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림표--




"....여기 계셨습니까."


팔찌가 강렬하게 빛을 내는 자작나무숲 가장자리에서, 게르트는 팔을 내리고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Anar caluva tielyanna, ontari."

(...그대의 길에 태양이 빛나기를, 어머니.)


갑옷을 벗어두고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걸친 그녀의 모습은, 게르트가 기억하던 페나르핀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아...아아...."


게르트를 인지한 순간, 페나르핀은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게...르...트..."


두근.두근.두근.


게르트의 특이한 눈동자를 바라보자, 그녀의 심장이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결국...와버렸구나..."


너무나도 보고싶었지만, 동시에 보고싶지 않았던 그의 등장에 페나르핀은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듯 고개를 숙였다.


"그 갑갑한 방에 계속 계시도록 내버려둘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페나르핀의 주변을 떠돌며 그녀를 모욕하던 과거로부터의 목소리들이 사라지고, 오직 게르트의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그나저나, 조금...마르셨군요. 전보다 더."


게르트는 자신이 어릴적에 배웠던 엘프들의 말을 사용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이 엄동설한에 그렇게 얇게 입고 돌아다니시면 쓰러집니다. 어머니."


요근래 쓰질 않아 발음이 어눌하면 어쩌나 걱정했던 게르트였지만, 괜한 걱정을 했다는듯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읏...!"


게르트는 굳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다가왔다.


"...이렇게 말을 나누는것도 정말 오랫만이니, 여러가지 여쭙고 싶은게 있긴 하지만... 그 전에..."


눈으로 뒤덮힌 차가운 숲의 풍경은 그에게 마치 페나르핀의 곁을 떠났을때로 되돌아간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것만 같았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겠습니다."


야츠후사가 든 자루를 꽉 쥐고서, 게르트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눈 앞의 엘프를 바라봤다.


"...어머니. 제가 숲을 떠난 그 날을 기억하십니까?"


게르트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페나르핀의 혼을 휘감고있던 악령이 반응했다.


"윽....!"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저 멀리서 다가오는 게르트의 발소리가 한걸음, 한걸음 들려올때마다 페나르핀의 고동이 커져갔다.


그날, 페나르핀의 잘못으로 인해 벌어진 서로의 반목의 결말이 그녀의 뇌리에 스쳤다.


땅에 꽂힌 검과,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 그리고 가슴에 구멍이 뚫린것만 같은 고통.


빼앗기지 않기 위해 휘두른 검이 그대로 자신에게 되돌아왔던 그 기억은, 그녀가 죽어서도 잊지 못할 아픔이었다.


스쳐지나가는 3년 전의 기억을 되새길수록, 그녀의 심장이 강하게 고동쳤다. 


그리고 심장이 강하게 고동칠수록, 그것에 반응하듯 그녀의 혼에 휘감긴 악령이 반응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날, 어머니는 제게 일방적으로 패배하기 위해서.....저를 내보낼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 일방적인 승리를 가져다 주셨죠."


게르트는 오른손에 쥔 자루를 그녀의 앞에 휙 던지곤 허리춤에 메어둔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


"숲을 떠나고 나서도, 이렇게 눈이 오는 날이면 항상 그날을 떠올리게 되더군요."


게르트가 던진 자루가 허공에서 풀리며 땅에 떨어지자, 안에 들어있던 야츠후사의 검자루가 툭 튀어나왔다.


"저는 그 날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게르트는 왼손을 꽉 쥐고 엘레메실을 뽑아냈다.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으로 단련된 그 흑색의 도신이 사방이 새하얀 숲 속에서 이질적인 존재감을 뽐내는것만 같았다.


엘레메실을 뽑아든 게르트가 엘레메실을 쥔 채 그녀를 노려봤다.


그가 가쁜 숨을 내쉬는 페나르핀을 결의에 찬 얼굴로 바라보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니 전 제 나름대로,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읏!"


페나르핀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게르트가 한걸음 다가오면, 그녀도 한걸음 물러나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또 도망치시는겁니까? 그날처럼?"


그가 다가올수록, 페나르핀의 고동이 커졌다.


"...다가오지 말거라!"


"그럴수는 없습니다."


"나는 더이상...너와 싸우고싶지 않단말이다...!"


"우리의 일로 인해 많은 이들이 피해를 봤습니다. 이제 끝을 봐야합니다."


"이...이미 끝난 일이지 않느냐...!"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전부터 계속, 끝나지 않았습니다."


두사람은 열 걸음 떨어진 간격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나무가 드물게 선 숲의 가장자리에 대치한 두사람의 사이엔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게르트는 잠시 그녀를 응시하더니, 어느샌가 자신의 발치에 굴러다니는 야츠후사를 쥐었다.


"...저는 어머니가 누굴 베어죽인들 신경쓰지 않습니다. 저 또한 이 손으로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으니까요."


손에 쥔 야츠후사를 다시금 그녀의 발치에 던진 게르트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같습니다. 어머니의 손에 피가 묻어있든 말든...저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두근.두근.두근.두근.


"...그러니 부디, 제 부탁을 들어주시겠습니까."


게르트의 마지막 한마디가 끝난 순간, 페나르핀의 혼을 휘감고있던 악령이 꿈틀거리며 격렬하게 반응했다.


"....윽!?"


'...부디...내 부탁을 들어주겠느냐...?'


게르트의 말을 시작으로, 페나르핀의 뇌리에 들어본적 없는 남성의 목소리가 흘려들어왔다.


