반이 생각하는 인간성은 단순히 선한 마음씨나 똑똑한 배려를 뜻하는 것만이 아닌 그 마음씨를 악용한 간사한 꾀와 상대를 마음대로 조종하고자 하는 악의 또한 포함되었다. 그렇기에 본디 인간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남을 향한 의심은 필수 덕목이었다.
그러나, 다시 이성적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해보니 여긴 인간의 상식과 통념이 통하는 세계가 아니었다. 비록 이반이 이곳에 어떤 경위로 떨어졌는가 대한 물음표는 남아있었지만, 짐승이나 마물의 성격을 가진 아인들, 곧 ‘인간성’ 이 사라진 세계였다.
그러니 마음 속의 복잡한 계산 같은 건 오토마타인 에밀리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하려 들지 않았다. 하물며 에밀리 또한 복잡한 계산은 그저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았고 에밀리 역시 무미건조할지언정 겉과 속이 같은 아인에 불과했다.
- 착!
“어머? 히히, 역시 내가 좋은 거였구나? 기뻐!”
“후훗⋯ 이거 분명히 마음의 짐을 조금 덜어낸게로구나.”
“행동 변화 분석 중, 심리적 안정 상태 돌입 중임을 확인. 소음 공해 방지 모드로 전환합니다.”
이반을 중심으로 모여든 4명의 아인녀들이 조금이나마 미간의 주름이 펴진 채 라나의 손을 잡아준 이반의 표정을 보고 그저 순수하게 경계를 푼 것이라 확신하였다. 라나는 당연히 기쁜 듯 단순한 팔짱끼기를 넘어서 아예 팔을 끌어안고 마을길을 걸었다.
샤나는 이제서야 사탕을 다시 입에 물고 가죽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조용히 4명의 뒤를 따랐다. 샤나가 뒤에서 지켜본 이반은 여전히 곤란한 웃음과 함께 자신의 뒷머리를 만지작거렸지만 방금 전과 다르게 마음의 무게를 덜어낸 조금 가벼워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곧 샤나는 자신의 이런 방해 받지 않는 편안한 성격이 곧 이반의 시선에 무조건 닿지는 않게 될 거라 깨달았다. 결국 막대사탕을 입에 문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다시 입에서 막대사탕을 빼고 뭔가 애틋해진 마음으로 그저 이반의 뒷모습만을 쫓았다.
“히히, 있지 언니도 옆에서 껴봐! 이반의 몸에 직접적으로 닿을 수 있다니깐?”
“난 됐어. 괜히 숭한 느낌 받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
샤나는 씁쓸한 듯 웃으며 거절의 뜻을 보였다. 샤나의 눈에 비친 이반은 그 소심한 경계심을 어떻게든 벗어 던지고자 마음속으로 자기 암시를 걸어가면서까지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고자 노력하였다.
반면에 샤나 자신은 선택적으로 드러내는 진심과 본능에 또 안주하며 다시금 귀찮다는 이유를 둘러대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버젓이 이반의 주변을 맴돌고 있음에도 이런 행위가 반복되면 결국 손해를 보는 건 오로지 자기 자신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이반의 눈에 비친 마을의 풍경은 여전히 눈에 다 담기에도 시간이 부족할만큼 너무나도 평화롭고 답답한 속이 탁 트일 듯한 자연과 잘 어우러진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마음의 짐을 덜어내고 나니, 이 평화로운 행복감은 배가 되는 듯 했다.
“앗, 저기 봐봐! 저기가 바로 정령계 아인들이 모여있는 구역이야. 근데 경고 하나 하는데 너무 섣불리 다가서면 다들 숨고 도망갈 걸? 당장 나도 이곳의 요정들과 엘프들이 나한테 보이는 경계심 푸는데 일주일 정도 걸렸거든.”
라나는 이반의 어깨를 비비적대다가 어느새 따로 경계구역으로 격리된 정령계 구역을 보자마자 다시 제대로 서 있으면서 얘기하였다. 이반은 아까보다도 더욱 천천히 걸음을 떼면서 행여나 이 엘프들과 요정들이 놀랄새라 경계하듯 움직였다.
“침입자 발생! 인간입니다. 정령들이여 모두 무장을 준비하십시오.”
그러나 정령들의 여왕처럼 보이는 성숙한 생김새의 아인녀가 이반의 모습을 확인하더니 곧 벌떡 일어서면서 엘프들과 요정들을 향해 명령하였다. 그 명령을 들은 정령들은 이내 분주하게 진형을 갖추고 자신의 활과 지팡이, 그리고 손바닥에서 피어오른 마력을 이반에게로 향하였다.
“으아앗! ㅈ, 죄송합니다. 진짜 해칠 생각으로 온 게 아니에요. 믿어주세요!”
“그것을 어떻게 믿어야하죠? 혹시 등 뒤에 무장을 숨기고 있다던가 그런 거 아닙니까?”
이 정령계 구역의 우두머리인 티타니아 종족의 여자가 지극히 적대심을 품고 이반을 노려봤다. 물론 정령들만의 원칙이 있던것인지 딱히 저항이 없는 인간에게는 무기는 겨누기만 해 잠시 위협을 주면서 티타니아족의 정령 여왕이 단호하게 이반 앞으로 걸어오며 얘기하였다.
“당신이 정말로 믿을만한 인간인지는 몰라도 정령들의 원칙상 인간들을 이 구역에 들여올 수는 없습니다. 10초 드리겠습니다. 당장 우리 정령들의 구역에서 나가주십시오.”
“쳇, 뭔 이런 표독한 여자가 다 있어? 예전까지만 해도 겁을 먹는다면 더 먹었지 표독해지기까지 한 적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라나는 입이 삐죽 튀어나오며 툴툴거리더니 나머지 네명의 동료들을 데리고 정령계 구역을 급히 빠져나갔다. 총체적으로 기운이 다 빠지는 대치가 끝나고 나니 오죽하면 통상적인 표정을 거의 항상 유지하던 에밀리도 이 기운 빠지는 대치 상황을 나름대로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하였다.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한 엘프의 새로운 행동 패턴 감지했습니다. 정령계 아인들은 인간에게 극도의 경계심을 보인다는 새로운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다른 아인들이 인간을 발견했을 시의 행동 패턴과 대조 시 일치율은 고작 0.02% 뿐입니다.”
“으으, 오늘 아주 제대로 벌집을 건드렸구만. 어째 이 정령 아인들은 인간을 그리도 적대하는게냐?”
아즈미는 방금의 상황에 적잖게 당황하며 멀찌감찌 떨어져서 정령계 구역과 이반을 번갈아 바라보며 얘기하였다. 누가봐도 이반이 문제를 몰고 다니는 원인으로 보였지만, 아즈미는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방금 전의 이반의 정신적 성장을 옆에서 지켜봐왔기 때문에 이반 자체가 잘못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뻔하지 뭐, 기존의 인간들은 사나운 마물이나 짐승계 아인들은 위험해 보인다고 그렇게 경계하더니 정령계 아인들은 그 특유의 상냥한 인상 때문에 만만해 보였나봐.”
샤나는 그녀 특유의 지능 때문인지 유독 정령계 아인들이 인간만을 선택적으로 적대하는 작금의 상황의 숨겨진 뜻을 관통하는 말을 씁쓸하게 내뱉었다. 사실 샤나도 산적 인간들이 마을의 재산을 다 빼앗으려 하고 천 년이 넘는 세월동안 순수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는 엘프와 요정들에게 품은 더러운 의도를 멀리서 지켜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
아놔 코감기랑 기침 때문에 뭔 고생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