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니다. 좀 불안해서... 말이죠."

정유현은 눈 앞의 여인을 힐끔거리며 꾸역꾸역 대답을 쥐어짜냈다. 여인은 너무 아름다운 모습이라 보는 게 자기가 쳐다보는 것조차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붉은 눈, 푸른 피부, 오똑한 코에 도톰한 입술, 정갈하게 묶은 긴 검은색 머리카락,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를 비롯한 잘 빠진 몸까지...

절로 몸 한 구석에 힘이 들어가려 하는 중이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도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를 내기에서 패배시키려고 계약에 명시된 범위 내에서 온갖 작업이랑 유혹을 하긴 했지만, 어쨌든 계약 내용을 벗어나진 않았어요."

사마엘은 안 그래도 환상적인 비율의 몸매에 쫙 달라붙는 여성용 정장을 빼 입고 있었다. 자기 딴엔 격식 차린다고 입은 건데, 계약 예정자가 부담스러워하는 걸 보니 스스로도 잘못됐다고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마지막엔 신이 개입해서 악마를 쫓아내지 않았나요?"

"그건 부차적인 이야기죠. 어찌됐건 간에 악마는 끝까지 계약 안 바꿨으니까요. 게다가 그 작품, 당신네 인간들이 쓴 거잖아요. 당연히 인간이 이겼다고 써 있겠죠. 저도 인간들 문화사는 좀 끄적거려 봤으니까."

그녀는 마계가 지구와 연결되고, 외교 사절단과의 회담에서 한 수행원이 전해준 파우스트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작품을 읽으며 의외로 악마들도 무작정 악한 것만은 아닌 계약에 묶인 존재라는 묘사가 마음에 들어, 그것을 이용해 이 지구에 세력을 넓히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 좋아요. 서명하겠습니다."

정유현은 이제 더 물러날 곳도 없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거액의 빚을 지게 되었지만 상속 포기로 벗어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빈털터리가 된 상황. 아버지는 자살, 어머니는 사고사.

친척들은 아예 우리 가족과 연락을 끊은 상태. 취업도 안 되고, 진짜 굶어죽겠다 싶어 무작정 돌다가 이 곳까지 흘러들어 온 것이다.

"잠깐.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이거 절대로 파기 못 하는 계약인데, 정말로 이행할 거에요?"

"... 네."

상투적인 확인 절차. 이렇게 마지막으로 고객의 의사를 묻지 않는다면 나중에 문제 될 소지가 다분했으니, 녹음은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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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정유현과 사마엘 사이의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사마엘이 손가락을 튕기자, 계약서가 공중에 붕 뜨고 불타는 액자가 허공에서 나타나더니 계약서가 액자 안에 봉해졌다.

"122일이야. 유현 군. 4개월이지. 만약 마계에서 122일을 우리 회사 직원들의 육탄공세에서 버텨내어 동정을 지켜내는 데에 성공한다면,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주고 평생 먹고 살 걱정이 없을 정도의 거액이 주어질 거야.

허나, 버티지 못한다면, 내게 영원히 그 일신이 전속되는 거고. 계약 조건에 따라 버티는 동안 숙식은 섭섭하지 않게 제공할게. 마계 내에서 이동의 자유도 보장하고."

사마엘은 고급스런 모래시계를 유현의 눈 앞에서 뒤집어 보이며 불타는 석탄같이 빨간 눈을 반짝였다.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