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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쯤 전까지만 해도 미약하게나마 움직이던 몬붕의 삶, 주로 행보관을 피해 다니는 방향으로 움직이던 그 삶은 이제 완전히 그 방향을 잃어버렸다. 복학을 하기도 애매한 시기에, 무어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만만한 게 책이었다. 슈린은 때로는 헌책방, 때로는 서점에서 제 입맛대로 책을 골라잡아 왔다. 그러던 중에 오늘의 책은 제목부터 세로로 쓰여 있는, 늙은이 냄새가 풀풀 풍기는 《마물신화총론》이었다. 

글이 세로로 쓰인 책은 펴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슈린에게는 글이 세로로 쓰였든 가로로 쓰였든, 어느 말로 쓰였든 일절 상관이 없었겠지만 몬붕에게는 아니었다. 

   

“책에서 아저씨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취향이 그쪽이야?”

   

몬붕은 페이지를 한 오십 쪽씩 넘겼다. 거의 끝부분에 다다르자 책에 끼워 놓은 종이가 떨어졌다. 이 책이 수십 년 잠들어 있었을 헌책방의 누군가가 끼워 놓았다가 잊어버린 낙서였다. 슈린은 몬붕이 그 부분을 읽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유치한 얘기를 왜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보고 있어?”

“유치해?”

“그러면, 지금 이게 진지하다는 거야?”

   

슈린은 기껏 골라 온 책을 외면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오래된 책이 싫은 건 자기도 매한가지였으나, 그 내용을 보고 ‘가성비 좋은 식품’으로서 골랐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덧붙였다. 잠깐의 실랑이 끝에 몬붕은 독서의 자유를, 동시에 독서하지 않을 자유도 보장받았다. 표정으로 짐작하건대, 슈린은 며칠 내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페이지를 다 집어먹어서 없애 버릴 심산이 분명했다. 

   

어디 그나마 읽을 만한 부분이 없나, 좀 사납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택배라도 시켰어?”

   

몬붕이 대강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가는 그 짧은 찰나에도 문짝은 거세게 울렸다. 택배가 저렇게 두들겨 댈 리는 없을 테였고, 간밤에 두 사람이 뒹굴면서 냈던 소리에 짜증이 났을 이웃이었을까. 이번에는 뭐라고 한소리를 할까.

   

“도와줘요!”

   

현관으로 다가간 제 인기척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다급한 목소리에, 몬붕은 몇 발 남지 않은 걸음을 재촉하고는 문을 열었다. 문 밖의 손님은 몬붕이 무어라 한 마디를 꺼내기도 전에 열린 문틈을 밀고 들어왔다. 다르게 말하자면 몬붕보다도 더 열심히 문을 열어젖히고 쳐들어오는 것 같았다. 몬붕의 눈에 들어온 것은 찬란한 머리칼과 그리고…길고 긴 바디. 비늘로 뒤덮인 긴 하체는 영락없는 ‘라미아의 아이’의 모습이었다. 

   

“하이고.”

   

아직까지 아무렇게나 나자빠져 있던 슈린도 곁눈질로 훑어보던 책을 내팽개치고 파랗게 질린 얼굴의 손님을 받았다. 손님은 슈린을 꽉 끌어안고는 양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도와줘…도와줘요.”

“그, 뭘 어떻게, 도와 드리면, 되겠습니까?”

   

슈린은 제 가슴팍에 부대끼는 상위종의 에너지에 짓눌려 바짝 얼었다. 그와 다르게, 몇 주 전까지만 해도 퇴마사를 때려치우니 마니 떠들던 몬붕은 막상 손님을 한 명 보자마자 어딘가 불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실없이 열어 놓던 입은 어금니를 꽉 다물고 눈빛에도 웬일로 불을 켰다. 오른손에는 웬 칼을 들었다. 


“잘 붙들고 있어. 피를 좀 내야 되니까.”

“넌 또 무슨 소리야?”

