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세상이 잔혹하던 시절, 한 평범한 소년이 있었어.
소년은 겁쟁이였어. 상처입는 것만 두려워했던게 아냐, 상처를 보는 것 또한 두려워했지.
그가 고명한 귀족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건 다행이었어. 막내로써 귀여움 받았던 그는 별채에서 혼자만의 정원을 가꾸며 세계에서 눈을 돌릴 수 있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한 꼬질꼬질한 여자아이가 그의 정원을 방문한 건 행운이었을까, 아니면 불행이었을까?
시간이 지나 어느덧 청년이 된 소년은 그 여자아이의 존재에 당황했어. 여긴 가족들만 들어올 수 있는 장소일텐데 말이야. 담벽은 높게 치솟아 가시덩굴로 덮혀있었고 문은 굳게 닫혀있었지.
이곳저곳 피어있는 다채로운 꽃들에 마치 동화 속 세상 같다며 신나하는 여자아이에게 그는 물었어. 어떻게 여기를 들어올 수 있었냐고 말이야.
소녀는 집 뒤편을 가리키며 저쪽으로부터 들어왔다고 말했어. 청년이 별채의 뒤편으로 돌자 그곳에는 놀랄만한 광경이 있었어. 담벽에는 아주 커다란 금이 가있던거지.
청년은 그 금 안에서 어둠이 세어들어오는 것을 느꼈어. 슬픔의, 피의, 고통의, 증오의 냄새. 청년은 황급히 벽돌과 모르타르로 다시금 금을 매꾸기 시작했어. 옆에 있던 소녀도 그것을 도왔지.
벽이 다 수리되어갈 쯤에서야 그는 깨달았어. 아직 이 정원 안에 소녀가 있다는 것을 말이야. 청년은 그녀에게 물었지. 가족이 어디 살고 있는지 뭐 그런 것들 말이야. 소녀를 집으로 데려다주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가족은 없어요. 소녀는 그렇게 말했어. 그럼 집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어. 그는 문 쪽을 한번 바라보고, 이내 말았어. 이 소녀를 위해 좋은 곳을 찾아주는 것보다는 그냥 이 소녀가 여기 있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으니까.
다행히도 소녀는 착한 아이였어. 그가 뭘 하던간에 방해하지 않았고 나가고 싶다는 말도 하지 않았지. 그에게 있어서 수고스러운 점이 조금 늘었다는 것이 있지만, 어느새 그도 자신의 정원을 보고 웃어주는 소녀가 좋아졌어.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만 있을 수 있다면…
청년은 달콤한 꿈 속에서 빠져나왔어. 맘 같아서는 영원히 있고 싶었지만 꿈 속에 진정한 그녀는 없었거든. 핏덩이를 토해내고 땅바닥을 쥐어 뜯으며 일어났어. 눈 앞의 광경에 청년은 빙그래 미소지었지. 아무래도 정원 가꾸는 솜씨가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것 같아.
가시 덤불, 덩굴 식물, 독초, 인간계의 것 뿐만이 아니라 마계의 것까지 섞인 이상식물들. 마물들은 거기에 매달려 마치 곤충 표본처럼 전시되어있었어. 이것이 그녀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최선을 다 할 뿐이야.
마물의 침략 전쟁의 여파가 그 작은 정원에까지 덮쳐왔을 때, 가족을 모두 잃고 전쟁터를 해맬 때, 주신의 가호가 소녀에게 내려왔을 때… 지금껏 얼마나 절망해왔을까. 그렇기에 이런 지옥도에서도 침착할 수 있는 것이겠지. 아니라면 단순히 익숙해져버린 걸지도 몰라.
그는 자신의 몸에 달라붙어있는 살점들을 가볍게 털어냈어. 그렇게나 역겹고 두려웠던 것들은 이제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했어. 왜냐하면 이미 냄새는 그 안에 자리 잡았으니까. 아마 영원히 그는 다시 편안히 잠들지 못할거야.
그는 반쯤 무너진 성벽에 기대어 누웠어. 멍하니 끝없이 성장하고 있는 자신의 걸작품을 바라보았지. 이 작전은 그가 제안했어.
마왕의 힘만 있다면 끊임없이 태어나고 증식하는 마물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마왕의 목을 칠 수 밖에 없어. 그리고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용사 뿐이었지. 그렇지만 용사가 전선을 잠시라도 이탈하면 인류의 존망 자체가 위험한 상황이었어.
그는 인류 따윈 어찌되든 상관없었어. 그러나 그녀가 동료들을 잃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어. 사실, 그건 그도 똑같아. 검고 탁한 악취나는 세상 속에서도 건져낼만한 빛나는 것이 있었어. 그의 정원으로 들어온 소녀처럼 지금의 그에게도 소중한 동료들이 하나 둘 씩 생겼지.
그러니까 이건 희생이 아니야. 자포자기가 아니야. 반드시 나는 살아돌아가서 소중한 동료들을, 웃는 얼굴이 아름다웠던 소녀를 만날거야.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반쯤 부러진 지팡이를 힘껏 붙들었어.
마계로부터 인간계에 열린 차원문. 거기에서부터 마계의 병력은 끊임없이 쏟아져나왔어. 그렇다면 그것을 파괴하면 돼. 하지만 어떻게? 인간에게 그것을 이룰 수 있는 힘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걸?