"아윽...!!"


마치 그의 존재에 반응하듯, 페나르핀의 오른팔에 달라붙어 불타는 불꽃이 일렁이며 점점 커져갔다.


"으윽...큭...아윽...!"


오른팔에 휘감겨있던 작은 불덩이가 점점 커지며, 순식간에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 페나르핀이 온 몸을 태우듯 달라붙었다.


"으으으으으...!!"


이미 악령의 마력으로 인해 변화된 육체는 악령의 움직임에 동조하듯 맹렬하게 타오르는 푸른 화염의 겉불에서, 불길한 검붉은 색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페나르핀의 영혼에 휘감긴 악령에게 이성은 존재치 않았다.


본래 지니고 있던 마력과 생전의 기억만을 남긴 채로, 페나르핀의 영혼에 달라붙어 그녀에게 자신의 미련을 보여줄 뿐이었다.


"이...이건...?!"


원념만을 남긴 채 사라져버린 망자의 기억이 그녀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큭....!"


당장이라도 달려가 어머니에게 일어나는 이상현상을 멈추고픈 게르트였지만, 그녀의 몸에 붙은 불꽃이 그를 위협하듯 타올랐다.


"큭....대체...이건 뭐야..!?"


페나르핀의 몸에 둘러진 불꽃은 열기가 아닌 냉기를 뿜어내며 일렁거렸다.


"...어머니!!"


점점 거세지는 화염과, 밀려들어오는 악령의 기억이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페나르핀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으윽....으아아아아!!!"


페나르핀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마치 뜨거운 기름이 몸 안으로 흘러들어오며 심장을 태우는것만 같은 감각이 그녀의 뇌에 스며들며,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기억들이 스쳐지나갔다.


주군을 사랑했고, 또 지키지 못했던 악령의 마지막 최후가 마치 파편처럼 페나르핀의 머리에 박혀 재생되기 시작했다.


피와 불, 그리고 품에 안긴 검은 머리의 남성.


그 조각난 기억 속의 주인공은, 죽어가는 남성을 안은 채 가슴이 찢어지는듯한 고통에 몸부림치며 미친듯이 울부짖었다.


굵은 눈물방울이 남성의 볼에 하나 둘 떨어지며 토해내는 피와 함께 흘러내렸다.


악령은 품에 안긴 남성의 얼굴을 만지며 어쩔 줄 몰라하고있었다.


그녀가 잠시 빈틈을 보인 사이 날아온 화살이 남성의 폐에 박혀 피를 쏟아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성은 힘없이 피를 토해내며 멍한 눈으로 악령의 볼을 어루만졌다.


"...울지 말거라."


남성은 옅은 웃음을 지으며 악령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너의 주군으로써...마지막으로 명령을 내리겠다..."


악령을 향해 미소를 지어보이는 남성을 보며, 악령은 마음이 무너지는것만 같은 고통을 느꼈다.


"...몸 안에 피가 차오르는게 느껴지는걸 보니...쿨럭. 나는 이제 오래 살지 못할게다. 그러니..."


안돼. 제발. 하지마. 그런 부탁 하지마. 제발 살아줘. 죽지말아줘.


그녀는 사모하는 주군에게 애원하듯 말했지만, 남성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악령의 손에 검을 쥐여주었다.


"그러니 부디...내 부탁을 들어주겠느냐...?"


울부짖는 악령의 주변을 빠르게 에워싼 적군들이 검과 창을 내세우며 고함을 질렀다.


슬퍼할 시간마저도 주지않겠다는듯, 휘둘러진 검과 창이 악령과 품에 안긴 남성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렇게, 악령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 멀어져만 가는 의식 속에서도 남성을 바라보다 마지막 숨을 내뱉었다.


"허억...!"


그렇게 악령의 마지막을 본 페나르핀은 눈물을 쏟아냈다.


"...으흑...윽...으읏...!"


마치 파도처럼 들이닥치는 슬픔으로 인해, 그녀의 눈에서 피처럼 뜨거운 눈물이 눈 위로 떨어졌다.


"이건...대체.....?!"


페나르핀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머리를 잡았다.


"내...안에....무언가가...."


마치 온전한 책에 찢어진 다른 책의 페이지가 사이사이에 끼워진듯,  몸에 꽂혀진 검과 창의 감촉과, 죽어가는 남성의 얼굴이 마치 어제 일인 듯 페나르핀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페나르핀은 혼란스러운듯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게...게르트...."


눈물을 흘리며 게르트를 바라보는 페나르핀을 향해 그가 걱정스러운듯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머니!"


눈이 밟히는 소리와 함께 게르트가 다가와 페나르핀의 어깨를 잡았다.


페나르핀은 기억 속의 남자의 모습과 겹쳐지는 게르트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어머니! 괜찮으십니까!?"


창백해진 얼굴에 흐르는 식은땀과 미열이 올라온듯 붉어진 볼, 거친 숨과 고통스러운듯 구겨진 미간.


딱 보기에도, 그녀는 상태가 좋지못해보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게르트는 검을 집어넣고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이러다 쓰러지시겠군. 젠장.'


힘겹게 숨을 고르는 그녀를 강제로 안고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페나르핀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공의 명을...받들겠나이다..."


발치에 떨어진 야츠후사를 쏜살같은 속도로 뽑아낸 페나르핀이, 게르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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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미안합니다 몬붕쿤들


현생사느라 바빠서 늦어버렸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