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란의 질주가 어떻게 끝났는지 최원봉은 기억하지 못했다. 최원봉이 정신을 차렸을 때에 그는 이미 자신의 집에 있었고, 김연천이 보낸 사람들이 그를 간호하고 지키고 있었다.

 김연천이 보내준 사람들의 말로는 최원봉이 산길을 달려 그들 앞에 도달하자 그대로 쓰러져 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내리 사흘을 잠만 잤다고 한다.

 사흘 동안 잠만 잤다면 몸이 찌뿌듯하고 여기저기가 쑤셔야하건만 최원봉은 지독하게 허기진 것 외에는 그리 큰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배고픔만 제외한다면 몸은 가뿐하고 알 수 없는 기운이 솟아났다. 표범 한 마리가 달려들어도 능히 때려잡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게 구슬을 삼킨 효과인가’라고 생각하면서 최원봉은 사흘 만에 배를 채웠다. 가마솥 하나 분량의 밥을 먹고 최원봉은 다시 골아 떨어졌다. 이번엔 내리 이틀을 잠으로 보냈다.

 이틀 뒤 잠에서 깨어난 최원봉은 밥 두 공기를 먹고 자신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구슬을 삼킨 지 닷새 밖에 되지 않았건만 뼈마디가 다 드러나던 몸은 적당히 살이 올랐고, 병색이 완연하던 얼굴도 건강하던 때의 빛을 찾아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족쇄를 차고 있다가 그 족쇄를 풀어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최원봉은 김연천이 보내준 사람들에게 자신이 잠들어 있을 때 누군가가 찾아오지 않았냐고 물었다. 대답을 들어보니 전부 수 년 동안 얼굴을 보아왔던 동네 사람들이었다. 구미호라고 의심되는 사람은 없었다.

 최원봉은 사흘을 더 기다려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구미호는 나타날 기미가 없었다. 그래서 최원봉은 무사히 해결되었다는 편지를 써서 김연천이 보내준 사람들에게 쥐어주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로부터 열이틀 후 최원봉은 구미호를 다시 만났다.



 김연천은 손을 들어 최원봉의 말을 끊었다.

 “잠깐. 그러면 자네가 5년 전에 무사히 해결했다고 기별을 줬던 게 거짓이었다는 겐가?”

 “음? 그러고 보니 그렇구먼?”

 그렇게 말하고 최원봉은 껄껄 웃었다. 김연천은 성을 내었다.

 “웃지 말게! 남의 목숨도 아니고 자기 목숨이 달린 일인데 신중하지 못하게 행동해서 어쩌자는 건가!”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지 않은가. 이미 지나간 일 일세. 신경 쓰지 말게나.”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해도 잘못행동 한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김연천은 잔소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남에게 잔소리를 들으면 기분 나빠질 법 하건만 최원봉은 허허 웃으며 김연천의 잔소리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친구가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잔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참동안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던 잔소리가 점점 기세가 줄더니 가뭄의 실개천마냥 뚝 끊기자 최원봉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계속 이야기해도 되겠나?”

 “……계속 하게.”
 

 
 최원봉은 구미호와 밀회를 나누던 장소에 도착했다. 옆 고을의 지인이 혼례를 올린다는 소식을 듣고 겸사겸사 들린 것이었다. 5년 후 친구의 말마따나 신중하지 못한 행동이었으나 최원봉도 아무런 대책 없이 온 것은 아니었다.

 가죽을 덧댄 종이갑옷을 두루마기 속에 입고, 환도와 활 그리고 투석구(投石具)까지 챙겨왔다. 이대로 혼례식장에 간다면 ‘사냥하러 온 건가, 축하하러 온 건가?’라는 핀잔을 듣기에 충분한 모습이었으나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핀잔 몇 마디 듣는 게 더 나았다.

 환도 자루에 손을 얹은 채 최원봉은 밀회장소를 둘러보았다. 구미호가 있었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최원봉은 왠지 입맛이 썼다. 불편한 감정이 가슴 한 편에서 솟아났다. 불안의 원흉이 아직 남아있어서 그렇다기보다는……섭섭했다.

 최원봉은 한탄했다.

 “어허, 내 단단히 홀렸군.”

 자신을 해하려 한 구미호를 다시 만나고 싶어 하다니. 홀려서 그렇다는 말 외에는 딱히 설명할 말이 없었다.

 최원봉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잡스러운 감정을 털어내었다. 모질게 마음먹어야했다. 이대로 그 구미호가 계속 살아있다면 필히 인간을 해칠 것이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기필코……

 저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최원봉의 정신을 일깨웠다. 최원봉은 고개를 들어 해의 위치를 살폈다. 시간은 정오에서 약간 지나있었다. 혼례식에 갔다가 다시 돌아올 것을 생각하면 이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최원봉은 다시 발걸음을 놀렸다.

 

 걸으면 걸을수록 점점 더 개 짖는 소리가 가까워진다. 컹컹대고 으르렁거리는 것을 들어보니 단순히 자기들끼리 놀면서 그러는 것 같지는 않다. 사냥감 하나를 둘러싸고 을러대고 있는 것이리라.