굳이 인간이 그걸 할 필요는 없어. 그는 그렇게 생각했어. 아주 아름다운 꽃 하나를 피워올리면 되는거야. 피와 죽음을 먹고 뿌리를 뻗는 피안화를. 그들이 인간을 증오해야만하는 생명체라면, 마물을 증오해야만하는 것을 하나 만들자. 먹는 것은 마물의 힘, 마물의 살점, 뭐든지 좋아. 그들과 같아, 단지 편식하지 않을 뿐이야. 모조리 먹어치워버리자.
그는 마지막으로 씨앗을 얽매고 있었던 주박을 풀어해쳤어. 뿌리를 깊게 내려 한 때 이 땅을 붉게 물들였던 모든 것을 먹어치우려무나. 그리고 그게 그가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던 빛이였을거야.
대책은 있었어. 마종이 완전히 깨어나기 전에 도망치면 되는거였지. 하지만 게이트 가까이 접근하는 과정에서 모든 호위를 잃어버렸어. 그들과도 꽤나 친해졌는데 말이야. 홀로 남은 그는 더 이상 탈출할 방법 따윈 없었어. 그렇기에 마종의 침식 범위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종을 깨운거야.
다행히도 한 때 왕국의 성이었고, 방금까지도 마물의 병참기지로 쓰이던 곳의 지하로 숨어들 수는 있었지. 하지만 그 뿐이야. 돌아갈 방법 따윈 생각나지 않았어.
“시간은 많아. 나갈 방법 같은 건 찾아내면 돼.”
그는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했어.
첫 1년 간은 그저 사투였어. 뿌리를 뻗으려는 마종은 지하에 서식하고 있는 무언가가 달갑지 않았지. 그는 마종을 약점이 있는 생물로 만들지 않았지만 최대한 식물로써의 약점을 공격했어.
3년째, 어느 순간부터 마종은 그를 무시하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그는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어. 하지만 지하에 있는 한정된 자원으로 그건 한계였지. 천천히라도 마종을 성에서 완전히 몰아내야만 할 필요가 있었어.
7년이 지나서야 그는 마종을 완전히 성에서 몰아낼 수 있었어. 이것은 그가 강해서도, 마종이 약해서도 아니야. 커질대로 커진 마종은 그에게 집중할 여유가 없었으니까.
10년, 마종의 성장이 멈추었어. 마종의 먹이인 질좋은 마력을 공급해주던 게이트가 파괴된 걸거야. 게이트 자체는 마종이 집어삼켰을 테니까 파괴 원인으로는 술자의 사망 밖에 없겠지. 마계로부터 인간계로의 게이트를 연 것은 마왕. 간만에 그는 웃었어. 인간이 이겼구나. 그녀가 해냈구나. 이제 나만 빠져나가면 돼.
15, 마종은 이제 불쾌한 것을 제거하기로 했어. 기생충. 계속해서 자신의 살을 파먹는 것. 물론 마종의 전체 크기에 비해서 매우 작은 양이지만 마종은 그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것 같아. 어느새 그는 마종으로부터 의지를 느끼고 있었어. 부디 마종이 인류의, 그녀의 방해물이 되지 않기를 빌 뿐이야.
도망가고 싸우고 쫓고 도망가고 싸우고 쫓고. 나는 충분히 노력했어. 미안해. 나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어. 정말로 다시 한 번 널 보고 싶었는데…
그 지역에 사는 인간들은 그 숲을 붉은 숲이라고 불러. 동물들도 무서워해서 가까이 가지 않는 곳. 그 숲은 마치 고치마냥 가시덩굴로 외부로부터의 모든 침입을 방어하고 있어. 전전대 마왕 시절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저 숲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 변하지 않은채로 전승되어왔지. 현자가 인간을 위해 만든 최후의 보루. 그리고 그 보루를 결국 뚫지 못한 용사의 이야기. 현자를 기리는 시체 없는 묘만이 숲 앞에 남아있을 뿐이야.
신마왕이 즉위하며 마물의 모든 개념이 바뀌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숲만은 바뀌지 않아. 그것이 아무리 마를 잡아먹는 마라고 할지라도 마왕의 규칙을 따를 수 밖에 없을텐데, 참 이상한 일이지.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
그 이유는 숲의 일부가 되어버린 현자가 고통스러운 꿈 속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기 때문이란거야. 이 이야기를 들은 마물들은 모두 이렇게 말해.
“악몽보다는 이 행복한 현실이 낫지 않나요?”
드물게 나도 이 의견에 동의해. 하지만 그를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야. 아무리 인간이 바뀐다고해도 그 근본적인 본질은 변하지 않으니까.
아마도 그는 자신만의 정원에 갇혀있었던 시절처럼 바깥에서 눈을 돌리고 있는 것 뿐이야. 수백년이 지나서 더 이상 소중했던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세계를 보고 싶지 않다는 거겠지.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현실보다 아직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끔찍한 악몽이 더 낫다는거야.
그러니 나는 이 추측이 사실이 아니기를 기원하고 있어. 이건 그에게 있어서 너무나 잔혹한 이야기일 테니까.
부디 그에게 구원이 있기를.
-아니마. S. 니움-
저서 [세계의 법칙의 예외에 대하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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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 걸 써야하는데 성욕이 없어서 못쓰고 있습니다...
절대 연중한게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