   

몬붕은 슈린의 등짝에 포개어진 손님의 왼팔 손목을 붙들더니 칼로 팔등을 한 차례 그었다. 슈린은 통각에 잠깐 요동하는 마음이 자신의 온 피부에까지 와 닿는 것을 느꼈다. 의식을 잃었는지, 아니면 잠들었는지 모르는 손님을 눕힐 만한 곳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침대뿐이었다. 그마저도 손님에게는 비좁았겠다만. 

아무튼 둘은 어떻게든 손님을 눕히고 난데없는 방문의 뒷정리를 잠깐 하였다. 제멋대로 열린 문짝, 손님의 긴 꼬리가 밀쳐놓고 간 잡다한 물건들. 슈린은 아직도 저 꼬리만 봐도 마음이 번쩍 떨렸다. 냉장고를 열어 맥주 한 캔을 꺼냈다. 몬붕은 상처를 낸 왼팔을 침대 아래로 늘어뜨리고는 그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라미아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정말 옛날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슈린도 주변이 닦달하던 대로 달달 외우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다만 알음알음 알고는 있었다. 읽기 불편한 책에 더 자세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라미아는 아득한 지고의 존재 중 한 명이었으며, 이쪽 세계에도 상당히 오래전에 처음 나타났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수한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뱀과 인간을 결합한 형태의 존재, 그리고 뱀에 대한 두려움까지도 상당 부분이 라미아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유명세에 비해 그녀의 기구한 운명에 대해서는 이상할 만큼 아는 이가 적은 편이다. 

그녀는 수천 년의 수명을 타고나면서, 눈을 뜰 때부터 자신이 마지막으로 눈을 감을 때까지, 그리고 그렇게 될 때의 세상까지도 내다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인간, 마족, 이쪽 세계와 저 너머의 세계까지도 자신들끼리의 증오 때문에 고작 수천 년 내에 끝장날 것을 내다보았던 그녀는, 감히 운명의 축을 틀어, 그 증오를 자신에게로 돌려놓았다. 지역을 불문하고 뱀에 대한 강한 두려움 내지는 증오에 가까운 감정이 심심찮게 발견되는 것, 그리고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이 라미아의 이름을 경외하는 것이 이 때문이라고 혹자는 말한다. 

그러나 운명을 틀어 놓은 데에 대한 응징으로서, 소수설에 따르면 라미아 자신의 마음이 흔들렸거나 변심했기 때문에, 본디 한 번의 삶을 끝마치고 스러졌어야 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세상 곳곳에 자신을 닮은 후손을 남기게 되었다. 그 후손들은 제 어머니가 받는 두려움 어린 시선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운명을 가벼이 본 대가로 수천 년에 달하는 삶 내내 쪼개진 자신의 운명을 찾아 되돌려야 한다는 강박 – 그리고 거기에 수반되는 물리적인 고통 – 에 시달린다고 한다. 

그들을 ‘라미아의 아이’라 부른다. 

   

“이 땅에서는 이무기라는 이름으로도 많이 불렸지.”

   

그 쪼개진 운명에는 여의주라는 이름이 붙었다. 제 주인보다 남의 손에 들어갔을 때가 그 주인에게도, 그걸 주운 남에게도 더 나은 결말이 될 애석한 물건. 


“이런 건 어디서 보고 배웠어?”

   

슈린은 맥주 한 캔을 다 들이키고서야 입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잠든 손님의 팔에 난 생채기를 가리켰다. 피는 멎었다. 마력은 아직도 피부 틈을 비집고 나와 대기 중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몬스터들은 몸이 허약해서 문제인 경우는 거의 없었다. 지나치게 강해서 작은 자극에도 과민반응을 하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 슈린은 방 안이 마나 향으로 자욱해질 때쯤 창을 열었다. 난간에서 고양이 하나가 아옹, 하고 울었다. 옆집에서 키우는 그 녀석을 닮았는데, 제 집 난간을 타고 건너온 모양이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하시던 걸 봤는데. 이러고서 돈을 끝내주게 받아내더라.”

