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몽무스 세계의 속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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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련의 소동 후, 나는 달이 하늘 끝에 오르기를 기다리며 집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상냥하고, 또한 엉망진창인 세계. 여기에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내가 있습니다. 창 밖으로 펼쳐지는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행복해보이지만, 과연 이게 정상일까요?
마가 떨어지는 날 이후로 약 1년 반. 한 때 쥐가 들끓고 오물이 가득했던 뒷골목조차 깔끔하고 위생적으로 변해있었습니다. 반쯤 마계로 변해버린 이 세상에 흉작 같은 건 없었고, 숲에는 맛좋은 열매가 가득했습니다.
단순히 살기 편해진게 아니라, 원한다면… 아니면 원하지 않더라도 ‘나’를 사랑해줄 존재는 이 세상에 수없이 많아졌습니다. 인간은 너무나 간단히 싫어하고 혐오했던 자기 자신을 벗어던질 수 있어졌고, 그건 마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이 무상의 사랑이 더 없이 두렵습니다. 간단히 손에 넣은 사랑은 간단히 떠나 버리는게 아닐까요? 언젠가 축복이 한바퀴 돌아 저주가 되어 덮쳐오는게 아닐까요? 이 세상은 마치 꿈만 같습니다. 너무나 행복하고 작위적이기에 간단히 깨질듯한 꿈.
내가 아직 남성일 때, 나는 나에게 구애해오는 마물들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정말 나를 사랑하고 있는걸까요? 아니, 사랑하고 있는 건 맞겠죠. 하지만 반드시 나여야되는 이유가 있나요? 근육질의 대장장이면 누구라도 좋은게 아닐까요?
그녀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던 내가 말하던 것도 이상하지만, 나는 욕심쟁이입니다. 겁쟁이이며 질투도 많고, 역경에 쉽게 절망하여 현실과 빨리 타협하는 나. 내가 사랑할 수 없는 나. 나는 그런 내가 정말 싫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이것이 진정한 나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간혹, 내 본질까지 들여다본 몇몇 마물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런 네가 좋아.”
뭐라 말하건 아직 그녀를 가슴에 품고 있는 나는 거절했겠지만, 나는 한번도 그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내가 정말로 듣고 싶었던 한마디.
나는 저녁 하늘이 눈부셔 눈을 한번 스르르 감았다 떴습니다.
어느 새 저녁 하늘 아래로 달이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나갈 채비는 이미 한참 전에 맞춰두었지만, 나는 나가기 전에 거울을 한 번 더 마주 보았습니다.
거울 반대편으로 보이는 작은 소녀의 모습. 연회색 빵모자에 흰색 블라우스와 청바지. 어떻게 관리할지 모르겠어서 싹둑 잘라낸 검은 머리칼은 어깨까지 내려와 있었습니다. 나는 거기서 불안과 기대로 찬 소년의 모습을 잠깐 보았습니다. 과거의 나는 전부 사라진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습니다.
나는 한번 심호흡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왕국의 밤은 빠릅니다. 저 해가 서쪽에 서있는 높은 산 뒤쪽으로 사라지면 순식간에 어둠이 집니다. 마가 떨어진 날 이후로, 그녀는 금요일 밤이면 밤마다 성벽의 위를 찾습니다. 과거에 한시도 끊이지 않고 순찰이 돌던 그곳은 이제 단순한 돌벽일 뿐입니다.
내가 성벽 밑에 도착했을 쯤, 세상은 서서히 어둠에 잠기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성벽 밑에 져있던 그림자는 한없이 그 몸을 넓혀 모든 것을 깜깜이 물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녹슨 철창을 열어 성벽에 붙어 있는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갑니다.
내가 성벽 위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남아있던 붉은색 마저 세상에서 전부 사라졌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달은 아직 미약합니다. 어둠은 아직 푸릅니다. 깊지도 앝지도 않은 때에 나는 그녀를 마주합니다. 아직 그녀의 상기된 얼굴을 놓치지 않을 수 있을 때.
“왔어?”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맞이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해나 실수라고 변명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어중간한 마음으로 괜찮은걸까요? 나는 무슨 생각으로 여길 온걸까요? 하나야씨의 말따마다 잘 될거라고 생각해서?