 최원봉은 활에 시위를 걸고 화살을 시위에 메겼다. 들개가 사냥감에 정신이 팔려있다곤 하나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최원봉은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면서 그리고 최대한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들개 으르는 소리가 점점 커지다가 다시 점점 작아진다. 최대의 고비는 넘긴 것이다. 그러나 아직 안심하기는 일렀다. 확실하게 거리를 벌릴 때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최원봉은 두 귀는 열어두고 눈으로 사방을 살피며 계속 나아갔다. 그 덕분에 최원봉은 그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최원봉은 길에서 조금 벗어난 수풀에 알록달록한 것이 떨어져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잠시 고민 후에 최원봉은 그것에 다가갔다. 

 짝을 잃은 꽃신이었다. 가죽으로 만들고 곱게 수를 놓은 것을 보니 저잣거리에서 돈푼 꽤나 줘야 살 수 있을 물건이었다. 꽃신은 흙이 잔뜩 묻고 여기저기 상처가 나 있었다. 하지만 더러운 것은 표면 뿐. 속은 비교적 깨끗한 것을 보아하니 여기 버려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리라.

 다시 들개 짖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최원봉은 들개 짖는 소리와 버려진 꽃신을 연관시켜보았다. 엄청 불길한 결과가 도출되었다. 이대로 갔다간 남은 평생 동안 밤잠을 설칠 것 같았다.

 최원봉은 조심스럽게 한숨을 내쉬고 들개 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오래지 않아 최원봉은 들개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최원봉은 가까운 나무를 타고 올라간 뒤 사태를 살폈다. 들개의 수는 대략 열. 놈들은 나무 하나를 둘러싸 나무 윗부분을 보며 으르렁 컹컹 거리고 있었다. 

 최원봉은 고개를 들어 들개가 둘러싸고 있는 나무윗부분을 보았다. 최원봉의 불길한 예상이 맞았다.

 한 여인이 나무 위에서 나무줄기를 얼싸안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본디 고았을 얼굴은 흙먼지로 더럽혀져있었고, 머리는 산발, 옷은 여기저기가 찢어져 그 속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음?”

 자세히 살펴보니 낯이 익었다. 그러나 여인이 고개를 숙여 땅을 바라보고 있기에 확신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최원봉은 여인이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이보시오, 낭자!”

 여인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개를 들었다. 어디서 들려오는지 감을 못 잡고 시선이 여기저기로 헤매었다. 최원봉은 여인을 도와주었다.

 “여기요!”

 최원봉을 발견한 들개 몇 놈이 최원봉이 있는 나무쪽으로 다가오기는 했으나 최원봉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여인의 시선이 최원봉이 있는 쪽으로 고정되었다. 이번에도 최원봉의 예상이 맞았다. 최원봉이 너무나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여인은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나리, 살려주시오.”

 여인의 태도에 최원봉은 크게 웃었다.

 “웃지만 말고 살려주시오. 여기서 꼬박 하루를 보냈소.”

 웃음을 그치고 최원봉은 여인을 향해 외쳤다.

 “구미호가 들개에게 쫓겨 벌벌 떠는 꼴이 참으로 우습구나!”

 여인은 당황했다.

 “구, 구미호라니! 소녀는 저 아랫 고을의……”

 최원봉은 여인의 말을 끊었다.

 “반 년 동안 밀회를 하던 내 얼굴을 보름 못 보았다고 벌써 잊었느냐?”

 여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최원봉의 얼굴을 살폈다. 잠시 후 여인의 표정이 사납게 변했다.

 “너는!”

 최원봉은 다시 크게 웃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이런 곳, 이런 상황에서 너를 만나니 참으로 유쾌하구나!”

 구미호는 나무를 꼬옥 안고 악을 써댔다.

 “이 놈! 네가 내 구슬을 삼켜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지 않았느냐! 내가 무사히 내려가게 되면 네 놈의 배를 갈라……”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뭔가가 나무에 박히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구미호는 자신의 손에서 한 뼘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화살이 나타나자 깜짝 놀라 버둥거렸다. 하마터면 나무에서 떨어질 뻔했다.

 “내 배를 갈라서 어쩌고 어쩐다?”

 “이 노오오오옴! 선비라는 자가 나무에 무방비하게 매달린 아녀자를 활로 위협하는 것이더냐!”

 최원봉은 다시 화살을 쏘았다. 이번엔 구미호의 머리에서 반 뼘 정도 떨어진 곳에 화살이 박혔다.

 “사내를 홀려 정기를 빨아먹던 요물이 도리를 말하는 것이냐? 참으로 가증스럽구나!”

 최원봉은 시위에 다시 화살을 먹였다. 그리고 구미호를 겨누며 외쳤다.

 “계속 입으로 방귀를 껴 보거라! 내 요즘 웃음이 메말라 고민이었던 참인데, 너의 입방귀를 들으니 절로 웃음이 나는구나!”

 구미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이상 말했다간 다음번엔 화살이 자신의 몸에 날아와 박힐 것 같았다. 아니 그냥 가만히 있어도 화살이 날아와 박힐 것이다.

 최원봉에겐 화살 한 대만 쏘아도 원한을 갚고, 들개에게 원수의 시체를 미끼로 던져주어 자신이 살 방도가 생기는 것이다. 괜히 화살로 들개를 전부 쏴 죽이는 것보다 그 쪽이 더 쉬웠다.

 구미호는 머리를 굴려 자신이 살 방도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최원봉에게 구슬을 빼앗겨 요력은 거의 다 사라져버렸고, 요력이 없는 신체는 인간 아녀자와 그리 큰 차이가 없었다.

 구미호는 자신의 처지가 참으로 처량했다. 구미호는 절로 나오는 눈물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다.

 “살려주세요.”

 최원봉은 시위를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