   

거짓말이었다. 당시만 하여도 사회가 그렇게 몬스터들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몬붕의 아버지는 간단한 응급처치를 한 정도로 한동안 주변의 실랑이를 겪었다. 꼬맹이였던 몬붕은 그 실랑이를 이해할 리가 없었으니, 무섭게 생긴 누나를 고쳐 주고 주변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아버지가 그저 대단해 보일 따름이었다. 전말을 알게 된 건 채 몇 년 되지 않았다. 

   

슈린은 두 번째 캔을 깠다. 한 반쯤 마셨을 때 손님이 일어나려는 기척을 보였다. 슈린은 또 잽싸게 주방까지 달아났다. 

   

“아, 그대가… 아니, 그대들이 저를 도와준 모양이군요.”

“하루 정도는 안정을 취하시는 게 좋습니다.”

“후후, 그래도 될까요? 집이 비좁아질 텐데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족히 오 미터는 되어 보이는 뱀 꼬리는 감아도 침대에 다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금 예, 나가십시오, 라고 할 수도 없는 법이었다. 굳이 마력까지 동원하지 않아도, 저 길고 두터운 꼬리에 붙들리기만 해도 최소 항복일 것이 분명했다. 몬붕은 잠깐 스스로에게 물었다. 알고 물어 보는 걸까? 그 대답은 당연히 동그라미였다. 지금 몬붕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까지도 다 들여다보고 있을 터인데. 

   

“저희는 괜찮습니다.”

“어머,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요.”

   

슈린은 주방 의자 뒤에 숨어서 맥주 캔을 안주도 없이 털어 넣고 있었다. 다 보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쪽을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손님은 눈웃음을 한 번 치더니 저쪽으로 목소리를 찔러 넣었다. 

   

“혼자 먹나요? 저도 좀 주시겠어요?”

   

손님은 맥주를 물처럼 들이켰다. 인간 중에서도 그러는 이는 많으니 딱히 놀랄 것은 없었다. 놀랄 만한 것이라면 냉장고에 남은 것을 죄다 털어먹고도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 것 정도. 몬붕은 빈 캔을 구기면서 마음속에 차근차근 요금 정산을 하였다. 네 캔에 만 원이니까, 이만 이천 오백 원을 좀 대담하게 반올림해서 삼만 원으로 치기로 했다. 

   

“좀 가뿐해졌네요. 인간의 의약은 알면 알수록 대단하단 말이지. 고마워요.”

   

손님은 또 눈웃음을, 이번에는 몬붕에게 지었다. 몬붕은 그저 알코올로 기분이 좀 들뜬 것이리라 짐작했다. 진통제와 술을 같이 먹으면 독이 되는 인간과 반대로 같이 먹으면 부작용을 큰 폭으로 줄여 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몇 주 후였다. 

   

기력을 다 차린 손님은 몸을 일으켜 움직이려고 하였으나 다행히도 아담한 집안은 그 꼬리가 쭉 펴지기에는 좁았다. 대신 손님은 손가락 하나로 아까 몬붕이 그어서 생채기가 난 자리를 한 번 문질렀다. 보기 흉하게 났던 상처가 말끔히 사라졌다. 손님은 ‘두 사람만의 시간’을 위해 슬슬 방을 빼겠다고 하였다. 그 전에 욕실을 쓰겠다고 하였는데, 몬붕은 혹시 손님이 문짝이나 안에 있는 뭘 부숴먹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손님도 그 생각을 뻔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두 분이 들어갔을 때 좁던가요?”
“네?”

“아닌가 보네요. 그러면 괜찮을 거예요. 아마도.”

   

손님은 긴 꼬리를 한 번 휘감아 욕실 안으로 다 집어넣고는 안에서 문을 닫았다. 목욕이라는 것이 가만히 하는 것이 아닌 만큼 아무리 보아도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을 수가 없는 부피인데, 어쨌든 샤워기에서 물 쏟아지는 소리가 문틈을 타고 넘어왔다. 슈린은 예정에 없던 술을 마시고 열이 올랐는지 열어 놓았던 창을 닫았다. 아까 앉아 있던 고양이가 다시 온 건지 지금까지 앉아 있던 건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가, 창을 닫자 또 애옹 하면서 제 나름 종종걸음을 쳤다. 

