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였을까?
나는 무얼 좋아했었고, 누구를 좋아했었을까?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내 목소리는 어땠을까?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좋아.
누군가를 따라하기만 해도 사랑받을 수 있으니까.



태어날 때부터 머리칼이 나 있었고, 이빨이 자라나 있던 나는 몹시 불길하다 여겨져 부모에게 버림받았다.

게다가 머리칼이 새하얀 색이었고, 이빨은 유독 송곳니가 날카로웠던 탓에 인간이 아닌 괴물이라 매도당했으며

눈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녹색 빛을 띄기 시작했다.



모두가 나를 싫어하고 미워했다.
나는 평범하지 않았으니까.
보통 사람들과는 모습이 달랐으니까.



그랬던 내가 어떤 낡은 소설책을 한 권 주웠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마을 서당 너머로 띄엄띄엄 글을 배웠던 나는 그 소설책을 어설프게나마 읽어낼 수 있었고, 그 내용에 푹 빠졌다.

소설 속 영웅이 온갖 난관을 해쳐내고 사랑하는 사람을 구해내고, 모두에게 인정받아 성공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일종의 대리만족을 했던 것 같다.

책을 덮으면 돌에 맞아 멍든 팔다리와 저주받은 흰 머리칼과 입 안 날카로운 송곳니가 느껴져 나는 그것들을 잊기 위해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 내용을 모조리 외우고 등장인물들의 말투, 감정까지 모조리 흉내낼 수 있을 정도로 읽었다.



그러다 찾아낸 나의 재능은, 사람의 목소리나 생물, 물건의 소리를 몹시 잘 흉내낸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소설을 소리내어 읽으며 그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를 흉내내었다.

나중에 알기로는 내가 숨어서 책을 읽던 곳을 지나던 상인 하나가 내가 소설 속 도적의 대사를 읽는 동안 겁에 질려 그 자리에 서서 바들바들 떨었다고 한다.

진짜로 도적이 나타난 줄 알았다고 말이다.



그래, 내게는 사람의 소리, 모든 동물들의 소리, 모든 물건들의 소리를 똑같이 따라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재주를 이용해 먹고 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내 머리칼과 눈, 송곳니를 볼 수 없도록 가느다란 밧줄을 엮어 흰 털옷을 만들고, 버려진 붉은 사자탈을 뒤집어썼다.

나는 마을을 순회하며 소설을 소리내어 읽어 돈을 버는 전기수가 되었다.



내가 따라하지 못하는 소설 속 인물, 영웅, 악당은 없었다.

내가 옷을 입고 가면을 쓴 채로 대사를 치며 연기를 하면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다들 벌벌 떨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칼이 부딪치는 소리를 입으로 내고, 동시에 사람들이 싸우는 소리를 외쳐대면 진짜로 칼부림이 난 줄 알고 포졸들이 뛰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절묘한 곳에서 이야기를 끊으면 사람들은 이야기를 마저 들으려고 돈을 냈다.

한번은 내가 너무 실감나게 악당 연기를 하는 바람에 흥분한 관객에게 칼을 맞을 뻔도 했다.

그 정도로 나의 흉내와 연기는 완벽했던 것이다.



전기수 일을 하기 시작하자 끼니를 굶는 일은 없어졌다.

내가 좋아하는 산딸기도 시장에서 사서 듬뿍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 보다도 더 좋은 점이 있었으니, 바로 연기를 하며 나의 비참한 모습과 처지를 잊을 수 있었다는 거다.

백발의 녹색 눈 괴물이라도 탈과 옷을 뒤집어쓰고 연기를 하면 소설 속 인물이 될 수 있었고,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연기를 하는 그 동안만큼은 나는 흉물이 아닌 주목받는 존재였다.




그러던 어느날, 내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어떤 바닷가 근처 마을을 돌던 중, 관객 틈에 섞여있던 내 또래의 남자아이.

그 남자애는 내 연기에 푹 빠져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잘생긴 얼굴에 나는 그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나는 용기를 내어 그 아이에게 고백했으나,
그 결과는 뭐... 뻔하지 않은가.

내가 가면과 탈을 벗고 내 모습을 드러내자 남자애는 경악하며 도망갔다.

내 흰 머리칼과 송곳니, 녹색 눈은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흘러내리는 실연의 눈물 속에 부숴져갔다.




그런데 언제인가, 그 남자애가 내게 다시 찾아왔다.

그것도 눈물로 젖은 슬픈 얼굴로 말이다.





"내 연인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고 말았다.

그 사람의 목소리를 다시 한번만 듣고 싶어.

너는 할 수 있잖아. 모든 소리를 흉내낼 수 있잖아.

그 사람의 목소리를 한번만 다시 들려줘. 부탁이야."





그 말을 들은 내 눈에는 눈물이 맺혔고 손발은 수치심으로 바들바들 떨렸다.

나는 그 죽은 여자의 대체물밖에 되지 않는가.

이 남자는 내 연심을 이용해 자신의 마음만을 채우려 하는가.



그 여자의 목소리는 알고 있었다.



나를 찬 후에도 그 남자는 내 연기를 보러 그 연인과 함께 내 연기판에 자주 찾아왔으니까 말이다.

관객들 사이에서 소설 속 인물 흉내를 내는 나를 보고 꺄르르 웃던 그 가증스러운 얼굴과, 그런 여자를 흐뭇하게 쳐다보던 그 남자.



슬프게도 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

왜냐면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내 고백을 걷어찬 후에도 나를 보며 웃기 위해 연인과 함께 나를 찾아와 나를 조롱한 그를,

죽은 연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내 사랑을 이용하려 드는 그를 나는 한심하게도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다.

한심하게도... 한심하게도...




내가 나의 모습이 아닌, 흰 옷과 붉은 탈을 뒤집어 쓴 채로, 다른 이의 목소리를 흉내낼 때 사람들은 나에게 사랑을 주었다.

그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 모습일 때는 사랑받을 수 없었다.

나는 그의 죽은 연인을 흉내내고 나서야 그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연인의 목소리를 흉내내는 나를 끌어안고 울었다.

내 흰 털옷 자락을 잡아끌며 내가 그의 연인인 것 마냥 끌어안았다.




그 때 내 안의 뭔가가 산산조각났다.





나는 사랑받고, 주목받는 것이 좋았다.

나는 나를 버렸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도 다른 사람의 것으로 채우고

내가 싫어하는 것도 다른 사람의 것으로 채웠다.

내 원래 목소리도, 좋아하던 음식도 모두 잊어버렸다.




내 마음 속에 나는 없어졌다.




몇 주 뒤, 그 남자는 푸른 바닷물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이유는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




언제부터일까.

이 털옷이 내 몸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게 된 것은?

대체 언제부터일까.

내가 마을에 내려가지 않고 산 속에서 살게 된 것은?

그리고 내 머리 위에 짐승의 귀가 삐죽 튀어나오게 된 것은?




나는 산 속에 찾아든 이들이 그리워하는 것들을 흉내내었다.

죽은 자식, 죽은 연인을 흉내내고 흉내내었다.

그들은 내 털옷을 들춰 내 정체를 확인하는 것보다 그들이 그리워하는 목소리를 다시 한번 듣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렇게 나는 나를 죽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되었다.






흉내쟁이. 흉내쟁이. 자기 것이라곤 없는 따라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