나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준비된 의자에 앉습니다. 우리가 항상 보는 것은 성벽 바깥쪽이 아닌 성벽 안쪽입니다. 밤이면 밤마다 왕국에서는 마가 피어오릅니다. 하지만 세상은 곤히 잠에 든 것 마냥 고요합니다. 마는 바람을 타고 왕국 이곳저곳을 누빈 다음, 마지막엔 달을 잠깐 붉게 물들이고는 사라집니다. 그 행렬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달은 마지막에는 항상 붉게 차오릅니다. 이 광경은 정말 아름답지만 나는 어쩐지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마치 어릴 적 하늘을 바라보던 것처럼. 나는 눈을 돌립니다. 이번엔 그녀에게로. 그녀는 저 붉은 오로라를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눈동자는 정말로 흐릿해서. 나는.
“나는 틀렸던걸까?”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멈출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큰 소리로 말한 영향인지 그녀는 좀 놀란 표정입니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고.”
“내가 이런 모습으로 변하면 안됐던걸까? 너도 힘들텐데, 나는 그저 너한테 사랑 받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어서 이렇게 변해버렸어. 그러면서도 나는 아직도 네가 변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어. 나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니까, 네가 어느 정도 내게 의지하고 있다는 게 정말로 기뻤어. 하지만 그럼에도 더 원했던게 아닐까? 나는? 마침내 최후의 인간마저도 네 앞에서 사라진다면 네가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따악. 그녀의 딱밤이 내 이마의 정중앙에 작렬했습니다.
“아니, 내 동료들에게 너에 대해서 조금 상담했거든. 만약 그렇고 그런걸 요구해오면 어떻게 하나하고 고민하고 있었지. 그렇지만 다행이네. 전혀 변하지 않은 것 같아서.”
그녀를 나를 꼭 껴안아주었습니다. 나는 그녀가 껴안을 때 혹시 이 빌어먹을 마물의 몸이 절정에 달해버리지는 않을까 고민했지만, 그저 따스함만이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뻤습니다.
“봐,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
그녀는 나를 살며시 그녀의 몸에서 떼어놓고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그녀의 눈은 내가 언제나 보던 것과 같이 선명한 밤하늘과도 같은 검푸른색이었습니다.
나는 목이 너무 메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습니다.
“라크?”
그녀는 내 이름을 나직히 부르며 말했습니다.
“음… 그러니까… 언제부터야? 날 사랑하게 된게?”
그것에 대해서는 나도 확실히 말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를 사랑하기 시작한건 아니니까요. 그저 그녀를 눈으로 쫓던 수많은 시간이 있었고 그러던 중 내가 사랑을 하고 있구나하고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하게 자각하게 된 시점이 있다면 역시 그때겠죠. 하지만 이건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말할지 말지 우물쭈물거리자, 그녀는 내 꼬리의 끝을 잡고 쓰다듬었습니다. 순간 번개와 같은 쾌락이 내 머릿속을 덮쳤습니다. 아니, 잠깐, 이건 아닙니다. 이번 것은 너무나 급작스러워서 뇌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지만 다음 번은 아닙니다. 다음 번엔 정말로 내 존엄성이랑 이성이랑 기타등등이 죄다 끝장날 것입니다. 내 마음 속은 공포로 가득찼습니다.
“몇 번 시험해보긴 했는데, 역시 여기가 약점이구나.”
“엘님…? 평소에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겁니까…”
“꼬리가 있는 마물을 제압할 땐 이런게 더 효과적이더라고. 딱히 알고 싶어서 알게 된게 아니야. 그래서 말할거야 안할거야.”
제가 머리를 황급히 굴리자, 그녀는 다시 꼬리 끝에 손을 가져다 댔습니다.
“말할게, 말한다니까! 그러니까 그 손놀림은 그만둬!”
“생각할 시간은 안줘. 3, 2, 1.”
“서임식의 그 날.”
“그 날에 뭔 일이 있었나?”
“사랑이라는게 무슨 급작스런 계기가 생겨서 시작하는 건 아니잖아? 그냥 우연히 그 날이었을 뿐---이니까 꼬리는 제발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넌 너무 나한테 숨기는게 많아. 믿을 수 없어.”
“정말 말하고 싶지 않은데, 말하지 않으면 안될까?”
내가 반쯤 울먹이며 그렇게 부탁하자,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듯 싶더니 고개를 저었습니다..