   

둘이 말없이 물 쏟아지는 소리를 듣고 있던 것도 잠시, 안에서 우당탕 하는 소리가 한 번 났다. 

   

“뭘 깨 먹지나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둘이서…욕실…아, 뭐, 뭐라고 했어?”

   

혼자 무어를 중얼거리다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슈린은 얼빠진 얼굴이었으나 눈에는 이미 불이 들어왔다. 몬붕은 슈린에게 혹시 저 손님에 대해 더 아는 것이 없나 물어볼 참이었으나, 자색을 발하는 눈빛과 취기로 벌게진 얼굴을 보고 생각을 접었다. 슈린은 취했는지 홀렸는지 다시 중얼거리기만 하였다. 물 쏟아지는 소리가 그치고 손님이 욕실에서 나오기까지 어색할 정도로 침묵이 흘렀다. 

   

“오늘은 고마웠어요. 그대들의 도움을 기억할게요.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겠어요.”

   

손님은 떠날 채비를 하였다. 몬붕은 손님이 욕실을 얼마나 휘저어 놓았을지에만 관심이 쏠려 있었다. 슈린도 취한 얼굴로 배시시 웃기만 하였다. 손님은 몸을 돌려 떠나려다가 혼잣말로 아 그렇지, 하고는 다시 몸을 돌려 두 사람의 오른손을 잡았다. 창을 비스듬히 헤치고 들어온 저녁빛이 흐드러지는 눈부신 머리칼, 감히 시선을 두기 어려울 흘러넘치는 가슴, 그 위에서 또 천진한 눈웃음. 얼굴 쪽에 고양이 그림자가 드리운 것만 빼면 가히 보는 이를 압도할 만한 외모였다. 눈짓 한 번에 애옹 하고 고양이 달아나는 소리가 나고, 손님은 몬붕의 손등을 손톱으로 살짝 찔렀다. 

   

“좋은 시간 되세요.”

   

몬붕은 별 감흥은 없었다. 어지간한 남자, 아니 어지간한 인간이라면 그 눈웃음이 마음을 죄 휘저어 놓고도 남았겠으나, 하루가 멀다 하고 제 욕망의 밑바닥까지를 다 들이마시는 사람이 옆에 붙어살다 보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몬붕은 손님이 현관문을 열자 욕실로 향했다. 그러나 손님은 거기에서 잠깐 멈추더니 손짓을 하였다. 슈린은 쫓아나갔다. 

   

“선물이에요.”

   

손님은 슈린의 오른쪽 손목을 잡더니 손등을 살짝 찌르는 것으로 마법을 새겼다. 알코올에 유독 약한 슈린은 아직도 알딸딸했으나 통증에 잠깐 술이 깼다. 

   

“이, 이게 뭐죠?”

“음, 사랑의 묘약이라고 할까요?” 

   

손님은 남은 한 손으로 저쪽에 손짓을 하였다. 욕실에서 우당탕 소리가 한 번 났다. 

   

“신랑한테는 확실한 걸로 걸어 뒀으니까, 두 분, 즐거운 시간 되세요.”

   

몬붕은 욕실을 한 번 뒤집어엎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그럴듯했으나 칫솔 치약부터 샴푸에 이르기까지 한 번 떨어졌던 것을 다시 올려놓은 것에 불과해 순서가 모조리 어긋나 있었다. 몬붕은 기억을 되짚어 순서를 맞추어 놓고 있었다. 

   

“몬붕아.”

   

욕실 문이 예정에 없이 열렸다. 몬붕이 욕실에 들어간 지 딱 십오 분째. 손님이 걸어 놓은 마법이 발동하는 데에 딱 그만큼의 시간이 걸린다고 하였다. 

   

“돈이라도 좀 받았어?”

“아니.”

   

벽을 보고 뒤적거리던 몬붕은 슈린의 묘하게 갈라지는 목소리에 등을 돌렸다. 

   

“벗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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