“안돼. 전부 솔직하게 말해줘. 내가 그런다고 널 미워하거나 그럴리 없잖아. 애초에 별거 아닌 이유일게 뻔하고.”
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별님을 올려다 봤지만, 하늘은 구름이 껴서 별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건 틀렸네요.
“너랑 함께 있는 은빛의 기사를 봤을 때, 은빛의 기사가 너무 밉고 증오스러웠어. 질투하고 있었던거지. 그때서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걸 알았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 꼬리는 놔주면 안될까?”
그녀는 잠시 침묵에 잠겼습니다. 아까전보다 어둠이 훨씬 더 드리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나는 그녀의 표정을 제대로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꽤나 진지하게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꼬리를 쥔 반대편 손으로 허리춤의 검을 툭툭 두드렸습니다.
“역시 이 검은 날 위해서 만든거구나? 기쁜데?”
어째서 밝혀지고 싶지 않은 것들이 전부 밝혀지고 있는걸까요? 그것보다 꼬리는 대체 왜 놔주지 않는걸까요? 저는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꼬리를 속박 당해서 흥분하고 있는 내면의 알프를 죽이고 싶어졌습니다.
“어떻게 안거야?”
“그야 조금 이상할 정도로 나한테 딱 맞았으니까. 심증은 있었어 심증은. 물증이 없었을 뿐이지. 물론 전에는 단순한 우정의 상징이라고 생각했지만 말이야.”
“그것보다, 이런 내가 싫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질투는 누구나 하잖아? 나도 왕자님이 싫었어. 지금은 어찌되든 좋지만 말야.”
그녀는 그렇게 가볍게 넘겼지만, 나는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항변하려는 찰나, 그녀가 내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넌 내가 이대로 널 거절해줬으면 좋겠어?”
나는 말문이 막혔습니다. 확실히 그건 아닙니다만…
그녀는 우물쭈물대는 나를 끌어안고 입술을 맞췄습니다. 깊게는 아니고, 단순한 접촉일 뿐이었지만 그것으로만으로도 나는 흠뻑 젖어버렸습니다. 꼬리 끝이 말려들어가고 발가락이 휘어졌습니다. 부디, 부디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길 빌었습니다. 짧은 접촉이 끝나고 이내 내 눈엔 열띤 그녀의 얼굴이 바로 앞에 보였습니다.
“라크, 아마 네가 그대로 털난 아저씨였더라도 난 널 싫어하지 않았을거야. 물론 지금이 더 귀엽지만 말이야.”
“마지막 말 굳이 필요했어?”
하하. 그녀는 멋쩍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쓸 데 없이 기분이 좋다는 것이 날 더욱 비참하게 만듭니다.
“넌 아마 나를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람쯤으로 생각하고 있겠지만, 그건 아냐. 나도 혼자서는 그렇게나 강할 수 없어. 내가 마지막까지 변치 않고 내 의지대로 있을 수 있던 이유는 다름 아닌 너야. 그러니까 만약 네가 원했다면…”
“난 다른 건 몰라도 사랑에 타협 따윈 안해. 난 엘이 정말 좋아. 지금 그대로의 엘이 정말 좋아. 그러니까 바뀌는 건 나 하나로 충분해.”
나는 단언했습니다. 처음으로 엘을 당당하게 마주 보았습니다. 엘은 잠깐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상냥하게 웃으며 나를 다시 끌어안았습니다.
“그래, 그래서였구나. 바보녀석. 어떤지 그 날 따라 내 이상형에 대해서 집요하게 물어보더니 다 이유가 있었어.”
우리 둘은 그저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엘이 물었습니다.
“아직도 네 자신이 싫어?”
나는 이전과는 다르게 살짝 망설였지만, 그래도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습니다.
“조금은.”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하나만 꼽아서 말해줄래?”
“쉽게 포기하는 점.”
“그러네, 그건 좀 싫은걸?”
엘은 이어 말했습니다.
“그럼 같이 노력해볼까.”
내가 정말로 듣고 싶었던 말. 포기하는 것도, 그저 지금의 자신으로 만족하는 것도 아닌 말. 내가 다시 하늘을 올려다 봤을 때, 구름은 어디론가 흘러가 하늘에는 하얗고 붉은 별들이 총총히 떠있었습니다.
그 때 그저 땅 밖에 볼 수 없었던 소년은 지금 그녀와 함께 별을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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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화에는 기필코 야한걸 쓰겠어. 절대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